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서남동양학술총서 32
하영선 외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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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한국의 문명 개념 도입사


"서양의 civilization 개념 자체는 막부부터 메이지 초기에는 예의와 교제로 이해되다가 점차 번역어로서 문명과 문화가 함께 쓰이는 짧은 시기를 거쳐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해서 니시 아마네, 미츠쿠리 슈헤이, 모리 아리노리 등에 의해 문명개화 또는 문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개/반개, 개화문명/문명개화의 네 부류로 진보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1875년에 쓴 본격적 일본 문명론의 전개라고 할 수 있는 『문명론지개략』에서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최상의 문명국, 터키,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반개화국, 아프리카와 호주를 야만국으로 분류한 다음 이러한 분류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반개화국가인 일본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과 장소를 고려한다면 일차로 서양 문명을 목표로 삼되 우선 지덕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정법을 개혁하고, 마지막으로 의식주나 기계를 추구해서 일본 독립을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57-8)


"유길준은 『세계대세론』에서 이미 전통과 근대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으며, 『서유견문』에서는 개화를 실상개화(實狀開化)와 허명개화(虛名開化)로 나누어 설명한다." "유길준은 실상개화를 달성하려면 개화의 노예에게서 벗어나서 개화의 빈객(賓客)을 거쳐 개화의 주인이 될 것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서 유길준은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그리고 개화의 병신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조선의 현실을 격렬히 비판한다. 전통 없는 근대를 추구하는 개화의 죄인과, 근대 없는 전통을 추구하는 개화의 원수, 전통의 긍정적 측면을 버리고 근대의 부정적 측면만 받아들인 개화의 병신만 존재하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 속에서 유길준이 당면하고 있었던 최대 과제는 단순한 서양문명의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 아닌 조화를, 더 나아가서 복합화를 당시의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44-6)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덕(智德)의 개화에 이어 정법(政法)의 개화를 논의하는 것처럼 유길준은 행실과 학술의 개화에 이어 정치와 법률의 개화를 강조한다. 정치의 개화를 위해서는 첫째,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의 급격한 영향력의 강화 속에서 당시 조선이 놓이게 된 양절체체─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국제질서─라는 이중구조의 어려움을 풀어 나가려고 유길준은 우선 구미 근대 국제질서의 명분체계로 등장한 『만국공법』의 논리를 빌려 국가는 마땅히 현존과 자위하는 권리, 독립하는 권리, 산업(토지)의 권리, 입법하는 권리, 교섭과 파사(派使)와 통상의 권리, 강화(講和)와 결약(結約)하는 권리, 중립하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유길준은 이러한 양절체제의 현실 속에서 청과의 관계를 속국이 아닌, 증공국(贈貢國)과 수공국(受貢國)의 관계로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청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균세와 『만국공법』에 기반을 둔 근대 국제관계로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50-3)


저항의 국제정치 대신에 활용의 국제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형 문명화 모델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서 조선이 당면하는 국내외 정치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근대를 복합화한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청국의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지지만 개화세력은 급격히 약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노력을 행동이 아닌 『서유견문』이라는 글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유길준은 갑오개혁(1894)을 통해 비로소 조선형 문명화의 실천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첫째, 조선이 겪고 있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둘째, 청일전쟁 이후 청의 영향력 대신 급격하게 커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셋째, 국내 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넷째,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실천전략적 취약성 등으로 19세기 조선의 문명화 모색은 좌절된다."(64-5)


2장 서구 권력의 도입


"근대 서구 권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서구문명에서 권력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수단으로든지 어떤 행동을 효과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연한 명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동양 전통사상에서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왕이나 관리가 자신의 인격을 연마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왔다. 둘째, 권력에 사용되는 수단은 주로 폭력과 돈, 금력 등 외부에서 작용하는 요인이며, 이들의 사용은 법(法)에 합당하는 한 정당하다. 이러한 수단의 양(量)과 방법 그리고 기술 자체에는 제한이 없으며 이를 확대하고 정교화하는 행위는 전문기술의 영역이다. 셋째,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하여 이를 행사하는 경우 거의 모든 경우에 국제 전쟁법에 직접 위배되지 않는 한 정당하다. 넷째, 권력의 행사는 주로 관료주의적 조직에 의한다. 이러한 조직은 권력의 도구이자 주체이며, 조직은 이같은 권력관계의 총체로서의 제도라 할 수 있다."(68)


"중국 고대부터 법가 전통에서는 영토를 넓히고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중심 원리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송(宋)나라 때부터 주자학의 강한 영향으로 '부국강병' 식의 사상은 이른바 '덕치(德治)' 뒤로 밀려나고 '패도(覇道)'로 지탄받게 되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문제는 동북아시아에서도 분명히 살아있는 현실이기는 했지만 계속 죄악시되고 잊히게 되었고, 현실적으로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적인 문화는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부국강병'이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것은 스스로 자성(自省)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권력 관념의 도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서구의 권력 또는 국가권력(national power) 관념은 '부국강병'이라는 한자 조어(造語)로 포장되었다. 결국 서구의 권력 개념은 당시에 그대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 사상언어로 번역되어 전통적 담론(談論)의 틀에 포섭되어 변형·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72)


