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한정숙 감수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서론


"〈아마도 내 설명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재미가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사는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므로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찾는 사람이 이 책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이 책은 한 번 듣기에 좋은 경연용 글이 아니라 영원한 유산이 되도록 저술되었다.〉(1.22.4)" "이 문단은 투퀴디데스가 자기 역사책에서 사실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왜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실이 반드시 정확해야만 투퀴디데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즉, 그는 미래에 지혜로운 사람이 이 자료를 활용하여 특히 전쟁 같은 긴장된 상황에서 인간 행동의 일정한 정형들을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만약 그의 서술 내용에서 사실이 잘못되었다면 해석 역시 잘못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정치적 지혜를 이끌어낼 수도 없게 된다."(34-5)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수정주의자 본능을 지녔던) 투퀴디데스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 논변을 펼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군가의 견해를 반박할 때에도 자기 관점을 '대안적 설명'이라 이름 붙여 제시하지 않았다. 오직 신중한 조사와 숙고 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실과 거기에서 추출되는 결론만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투퀴디데스가 택한 방법은 크게 성공했다. 무려 2,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바라보는 데 있어 투퀴디데스와 다른 관점이 존재했음을 알아챈 독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책과 여러 고대 자료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투퀴디데스가 살던 시대에 그와 다른 견해가 존재했고,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러한 다른 견해에 반대하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잊히고 가려진 동시대 견해를 복원해 투퀴디데스가 제시한 해석과 비교하면 투퀴디데스의 정신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의미를 흥미롭게 다시 조명할 수 있다."(42)


# 수정주의자 :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기원전 431년 봄부터 기원전 404년 봄까지 벌어진 사건을 따로 떼어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벌인 단일한 전쟁으로 정의한 사람은 투퀴디데스가 처음이다." 그 기간에 벌어진 몇몇 분쟁을 독립적인 전쟁으로 다룬 당대 혹은 직후의 저술가들과 달리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합된 하나의 긴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쳤다.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서 스파르타인과 동맹국들이 아테나이 제국을 끝장내고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점거하던 때까지 이야기이다.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다. 누군가 조약으로 전투가 중단된 시기는 전쟁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틀렸다. 10년 전쟁과 그에 뒤이은 의심스러운 휴전 기간, 이후에 벌어진 전쟁을 여름과 겨울 단위로 합산하면 전쟁은 이미 내가 말한 기간(27년)과 똑같은 햇수만큼 지속되었고, 단지 며칠만 차이가 난다.〉(5.26.1-3)"(54-6)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동맹국들이 제기한 논변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1.88)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투퀴디데스가 자신이 내린 상황 판단을 마치 스파르타인의 판단처럼 제시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당시 아테나이가 얼마나 강력해졌으며 스파르타인이 이에 대해 얼마나 경계심을 품었는지를 보여주는 보충 설명을 길게 덧붙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한다.(1.89-118) 이로써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원을 에피담노스 문제보다 훨씬 이전에서 찾아야 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울러 투퀴디데스는 이 보충 설명의 끝 부분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정한 행위는 페르시아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지속적인 과정에서 단지 마지막 단계였을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66-7)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성공과 부, 권력을 차지하고 서서히 아테나이 제국으로 탈바꿈한 페르시아 전쟁 직후의 시기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스파르타에는 처음부터 아테나이가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수상쩍게 여기고 못마땅해 하는 분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도주한 뒤 아테나이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러한 반대 의견을 확연한 태도로 거부하자 이들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히 이를 갈았다.〉(1.92.1) 기원전 475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게루시아(스파르타 원로원)'에서는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여 새로 결성된 동맹을 분쇄하고 해상을 제패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스파르타인은 얼마간 논쟁을 벌인 끝에 이 안을 거부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반反아테나이파가 늘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8-9)


"대개 아테나이 민회에서는 거의 모든 논쟁이 하루 안에 끝났다. 그러나 케르퀴라 동맹 문제는 하루를 더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궁극적으로 거대한 전쟁을 초래할 정책을 결정했는데,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방어동맹만 맺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약은 헬라스 역사에서 이때 처음 등장했다.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사절의 연설을 서술할 때에는 그들의 말 자체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아테나이인의 연설은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 다만 아테나이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라고 '자신이 믿는 바'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최종 결정을 이끌어낸 동의안을 누가 제안했고 또 누가 옹호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플루타르코스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코린토스와 싸우고 있는 케르퀴라를 돕게 하고 해군력을 갖춘 활기찬 나라와 연합하게 만든 이는〉 바로 페리클레스였다."(87)


