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사란 무엇인가 - 역사와 언어의 새로운 만남
나인호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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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역사의미론에 의하면, 언어가 과거의 실상, 다시 말해 역사적 실재를 구성한다. 이는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먼저,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여러 행태의 언어 행위 혹은 언어적 매개체 없이는 어떤 사건도 완성될 수 없고 어떤 정치·사회적 시스템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정치·사회·경제적 행위는 말하기와 답변, 계획의 발표, 논쟁, 밀약, 명령, 규약의 작성, 합의와 이견의 선언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발생, 모든 제도의 형성과 변화는 이미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한다면, 언어 없이는 어떤 역사적 사실, 나아가 과거의 정치·사회적 현실 세계 전반의 전달과 재구성도 불가능하다. 유물이나 유적 등의 비언어적 전승물도 결국 언어에 의해 구성되고 유의미하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과거의 사실은 언어가 없다면 존재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14)


# 개념사 : 언어와 정치·사회적 실재, 혹은 언어와 역사의 상호 영향을 전제한 채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하는 역사의미론(historical semantics)의 한 분야


1부 개념사란 무엇인가?


1장 개념이란 무엇인가?


"실재와 실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균열과 불일치가 존재한다." "따라서 개념사가에게 개념이란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했다시피, 정의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비역사적인 개념뿐이다. 언어와 실재의 관계는 모호하다. 역사적으로 언어도 변화했고 현실도 변화했다. 언어의 변화는 현실의 변화에, 현실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에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이 둘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변화는 시간적으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다르게 전개되기도 한다. 또 양자 간에는 변증법적 지양도 일어나지만, 해결되지 못할 대립 관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개념을 해석한다는 것은, 언어의 역사와 실재의 역사 간의 이런 모호하고도 복잡한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개념 속에는 이렇게 모호하고도 복잡한 긴장 관계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28-9)


"그런데 '실재'란 달리 보면 후대의 역사가가 만든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와 실재 사이의 긴장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통시적으로 볼 때 과거 행위자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표현해놓은 사료의 언어와, 그가 경험한 것 이상의 사실을 표현하려는 현재 역사가의 언어가 갖는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언어와 실재 사이의 긴장이란 과거 행위자들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 즉 '과거의 현재'와 오늘날의 우리가 재구성한 당시의 현실, 즉 '현재화된 과거' 사이의 긴장이기도 하다." "이 난제를 대하는 개념사의 연구 방식은 과거 행위자가 경험한 '현재'를 표현하고 있는 사료의 언어와 우리가 경험한 '과거'를 표현하고 있는 현재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고, 전자를 후자로 번역하면서 양자가 어느 지점에서 수렴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절차로 이루어져 있다."(29-31)


"이념사와 관념사에 의하면, 이념/관념은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실제 역사적 맥락, 즉 각 시대의 구체적 정치·사회적 맥락을 초월해 핵심적 의미의 내용이 변하지 않는 단단한 실재이다." "독일 이념사를 이론화한 미국의 러브조이는 관념사란 〈널리 확산된 채 많은 사람들의 생각(mind)의 뿌리〉가 된 관념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러브조이가 말하는 '관념'이란, 여러 사상들로부터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맥락과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불순물 및 역사적 영향을 제거한 뒤 남는 순결한 '단위관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위관념'은 마이네케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역사적 맥락을 초월해 핵심적 의미 내용이 변하지 않은 채 여러 시대의 여러 사상('관념복합체')들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수常數이다. 또한 상수로서의 관념은 초경험적·초역사적·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생성, 발전, 완성이라는 고유의 장기지속의 역사를 갖는다."(35-6)


"개념사는 이와 달리 개념을 인간의 경험 세계, 즉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초월해 불변하는 단단한 실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내뿜고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언어적 구성물로 본다. 이념/관념사가들과 달리 개념사가들은, 어떤 이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어휘를 어떤 의도로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중시한다. 즉 특정한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사용과 의미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코젤렉이 마이네케의 이념사를 비판하면서 말했듯이 〈개념사는 그 속에서 개념이 발전하고 특정한 화자에 의해 사용되는 특정한 상황의 특정한 언어 사용〉을 연구한다. 따라서 이념/관념사가들에게는 '오류'의 원인이 되는 개념(관념/이념)의 다양성과 모호함, 혼란스러움이 개념사가들에게는 '개념'의 진정한 특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관념(이념)'은 진화할 수 있지만 '개념'은 진화할 수 없고, 단지 변화하는 것이다."(38-9)


# 개념사와 담론사의 차이점

1. 개념은 특정 담론의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 담론의 의미론적 상징이 된다. ('대중'이나 '국민'이라는 개념이 특정 담론에 사용되었을 때, 주어진 맥락 외에도 다른 많은 의미를 연상시킬 수 있다.)