"국가권력의 기본 작동원리로서, 그리고 제도로서의 근대 법(法) 개념의 도입은 1894년 청일전쟁에 이은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부터였다. 전통적 유교국가에서 법의 의미와 서구식 근대국가에서 법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서구식 근대국가는 특히 19세기 이후의 민족국가에서 법적 존재였다. 국가는 보편적 법에 근거하여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며, 법에 근거하는 한 정당한 것이었다. 또한 법은 늘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절차와 주체는 법이 정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 언어는 명쾌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추호의 혼란도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교국가에서 법의 위치는 애매한 것이었다. 국가가 법에 따라 다스려진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최악의 상황에 한하는 것이었다. 또한 법이란 조선의 경우 명나라의 법전을 사용한다는 것에 별 수치스러움이 없었고, 그것은 동양의 전통에는 입법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86)


"1898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의해 소멸하자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권력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06년 4월에 출범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이 중심이 된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 운동 또한 대한자강회 외에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가세한 전국적인 흐름이었다. 대한자강회의 설립 소이(所以)는 바로 '자강(自强)', 즉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힘'이 운동의 의미와 목적 그 자체였고, '실력(實力)'은 바로 그들의 모든 언어의 '키워드'였다. 이렇게 보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갑신정변의 다른 길이었다면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힘', 현실적 힘─정치권력의 탄압을 극복할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다. 실력이라는 의미는 오랜 기간을 거쳐 다져지는,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하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면적인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96-7)


3장 근대한국의 주권 개념


"『만국공법』이 번역되면서 조선에 도입된 주권 개념은 새로운 대외관계의 규범과 규칙의 전파를 뜻하였고,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었다. 일본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제1조에 〈조선국자주지방(朝鮮國自主之邦) 보유여일본국평등지권(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이라고 표기하여 청으로부터의 자율성을 명시하였다. 이는 당시 기존의 '정교자주(政敎自主)' 원칙으로부터 종주권에 대한 강조로 대조선정책을 변화시키고 있던 청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확대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1877년 청에 대한 보고에서 〈소방(小邦)이 상국(上國)에 복사(服事)하는 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병자조약에서 소방을 자주국(自主國)이라고 한 제1조는 일본이 마음대로 자서하여 강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종속관계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청국을 통해 서양과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조선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31)


"주권은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근대정치를 표상하는 관념이자 당시의 문명표준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 주권 개념의 도입은 곧 포괄적인 관념의 수용 문제였고, 이는 유교와 기독교, 그리고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질서와 근대적인 서구 정치질서 사이 선택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갖게 되는 관념은 그를 통해 한 사회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공동체의 상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주권 관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질서관의 수용은 그 대응에서 저항과 구성, 그리고 순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게 된다. 서구를 야만으로 간주하고 무조건적인 척사의 태도를 보인 쪽과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고려하여 외세에 편승하려 했던 세력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관료나 지식인들은 이전의 규범과 새로운 규범, 그리고 주어진 현실과 명분체제 사이에서 각기 다른 고민을 하였다."(137)


# 주권 개념을 둘러싼 주요 논지들

1. 김윤식(저항의 한계) : 조선이 중국의 속방─조공과 책봉 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내치(內治)에 자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임을 명시하는 것이 자주권을 유지하면서 국가의 안보를 보장받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2. 유길준(구성의 좌절) : 강대국의 침략을 면하려고 본심에 없는 조공을 하는 증공국과 자주할 권리가 전혀 없는 속국을 구별하고, 증공국[조선]은 다른 나라들과 동등하게 조약을 맺을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3. 윤치호(순응의 결과) : 근대적 주권 관념을 가장 충실하게 수용하였지만, 근대국가의 주체를 당시의 인민들이 아니라 미래의 ‘개화국민’으로 상정한 결과, 대세를 좇아 '선先문명화, 후後독립'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4장 근대한국의 부국강병 개념


"구한말 조선에서 부국강병의 개념이 긍정적 의미로 재해석되고 조선의 여러 국내 정치세력이 부국강병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식들을 모색하게 된 것은 서구세력의 팽창에 직면하여 유교이념과 조공체제에 입각한 조선의 안전과 독립 확보방식이 뚜렷한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부국강병을 국가정책의 최우선순위에 두었다는 사실은 과거와 달리 부국강병 개념이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긍정적인 의미로 재해석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구한말 부국강병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부국강병책은 포군의 대대적인 증설, 새로운 무기개발 등으로 이어졌다." "고종 친정기 부국강병의 개념은 더는 패도 혹은 잡술로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조선이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의 의미로서 재해석되고 있다."(157-8)


"위정척사파와 달리 김윤식과 어윤중 같은 개화파 관료들은 조선의 부국강병은 기존의 중화질서의 틀 내에서 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입장은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주장하듯이 당시 조선이 처한 양절체제적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중국에 의존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서구 국가들과 독자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부국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자들의 부국강병책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일본과 연대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급격하게 달성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들의 부국강병 방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김홍집은 자강은 단순히 부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질서와 정치제도를 유지한 바탕 위에서 군비의 증강과 서구 선진기술의 도입을 통하여 서구열강의 위협에 대처하고 소국 조선의 안전과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68-9)


