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미래 - 모더니티총서 4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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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의 가설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혹은 인류학적으로 말해서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규정 속에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들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Neuzeit)'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현재와 지금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그 당시의 미래가 고찰대상이 된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경험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미래의 비중이 커진다면, 그 세계는 틀림없이 새로운 경험을 모으고 점점 빨라지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에게 점점 짧은 시간간격을 강요하는, 기술적·산업적으로 고도로 형식화된 세계이다." "방법론적으로 이 글들은 역사적 시간경험들을 포착하는 중요개념들의 의미론에 초점을 맞춘다." "현대적 역사개념은 경험의 조건들이 점점 경험 자체를 벗어나는 '역사 일반'의 점증하는 복잡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성찰의 결과이다."(13-4)


1 근대사에서 과거와 미래의 관계


- 근대 초기의 지나간 미래


"비전을 지닌 모든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로마교회의 통치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세계의 미래와 종말은 교회사로 편입되었고, 새롭게 유포되는 예언들은 불가피하게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제 세계종말이라는 미래의 가능성은 교회의 구성요소로서 시간에 포함되었다. 그러한 미래는 선형적 의미에서 시간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끝은 교회가 그것을 항상 지양하기 때문에 경험될 수 있고, 그러는 한 교회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이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전통이 갖는 내적 전제를 파괴했다." "피비린내나는 한 세기의 싸움 끝에 얻어진 결론은 종교내전은 분명히 최후의 심판의 서곡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가 가진 잠재력들이 공개적 투쟁 속에서 소진되고 고갈되었을 때, 혹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속박하거나 중립화하는 것이 성공했을 때 평화는 이루어졌다. 이로써 새로운 미래가 열렸다."(25-8)


"항상 나름대로의 계기를 가지고 지속되었던 (종말론적) 미래해석들이 마침내 해체되었다는 것이 17세기의 특징이다. 특히 세벤느봉기에서 그랬듯이 국가는 힘이 있을 때 미래해석을 반박하면서, 그것을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며 민속적이고 비밀스런 영역으로 추방했다. 이와 병행하여 인문주의자와 회의주의자들이 저술활동을 통해 신탁과 미신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 최초의 인물들이 몽테뉴와 베이컨이다." "16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신앙심 깊은 기독교도들의 기대나 모든 종류의 예언들은 당연히 정치적 행동으로 전이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 계산과 인문주의적 요소들은 미래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하나의 세계종말도, 몇몇 작은 종말들도 인간사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대했던 종말의 시간 대신 예전과 다르면서 새로운 그 어떤 시간이 시작되었다."(30-1)


"이제 예언을 대신하여 (미래구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합리적 예견, 즉 예측이었다." "미래가 유한한 가능성의 영역이 되었고, 이 영역은 개연성이 큰가 작은가에 따라 자체적으로 등급이 나누어졌다. 이것은 바로 보댕이 인간사의 주제로 만들었던 지평이다." "정치가들이 내릴 수 있는 도덕판단의 유일한 척도는 '대악이냐 소악이냐'라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리셜리외는 국가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견이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한번 빠져들면 벗어나기 어려운 수많은 해악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현재보다 미래를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리셜리외의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측과 정치적 상황의 관계는 너무도 긴밀한 것이어서 예측을 한다는 것은 이미 상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예측은 정치적 행동의 의식적 계기이다. 그것은 사건에 관계하면서 새로움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예측은 예측가능하면서도 불확실한 시간을 만들어낸다."(32-3)


"근대 초기의 정치적 시간의식과 기독교적 종말론의 차이는 보기보다 그렇게 크지 않다.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맞이하건 아니면 냉정하게 미래를 계산해보건 간에, 영원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정치가들이 아무리 영리하고 교활해지며, 술수를 잘 쓰고, 현명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더라도, 그들은 역사 속에서 미래라는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예언된 미래가 예측된 미래로 바뀐다고 해서 기독교적 기대의 지평이 원칙적으로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입헌군주국들이 기독교의 영향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이들은 중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철학이야말로 근대 초기를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면서 새로운 미래와 더불의 우리의 근대를 열었던 장본인이다." "합리적 미래예측과 구원을 확신하는 기대의 혼합은 18세기의 특성이었고, 이것은 진보의 철학으로 이어졌다."(37)