2. 개념은 전혀 다른 담론과 담론 사이를 이동한다. ('계몽'은 17세기에는 날씨 담론의 맥락에서 사용되다가 18세기에 철학과 역사 담론으로 편입되었다.)

3. 개념들은 경우에 따라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의미구조를 형성한 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등장하는 담론들에게 반복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기독교도'와 '이교도', '서양'과 '동양' 같은 비대칭적 반대개념들이 그러하다.)

4. 개념사는 담론사와 달리 역사적·사회적 실재가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개념은 단어 이상이다. 모든 개념은 단어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모든 단어가 개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단어는 어떻게 개념이 되는가? 실용적 차원에서 언급하자면 한 단어가 다의적多意的이면 다의적일수록, 한 단어가 모호한 뜻을 내포하면 할수록 단어는 개념에 가까워진다. 코젤렉은 말한다. 〈단어는 사용되면서 명확해질 수 있다. 반면 개념은 개념이 되기 위해 다의적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단어와 개념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그것의 의미들이 정의定意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해석의 대상인가에 달려 있다. 〈단어의 의미들은 정의에 의해 정확히 결정되지만, 개념들은 단지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순수한 기술적 용어나 전문용어들은 개념이 아니다. 반면 각 시대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공적 논쟁에 동원되는 용어들은 개념이 된다. 그 용어들은 항상 다의적이며, 더 나아가 그 안에 상호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는 논쟁적인 의미들을 쌓고 있기 마련이다."(51-2)


"개념사는 실재의 변화와 이와는 다르게 전개되는 개념의 변화를 관련지어 탐구함으로써 과거의 인식지평과 현재의 인식지평을 포괄하는 통일적인 역사 서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루치앙 횔셔의 '산업화' 개념 연구를 보면, 1900년 이전의 유럽인들에게는 산업 발전이 필연적으로 다른 경제 부문─특히 농업 부문─의 희생을 가져올 것이라는 경제철학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불균형한 경제 발전은 반드시 사회적 위험을 초래하리라는 우려가 '산업주의'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1900년경 관세 논쟁의 와중에 일부 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들에 의하면, 산업적 생산방식의 원리는 단지 산업(상공업)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농업 등의 다른 경제 분야, 나아가 문화 및 사회 전반에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산업화'는 '근대화'라는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64-5)


2장 개념사의 다양성


# 개념사 연구 방법론

1. 코젤렉의 기본개념의 구조사 : 오랫동안 반복되어 사용됨으로써 체계화된 의미론적 구조를 파악한다. 개념의 의미구조는 경제나 정치 같은 물적 구조들과 더불어 언어 행위라는 사건의 전제조건을 만든다.

2. 라이하르트의 사회사적 의미론 : 코젤렉이 다루지 않은 일상용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개념의 사회적 영향력을 분석한다. 코젤렉이 말한 '언어의 사회사', 즉 개념의 공시적 분석을 특별히 강조한다.

3.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 : 핵심어, 즉 기본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헤게모니 관철을 위한 문화적 도구라는 전제하에 일상 영역에서 관철되는 개념의 의미론을 탐구하면서 개념사의 정치를 지향한다.

4. 페레스의 '기본 개념이 아닌 개념'의 연구 : 기본개념과 불평등한 의미론적 대립구도 속에서 열등한 타자와 우월한 자신을 규정하는 비대칭적 반대개념들에 주의를 기울여, 그 안에 내재된 모순, 모호함, 공백 등을 추적한다.