5장 근대한국의 세력균형 개념


"『만국공법』(1865)은 청국 동문관(同文館)에서 서양서 한역을 담당했던 윌리엄 마틴이 헨리 휘튼의 『국제법 요강』을 한역한 것인데, 마틴은 이 책에서 'balance of power'를 '균세(均勢)'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자연법론자였던 마틴은 『만국공법』에서 국제법의 자연법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는 구미의 『만국공법』이 소국의 자주독립을 보전한 사례들을 예시하면서 세력균형의 자연법적 공공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마틴은 '균세의 원리'를 대국이 세력을 '균평(均平)'하게 만들고 소국이 이에 의뢰하여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태평의 요술(太平之要術)'로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휘튼의 원저에는 없던 것인데, 마틴이 세력균형의 자연법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일부로 할주(割註)의 형태로 삽입한 것이었다. '균세' 개념의 탄생은 『만국공법』의 자연법적 국제법의 이미지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균세'는 『만국공법』의 법적 공공성을 실현하는 정치적 공공성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178-9)


"번역어 '균세'의 사회적 확산과 개념화에 이바지한 텍스트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 이 책자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조선정부에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의 외교정책과 '자강'정책을 권유한 논책이었다. '친중·결일·연미'의 균세론은 한국을 서양 국가에 개방하여 위협세력인 러시아와 부상세력인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동북아에 세력균형 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조선 종주권을 재정립하려 했던 리홍장의 동북아정책에서 나왔다. '균세'는 '친중·결일·연미'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동원되었다. 『조선책략』은 필사본의 형태로 중앙뿐 아니라 지방 유생사회까지 유포되고 개화론자와 척사론자들 간에 개방개혁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논쟁을 통해 '균세' 개념은 개항반대자들(위정척사론자)까지도 그 정확한 의미를 포착할 정도로 널리 유포되었다. 즉, 『조선책략』은 (균세 개념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국제정치 개념으로서의 수용'을 유발하였던 것이다."(179-80)


"'균세'는 유교의 권력 관념에 부응하는 중국식 한자어였다. 'balance'의 번역어 '균(均)'은 '평형'의 뜻만이 아니라 토지의 공평한 분배를 통해 '안민(安民)'─경제적·정치적 안정, 곧 '태평'─을 모색하는 유교이념을 담은 '균분(均分)' '균평(均平)'에 쓰이는 '균'의 의미를 연상했을 것이다." "(서구의) 권력지향적 '세력균형' 개념을 규범적 '균세'로 치환하여 규범원리로서 관념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교이념의 영향뿐 아니라 조선의 취약한 국제정치적 위상과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관념은 자기 존재의 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세력균형 개념에 대한 규범적 관념(해석)은 주권이 취약한 상태에서 세력균형의 주체가 되기 어렵고, 객체가 되기 쉽다는 소국의 현실과 자의식에서 비롯한다. 소국의식이 강한 장소(topos)에서는 규범은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여기서 권력의 취약성 때문에 규범에 의탁하는 국제정치 관념이 '균세'를 규범적인 개념으로 상상하게 하는 착시현상이 나타난다."(185)


"근대 한국의 '합종연횡'에 관한 상상력은 세력균형 관념의 장소성을 드러낸다. 이 상상력은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 달랐다.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를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하여 생각했을 때 막부 무사들은 개체적 전투력과 생존의지에 충만한 무사들의 만국투쟁적 질서를 상상했다. 그리고 '전국'적 만국투쟁 이미지는 부국강병을 통해 주권을 확보하고 서양국가의 위협에 대항하려는 개체적·주체적 생존의식을 낳았다. 청국의 경우는 서양국가(미국)를 끌어들여 러·일을 견제하는 동북아 세력균형, 곧 균세지국(均勢之局)을 구상하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 혹은 '이적제적以敵制敵'이나 '원교근공遠交近攻')'를 동원하였다. '이이제이' 관념에는 화이질서관의 대국 관념이 남아 있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 달리 1870~80년대 소국 관념과 결부된 한국 지식인들의 '합종연횡' 관념은 대국과의 동맹이나 외교정책의 신중함(prudence)을 추구하는 전략 관념의 표현이었다."(189)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등 '자주'와 '자강'을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청국과 일본, 러시아와 일본의 권력투쟁이 동북아 국제관계를 규정하고 열강의 권력투쟁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국제폭력으로 귀결되는 콘텍스트에서 한국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세력균형이 열강의 역학관계를 의미하고 조선이 '자주'와 '자강'의 부족으로 세력균형의 객체가 되었을 때 '균세'가 국제행동의 정책원리로서 내면화될 가능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립'과 '정립'의 세력균형론이 나타났다. 중립 구상은 세력균형의 주체적 실천이 거의 불가능한 소국의 장소적 특질에서 나왔다. '중립'은 대국이 세력균형 정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지만, 부국강병에 기반을 둔 주체적 자주독립이 어려운 상태에서 강구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조선의 중립은 주권국가 체제와 조공체제가 공존이나 중첩되는 콘텍스트에서 모색된, 그리고 유럽의 경험에서 유추된 조선의 생존전략이었다."(195-6)


