자본론을 읽다 - 마르크스와 자본을 공부하는 이유 유유 고전강의 2
양자오 지음, 김태성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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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형식과 내용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진실'을 추구하다


"자본, 특히 19세기 유럽에서 마르크스가 본 발달된 산업 자본주의는 일단 형성된 다음에는 너무나 쉽게 국경을 넘어 국가와 정부 권력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 진정으로 근본적인 현상은 '자본에는 조국이 없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자본가에게는 조국이 없다' 혹은 나중에 좀 더 통속적인 화법으로 나온 '상인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말과도 다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자체적인 작동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그 움직임은 자본을 쥐고 있는 자본가마저도 주관적인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가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자본가를 통제한다. 자본은 인위적인 것이고 자본가가 투자를 통해 창출한 것이지만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오히려 자본가의 행위를 결정하고 자본가를 조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물려받아 더욱 확장하고 변화시킨 '소외'의 개념이다."(40-1)


"100여 년 전, 마르크스는 관찰과 사유를 통해 이런 현상을 예견했다. 이 때문에 그는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운동 구호를 '졸렌' 차원의 해결책 혹은 대항 방법으로 삼았다. 노동자가 자주성을 확보하려면 자본가에게 '잉여 가치'를 창출해 주는 도구로 전락하지 말고 '자본에는 조국이 없다'라는 본질에 맞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국경을 초월해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국경 개념에 입각한 시각으로 자본을 대하면 하나의 국가에 있는 자본과 자본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동 운동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고 자본가는 자본의 본질에 기초한 연맹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가에게 대항하려면 노동자와 노동 운동도 반드시 국경을 초월하는 연합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말은 현실 묘사가 아니라 당위 명제이다."(44-5)


# 자인(Sein)은 사실을 대표하고 졸렌(Sollen)은 당위성을 나타낸다. 자인은 실재의 상황이 어떤지를 나타내고 졸렌은 상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낸다.


"헤겔 철학의 시작점은 '초월적 정신'이다. 먼저 '초월적 정신'이 있어야 타락이 있고 현실 세계가 있을 수 있다. 세계는 '초월적 정신'의 물화, 객관화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기원 관계를 전도시켜 '초월적 정신'과 '신'이 인간 이상理想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세계가 '정신'의 물화라고 말하는 반면 마르크스는 '정신' 혹은 '신'이 인간의 이상화라고 말하는 셈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이론의 시작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먼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정신'이 있다고 할 때, 이 '정신'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현실로 전개되며 이로 인해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것이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순수한 인간의 시각에서 역사의 변화란 추상적이고 논리로만 가정할 수 있을 뿐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정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얻은 진실성의 충동이 전개된 시험이자 투쟁이라고 간주했다."(67-8)


"'신'과 '정신'은 모두 인간의 창조물이다. 이것이 헤겔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극적인 전도다. 인간은 자신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하는데도 현실에서는 갖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성질을 '신'에게 투영했다. 이 때문에 '신'의 진정한 모습은 '가장 진실한 인간'이 된다. '신'은 인간 삶의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이며 진실한 상태를 체현한다. '신'은 원래 인간과 인간의 이상과 인간의 추구를 대표한다. 다시 말해 '신'이 존재하는 목적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 인간을 '신'처럼 순수하고 진실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경험 속에서 '신'은 '소외'되고 말았다. 인간은 진실한 인간을 나타내는 '신'을 창조하여 이를 숭배 대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철저하고 절대적으로 인간과 분리시켰다." "'신'을 창조한 이상 본질적으로 인간이 '신'의 주인이 되어야 했지만, '소외'를 통해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었고, 인간은 자발적으로 '신'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70-1)


"마르크스의 기본 신념이란 인간의 진실성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이며, 이는 그의 사회 분석 및 역사 해석의 판단 기준이었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사람이 '소외'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진실한' 삶을 추구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일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각 역사 단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진실'했는지, 얼마나 '소외'의 역량에 견제당했는지 유익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찰하고 판단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관심을 갖는 것은 군중이 조직한 사회가 어떻게 사람들을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 때문에 그는 어떤 사회 요소 혹은 힘이 사람의 '진실한' 삶을 저해하는지를 가장 열심히 분석했다. 그는 왜 자본주의를 죽도록 미워했던 것일까? 왜 그토록 비판적인 필치로 그 두꺼운 『자본론』을 썼던 것일까? 그의 철학적 시각에서는 자본과 자본주의가 인간과 '진실' 사이에 가로놓인 가장 커다란 장애였기 때문이다."(72-6)