"코젤렉에 의하면 한 개념의 여러 의미들은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개념은 다양한 시간의 층을 지닌다. 다시 말해 개념의 다양한 의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의 지속성을 갖는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한 개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에 주목한다고 했다. 마치 아날 학파가 역사를 단기적 사건의 층위, 그 밑의 중기적 변화, 그리고 보다 깊은 곳의 장기지속이라는 세 범주로 구분했듯이, 코젤렉은 개념의 역사를 개별 언어 행위(사건), 중기지속, 그리고 장기지속이라는 시간적 구조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한 개념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 다양한 의미들이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당파성, 사회적 이해관계, 혹은 그 개념의 정치·사회적 기능상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그 속에 내포된 각 의미들의 다양한 시간적 지속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73-4)


"여기서 근대적 시간에 대한 코젤렉의 중요한 명제인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균열'을 언급해보자. 18세기가 경과되면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경험의 공간과 기대지평 사이의 간극은 점점 빠른 속도로 멀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시기를 경과하면서 현존하는 정치·사회적 실재에 대한 경험과 미래에 달성되어야 할 이상적 상태에 대한 기대 사이의 간극이 점점 멀어지고, 새로운 경험이 빠른 속도로 축적되는 것과 비례해서 기대지평은 빠른 속도로 점점 더 먼 미래를 향해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 변화는 바로 개념의 의미 변화를 통해 가시화되었다. 예를 들어 '공화주의' 개념은 18세기 이후 더 이상 현존하는 정치적 사실 관계를 묘사하는 개념이 아니라 미래에 달성되어야 할 완전한 공화국의 이상이라는 기대를 담은 개념이 되었다." "이처럼 개념 속에는 과거의 경험, 현재의 실재, 미래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79-80)


"라이하르트의 개념사는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에 아직 남아 있는 〈이념사적 잔재〉를 떨쳐버리고자 했다. 라이하르트는 특히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가 이론적 의도와 달리 그 실행에서 지식인들과 대사상가들의 텍스트에 치중하는 〈정상에서 정상으로의 이동〉이라는 종래의 이념사적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라이하르트에 의하면, 개념사 연구가 의미를 지니려면 무엇보다 개념의 사회적 대표성, 다시 말해 개념에 담긴 의미론의 사회적 영향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념의 사회적 대표성은 보통 사람들이 사용했던 일상용어의 연구를 통해 비로소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무엇보다 일상 생활 세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념 속에 어떤 일상적 경험과 기대가 반영되었는가, 그리고 일상의 경험과 기대가 개념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말하기 전략이 조직화되고,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담기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83-4)


"윌리엄스는 역사의미론을 표방하면서도 단어의 의미 변화와 역사적 콘텍스트 사이의 관련성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런 취약점에도 불구하고─아니면 바로 그 취약점 때문에─윌리엄스의 개념사는 독특한 면모를 보인다. 코젤렉이나 케임브리지 학파의 연구가 개별 개념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개념과 개념 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 여러 개념들 사이에 어떤 구조적 특징이 있는가를 거의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데 비해, 윌리엄스는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계, 즉 특정 단어들의 〈내적 구조〉를 조명한다. 윌리엄스에 의하면 특정 단어들의 의미의 확장, 변형, 전위는 유관 단어들에서 보이는 비슷한 변화와 상호 영향 관계에 놓여 있다." "윌리엄스의 핵심어 연구는 개별 개념의 개념사를 넘어서 정치·사회적 어휘 체계의 통합적 재구축을 통해 전체 담론의 특징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담론사적 개념사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100-2)


"페레스가 보기에 코젤렉의 기본개념의 구조사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코젤렉의 근대성 개념에 담긴 보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기본개념이라는 개념에 내재된 보편주의이다. 주지하듯이 보편주의는, 정확히 말해 유럽(서양)보편주의는 다른 한편 유럽예외주의, 이와 관련하여 오리엔탈리즘과 같이 타자들을 불평등한 대립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정신적 습속과 함께 유럽(서양)중심주의의 핵심적 요소이다." "문제는 그의 근대(성) 개념이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관계에서 형성된 보편적 구조로 환원됨으로써 시간적·공간적 특수성이 무시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구체적인 역사주체들, 그리고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균열'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유럽(서양)보편주의는 비유럽인들과 유럽(서양)사회 내에 존재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경험을 주변화 혹은 배제시키고, 그들을 침묵하는 하위주체로 만들어버린다."(112-3)


3장 근대 비판으로서의 개념사─코젤렉의 성찰적 역사주의에 대하여


"중세사가 브룬너에게 개념사란 서구에서 발원한 자유주의에 대항하고 독일 민족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한 지적·정치적 도구였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구축한 '헌정국가(Rechtsstaat)'를 역사적 필연성이 결여된 우연한 에피소드로 치부하면서, 이런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질서는 이제 나치 독일의 민족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질서에 의해 대체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이런 정치적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자유주의 역사 서술에 의해 왜곡된 역사학을 구원할 새로운 수단을 찾았는데, 그것이 개념사였다. 그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규범에 의해 각인된 현존하는 '기본개념'들이 과거의 실재를 왜곡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이 시대착오주의를 수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거의 개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복원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에게 개념사란 단순히 역사 연구의 한 방법이 아니라 역사가에게 부과된 인식론적 명령이었다."(137-8)