"'중립'은 주변 열강들이 만들어내는 세력균형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립론은 일본의 힘의 우위(지역패권)가 동북아 세력균형을 대체했을 때 파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보호조약 체결 이후 문명개화론자들은 대국 의존론을 생존논리로서 제시하였다. 청국 우위의 콘텍스트에서 친청 중립을 구상했던 유길준은 이 콘텍스트에 들어서면 일본 의존적인 평화론을 내세운다. 일본은 한국의 자강과 국권 회복을 통해 '동양의 영원평화'를 보전하기를 원하며, 한국은 '문명'과 '부강'을 통한 '광복'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지성(至誠)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평화'는 일본의 대한정책에 대한 우호적인 협조 혹은 '대국' 일본에 대한 묵종을 뜻했다. '균세'는 이러한 '평화'를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한다. 유길준은 '균세'를 믿고 일본에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다른 외세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응하려는 세력균형 정책이 부정되었던 것이다."(197-8)


"세력균형의 내면화 또는 토착화는 열강의 세력균형을 중시한 중립론과 달리 동북아공간 내부의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또다른 구상에서 전개되었다. '정립(鼎立)' 혹은 '정족(鼎足)'의 발상이 그것이다. '정립' '정족' 개념은 국제체제의 관점에서 동북아공간의 세력균형을 포착하고 조선을 세력균형의 주체로 상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정립' '정족' 개념은 1890년대 중반 이래 1920년대에 걸쳐 보였는데,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세력을 팽창하고 제국을 형성한 시기에 해당한다. '정립' '정족'은 일본이 지역패권국가로 성장해가는 콘텍스트에서 일본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제시되었다. 이 개념은 개화지식인들도 보였지만, 특히 유학자들(위정척사파, 개신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과거 '균세'와 균세적 동맹을 거부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은 일본의 세력팽창에 직면하자 만국공법을 일본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받아들였고 '정립'의 세력균형론을 조선의 생존논리로서 적극적으로 내세웠다."(198-9)


# 정립(鼎立) : 한·중·일 삼국이 안정 자립의 세를 보전함 / 정족(鼎足) : 한·중·일 삼국의 지리적 특성, 인종적 동질성, 문화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협심평화를 보전함


"'정립'이 실현되기 어려웠을 때 '만국공법'은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일본의 이기적 대외행동을 비판하고 일본에 '신의'와 공공성을 요구하는 규범적 준거로서 부활한다. 1900년대 후반 현실지향적인 국제정치관을 가졌던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이 지역패권을 장악해가는 동북아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현실에 추종하는 자세를 보였다. 반면 전통론자들은 세력균형을 동북아공간에 내면화한 '정립'의 논리를 통해 일본의 폭력과 패권에 대항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전하려는 강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여기서 만국공법이 일본의 대외행동을 비판하고 세계만국에 공공성을 주창하는 근거로서 제시되었다. '만국공법'의 규범성과 공공성이 전통론자들에 의해 부활했던 것이다. 지난날 '균세'를 부정했던 전통론자(위정척사론자)들이 '정립'의 세력균형 관념을 강하게 주창하게 된 반면, 과거 '사대'를 부정했던 문명개화론자들이 신흥대국 일본과의 의존관계를 중시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203)


6장 근대한국의 평화 개념 도입사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청은 전통적으로 사대질서를 관리해온 예부(禮部)와 별도로 구미의 근대 외교를 담당하는 총리아문(總理衛門)을 설치해서 이중 외교를 시작해야 했다." "이는 청이 구주제국의 행동양식이 단순히 금수와 같이 무력행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공법이라 할 수 있는 법규범에 따르는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청은 이러한 규범을 바로 문명의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의 오랜 역사 중에 춘추전국시대에 유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부회론(附會論)을 전개했다." "『만국공법』은 원용론(援用論)과 부회론의 틀 속에서 중국에 서양 국제법을 구체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점차 빈번해지는 구미제국과의 관계에서 중국은 서양제국들의 요구를 전통적 천하질서의 논리로서 거부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사고와 행동의 규범논리를 원용하여 상대방을 물리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했다."(214-6)


"근대한국의 평화 개념 도입 역시 청일전쟁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중국은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구미의 근대 국제질서를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청의 종주권이 명실상부하게 소멸하고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위험 속에서 위정척사론자들의 인간과 금수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만국공법 거부론 대신에 동도서기론자들의 만국공법 원용론을 채택하게 된다. 양절체제론은 더는 설자리를 잃게 되고 현실에 뿌리는 내리지 못하고 논의 차원에 머물렀던 자강균세의 평화론은 국내외의 현실과 직접 부딪치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또 현실적인 실천 가능성을 꿈꾸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1896년 4월부터 1899년 12월까지 제기된 『독립신문』의 자강균세 평화론을 크게 재구성하면 독립, 문명개화, 인민교육의 3대 과제로 요약할 수 있다."(234-5)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1894년 10월 20일 임시회의에서 개전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고, 청일전쟁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공격적 민족주의의 전쟁적 평화관은 러일전쟁 이후 기독교 평화론을 대표하는 우치무라 간조를 포함한 광범위한 일본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둔 평화관은 사회진화론의 양면성, 즉 경쟁진보와 약육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조선이 20세기에 생존하려면 새로운 지역문명표준으로 등장한 일본을 받아들여서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잘 요약한 최석하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고, 천하대세와 세계치란을 논의하려면 일본을 제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일본 문명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240-1)