# 케르퀴라 동맹 문제 : 케르퀴라가 코린토스와의 분쟁에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테나이에게 동맹을 요청한 사안. 아테나이가 중립을 취한 결과로 코린토스가 케르퀴라 함대를 장악하게 되면 아테나이의 제해권이 위협받고, 이를 막기 위해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으면 코린토스는 물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둘째 날 회의에서 다수가 방어동맹을 지지하도록 설득한 데에는 분명히 페리클레스의 연설 필요했다. 여기에서 투퀴디데스는 문제에 부딪혔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특유의 방식으로 인상적인 연설을 했을 테고 늘 그렇듯이 회의를 주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설득하여 케르퀴라인을 돕게 만든〉 이가 바로 페리클레스이며, 앞으로 엄청난 고난을 안기고 참혹하게 종결된 전쟁이 바로 그가 추진한 정책 때문에 벌어졌다는 인상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당대의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투퀴디데스는 바로 이 견해를 반박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아테나이인의 결정을 특정 개인과 무관하게 취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민회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모든 아테나이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인 것처럼, 그리고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89)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제국에 속한 모든 항구와 아테나이의 시장 겸 중심지인 아고라에 메가라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쟁보다 낮은 강제 수단인 경제 봉쇄는 현대 세계에서는 외교적 무기로 자주 활용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또한 분명 페리클레스가 고안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벌어진 전쟁이 이 봉쇄령 때문이었고 또 페리클레스가 이 봉쇄령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메가라 봉쇄령은 코린토스와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로 전쟁이 확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외교적인 압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인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파르타를 싸움에 끌어들여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인은 메가라를 징벌하여 다른 폴리스가 추가로 코린토스를 돕지 못하게 억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99-100)


"마침내 기원전 432년 7월 에포로스들은 스파르타 민회를 소집하고 동맹국 중 아테나이에 불만을 가진 폴리스는 모두 스파르타로 오도록 초청했다." "(전쟁을 선동하는 코린토스인의 연설) 다음 발언자는 아테나이 사절 중 한 사람이었다. 투퀴디데스는 그가 〈다른 일 때문에 스파르타에 왔다가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1.72.1)고 말한다. 그 '다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는 아테나이인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주려고 만든 핑곗거리였음이 분명하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입장에서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불만 사항에 대해 해명은 해야겠지만 스파르타 민회에 공식 대변인을 보내지는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공식적인 사절을 보낸다면, 평화조약에 따라 불화를 중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가 아테나이의 행위를 심판할 권리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 민회의 논의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102-3)


"스파르타가 메가라 봉쇄 사안을 (30년 평화조약에 명시한 대로) 중재에 회부했다면 페리클레스는 중재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또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가 대표를 파견해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 민회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스파르타가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 건으로 아테나이 제국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 메가라 봉쇄령처럼 아테나이가 추진하는 상업 정책과 제국 정책에 개입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양보를 한다면 에게 해에서 아테나이가 장악한 헤게모니와 아테나이 제국에 대한 지배권이 스파르타의 용인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테나이가 지금 협박이 무서워 뒤로 물러선다면 이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등하다고 주장해온 입장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이며, 또 장차 더 많은 협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 연설에서 외부 압력 때문에 유화책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설명했다."(112)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아테나이인이 수비에 치중하고 함대를 보존하며 전시에 제국을 확대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2.65.7)" "(투퀴디데스도 이에 동의했지만) 동시대 아테나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 첫해에 앗티케를 침공한 스파르타군이 아테나이 서북부 모퉁이만 휩쓸었다면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페리클레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기꺼이 성벽 뒤에 머물며 교전을 회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군이 도시에서 고작 60스타디온 떨어진 아카르나이 인근에 이르자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자기 땅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끔찍한 일이었다.〉(2.21.2)"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정책을 향해 매우 거센 분노와 비판이 쏟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회가 자신이 수립한 전략을 거부하고 지상전을 강행하지 않을까 두려웠다."(119-21)


# 페리클레스 전략의 실패 요인

1.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스파르타에서도 평화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 피해를 겪은 양측의 감정은 격해지고 전쟁을 지속하려는 결심이 한층 굳어져갔다.