"예측에는 과거를 미래로 끌어들이는 진단이 내재해 있었다. 과거가 지니는 이미 보장된 미래성이 국가의 행동반경을 열어주는 동시에 제한했다. 과거 자체가 이미 미래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과거를 경험할 수 있고 또 그 역도 성립한다면, 국가의 정치적 존립은 정태적 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간구조와 연관된다." "반면, 진보가 바라보는 미래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그 하나는 가속성이다. 미래는 가속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하나는 미지성이다. 자기가속적 시간, 즉 우리의 역사가 경험영역을 축소시키고 그것의 항상성을 빼앗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미지의 것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미지의 것이 갖는 복잡함 때문에 현재적인 것 역시 경험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자기가속성을 지닌 시간은 현재로 하여금 현재로서 경험될 기회를 빼앗고 미래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경험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재는 미래를 통해 역사철학적으로 포착될 수밖에 없다."(38-9)


-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역사는 삶의 스승'이라는 표현은 헬레니즘시대의 예를 본받아 키케로가 한 말이다. 키케로의 이 말은 웅변술과 연관된다. 즉 삶에 교훈을 주는 역사에 불멸성을 부여할 줄 아는 웅변가만이 그 역사의 소중한 경험들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외에 이 말은 은유적으로 역사의 임무를 규정하기도 한다 〈참으로 역사란 시대의 증인이요, 진리의 등불이요, 기억의 생명이자, 고대의 전달자이다. 웅변가의 목소리 이외에 그 무엇이 역사에 불멸을 가져다 주겠는가?〉 여기서 키케로가 역사학에 설정하는 과제는 주로 웅변가가 개입하는 현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주려고 역사를 범례의 집합소로 이용한다." "이에 더해 선인들에게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방하라는 마키아벨리의 요구는 역사에서 끊임없이 유용함을 얻어내라는 원칙을 강화시켰다. 그가 범례적 사고와 경험적 사고를 새롭게 통일시켰기 때문이다."(46-9)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역사 자체가 신의 전유물인 전지전능함과 절대적 정당성과 신성함을 지닌 주체가 된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의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고 그들의 자연적 동일성을 파괴하는 추동력이 된다. 이때에도 독일어는 그에 대한 전조를 보여주었다. 당시에 '역사'라는 단어가 지녔던 의미와 새로움은 이 단어가 대표단수로 쓰였다는 데에 있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이 말은 일반적으로 복수로 쓰였다. 1748년에 나온 전형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야블론스키의 『예술과 학문에 관한 일반사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들은 미덕과 악덕의 거울이다.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어떤 일들이 행해졌고 벌어졌는지를 배울 수 있다. 역사들은 악행과 선행의 기념비이다.〉 여기서 보이는 전통적 정의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이 정의는 부가되는 다수의 개별역사들'die Geschichte(n)'에 대해 말하고 있다."(57-8)


"일련의 개별사들을 포함하는 보편사가 세계사로 변화하는 때에 칸트는 인간행위의 무계획적 집합을 이성적 체계로 바꾸어줄 수단을 찾고 있었다. 세계사에서건 개별사에서건 간에, 역사라는 대표단수를 통해 비로소 그러한 생각들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역사'라는 대표단수가 등장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사건과 고통에 내재하는 힘, 비밀스러운 혹은 분명한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연결하거나 추진하는 힘, 사람들에게 의무감을 주고 또 그 이름 아래 행동할 수 있다고 믿도록 했던 힘이 역사에 주어졌다. 이러한 언어사적 사건 뒤에는 시대적 연관이 숨어 있다. 이 시대는 사회적·정치적으로 신분사회에 대항했던 단수화·단순화의 위대한 시대였다. 즉 이 시대에 자유들에서 자유가, 정의들에서 정의가, 진보들에서 진보가, 수많은 혁명들에서 혁명이 탄생했다. 서유럽의 사고에서 프랑스혁명이 일회적으로 가졌던 중심적 위치가 독일어권에서는 '역사'에 주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60-2)


"가속, 무엇보다도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기까지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묵시론적 기대는 역시 18세기 중반 이래로 역사적 희망개념으로 변했다. 하지만 동경의 대상이기에 가속되어야 했던 미래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 기대는 기술화와 프랑스혁명을 통해 뜻밖에도 견고한 현실성을 획득했다." "1789년 이후 시점상의 소실점들을 지닌 새로운 기대공간이 형성되었다. 이 소실점들은 동시에 지나간 혁명의 상이한 여러 단계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칸트는 계속 반복되는 혁명에 대한 모든 시도들에 대해 시대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지만 유한한 목적을 설정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적 경험의 이러한 현대적 체계를 예견했다. 실패라는 〈잦은 경험을 통한 가르침〉이 혁명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그 이후 역사의 가르침은 역사철학적으로 정당화된 행동강령이라는 뒷문을 통해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마치니, 마르크스, 프루동이 혁명을 호소한 첫번째 스승들이다."(72-3)