2장 '실낙원'의 속죄의 길을 다시 걷다


"『자본론』 제1권은 대부분 '노동 가치'에 대한 탐색과 평론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마르크스의 경제학 이론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그의 '노동 가치설'을 겨냥한다. 비판자들은 상품의 가치가 완전히 '노동 가치'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생산에는 노동 가치 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런 다양한 요소를 무시하고 원료 가치와 상품 가치의 차이가 전부 노동 가치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탓에 그의 경제 분석은 정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이처럼 집중 비판의 대상이 된 '노동 가치설'이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하나의 전략적 가설로서 상품의 성질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제3권에 이르면 마르크스는 이 가설에서 벗어난 노동과 가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확대한다. 다만 애석하게도 당시에는 인내심을 갖고 『자본론』을 제3권까지 읽어 내는 사람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다."(89-90)


"마르크스의 논리적 방법은 알튀세르의 표현으로 하자면 '중층 결정'이다. 〈휴대전화가 생활에서 맡은 역할을 사람들 사이의 정보 전달〉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휴대전화와 생활 사이에서 맺는 다른 형태의 관계를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우리가 휴대전화와 생활 사이에 사람들 사이의 정보 전달 이외의 다른 기능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러한 방식이 휴대전화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그 기능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휴대전화가 갖고 있는 모든 성질 가운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요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중층 결정 요소'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설명과 평가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어 양자를 분리할 수가 없다. 한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는 것은 우리가 비교적 높은 단계의 결정 요소를 찾아 이 일을 평가한다는 의미다."(91)


"『자본론』 같은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경제학과 경제사, 정치경제 이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러한 정치경제의 논술을 꿰뚫고 있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로 하여금 이러한 방식으로 인류의 정치경제 활동을 귀납하게 한 것은 결국 '청년 마르크스' 시기의 철학 정신이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자본론』이 경제학서이자 정치경제학서인 동시에 정치경제학 비판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론』이 현대 경제학자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현대 경제학자는 경제학에서 자랑스럽게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배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정치경제를 분석하기 전부터 먼저 이상적이고 완벽하며 반드시 있어야 할 인간의 상태를 가정했다. 그리고 이를 모든 목표의 종점으로 설정하는 한편 분석과 토론의 기준으로 삼아 인류가 어떻게 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일관성 있게 사유했다."(98-101)


"현대 서양 경제학은 수요 공급과 가격이 상호 작용한다는 개념 위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가격은 검증과 비판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가격이 반영하는 것은 상품의 사회 관계이지 그 내재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내재 가치인데 가격은 가치를 왜곡하는 부정적인 힘이다." "서양 경제학의 시작점은 가치를 방치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가치는 주관적이고 유동적이다. 존재하지만 객관적인 측량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경제학 연구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 오로지 가격만이 연구되고 논의되며 인류 행위의 변수로서 예측된다. 서양 경제학에서 가치는 칸트 철학에서 가정하는 '물자체'와 같아서 확실히 존재하긴 하지만 결코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만지거나 파악할 수 없다. 교환 관계에 끌어들여 계량이 가능한 가격으로바꿔야만 가치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있다."(105-6)


"가격은 교환으로부터 나오고 사물 사이의 교환 관계에서만 존재할 뿐, '사용 가치'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물물 교환 관계에서 만들어진 가격은 필연적으로 이성적 강제성을 띠게 된다."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물건이 교환을 통해 '상품'으로 변하면 이 '상품'은 필연적으로 그 교환 네트워크를 끝없이 확장하여 방대한 체계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상품'을 말한다. 『자본론』의 출발점은 자본주의 경제학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름 아닌 사람과 물건 사이의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관계인 '사용 가치'의 관계다. 우리에게 주전자 하나의 용도와 의의는 우리와 주전자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다. 교환은 이런 관계를 파괴하고 변형시켜 원래의 계량화가 불가능한 가치를 억지로 가격 계량화 체계 안에 편입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물건의 교환 가치가 그 '사용 가치'와 같다고 착각하게 만든다."(114-6)