"신채호는 동양주의의 문제를 한마디로 시대착오자들로 평가한다. 20세기는 치열한 열국경쟁시대인데 국가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동양주의를 잘못 꿈꾸는 것은 미래 다른 별나라 세계의 경제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국가가 주인이 되고 동양이 손님이 되어야지 동양이 주인이 되고 국가가 손님이 되면 나라는 망한다고 단언한다."(242) "열국경쟁과 약육강식의 무참한 희생물이 된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여 다시 무대에 서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동양주의는 전혀 상반된 길을 걸었다. 동양주의론은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방패삼아 우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새로운 문명표준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낙관론을 전개했다. 반면에 국가주의론은 구미의 약육강식적 제국주의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뒤늦게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비관론이었다. 역사적 현실의 결과는 동양주의론의 패배였다."(245)


7장 근대한국의 국민/인종/민족 개념


"국민은 서양과의 만남 이전에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나름의 의미로 존재하던 개념이었다. 『주례(周禮)』 『좌전(左傳)』 『사기(史記)』 등 동아시아 문명권의 대표적인 고전에서 이미 국민 개념이 쓰였다. 이때의 국민은 국(國)─선진(先秦)시대 봉건제후의 영지, 중국적 세계질서의 개념적 기초가 잡힌 한대(漢代) 이후에는 중국적 세계질서의 일원인 조공국 등─에 속한 민(民), 즉 백성이었다. 이러한 용례는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답습된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1660년의 한 상소에는 〈두루 넓은 땅의 백성은 또한 국민이 아님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조공국인 조선의 백성을 국민으로 지칭한다. 또한 이 국민 개념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자산을 공유하고 있던 중국과의 담화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729년의 『비변사등록』의 기록을 보면 청의 사신과의 대화에서 조선민을 지칭할 때 번속(藩屬)의 백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국민이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51-2)


"청일전쟁은 한반도의 인간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에 관한 논의를 전혀 다른 문맥 속에 위치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선 청의 패배로 조선에서 조공국의 백성이라는 국민 개념은 현실적인 의미를 잃고 논의의 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둘째, 고종을 중심으로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군君과 평등한 민民으로 구성된) 민국 정치이념의 국민 개념이 긴 잠복기에서 벗어나 재등장하였다. 조공국 백성으로서의 국민 개념이 사라진 상황에서 민국 정치이념의 국민 개념은 전통적인 국민의 기표를 손쉽게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서양 근대를 모델로 하는 국민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서양 근대를 문명의 기준으로 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고조됨에 따라 서양의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조선에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유산에서 과감히 탈피했고, 이들 중 일부는 서양 근대 국민을 nation의 번역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256-7)


"조선의 지식인 글 중에서는 유길준이 저술한 『서유견문』이 인종을 소개한 초기의 저작에 속한다. 그는 '세계의 인종' 편에서 〈여러 학자들의 논의가 같지 않아 혹은 삼종이라 하며 혹은 사종이라 하며 혹은 육종이라 하며 혹은 십일종이라 하며 혹은 이십이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 논의이다. 오직 불루면씨가 말하기를 오종이라 하니 그 말이 맞는 듯한 고로 이 책에서도 역시 채용한다. 그 오종은 황색인, 백색인, 흑색인, 회색인(혹은 종려색), 적색인(혹은 동색)이니〉라고 하여 지구상의 인종을 설명한다." "『서유견문』의 인종 개념은 세계에 대한 자연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적인 설명에 사용됨에 머물렀고 조선인을 규정하는 새로운 정치체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인종이 형질적인 구별을 나타내는 자연과학적 개념에서 정치적 의사를 함께하는 인간집단을 나타내는 정치적 개념으로 진화한 것은 청일전쟁 이후의 시기였다."(262)


"대한제국에서 인종 개념의 수용과 그에 따른 황인종으로서의 자기인식은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결, 즉 관점에 따라서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대결이 현실감을 띠는 것과 더불어 강화되어갔다." "하지만 1905년의 시점에서도 인종 개념이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에서 국민 개념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지역 차원의 인종 개념과 병립하고 있었다. 이 시기 대한제국의 적지 않은 논자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자 동아시아의 황인종이라는 두 차원의 정체성이 조화로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백인종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황인종 일본의 승리는 황인종 대한제국의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인종 개념의 확산을 정점에 도달하게 하였으나, 바로 그 전쟁을 통해 황인종의 일본이 황인종의 대한제국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인종[황인종]과 국민[대한제국민]의 조화는 여지없이 깨어졌다."(266)