2 사적 시간규정의 이론과 방법


- 개념사와 사회사


"개념사와 사회사의 관계는 일단 느슨해 보이고 적어도 어려워 보인다. 개념사가 우선 텍스트와 언어를 다루는 반면, 사회사는 텍스트 자체에는 담겨 있지 않은 실상과 운동을 끌어내기 위해 텍스트를 이용할 뿐이다. 이때 텍스트와 그것의 생성상황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이러한 일차적 비교는 피상적이다. 방법론적으로 고찰해보면 개념사와 사회사의 관계는 단순히 전자를 후자에 환원시키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분야의 대상영역을 살펴보면 쉽게 드러난다. 공통적 개념들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행위단위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개념들은 정치적·사회적 체계들에 근거하며, 이 체계들은 단순히 특정한 주도개념하의 언어공동체로 파악하기는 너무 복잡하다. 사회와 그것의 개념들은 긴장관계를 이루며, 개념과 관계된 역사의 학문분과들 역시 이 긴장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122)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지위를 지키거나 관철시키려는 의미론적 투쟁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위기상황에 나타난다. 프랑스혁명 이후 이 투쟁은 첨예화되었고 구조적으로 변화했다. 즉 개념들은 사건들의 파악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까지 개입했다. 점점 많은 미래개념들이 만들어졌고, 장래에나 획득될 지위들이 언어적으로 먼저 생겨나서 이 지위들을 획득하는 데에 일조했다. 따라서 개념들의 실현에 대한 요구는 커진 반면, 그 개념들의 경험내용은 더 적어졌다. 점점 경험내용과 기대공간이 일치하지 않게 된 것이다. '─주의'라는 수많은 말들도 그러한 개념들이었다. 집합개념이자 운동개념으로서 이 말들은 신분제에서 벗어난 대중들을 새롭게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표현들의 사용을 둘러싼 긴장은 구호에서 학술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말을 생각해보라."(128)


"여태까지 사회사적 문제에 대한 보조요소로서 개념규정의 문헌 비판 측면만을 강조했다면, 그것은 개념사의 영역을 축소시킨 것이다. 개념사는 오히려 사회사와 긴장관계를 이루며 독자적 영역을 형성한다. 역사서술적으로 보았을 때 이미 개념사의 특화가 사회사적 문제설정에 적지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우선 개념사는 정체에 관한 현재적·시대연관적 표현들이 조사되지 않은 채 과거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판이고, 또 핵심은 변하지 않은 채 여러 상이한 사적 형상들로 나타나는 상수인 이념사에 대한 비판이다." "단어가 같다는 것이 실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지표가 될 수는 없다. 가령 '시민'이라는 표현의 개념변화를, 즉 거칠게 말해서 1700년경의 (도시) 시민에서 1800년경의 (국가) 시민을 거쳐 1900년경의 (비프롤레타리아로서의) 시민으로 가는 경로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시민'이라는 동일한 단어의 의미는 밝혀지지 않는다."(130-1)


"모든 개념들은 단어에 근거하지만, 모든 단어들이 사회적·정치적 개념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정치적 개념들은 항상 다의적이며, 구체적으로 보편성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국가'라는 단어를 개념으로 만드는 것은 이 단어로 유입되는 모든 것들, 즉 통치, 행정구역, 시민층, 입법, 사법, 행정, 조세, 군대 등이다. 다양한 모든 실상들이 그에 따른 용어 및 개념성과 더불어 '국가'라는 단어로 파악되어 공통적 개념이 된다. 따라서 개념은 많은 의미내용들의 농축물이다. 단어의미와 그 의미의 대상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역사적 현실과 경험들이 한 단어의 다의성으로 유입되고 그 단어에서만 의미를 얻어 파악되는 한, 개념에서 의미와 대상은 일치한다. 단어는 의미잠재성을 지니고, 개념은 충만한 의미들을 자체적으로 통일시킨다. 개념은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과 이론적·실천적 실재연관들의 총합을 연관지으며, 이 연관 자체는 개념을 통해서만 주어지고, 현실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134-5)