"『자본론』의 내용은 인간이 원초적 진실에서 점차 멀어지는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사용 가치'의 추락에서 '교환 가치'로 상품을 정의하고, 자신의 욕망을 '물신 숭배' 충동에 양도하며 돈으로 모든 가치를 포괄하는 추락을 거친 후 한 걸음 더 나아가 돈이 교환 계산의 도구에서 모든 사물의 주재자로 승화하는, 곧 '자본'의 등장으로 추락한다. 돈은 원래 사람들이 물품을 구매할 때 사용하는 도구였지만 '자본'이 된 뒤에는 거꾸로 돈이 사람을 사고 사람이 '자본'에 복무하는 노예가 된다. 이는 『실낙원』의 이야기와 궤를 같이 한다." "『실낙원』은 종교적인 이야기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구도를 빌려 인간이 끊임없이 타락해 가는 과정을 밝힐 뿐 아니라 모두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라고 격려하면서 모두를 속죄의 길로 인도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소외' 이전의 원초적 상태로 되돌리려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계획이다."(123-4)


3장 왜곡과 소외를 지적한 '과학적 유물론'


"초기부터 후기까지 마르크스의 사상 전체를 살펴보면 특별히 토론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관념이 한 가지 발견된다. 바로 프락시스Praxis다." "프락시스의 '실천'은 왕양명이 말한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이론과 실천의 합일에 가깝다. 혹은 프락시스를 '지식의 실천'으로 보고, 세계를 해석하는 동시에 변화시킨다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옳고 좋은 지식은 단순히 객관적인 분석에 그치지 않고 변화의 힘을 갖춘 비판이 되어, 사람들이 변증적이고 전복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결심과 힘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경제학 분석은 단순한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다. 경제 요소를 분석하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어떤 정치적 조치로 기존 경제 구조를 바꿔야 할지 함께 탐색한다. 이는 마르크스 철학의 또 다른 특수한 관점이다."(138-41)


"마르크스는 경제 활동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정상적인 W-G-W(상품-화폐-상품)가 아니라 뒤집힌 G-W-G, 즉 화폐-상품-화폐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G-W-G가 가리키는 것은 돈으로 물건을 사서 이 물건을 다시 파는 것을 말한다. 즉 매매의 거래는 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중간에 '사용 가치'가 개입하지 않는다. 가장 전형적인 G-W-G 활동의 예로 부동산 투자자를 들 수 있다. 그들은 거주를 위해 집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 집에 거주하는 일이 없다. 순전히 전매를 통해 돈을 벌려는 것이 그들이 집을 사는 목적이다. 그들은 그 집이 자신에게 '사용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전매할 수 있는 '교환 가치'에만 주목한다. 절대 다수의 투자자가 투자로 사는 집은 자신들이 직접 거주하는 집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자신이 애당초 거주할 생각이 없는 집들을 투자 표적으로 삼아 구매한다."(160-1)


"G-W-G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은 경제 활동이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의 생각처럼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경제 활동으로 사회 전체의 사용 이익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일부분, 심지어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사실 본말이 전도되어 화폐 가치를 높이고자 이루어진다. G-W-G의 교환 과정에서 교환 성립을 위해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사들인 가격보다 파는 가격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고, 상품 자체의 '사용 가치'는 고려 대상 밖으로 완전히 버려진다." "G-W-G는 우리를 교환의 근본 이치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고 교환을 또 다른 일, 즉 화폐를 축적하기 위한 교환으로 변화시킨다. 이때부터 교환의 평가 기준은 더 이상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용 가치'가 아니라 통일된 화폐의 수치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추상적인 숫자를 위해 교환하게 되고 경제생활도 추상적인 숫자를 위한 활동이 된다."(161-3)


"화폐는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자본'은 새로운 사회 현상이다. 새로운 사회관계 속에서 전통적인 금전은 '자본'으로 변했다. G-W-G의 과정에서 자본가는 돈을 내고 노동력을 사고 다시 노동력의 성과를 팔아 그 속에 담긴 '잉여 가치'를 취한다. 그러나 노동력이 창출하는 상품 가치는 결국 노동력을 제공한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돈을 낸 사람이 가져간다. 이리하여 이 돈은 '자본'이 된다. 이는 여전히 금전을 통한 매매 교환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관계에서는 매매에 새로운 이익의 원천이 생겼다. 원료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임대한 토지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공장의 기계 설비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익은 오로지 노동력의 가격 차이에서 온다. 노동력은 상품 가치를 창출하지만 노동자가 창출한 상품 가치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은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돈을 낸 자본가다." "'자본'으로 명명된 이 시대는 사실 노동자와 노동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174-5)