"메이지 일본에서 만든 민족/민족주의 개념은 량치차오에 의해 청의 국제·국내정치적 맥락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쳐 한층 그 위상이 높아졌다. 량치차오에게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저항은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였고, 민족/민족주의 개념은 이 과제의 해답으로 주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량치차오의 민족 개념은 그가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식·정보의 전달자였다는 특징에 의해서 한반도의 민족 개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275) "러일전쟁 이후 인종 개념이 제국주의 논리로 변하여 국민 개념과 인종 개념의 조화가 깨어짐에 따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면 새로운 인간집단을 개념화할 필요가 생겼고 민족 개념은 바로 이러한 요청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수용된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변화되어가며 대한제국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개념으로 정착되어갔다. 이러한 민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인종 개념의 대척점에 민족 개념과 국민 개념이 공존하는 상황이 나타났다."(278)


"경술국치와 더불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재규정되었다. 그 결과 그들의 행동은 당연히 대한제국이 아닌 제국일본이라는 국가와 연결되었다. 국민 개념은 여전히 제국의 신민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들이 속하는 제국은 바뀌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국민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 키워낸 국민 개념은 제국일본에 의해서 제국주의에 대한 복종의 언어로 변화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맞서 한편에서는 이전의 국민 개념, 즉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대한제국의 국민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입장을 고수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 개념의 변화를 인정한 위에서 한반도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을 새롭게 규정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여 국민의 전제가 되는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전의 국민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논자 다수는 국민 개념과의 결별을 꾀했고, 이들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민족 개념이었다."(286-7)


8장 근대한국의 민주주의 개념 :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구한말 서구 민주주의 개념의 소개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길준은 입헌민주주의를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라고 하며 국중의 정령과 법률을 대중의 공론으로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①인민이 천거권을 가지고 ②대신 관리들의 직무를 감찰하거나 정령과 법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민주주의는 군주와 백성이 공동으로 수호하며 국민이 〈진취하는 기상과 독립하는 정신〉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며 문명개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독특한 것은 민주주의의 제도와 이념의 소개가 그의 부국강병론적 국가론 또는 국권론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방국의 권리' 편이 '인민의 권리'보다 앞에 다루어지고, '정부의 종류'에서도 '군주가 전단하는 체제'인 절대군주제가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인 입헌정체보다 앞서 소개되었다."(298-301)


"갑오개혁 이후(18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민주주의 개념의 체계적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초기적 수용이 대중적 기반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1890년대 후반 민주주의 관념의 수용자들은 지식 엘리트층에서 시작되었지만 민주주의 관념은 이 시기에 다시 등장한 일간신문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빠르게 전파되어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후기 개화기에는 우선 전기 개화기와는 달리 1880년대 중반기 이후 시작된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의 영향이 학교교육의 결실을 통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육영공원, 배제학당, 경성학당 등에서의 수년간 신식교육이 실시되었고, 신세대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서구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 물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서구 정치사상과 민주주의 개념의 전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계몽주의적 선각자─초기에는 서재필, 후기에는 윤치호─의 활동과 영향력이 두드러졌다."(302)


"비록 서재필이 초기부터 여러가지 국가적 덕목인 충군애국이나 부국강병, 독립을 강조했으나, 그가 사상적으로 가장 커다란 이바지를 한 것은 조선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담론인 민권 개념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유민권론은 『독립신문』이 다루는 '민(民)'의 성격이 유학적 '민(民)'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서재필이 소개한 민권은 민(民)이 정치체의 객체가 아니고 점차 중심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두드러졌다." "이제 권리란 특권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며 보편자인 인민, 즉 개인들의 〈텬생 권리〉나 〈사람마다 가진 자유권〉이라고 천명하여, 대한인민에게도 서구의 천부인권사상을 당당하게 소개했다. 서재필은 개화기 조선 민중의 계몽을 최우선시하였다. 아직 근대적 자각을 하지 못한 조선의 대중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하며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303-4)


"독립협회기의 민주주의는 2단계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먼저 민권을 고양하고 민권의식을 자각하는 시민층을 육성하는 단계로 계몽과 개화의 단계이다. 그 다음은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군민공치제) 애국론과 경장론의 단계이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은 서구의 자유주의나 계몽주의 사상을 소개하면서도 이것을 전통 유교적 관념에 대비하여 독자들에게 개화사상의 우월성을 설득하여 나갔다." "『독립신문』의 주요 담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장(更張) 개혁론'이다. 서재필은 급진적 개화운동으로 수구파와 왕권의 반대를 불러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우회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충군애국론을 바탕으로 하되, 개화파의 현실적 입지를 넓히려고 갑오년과 을미년의 근대적 개혁, 즉 경장개혁의 성공적 계승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특히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법률의 시행과 준수가 충군(忠君)이라는 점과 더 나아가 이를 통해 국가의 독립 기초가 굳세어진다는 점을 처음부터 밝혔다."(305)