"개념사적 방법은 단어와 실재 사이의 소박한 상호순환구조를 파괴한다. 개념을 언어화된 시대정신과 사건연관의 동일성으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개념에서만 역사를 파악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단견이다." "한 개념이 어의론적으로만 조사되어서는 안되며, 그러한 조사가 단어의미와 그것의 변화에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개념사는 항상 정신사적 혹은 실재사적 연구결과들을 고려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의미론적 접근을 명칭론적 접근과 교대로 사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세속화 현상은 이 표현만 분석함으로써 연구될 수 없다. '세속화'라는 개념을 그것이 지칭하는 역사에 대한 요소이자 충분한 지표로서 생각하기 이전에, 단어사적으로 '현세화' '시간화'와 같은 병립 개념들이, 실재사적으로는 교회법과 정체의 영역이, 정신사적으로는 이 표현에서 결정화되는 이데올로기적 흐름이 고찰되어야 한다."(136-7)


- 서술, 사건, 구조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서술에 관한 질문은 인식영역에서 역사운동의 다양한 시간적 외연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무한한 일들에서 분리된 사건들은 이미 동시대인들에게 사건 연관, 서사할 수 있는 의미단위로 경험될 수 있다." "이때 여러 소여들의 총계를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주는 공간은 우선 자연적 연대기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모든 계기들을 배열하는 데에 있어서 연대기적 정확성은 사적 서사의 방법론적 요구 중의 하나이다. 이때 역사적 시간연쇄의 의미에서 〈세분화의 문턱〉(짐멜)이 존재하며, 사건은 그 아래에서 일어난다. 최소한의 '이전'과 '이후'가 있어야 의미단위가 구성되어 소여들에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 수 있다. 한 사건의 연관, 그것의 '이전'과 '이후'는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사건의 일관성은 시간연쇄에 얽매여 있다. 행동하는 주체들이 하나의 사건연관을 수행하는 한, 그 사건연관의 상호주체성 자체가 시간연쇄의 망에 고정된다."(160-1)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구조는 더 견고한 지속과 더욱 큰 항상성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변화만을 나타낸다. 이때 지난 세기에는 '상태'라는 말로 파악되었던 것이 '중·장기성'이라는 범주로 시간적으로 더 큰 요구를 지니며 포착된다." "(사회적 삶이나 국가 간의 삶의 흐름을 중·장기적으로 규제하는 관습이나 법체계 같은) 구조들의 상호관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구조들의 시간적 상수들이 한 사건의 연대기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경험공간을 넘어선다는 점은 모든 구조에 있어서 동일하다. 규정가능한 주체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반면, 구조는 그 자체로 초개인적이고 상호주체적이다. 구조는 한 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집단들로 환원되기도 힘들다. 그래서 방법론적으로 구조는 기능적 규정들을 유발한다. 이로써 구조는 시간 외적 단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종 일상의 경험에도 개입할 수 있는 과정적 성격을 얻는다."(163-4)


# 다양한 구조들 : 정체의 구성형식, 통치방식, 생산력과 생산관계, 지리적·공간적 조건, 관습이나 법체계 등


"따라서 사건과 구조들은 역사적 운동의 경험공간에서 상이한 시간적 외연을 지니며, 학문으로서의 역사만이 그것을 다룰 수 있다." "사건과 구조의 두 차원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시한다. 게다가 이 두 차원의 위치가치는 변화하며, 질문 방향에 따라 상호간의 배열관계가 달라진다. 통계적 시간연쇄는 구체적 개별사건들에 의지하며, 이 사건들은 고유한 시간을 갖지만 긴 기간이라는 망을 통해서만 구조적 발언력을 얻는다. 서사와 묘사는 서로 맞물리며, 이때 사건은 구조적 진술의 전제가 된다. 반면에 지속적 구조 혹은 장기적 구조는 가능한 사건들의 조건이다. 도대체 하나의 전투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삼박자로 정리될 수 있으려면 특정한 통치형식, 자연적 조건에 대한 기술적 지배, 적-동지 관계의 조망가능성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구조는 이 전투라는 사건을 조건지으면서 이 사건의 일부를 이루고, 이 사건에 개입한다."(165-6)


