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문명 -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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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유럽 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서 연구했다.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앗간mill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적절한 사례이다.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에 소아시아에 알려졌고 수직 형태의 풍차는 서기 7세기 페르시아에 알려져 있었지만, 방앗간 건설이 진정으로 크게 유행한 곳은 중세 유럽이었다. 무명의 수공업자들은 일련의 기발한 기계장치를 고안해 물이나 바람에서 나온 회전력을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 잘 분화된 여러 운동 장치로 전환했다. 유럽은 곧 놀랄 만큼 많은 방앗간으로 뒤덮이게 되었다."(30-1)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定性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 분야로의 진입 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다." "아울러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 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virtuosi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다."(48-9)


1장 유럽, 시계를 만들다


"종은 중세 도시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다.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다.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되었다.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성된 이러한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54-5)


"도시는 급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도시 문화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제도와 전통, 기득권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될 경직성에 아직은 발목이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13세기는 대학과 고딕 성당의 확산, 조토 디 본도네와 조반니 치마부에가 가져온 미적 혁명,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려는 유럽인 최초의 시도를 목격한 시기였다. 그 세기 후반에는 최초로 대포가 제작되었다. 기계식 시계와 대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이 전적으로 우연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수적으로 또 질적으로, 금속 직공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소산이었으며 뒤에 가서 보겠지만 초창기 시계 제작자 다수가 또한 대포 제작자였다. 대포와 기계식 시계의 동시 출현은 유럽식 발전의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앞으로 전개될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56)


"시계, 특히 커다란 공공 시계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시계를 설치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은 대개 지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는 특별히 임명된 〈관리장〉의 정기적인 임금까지 포함되었다. 시계를 설치할지 말지의 문제는 종종 길고 열띤 논쟁 끝에 결정되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공공 시계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본질적으로 유용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58-9) "아무도 시계가 없거나 극소수만이 시계를 휴대하고 있던 시대에 시각을 알리는 공공 시계의 유용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용성만이 언제나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일보 도시들은 15세기 한 프랑스 문헌이 표현한 대로, 〈도시를 빛낼 크고 훌륭한〉 기계를 갖고 있다는 명성을 두고 다른 도시와 경쟁했다." "따라서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비교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확산이 촉진되었다."(64)


공공 시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가내용 시계가 확산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추가 유일한 원동력인 한 가내용 시계는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그것들은 받침대로 받쳐야 하거나 벽에 단단히 고정시켜야 했다. 쉽게 옮길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원동력을 고안해야 했다. 동시대의 누군가에 따르면, 위대한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태엽 장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1410년이 되자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증거로 보았을 때 시계에서 태엽을 사용하게 된 시기는 적어도 15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태엽 발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태엽의 발명으로 쉽게 운반 가능한 시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같은 휴대용 시계의 제작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76-7)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한다.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했다.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했다.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 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이제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지만) 시계 제조업이 두드러진 산업으로 발전한 제네바 같은 중심지는 시계공들이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도 획득했다."(83-4)


"18세기가 밝아오자 런던과 제네바는 유럽 시계 제조업의 최대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두 중심지의 부상과 더불어 시계 제작 및 상업에서 새로운 원原산업적, 원原자본주의적 작업 방식이 출현했다. 특히 17세기 전반기 이후 시계 제작이 발달한 지역의 수공업자들은 특정 부품 생산을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태엽 제조공이 최초로 출현한 전문 직공으로 보이며 다른 전문가들도 곧 뒤를 따랐다. 18세기 초에 런던 클라컨웰 지구의 여러 거리들은 탈진기 제조공, 선반공, 원뿔형 도르래 절단공, 비밀 태엽 제조공, 마감공 같은 직공들이 차지했다. 이미 1701년에 회중시계 제작은 분업의 이점을 증명하는 실례로 꼽혔다. 제네바에서는 두 전문 직공 집단이 시계공 길드와 구분된, 자신들만의 길드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조립공들은 1698년에, 조각공들은 1701년에 길드를 조직했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히 다른 직종에도 영향을 미쳤다."(106-7)


2장 중국, 시계와 조우하다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아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서양인들에게 서양 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 부문에 걸쳐 유럽 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이었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 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기계식 시계가 그중 하나였다."(118-22)


"시계는 예수회원들이 베이징의 궁성 문을 열 때도 활약했다. 소문에 따르면 예수회원들은 예를 갖춰 조정에 나가 황제에게 시계 두 점과 다른 공물을 몇 점 바치고 싶다고 간청했다. 시계 가운데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도금된 용과 독수리 및 기타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형 시계였다. 나머지 하나는 도금을 한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태엽으로 돌아가는 작은 시계였다. 둘 다 종을 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125) "〈스스로 울리는 종〉에 대한 천자들의 애착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시계와 자동 창치, 그리고 그와 비슷한 아름답고 신기한 장치들이 끊임없이 베이징의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강희제(1662~1722년 재위)는 황궁에 크고 작은 시계를 만드는 제작소를 차리기까지 했고 특유의 유연성을 보인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에서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켰다."(129)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양 시계를 장난감으로, 오직 장난감으로만 보았다." "16세기 말에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중국인들이 유럽의 어떤 물건에도 관심이 없지만 〈온갖 종류의 렌즈만은, 특히 형형색색의 렌즈만은 구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과 망원경, 안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렌즈를 멋진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렌즈와 시계, 여타 기기들은 유럽 사회가 느끼던 특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고 그 필요는 다시 유럽이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기계 장치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국인들은 그것을 그저 재미나고 특이한 물건으로 대했다."(131-2)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가 있다." "꼭 금전적으로 표현된 유효수요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다른 보람 있는 자극들이 수공업자들을 독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수공업자를 대하는 당시 관리들의 태도를 두고 권력 남용의 무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쉽게 일축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명대 중국의 지배적인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는 실제로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했다. 올바르게 지적된 대로, 〈예술가artist와 수공업자artisan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양 있는 중국인은 수공업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마치 비버의 영리한 작품을 살펴볼 때처럼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명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147-8)


"사실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한다. 그러나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150-1)


에필로그


"시계가 등장한 직후부터 사람들은 활동 시기를 서로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무척 민감해졌고 궁극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일은 필요이자, 미덕, 집착이 되었다. 따라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갖게 될수록 다른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장치를 가져야만 했고 기계는 자신이 확산되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시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유럽의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불가항력으로 진행되었다. 균등한 시간 체계가 계절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불균등한 시간 체계 그리고 그 밖의 시간 구분 방식들을 대체했다. 〈첫 미사 시간〉이나 〈저녁 기도 시간〉 같은 표현들이 완전히 폐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동일한 길이의 〈시계의of the clock〉 시간(정각o'clock)이란 더 추상적인 표현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156-7)


"기계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도구는 아니다. 우리는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기계는 조금씩 인간성의 일부가 될 것〉이며 〈모든 기계는 자신의 기능 속에서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인간의] 녹이 끼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기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우리 역사 점차 녹이 껴가고 있고 인간사를 다루는 데 언제나 유용하거나 이롭지많은 않은 기계적 세계관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는 대로 〈기계가 끼치는 해악은 인간 자신도 기계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기계를 그렇게 덮어놓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기계와 더 좋은 기계가 절실하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계를 좋고 훌륭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철학의 발전과 인간사를 다루는 능력의 발전도 간절히 필요로 한다."(1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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