"1945년 이후 독일 개념사는 탈나치화 과정을 겪었다. 이제 독일 개념사는 서구적 근대성의 극복이라는 민족주의적 과제로부터 벗어나, 범 유럽적 관점에 입각해 근대 산업사회와 전통사회 사이에 놓인 인식의 심연을 이어주려는 사회사적 개념사로 변화했다." "콘체는 브룬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사에 나타난 언어 혼란에 대한 불쾌함〉을 없애기 위해 개념을 명료하게 정리하려 했다. 그리고 이런 의도는 과거의 실재를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학술 개념의 구성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근대 학술 개념을 불신하고 과거 행위자의 언어를 복원시키려 했던 브룬너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콘체는 언어를 근대화라는 사회사적 진행 과정의 지표로서만 간주하는 전형적인 사회사가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에게 개념의 변화는, 이를테면 경기지수의 변화와 유사하게 사회구조의 실제적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139-40)


"반면 코젤렉은 이런 실재론을 극복했다. 그는 언어와 실재 간의 차이, 개념 변화의 역사와 사회사적 진행 과정 간의 내용적·시간적 차이를 강조했다. 이런 전제 아래서 양자의 긴장 관계 및 복잡한 상호 얽힘의 관계를 섬세하게 읽어내려 했다. 이런 태도는 언어가 근대화라는 사회사적 진행 과정의 지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를 추동했던 요소라는 명제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독특한 역사인식론이 작용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실재 혹은 진실이란 사료의 언어와 현재 역사가의 언어, 즉 과거 행위자의 개념과 현재 역사가의 학술적 개념, 그리고 이에 내포된 과거의 인식지평과 현재의 인식지평 모두를 포괄하거나, 혹은 그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근대화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양자 모두의 관점에서 다차원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코젤렉은 브룬너의 텍스트 해석학적이고 정신사적인 방법과 콘체의 사회사적이고 실증주의적인 방법 모두를 넘어선 개념사 연구 모델을 정립했다."(140-1)


"홉스봄은 서구에서 두 가지 혁명, 즉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통사회가 해체되고 현대사회가 출현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서구 사회 근대화의 원동력을 정치혁명과 급진적 산업화에서 찾는 그의 '이중혁명' 이론은 서구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코젤렉은 이 대전환기를 특징짓는 또다른 혁명적 변화를 상정했다. 바로 '언어혁명'이다. 코젤렉은 대략 1750년에서 1850년까지의 기간을 이른바 '말안장의 시대(Sattelzeit)', 말년에는 '문턱의 시대(Schwellenzeit)'라고 은유적으로 명명하면서, 이 기간 동안 유럽 사회는 전통적 개념 세계에서 근대적 개념 세계로의 근본적인 변화, 즉 언어혁명을 겪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세계관과 상징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이 개념의 혁명적 변화야말로 서구인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경험한 가장 근본적인 문화적 혁명으로서, 근대 서구 사회를 탄생시킨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다."(142-3)


# 개념의 혁명적 변화 과정을 함축하는 네 가지 범주

1. 민주화 : 신분사회가 해체되면서 많은 개념들의 사용 범위가 엘리트층을 넘어 하부계층으로 확대되었다.

2. 시간화 : 많은 개념들의 의미 내용 속에 이전에는 없던 미래의 기대와 목표를 지닌 운동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3. 이데올로기화 : 많은 개념들이 내용적 구체성, 혹은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실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잃고 점점 더 추상화되었다.