"사후에 탐구된 사건의 사실성은 예전에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었을 지나간 연관들의 총체성과 동일하지 않다. 사적으로 탐구되고 제시된 모든 사건은 사실적인 것의 허구에 의존하며, 현실 자체는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임의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설정할 수는 없다." "역사가는 지나간 현실의 증언에 소극적으로 얽매여 있다. 역사가가 사료들을 통해 한 사건을 발굴해낼 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사실적인 것의 허구에 열중하는 문학적 이야기꾼에 가까워진다." "그것을 위해 역사가는 역사적 개념들을 사용한다. 이 개념들은 지난날의 풍부한 사건연관들을 포괄해야 하고, 또 오늘날 역사가 자신 혹은 독자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를 파악하게 해주는 역사적 개념들이 없다면, 어떠한 사건도 서사할 수 없고, 어떠한 구조도 서술하지 못하며, 어떠한 과정도 묘사할 수 없다. 모든 개념성은 지나간 단수성 이상의 것이다."(169-70)


- 우연 (역사서술에서의 계기화의 불가능성)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우연은 순수한 현재범주이다. 기대지평의 갑작스러운 돌발현상으로 우연을 미래에 대한 기대지평에서 이끌어낼 수는 없으며, 지나간 근거들의 결과로서 그것을 경험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사서술의 목적이 시간적 외연 속에서의 연관을 밝히는 것이라면, 우연은 역사 외적 범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연은 당황케 하는 것, 새로운 것, 예기치 못했던 것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항상 이런 식으로 경험되는 것을 기술하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우연을 통해서만 연관이 설정되기도 하고, 연관이 약할 때에 그에 대한 보충물로서 우연이 필요하기도 하다. 역사서술에 이용될 때, 우연은 조건들이 수미일관하지 못하거나 그 결과들이 비길 데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가능한 한 우연을 회피하는 것이 현대의 사적 방법론인 반면, 18세기까지는 역사 해석에 우연이나 행운의 여신의 모습을 한 요행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76-7)


"기독교도들과 인문주의자들은 행운의 여신이 '섭리의 딸'이자 '우연의 어머니'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보에티우스가 기독교적 역사해석에 끌어들인 '돌아가는 바퀴'의 은유는 모든 일들의 반복가능성을 나타냈다.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이 세계의 그 모든 부침현상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새로운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행운의 여신은 측정불가능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 신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인간적 사건연관에 끼어들었던 요행이나 비탄은 바로 인간적 사건연관에 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얼굴을 한 행운의 여신은 단지 가능성에 머무는 모든 역사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고, 이 여신의 풍성한 선물탁자는 〈모든 세대〉를 위한 자리였다. 세속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서술가능성에 대해 항상 동일한 전제를 보장했던 것이 바로 행운의 여신의 변화가능성이었다."(178-9)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과거와 미래의 역사적 사실은 강제적 필연성을 배제하는, 실현되었거나 실현될 가능성이다. 충분히 근거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은 우발적이며, 인간의 자유의 영역에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지나간 미래와 다가올 미래는 항상 우연적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에게 우연의 연쇄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일회적 확실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연쇄는 최선의 세계라는 신의 계획 안에서 설정되고 지양된다. 신정론의 계명 아래에서는 우발적인─역사적인─사건들 역시 필연적인 것이 된다." "보다 높은 시점에서 보면 우연은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후 우연은 더이상 계기화의 불가능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18세기에 발전하기 시작한 새로운 역사 이론에서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세속적인 것의 단수성이라는 신학원칙과 역사의 내적 통일성이라는 미적 범주가 근대의 역사철학에 편입되었고, '역사'라는 현대적 개념을 만들어냈다."(193)


"〈철학적 고찰의 의도는 우연적인 것의 제거에 있다. 우연성은 외적 필연성과 같은 것으로서, 자체적으로 외적 상황일 뿐인 원인으로 돌아가는 필연성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하나의 보편적 목적, 즉 세계의 궁극적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헤겔의 이 문장은 그가 지난 세기에 이루어졌던 우연의 합리화를 얼마나 넘어서고 있는지, 세계사의 신학적 통일성이 계몽주의보다 얼마나 더 수미일관하게 우연을 배제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믿음과 사고를 역사로 옮겨야 하니, 의지의 세계는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이상주의의 역사개념 내부에서 모든 우연을 배제했던 것은 신학적 유산뿐만이 아니었다 역사서술에 내적 개연성을─그로써 더 높은 현실내용을─요구한 문학적·미학적 성찰 역시 무의미하게 보이는 우연을 추방했다." "선사적 역사관의 영역에서 행운의 여신이 했던 일을 현대에는 이데올로기가 떠맡게 되었다. 불변의 법칙성으로 치장할수록 이데올로기는 항상 새로운 조작을 필요로 한다."(194-5)