2. 기원전 430~427년에 역병이 발생하여 도시 거주민의 3분이 1이 사망하면서 페리클레스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펠로폰네소스에는 역병이 번지지 않았다.)

3.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축적한 전비(동맹에서 걷는 수익까지 포함한)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개시 후 3~4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대파들의 비난과 소송에 맞서 기원전 430년에 행해진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자기 정책의 결과로 빚어진 현재의 끔찍한 상황을 이해해달라거나 용서해달라고 호소하기는커녕 대담하게도 자신이 폴리스의 효율적인 지도자가 될 가장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아프라그모네스(고요함을 사랑하는 자들)'는 불행과 공포로 인해 바보, 겁쟁이에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전쟁을 지속하기를 지지하고 '아프라그모네스'를 반대하는 논변을 펼치는 이는 용감하고 연륜을 쌓았으며, 현명하고 거기에 더해 진정한 지도자로서 탁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적어도 페리클레스 본인은 이 강력한 연설에서 스스로를 이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고, 투퀴디데스도 페리클레스를 그렇게 그렇게 묘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147-9)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2.65.10)고 말한 것은 자기 기준에서 볼 때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가 민주정이라 부르기에 부족했다는 뜻이다."(153-4) "그러나 (많은 희곡작가와 정적들이) 페리클레스와 내연녀를 인신공격하고 정치를 빈정대며 풍자하는 일은 사실상의 군주제나 독재정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프린키파투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 제아무리 군주정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프린켑스라는 호칭 뒤에 숨기려 했어도,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행해진 것과 같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공공연한 악담과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넘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페리클레스에 대한 비방과 풍자는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운 민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어떤 다른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160)


"오늘날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달리 고대의 비평가들은 이 체제가 '실제로' 민주정이라는 점을 확신했고, 바로 민주정이기 때문에 본성상 나쁘다고 믿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렸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2-4)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투퀴디데스는 자기 역사책에서 기원전 427년에야 처음 클레온을 소개한다. 그리고 클레온이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3.36.6)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니키아스와 클레온이 서로 매우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니키아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따르는 자로서 평화를 옹호했고,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신사였다고 한다. 반면 클레온은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는 자였고, 전쟁을 옹호했고, 선동정치가였으며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통 묘사되듯이 그렇게 다른 인물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모두 귀족 가문이 아니라 '신인' 계층 출신이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둘 다 자기 가문에서 무엇으로라도 크게 이름을 떨친 첫 인물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 둘 다 부자였겠지만 폴리스에서 유난히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다."(177-9)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이루어낸 놀라운 승리는 비할 데 없이 중요했다. 〈헬라스인이 보기에 이 일은 전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스파르타군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40.1)" "아테나이인은 투퀴디데스와 그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부른 이들과 의견이 달랐다. 아테나이인에게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이룩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아테나이인은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클레온에게 감사를 표했다." "클레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테나이 재정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수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클레온은 당당하게 포로를 압송한 지 두 달가량 지난 뒤인 8월 둘째 주 정도에 튀딥포스라는 자를 파견해 아테나이 동맹국에게 새롭고 더 높은 금액의 조공을 부과한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었다."(206-8)


# 클레온의 승리(기원전 425년) :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니키아스파와 맞서던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스팍테리아 섬에 있는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을 공격하여, 그 중 스파르타 완전시민(120여 명)을 생포한 승리. 이 패배로 함대를 억류당하고 포로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르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다.