4장 계급 의식의 확립과 착취로부터의 탈피


"마르크스는 수많은 문제를 제기했지만 제때 완성된 해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전부 온전한 해답을 얻었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아마도 후세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길을 따라 논의하고 논쟁하도록 자극했다. 또한 자기 생전에는 사상의 지도에 간단한 그림만 그리고 직접 탐색할 여유가 없었던 여러 영역을 후대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그의 이론을 계승한 '마르크스주의자'를 구분하는 일은 극도로 어렵다. 마르크스 자신이 설계한 방대한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마르크스주의자'의 보충이 필요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생전에 마르크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도 유감스럽다는 듯이 자조 섞인 어투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191)


"마르크스 저작의 핵심개념 중 첫 번째는 '착취'로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물건을 점유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개념을 사용하면서 더 깊은 함의를 부여했다. 피착취자의 각도에서 '착취'를 해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보다 더 적게 받았다면 여기에는 필시 '착취'가 존재할 것이며, 그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을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가져갔음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의 결과다. 노동자가 생산한 노동의 결과 가운데 일부 또는 전부가 그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면 이는 '착취'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착취'를 고려 대상에 두고 노동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보수를 산출하여 이 응당한 보수와 실제 소득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따진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 경제학과 시장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시장 경제학에서는 노동력을 시장에 두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 가격만 있지 '착취'는 있을 수 없다."(193)


또 한 가지 중요한 검증 개념은 '조작'이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말하는 시장은 일종의 신화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제시한 경제 논리를 부정하거나 이에 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이들의 이론은 현실이 아니라 상상에 기초하여 세워진 경제 논리일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는 이처럼 이상화된 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항상 각양각색의 힘이 끼어들어 시장의 조작에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시장이 실제로는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평등하지도 않다는 사실뿐 아니라, 실제로는 시장이 거짓된 가치 시스템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장에는 갖가지 유혹과 사기가 가득해 사람들이 모든 것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애덤 스미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시장이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의 공평한 관리 아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쉽게 속임을 당할 것이다."(200-1)


"다음은 '노동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라는 기본 원리다. 노동하는 인간, 생산하는 인간이 없다면 어떤 영역에서든 가치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는 깨뜨릴 수 없는 진리이고, 이 진리는 온갖 귀신의 유혹으로 가득한 어두운 밤중에 마음 놓고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횃불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이처럼 간단한 원리로 가치를 평가하고, 이에 의지하여 시장 가격 및 '교환 가치'가 조성하는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타인의 조작을 피할 수 있도록 교육하려 했다. '노동이 모든 가치의 근원'이라는 원칙은 순진할 정도로 간단하다. 마르크스도 이처럼 간단한 원리로는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의 목적은 복잡한 조작 아래서 자신의 노동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노동력의 가치를 이해하고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노동자에게 자기 평가의 기회를 주는 데 있었다."(203)


"시장 경제학은 스스로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하는 과학 체계를 구축하여 자연과학에서 자연 현상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예측하는 방법을 인간 행위에 그대로 적용한다." "반면 마르크스는 생산이라는 경제 활동을 사회 활동이자 인간관계 행위로 간주한다. 모든 사회관계와 마찬가지로 생산관계에서의 역할과 입장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시장 경제학에서는 자신들이 신분과 개인적 차이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경제 원칙이라고 말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누구의 입장에 서서 그런 분석을 한 것이냐고 집요하게 따져 묻는다. 이런 문제에서만 출발해도 시장 경제학이 더 이상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경제 법칙이 아니라 자산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입장에 서서 자산 계급의 '조작'과 '착취'를 합리화하는 이론임을 알 수 있다."(210-1)


5장 '상부 구조'의 구속을 부수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임금 노동'과 '노동 일수', '노동 시간' 등에 대해 논한 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의 참담과 우울, 심지어 비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일은 사람과 생활에서 분리되었지만 사람과 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리하여 실제로 사람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임금 노동자'로서의 부분이 커질수록 자유롭고 진실한 생활의 부분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게다가 '임금 노동'의 부분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되면 우리는 '임금 노동' 후의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 자신은 존재하지만 생활이 없어지고 그저 '임금 노동자'로서의 존재만 남는다. 이런 상태는 공장과 자본가에게 가장 유리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이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정도로 낮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 재생산 원가'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없이 많은 곳에서 이런 인생이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229-30)