- 입장연관성과 시간성


"근대의 역사를 이전의 역사들과 구분하는 것은 계몽주의자들의 성찰을 통해 무대상적인 '즉자대자적 역사'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역사는 성찰개념이 된다. 역사적 흐름의 조건, 역사 속에서의 행위의 조건, 역사의 인식의 조건이 계몽주의 이후 서로 연관된다." "역사가는 예술가나 도덕적 판관으로서 생산적 역할을 했고, 이 역할의 기준은 효과적 전달이라는 요구였다." "청중은 전해듣는 사건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하기 때문에 역사서술가가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루키안은 생각했다. 그래서 보기, 나타내기, 반영하기의 영역에는 '생산적 조각술'이라는 비유가 남아 있기도 하다." "즉 윤색되지 않은 벌거벗은 진리, 명확하게 모사되는 진리를 궁극적 목표로 하는 예들은 18세기까지의 역사적 서술의 상황을 보여준다. 소박한 실재론을 포괄하는 은유들은 청각적 증인보다는 자신의 현전을 통해 역사의 진리를 보장하는 시각적 증인에 의존한다."(203-4)


"클라데니우스(1710~1759)는 역사서술에서 모든 직관 판단, 모든 경험의 상대성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보고가 각자 진리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는 물론 상반된 증인들을 정확하게 조사하고 단서들을 확보함으로써 지나간 역사 자체를 인식하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는 한 그 역시 적절한 실재론적 인식이상을 숭배한다. 그렇지만 클라데니우스는 지나간 사건연관들은 어떠한 서술을 통해서도 전체적으로 모사될 수 없다고 한다. 〈역사의 원래 모습〉은 서사를 하는 가운데 이미 변한다. 증인들만 입장연관성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의미로 충만한 역사〉를 쓰려는 훌륭한 역사가는 그 역사를 〈젊어진 영상〉으로 모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선택해야 하고 잘라내야 한다. 또 은유를 이용하고 보편적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이로써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체적으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다의미성을 만들어내고 만다."(207-8)


"플랑크는 시간적 거리가 커질수록 인식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을 누구보다 먼저 생각했다. 이로써 시각적 증인은 클라데니우스가 이미 상대화시켰던 그때까지의 특권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이제 구전이나 문자적 전수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 방법을 통해 과거는 재구성된다." "역사들을 계속 기록하면서 전승했던 역사의 테마는 더이상 지나간 현재가 아니다. 이제 과거 자체가 주제가 되며, 그것도 그 고유성을 오늘에야 드러내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루어진다. 지나간 현재들의 서사는 성찰을 통한 과거의 현재화로 바뀌고, 사학은 시간적 입장을 고려하면서 과거연구가 된다. 확실히 프랑스혁명이 가져온 급속한 경험변화가 이러한 시점의 시간화를 촉진시켰다. 연속성이 단절되면서 과거는 분리되는 듯했고, 사적 연구만이 점점 낯설어지는 과거를 해명하고 만회할 수 있었다." "오래된 과거일수록 더 잘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은 혁명 이전의 진보철학의 산물이다."(213-4)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세계사를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주관성과 분리하면서, 〈모든 관점들의 총체성〉을 〈그 세계사의 정신적 원칙〉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무당파성에 대한 요구 역시 정당하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는 이해에 이끌리는 일면성에 대항하여 〈있었던 일을 주장하는〉 사실성에만 몰두한다. 이로써 헤겔은 역사연구의 전통적 기준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는 당파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무당파성이 역사가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관객〉으로 만든다면, 무당파성 자체가 무목적적인 것이 된다고 그는 보았다. 〈판단이 없다면 역사는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서술은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역사서술은 본질적인 것을 위해 당파를 취하며, 그것에 연관된 것에 집착한다.〉 헤겔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한 기준은 분명했다. 그것은 역사의 이성이었다."(222-3)


"역사가가 사건사에서 눈을 돌려 장기적 흐름, 구조, 과정을 관찰한다면, 내재적 사료해석은 더욱 극복되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어떠한 사료도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줄 수 없다. 우리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 한다면, 사료는 그것을 방해할 것이다. 사료는 거부권을 갖는다. 완전히 틀리거나 신빙성이 없는 해석을 감행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사료는 금한다. 잘못된 자료, 잘못된 숫자들, 잘못된 계기설명, 잘못된 의식분석, 이 모든 것들이 사료비판을 통해 발견된다. 사료는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지만,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나의 역사를 역사로 만드는 것이 사료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료로 하여금 말하게 하려면 가능한 역사들의 이론이 필요하다. 이때 당파성과 객관성은 이론형성과 사료해석의 긴장지평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차한다. 양자 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연구에서 나머지 하나도 무가치한 것이다."(230-1)