9장 근대한국의 경제 개념


"일본에서 전통적 경제 개념(경세제민)은 오규 소라이로 대표되는 도쿠가와 유학의 변질, 란가쿠의 영향하에서 동요되었고, 19세기 중엽 개항과 유신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양적 개념인 economy의 번역어가 되었다. 당시 일본이 마주친 식민지화의 위기[外壓], 그리고 국내 세력으로부터의 점증하는 도전[內壓] 속에서 메이지 지배층은 부국강병이란 슬로건을 국가정책의 전면에 내걸었으며, 따라서 경제는 국민국가를 단위/경계로 한 경제로서 부국과 강병의 상호작용 맥락 속에 있었다. 그리고 부국의 수단은 식산흥업으로, 즉 산업의 육성을 통한 생산의 확대와 교역이라는 당시 19세기 후반 세계표준에 수렴되어갔다. 다시 말해 경제란 백성의 복지, 구휼, 절검(節儉), 조세 및 재정의 합리화로서의 경제에서 국가의 부강, 생산, 식산흥업으로서의 경제로 전환되어갔으며, 이 전환된 개념하에서 국민경제의 성공적 구성은 결국 일본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서 또하나의 강국의 출현을 가져온 것이었다."(332)


"유길준에게 경제적인 것의 중심은 대체로 재정과 조세의 문제였다. 그는 〈민세(民稅)를 비용(費用)하는 사무(事務)가 국가 최대의 무(務)〉라 언급하면서 합리적인 조세체계의 구축, 예산확보와 예산집행 등의 재정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요컨대 유길준의 경제는 조세와 재정책이 중심이 되고 근대적 상업관이 부가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후자(=상업관)의 경우 문명개화론이란 보편적 범주에서 논의됨과 동시에 상권의 확보 혹은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부의 체계적 창출로서 상업을 관념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그의 논의는 주어진 재화를 합리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경제는 백성의 복지, 구휼, 절검, 조세 및 재정의 합리화로서의 경제에서 국가의 부강, 생산, 식산흥업으로서의 경제로 전환되는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근대경제의 표준담론, 즉 부국강병의 맥락에서 상공업을 통한 생산의 확대란 담론과는 거리가 있었다."(336)


"유길준의 상업관은 1890년대 '상업입국' 혹은 '무역입국'론으로 전개된다. 대표적으로 『매일신문』 1898년 4월 27일자에는 「장사길 넓게 열도록」이란 제하에 〈일국의 흥망성쇠는 상업(무역)에 달렸으니 천하에 장사가 큰 근본이 될지라〉고 주장하면서 영국이 세계 제일의 부강국인 까닭은 〈상업을 확장하야 긔교한 제조물을 만들어가지고 남의 나라 금은을 바꾸어다가 그 나라를 부유케〉 한 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상업이 단순히 부를 가져다주는 것일 뿐 아니라 〈일국의 재물은 그 나라 혈맥이라 (상업을 장악한 나라는) 몇달 안에 전국 혈맥을 말릴 권리를 가졌으니 정부와 백성의 목숨이 (그 나라의) 장중에 달렸다〉는 점에서 강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가 정부를 지탱하고 백성이 집안을 보전하려면 아무쪼록 장삿길을 널리 열어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는 중상주의적 주장이 드러나고 있다."(338-9)


10장 근대한국의 '개인' 개념 수용


"박영효에 의하면 민은 '자유의 권(權)'을 갖는다. 그러면 '자유'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자유'는 종래의 한자어 '자유'─그것은 ('문명의 자유'가 아니라) '야만의 자유'일 뿐이었다─와는 의미를 달리한다. '자유'라는 말에도 이미 변용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은 그 생각한 바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만 하늘과 땅의 이치를 따를 뿐이며, 속박할 수 없고, 굽힐 수도 없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하늘이 부여해준 자유[天賦之自由]〉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민은 그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고 세속의 동의에 따른다. 그리고 따라야 한다. '의무' 같은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그 이익을 서로 얻으려면 일부의 자유를 버리고 세속의 동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비록 그 자유를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야만의 자유를 버린 것이며, 천하에 두루 통하는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략하나마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355-6)


"크게 다르지 않은 박영효와 유길준의 '인민관'은, 시민불복종, 저항권이라는 측면에서 나뉜다. 시민불복종을 긍정하는 박영효와 달리 유길준은 〈군민의 공치(共治)하는 정체(政體) 우왈(又曰) 입헌정체(立憲政體)〉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군주'의 위상과 관련하여 홉스 식의 (계약을 통한) 이론적 정당화는 보이지 않는다─생각하면서도, 인민의 풍속과 국가의 상황을 불문하고 그 정체를 감행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인민의 정치참여를 유보하는 것이다.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국가는 갑작스레 그 인민에게 국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 '인민의 권리' 바로 앞에 '인민의 교육'이 있다는 것은 극히 상징적이다. 개량주의나 계몽사상으로서의 뉘앙스가 강하다고 하겠다. 주어진 법률을 준수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시민불복종과 저항권이 깃들여지는 그만큼 옅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길준은 로크보다는 홉스에 가까웠다."(359)


11장 대한제국의 '영웅' 개념


"이 시기 구국(救國)과 구망(救亡)의 정신적 전선이 한·중·일 삼국 간에, 더 나아가 동양과 서양 간에 공유된 어휘를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는가에 놓여 있었다고 할 때, 식민 전야(前夜)의 대한제국 지성계가 일제히 '영웅'을 부르짖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영웅론에서 반복적으로 개진되던 두 가지 논점, 즉 '영웅과 시세(時勢)' '무명(無名)의 영웅'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에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논자들은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수립에 성공하고 서구열강과 함께 본격적인 민족제국주의적 경쟁에 뛰어든 일본, 1898년의 무술정변, 1899년부터 1900년의 의화단사건으로 개혁운동과 반제 민중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서구 열강의 이권침탈을 받고 있던 중국, 1905년 통감정치 실시로 재정·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채 반식민지 상태에 접어든 한국의 각 정치현실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375)