"마르크스가 제시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상대적 잉여가치'다." "가령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2,000원의 비용이 들었고 그가 하루 열 시간 일해서 창출할 수 있는 가치 총액이 1만 원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노동자가 착취당할 수 있는 '잉여 가치'가 8,000원이라는 의미다. 그는 자신을 위해 매일 두 시간만 일하면 되므로 나머지 여덟 시간의 노동은 자본가가 임금 형식을 통해 착취할 수 있는 범위가 된다. (그런데 산업화로 인해) 생활에 필요한 비용이 더 줄어들어 이 노동자의 생활에 필요한 비용은 1,000원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하루에 10시간씩 일해서 1만 원의 가치 총액을 창출한다. 이리하여 착취당하는 '잉여 가치'는 반대로 더 늘어난다. 새로운 상황 아래서 그는 하루에 한 시간만 일해도 '노동 재생산'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머지 아홉 시간의 노동은 전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화로 인한 물가 하락은 자본가에게 여전히 유리하다."(230-1)


"마르크스는 인류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해석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 부분에서 그의 야심은 헤겔과 일치했다. 마르크스가 경제 분야를 논의의 중심으로 선택한 것은 경제 영역에 익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그 전면적인 이론에서 경제 활동과 경제 행위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경제 생산 방식이 있으면 그에 따라 어떤 예의와 습관, 풍속, 제도, 사회 조직 내지 문학, 철학, 예술이 출현한다. 이로써 '하부 구조'가 '상부 구조'를 결정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부 구조'에서는 특히 생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생산관계에서 이익을 얻는 쪽의 가치관으로 물든 ‘상부구조’인 예의와 습관, 풍속, 제도, 사회 조직 그리고 문학, 철학, 예술은 모든 사회 성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리하여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를 위해 복무하는 기능을 발휘하고 기존의 생산관계를 보호하고 강화하게 된다."(259-60)


"마르크스는 '상부 구조'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극도로 불평등한 생산관계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와는 전혀 대칭되지 않는 이익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일깨워 준다. 그 권력이 경제 영역에 한정되어 다른 영역으로는 번져 갈 리 없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자본가는 생산 수단을 통제함으로써 신속하게 노동자의 '잉여 가치'를 빨아들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생산관계에서 점한 우세를 이용하여 '상부 구조'의 다른 비非경제 영역에도 자신의 이익을 반영시킨다. 그리하여 전체 사회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조작'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개조된다. '노동력 가치'의 판매자로 전락한 노동자는 지불하는 노동력에 상응하지 않는 빈약한 임금을 받을 뿐 아니라 자본 가치가 조성하는 사회 환경에서 살면서 이런 생활이 합리적이라고, 적어도 필연적이어서 이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착각하게 된다."(260-1)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나 지식인의 임무는 허위를 비판하고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의 방식은 세계의 변화라는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지, 비판 이외에 다른 실천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나 지식인은 조사와 사유로 진상을 찾아냄으로써 착취당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조작'된 공범 시스템에서 깨어나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신분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정확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현실이 마르크스를 이러한 노선에서 이탈시켜 버렸다. 나중에 그는 노동자 혁명을 이끄는 자리를 맡게 되어 더 이상 마음껏 사유에 전념할 수 없었다. 이 노선은 레닌에게 전달된 뒤로 '볼셰비키'의 개념이 더해지면서 '당'이 노동자 혁명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마르스크의 사유 방향에서 빗나간 논리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노선으로 자리 잡았다."(284-5)


"철학자 마르크스와 혁명가 마르크스는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지만 불행하게도 너무나 빨리 혁명가 마르크스가 철학자 마르크스를 덮어 버리고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유일한 마르크스가 되고 말았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에게 부여한 역사적 사명은 엉뚱하게 '당'으로 옮겨 가 훗날 무수한 논쟁과 비극을 불렀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철학자 신분을 회복시켜야만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전면적일 수 있고,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마르크스가 묘사한 '소외' 이전의 인류 상태는 역사의 환상이 아니라 철학적 전제였다. 그것은 현실을 재료로 하여 거슬러 올라간 철학적 사유로서, 연역해 낸 논리 명제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나오는 이상적이고 전면적인 '이데아'에 근접해 있다. 이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추론은 중요한 좌표축이자 우리에게 현실을 검증할 수 있는 기준점으로서 우리가 이를 근거로 현실을 비판할 수 있게 해 주고, 노동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변화시킨다."(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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