3 역사적 경험변화의 의미론


-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사적·정치적 의미론


"역사적 행동단위들은 보편개념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보편개념들을 단수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die Kirche)'는 가톨릭 교도에게 자신들만의 교회이며, '당(die Partei)'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만의 당이며, 프랑스혁명에 있어서의 '국가(La Nation)'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때 쓰이는 관사는 정치적·사회적 단수화에 기여한다. 이 경우에 구체적 집단은 언어적 보편개념을 자신에게만 관계시키고, 모든 비교가능성을 거부하면서, 보편성을 배타적으로 요구한다. 그러한 자기규정이 배제된 것들을 구별하면서 '대응개념'을 만들어낸다. 가톨릭 교도가 아니면 이교도나 이단자가 된다. 공산당을 탈당한다는 것은 정당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인류에게서 뛰쳐나가는 것과 같다〉(루친스키). 유럽민족들이 갈등기에 서로에게 사용했고, 세력관계가 변하면서 하나의 민족에서 다른 민족으로 옮겨져 쓰였던 부정적 용어들은 말할 것도 없다."(237)


"일상에서처럼 정치적 언어사용은 항상 이러한 비대칭적 대응개념이라는 기본구조에 근거한다." "불평등하게 대조되는 대응개념들의 특징은, 반대입장을 부정할 수 있는 기준들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응개념들의 정치적 효율성이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이 개념들을 학문적 인식과정에서 활용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일단 생성되면, '헬레나인과 야만인', '기독교도와 이교도',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개념쌍은 특정한 경험방식과 기대가능성을 가리킨다.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라면 이 개념쌍들은 그때그때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 안티테제들은 고유하면서도 공통적인 구조들을 지니며, 이 구조들은 항상 정치적 언어로 사용된다. 비록 역사가 흐르면서 단어나 이름이 변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응개념들의 구조가 개념쌍을 형성하는 단어들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단어들이 바뀌어도 비대칭적 논거구조는 지속될 수 있다."(240)


"계몽주의시대에 인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판적 기능 혹은 더 나아가 대립입장을 부정하는 기능을 했다. 이 개념은 세 가지 방향, 즉 여러 교회와 종교들, 신분적 권리의 차별화, 군주의 개인통치에 저항했다.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인간이나 인류라는 표현의 위치가치가 변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을 포괄하기 위한 상위개념이었던 인류가 정치적으로 사용되면서 부정적 대응개념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비정치적이었던 인류의 의미를 통해 최대의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었고,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것에 필적할 것은 없었다. 모든 인간의 산술적 총계였던 인류가 단어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정치적 자기정당화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법적인 규정 없이 인간이나 인류개념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잉여가 생겼다. 이것은 그리스인, 야만인, 기독교도, 이교도와 같은 구체적 개념들에는 없었던 것이다."(276-7)


"〈군주는 인간이고, 노예는 자유롭네. 황금시대가 다가오네〉라는 시는 상이하게 대조되는 두 개념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자유가 노예제의 반대이듯, 군주는 암시적으로 인간에 대한 대립입장이 된다. 루소가 더 분명하게 왕과 인간을 대립시켰다. 〈왕이 왕좌를 포기하면, 그는 인간의 신분으로 격상하리라.〉" "인간을 짐승과 신 사이의 긴장영역에 위치시키는 것은 고대 이래의 위상학적 사고였다 .18세기에 인간과 왕이 대립되면서 군주들은 갈 곳을 몰라했다. 군주는 이전처럼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군주는 오히려 인간 일반의 도덕을 근거로 하여 배제하고 근절시켜야 할 적이 된다. 루이 16세는 이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에 대한 변호가 그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점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생쥐스트는 그것을 반박했다. 〈나는 왕이 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왕을 적으로 평가한다기보다 차라리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279-81)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분명히 과거에 경험된 것과는 다른 식으로 제한된다. 제기된 기대는 따라잡을 수 있고, 체험된 경험은 결집된다. 경험이 미래에 반복되고 확증되기를 오늘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에 이미 기대를 경험할 수는 없다. 희망에 차서 혹은 불안에 떨며, 염려하거나 계획하며 생기는 미래에 대한 긴장은 물론 의식 속에서 성찰될 수 있다. 그러는 한 기대도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기대를 통해 의도했던 상황이나 행동결과 자체가 이미 경험내용인 것은 아니다. 경험의 특징은 지나간 일들을 세공하여 현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현실로 충만하다는 것이고, 성취되거나 실패한 가능성들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개념들은 단순한 대응개념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동일하지 않은 존재방식을 가리키며, 이 존재방식의 긴장에서 역사적 시간과 같은 것이 나올 수 있다."(396-7)