"1911년 4월 12일 『신한민본』의 논설 「조선에 와싱톤이 누구뇨」에서는 〈영웅이 시세를 만드느뇨, 시세가 영웅을 만드느뇨 하는 문제는 오늘 천하에 사람마다 아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은 사회적 조건이 성숙해야 영웅적 업적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으면 영웅이 출현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선도하게 되는지를 묻고 있다. 만약 시세가 영웅을 만든다면 제도와 의식이 성숙해야만 그에 부응한 정치적·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지겠지만, 영웅이 시세를 만든다고 하면 강력한 리더십과 극적인 혁신을 통해 불리한 환경과 물질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청과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에게 영웅이냐 시세냐는 과학을 넘어서는 실존적 질문이었다. 근대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고 사회가 점차 보수화되어간 메이지 말기 일본에서 영웅론이 쇠퇴했지만, 같은 시기 대한제국에서는 영웅론이 맹위를 떨쳤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376)


"도쿠토미 소호의 무명영웅론은 칼라일과 스마일즈의 영웅 개념을 신분사회에서 실력본위 사회로 변화해가던 메이지 일본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것은 영재(英才)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이 분발 노력하여 된 것이라고 한 스마일즈의 자조론과, 영웅은 진정한 인간의 완성태로서 모든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한 칼라일의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명'과 '영웅'이 결합된 형태의 무명영웅론은 이 시기 영웅 개념이 전통적 영웅 관념과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도쿠토미 소호는 비슷한 시기 '평민(平民)주의'를 주창하였으며, 소호의 무명영웅론에서 '평민'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와 사회적 지위획득의 기회가 만인에게 열려 있었던, 혹은 적어도 그러한 기대를 가능하게 했던 메이지 일본사회의 역동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일본이 군국주의로의 경사를 보이는 시점에서 영웅론은 쇠퇴하고 '무명의 영웅'은 '영웅'의 자리를 빼앗긴 채 '무명'으로 남는다."(391-2)


"도쿠토미 소호의 문제의식은 서구의 근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놓여 있으며, 유명한 영웅들의 대사업의 조력자이자 원동력이라는 측면에서 무명의 영웅이 조명되고 있다. 그에게 '무명의 영웅'은 자신의 맡은바 직분을 다하는 '평민도덕'의 구현자이다." "도쿠토미 소호의 '평민도덕'과 '무명의 영웅'에 대한 사상은 칼라일의 논리를 계승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이 내셔널리즘의 구호로 사용될 때 그것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향한 맹목적 열성에 불과하다. 훗날 역사적으로 증명된바 일본의 무명영웅론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신민, 제국전쟁에서 싸우다 죽는 무명용사가 되라고 요구하는 국가주의로 변질한다. 칼라일의 사상 자체가 안은 파시즘의 위험은 「무명의 영웅」에도 이미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다. 대(對)아시아 침략을 언론과 정치활동을 통해 열렬히 지지하고 훗날 A급 전범 판결을 받은 도쿠토미 소호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394-5)


"소호의 경우 천황으로 대변되는 메이지 국가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유명영웅을 생략하고 메이지 일본의 '평민'들에게 직접 무명영웅으로서의 덕목을 설파할 수 있었다. 반면 량치차오의 무명영웅론이 겨냥하는 계몽의 대상은 무명영웅들이 아니라 유명영웅으로서 청의 위정자들이다. 「무명지영웅」 말미에 량치차오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시세가 진실로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또한 시세를 만드나니 장수를 도와 성공케 하는 자는 병졸이오, 이 병졸을 훈련하여 능히 우리 편이 되게 하는 것은 또한 장수에게 있으니〉라고 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세를 만드는 영웅'으로서 중국의 유명영우에게 요청된 시대적 숙제는 중국 인민을 모두 '무명의 영웅'으로 빚어내는 것이었다." "국민의 윤리와 가치를 역설할 도쿠토미 소호의 무명영웅론은 량치차오에게 와서 국가지도자에 대한 시무책이 되었다."(396-7)


"스펜서의 이론에서 영웅이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며, 제임스의 이론에서 영웅이 일종의 사회적 돌연변이로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의 조합으로 탄생하는데 비해, 한국의 영웅담론에서 영웅은 '주조(鑄造)'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사회진화에서 인위적 개입을 중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되지만, 중국과 일본의 영웅론에서는 그 무게중심이 종종 '유명의 영웅'의 주조에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무명의 영웅'을 만들어내려는 데 전적으로 놓여 있다." 시세가 무르익어야만 영웅적 사업이 가능하다고 하면 당대의 한국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아 나라가 망해가는 암울한 과도기였으며, 현실적으로 국가의 대외적 주권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어째서 국가형성의 질료로서의 근대적 민(民)에 대한 언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은 이 당시 영웅론을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읽었을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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