"투퀴디데스가 튀딥포스 법령을 언급했다면 클레온의 공격적 제국주의와 아테나이 속국들에 대한 그의 가혹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에서 벗어난 작전으로 거둔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이 승리로 아테나이는 제국의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장기전을 치를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페리클레스 전략의 최대 약점을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튀딥포스를 언급한다면 페리클레스 전략의 단점이 강조되고,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을 충실히 따랐더라면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투퀴디데스의 칭송은 벽에 부딪힌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페리클레스가 실수했으며, 클레온이 무분별하고 운만 좋은 미친 남자가 아니라 대담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고 결론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210)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우리에게는 투퀴디데스가 암피폴리스에서 한 행동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보다 투퀴디데스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투퀴디데스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기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약한 부분인 운명의 날에 왜 에이온에 있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이 일에 대해서 분명 투퀴디데스는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퀴디데스는 (자신과 반대측의 변론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겉으로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가장 냉정한 태도로 객관적인 이야기만 전했다. 그리고 핵심 질문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로써 이천 년이 넘도록 독자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는 잘못이 없고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분노하고 이성을 잃은 탓에 투퀴디데스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렸다."(224)


# 암피폴리스 함락(기원전 424년) : 투퀴디데스는 스팍테리아 사건 이듬해에 장군으로 선출되어 제국의 트라케 지역(핵심 근거지가 암피폴리스)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이 도시를 기습 공격해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투퀴디데스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국외로 추방되었다.


"아테나이인은 암피폴리스를 비롯해 빼앗긴 여러 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함 30척에 중장보병 1,200명, 기병 300기, 렘노스와 임브로스 출신의 뛰어난 대규모 경보병 특수 부대를 보냈다. 클레온이 장군으로 이 군대를 이끌었다." "투퀴디데스는 이번 작전의 동료 장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전쟁을 통틀어 트라케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모두 검토해도 장군 한 사람이 혼자서 군대를 이끈 경우는 없었다." "아테나이인이 예외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오직 장군 한 명에게, 그것도 다수의 동료 시민에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의심받는 장군에게 맡겼을 리는 없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동행한 장군 혹은 장군들을 언급하지 않은 일 역시 결코 우연한 누락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 실패한 작전의 책임은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관계자가 모두 뒤집어썼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일일 리가 없다."(228-9)


# 브라시다스의 기습 : 암피폴리스 포위 작전에 앞서 정찰을 마치고 트라케 문을 지나 철수하던 아테나이 군이 브라시다스의 기습을 받아 600명 가량 전사(스파르타군은 7명 전사)한 사건.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도 함께 전사했다.


"클레온은 브라시다스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정책이 자기 폴리스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추구했다. 물론 클레온의 저급한 태도가 아테나이 정치 생활의 품격을 낮추기는 했다. 반란을 일으킨 동맹국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했는데, 이를 잘했다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클레온이 아테나이 대외 정책을 형성하고 수행하면서 광범위한 여론을 대변했고 늘 열정과 용기로써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긴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동시대인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음으로써 평화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한 말은 옳았다. 당분간 아테나이에는 니키아스가 강력하게 이끄는 평화 정책에 반대할 만한 위상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이 평화는 거짓으로 드러나고 아테나이인에게 재앙과 최종적인 패배를 안겨주겠지만 이는 클레온과 아무 상관 없는 결과였다."(241-2)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투퀴디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을 설명하는 내내 그려낸 모습에 따르면 이 작전은 시켈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고 착취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아테나이 군중은 이 작전이 얼마나 거대한 모험이며 얼마나 어려울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도 알지 못한 채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이 일의 실행을 요구했다.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는 이 섬이 얼마나 큰지도 몰랐고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을 포함해서 섬 주민이 얼마나 많은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펠로폰네소스인과 벌이는 전쟁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6.1.1)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로 1차 벙력을 보내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한 뒤 니키아스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은 시시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핑계를 댔지만 실은 시켈리아를 정복할 의도였고 이는 거대한 사업〉(6.8.4)이었다."(252)


# 시켈리아 원정 : 시켈리아 서부에 있던 에게스타와 셀리누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열세에 몰린 에게스타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한다. 주전파(알키비아데스)와 평화파(니키아스)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아테나이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지만, 적절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원정에 임했다가 결국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의 원조를 받은 쉬라쿠사이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의 지리와 인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큰 사업인지도 알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시켈리아를 향한 대규모 원정이 시작되기 적어도 9년 전인 기원전 424년에 아테나이 삼단노선 60척이 시켈리아에서 장기 주둔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는 에게스타와 레온티노이의 요청에 아테나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했는데 이 내용 역시 아테나이인이 무지했거나 무모했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민회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대신 에게스타로 사절단을 보내 〈에게스타인이 말한 대로 국과 신전에 돈이 넉넉한지 살피고 동시에 셀리누스인과 벌이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조사하도록〉(6.6.3) 결정했다." "에게스타인은 아테나이에 은괴를 60탈란톤─전함 60척을 한 달 동안 부양할 수 있는─이나 제공해 더욱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253-4)