"특정한 사건 위에 근거하는 경험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할 수 있다. 그것들은 서로 겹치고 상호침투한다. 게다가 새로운 희망이나 환멸, 새로운 기대가 그 속에 유입된다. 따라서 일단 만들어진 것으로서 항상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험들은 변한다. 이것이 소급작용하는 기대가 없다면 결집될 수 없는 경험의 시간적 구조이다. 경험이 없다면 존재할 없는 기대의 시간구조는 이와는 다르다. 경험에 근거하는 기대가 적중했을 경우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대되지 않았던 것만이 놀라움을 준다. 이때 새로운 경험이 생긴다. 즉 기대지평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경험이 발생한다. 그때의 경험획득을 통해,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주어졌던 미래의 한계가 사라진다. 기대가 시간적으로 추월되면서 이 두 차원은 그때그때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한다. 그때그때 상이하게 새로운 해결을 유발하고, 그러면서 역사적 시간을 추동시키는 것이 경험과 기대 사이의 긴장이다."(398)


"새로운 기대지평이 열리자 이러한 상황은 진보개념에 의해 마침내 변했다. 용어론적으로 정신적 '완성'이 세계의 '진보'를 통해 밀려나거나 해체되었다. 이전에는 내세에서만 도달가능한 것이었던 '완전성'이라는 목적규정은 그 이후 세속적 현존의 개선을 위해 쓰였고, 이로써 열린 미래라는 대담한 계획을 통해 종말론은 밀려날 수 있었다." "'완전' 이론이 이렇게 시간화되면서 프랑스에서는 '완전화'라는 표현이 나왔다. 루소는 이 표현에 인간의 '완전성'이라는 역사적 기본 규정을 덧붙였다. 그 이후 전체 역사가 지속적인 완전화의 과정으로 파악되었고, 모든 퇴보와 우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마침내 인간 스스로에 의해 계획되고 수행될 수 있는 과정이 되었다. 그 이후 목적은 세대를 거치며 계속 규정되었고, 계획이나 예측 속에서 선취된 작용들은 정치적 행동의 정당성의 명분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대지평은 그 이후 시간과 함께 진보하는 변화계수를 얻는다."(402-3)


"그러나 기대지평만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질을 얻으면서 유토피아적 목적을 계속 설정했던 것은 아니다. 경험공간 역시 점점 변했다. 진보개념은 18세기말경에야 비로소 지나간 3세기의 충만한 새로운 경험들을 결집시키며 만들어졌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진보개념은 일상 속으로 점점 깊게 개입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새로운 경험들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분과적 진보에 의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기술의 등장, 신대륙과 상이한 발전단계에서 살고 있는 민족들의 발견, 산업과 자본을 통한 신분세계의 해체가 그 예이다. 이 모든 경험들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가리킨다." "새로운 점은 미래를 향한 기대가 이제 그때까지의 모든 경험들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학문과 기술이 전개되면서 새롭게 경험에 부가된 것들 역시 미래의 기대를 생산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그 이후 경험공간은 더이상 기대지평을 통해 제한되지 않았고, 양자의 경계들은 분열되었다."(403-4)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간의 비대칭성이 돌이킬 수 없는 진보로 협소화되어 일면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 근대를 '새로운 시대'로 파악하려는 첫번째 시도였다. '진보'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만든 특수하게 역사적인 첫번째 개념이다. 항상 문제는 더이상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도출될 수 없었던 경험들을 소화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그때까지 제기될 수 없었던 기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도전은 근대 초기에 성장하여, 유토피아적 잉여잠재력을 공급했고, 프랑스혁명의 사건적 성격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그때까지 항상 세대의 연쇄에 연결되었던 정치적·사회적 경험세계가 파괴되었다." "18세기말 이후에는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기술적·산업적 진보가 덧붙여졌다. 학문적으로 창안하고 그것을 산업에 적용할 때 원칙이 된 것은 미리 계산할 수 없는 새로운 진보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진보는 시간적으로 전진하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되었다."(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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