"투퀴디데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아테나이인은 '엘피스(희망)'에 가득 차서 출발했다. 이 대목에서 투퀴디데스를 읽는 독자는 아테나이인이 1년 전에 불운한 멜로스인에게 경멸조로 했던 말을 틀림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켈리아 원정 직전에 서술되었다. 〈그래요. 희망은 험악한 시절에 위안을 줍니다. ····· 그러나 희망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기에, 단 한 번의 시도에 전부를 거는 이들은 그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야 대가를 알게 됩니다.〉(5.103) 아테나이인의 냉정한 논평은 사실로 증명되었고, 스파르타가 도우리라는 희망에 운명을 걸었던 멜로스인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독자는 아테나이의 위대한 무적함대가 맞이할 끔찍한 운명을 이미 알기에 여기에 담긴 반어법을 놓칠 리 없다. 투퀴디데스는 이 모두를 통해 이번 원정대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군중이 결정하고 응원한 행사이며,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되는 일이었다고 암시한다."(279)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니키아스는 전략가로서 원정 실패의 핵심 원인이 된 실수를 저질렀다. 쉬라쿠사이를 점령하려면 기병이 꼭 필요했다. 아테나이군이 처음부터 기병을 보유했다면 쉬라쿠사이는 항복할 도리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어떤 도움을 얻더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니키아스 본인이 원정대 출발 전에 기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테나이군이 기병 부대를 원정대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판단을 잘못 내린 탓이 아니라 목적을 잘못 설정한 탓이었을 것이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 이 작전에 참가한 뒤에도 최소한의 행동만 하고 제대로 된 교전은 피하려 했다. 니키아스는 아마 쉬라쿠사이를 직접 공격하는 심각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작전에 필요한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9-90)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고, 본인도 본래 후퇴하는 편을 선호했지만) 니키아스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심하면 더 좋지 않은 결과도 맞이해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내내 아테나이인은 기대를 저버린 장군들에게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다. 위대한 페리클레스조차 정책과 전략의 결과물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자 모욕당하고 처벌받았다. 니키아스는 분명히 귀환하자마자 심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니키아스는 자신의 명성과 안위를 염려해 (부정직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아테나이인에게 자기 뜻대로 철수하거나 아니면 1차와 같은 규모로 추가 원정대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니키아스는 애초에 아테나이인이 원정에 나서지 못하게 막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한 듯하다. 아테나이인은 이번에도 니키아스의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가 함대와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니키아스를 해임하지도 않았다."(304-7)


"역사가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조치들이 아테나이 직접 민주정의 탐욕과 무지,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아테나이인은 아테나이 민주정을 비난하는 주된 이유인 변덕과 우유부단함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좌절과 실망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려는 일관성과 결단력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이 저지른 실수는 사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약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강력한 나라라면 다들 겪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당한 강대국은 대개 그대로 군사를 되돌리면 위신에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철군 자체도 불미스럽지만 주변 국가들이 이 나라의 국력과 결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험을 할 때에는 대개 승리할 전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307-8)


"투퀴디데스가 니키아스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니키아스의 동시대인들과 같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은 니키아스가 정치가로서 또 장군으로서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의 무능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가 보기에 니키아스의 무능만으로는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도 아니었다. 투퀴디데스는 재앙이 벌어진 주된 이유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현명하고 절제력을 지닌 강력하고 총명한 지도자에게 견제를 받지 않았고, 생각 없고 야심 가득한 선동정치가에게 현혹되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무지와 탐욕과 미신과 공포에 내맡겼기 때문이라는 점을 독자가 이해하기 바랐다."(325)


결론


"우리가 본 대로 투퀴디데스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서술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이 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진실을 강조하고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료를 선택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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