4. 정치화 :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참여하고, 동원되면서 해당 용어들(과 반대개념들)의 정치사회적 활용도와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역사들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만, 동시에 역사학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역사주의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젤렉은 탈이데올로기화된 새로운 역사철학, 즉 '역사' 개념에 담긴 함의들에 대한 새로운 비판적 성찰을 주장했다. 그리고 역사학은 이 '성찰적 역사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성찰적 역사주의'의 목표는 메타역사인 '역사'를 경험 세계 속에서 역사화하자는 것이다. 이 목표는 이중의 전략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철학자들의─결국은 비역사적이고 형이상학적인─거대서사를 해체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박한 역사학자들에게 '역사적 인식'이란 결국 메타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맥락에서, 그는 역사적 문제제기 없이 사료 자체는 아무런 역사적 인식을 주지 못하며, 역사적 문제제기는 역사적 경험을 뛰어넘는 메타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계몽했다."(164)


2부 여섯 개의 개념으로 근대 읽기


1장 근대─근대 개념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단상


"비교문학가이자 문예사가인 굼브레히트는 '모던'이라는 용어를 통해 개념화될 수 있는 것들을 이 용어에 내포된 세 가지 의미 유형을 가지고 구분했다. 먼저 '현 교황'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라는 뜻과 반대되는 '현재의'라는 의미 속에서 '모던'은 그때그때 현재마다 바뀔 수 있는 제도를 대표하는 개념·대상·사람을 지칭한다. 둘째, '낡은'과 반대되는 '새로운'의 의미 속에서 '모던'은 한 시대로 체험된 현재를 지칭한다. 이때 '모던'은 '과거 시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영원한'과 반대되는 '일시적인'이라는 의미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특정 시기의 현재가 '미래에 다가올 현재의 과거'로서 생각된다. 이때의 '모던'은 '미래를 준비하는 이행기'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런 구분은 단지 '모던'이라는 말을 통해 개념화된 복잡한 의미의 층위들을 분석하기 위한 이념형적 구분에 불과하다."(172-3)


"서양의 근대 개념에는 무엇보다 서양인들의 새로운 역사적 시간 경험에서 비롯된 '근대'라는 시대 자체의 역동성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근대가 '새로운 시대'인 것은 근대가 성취한 문명적 내용 때문이 아니라, '시대 스스로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과거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포함한 동양의 근대 개념에서는 서양문명과의 조우로 인한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변화의 내용이 갖는 새로움이라는 함의가 강조된 반면, 서양의 근대 개념에서는 무엇보다─사후적 관점에서 회고한 것이 아니라─당대인들이 경험한 '시대 자체의 완전한 새로움'이라는 함의가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대 자체의 완전한 새로움'이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새로운 시대', 곧 '새로운 역사적 시기(period)'라는 의미를 넘어, 이전에는 없던 '신기원적 시대(epoch)'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180-1)


2장 문명과 문화─핵심어로 읽는 유럽인의 근대적 정체성


"고대 로마의 식자층에게 civilis란 '미개한', '야만적인', '군사적인', '형사처벌적인' 것의 반대개념을 의미했으나, cultus/cultura는 그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후자는 경작되지 않은 농토와 경작된 농토의 차이처럼 모든 인간의 정신적 개발(발전)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차이만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 특히 civilis라는 개념 속에는 농촌적 삶보다 도시적이고 정치적으로 조직된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이런 점은 오늘날에도 '야만'의 반대개념으로서 '문화'보다 '문명'이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고려해볼 때 현대적 '문명' 개념에도 일정 부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civilis는 정치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문명은 정치적 뿌리를 갖고 있음에 비해, 문화는 그렇지 못했다. cultura는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지 않은 채 개인으로서의 인간 활동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191-2)


"그러나 16~17세기를 지나면서 '문명' 개념의 뿌리가 된 civilitas가 civilite, civility 등으로 번역되면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 내지 '도시 시민의 공동체 생활'이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의미보다는 점점 더 '예절바름', '공손함' 같은 도시사회 구성원(시민)의 도덕적 덕목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또한 civilitas는 상태나 성취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강조하는 civilize, civiliser 등으로 번역되면서 유럽 내부나 유럽 외부의 '야만적' 타자들을 도덕적·정신적으로 교육시키자는 함의가 내포된 개념으로도 쓰였다. 이런 변화는 종래의 cultus/cultura 개념에 내포된 개인의 교육, 개인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의미와 일치한다." "이제 cultura는 부분적으로 (정치사회) 공동체 생활과 관련된 정치 규범적이고 실제적인 부분까지 포함된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광의의 의미로 확산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cultura 개념은 많은 점에서 새로이 변화하는 civilitas 개념과 중복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192-3)


"또한 두 개념은 학술 담론에서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상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명과 문화야말로 유럽적인 것, 나아가 미국까지 포함한 서양적인 것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결정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런 관념에 기초하여 단선적 진보의 등급에 따라 세계 각 민족들의 문명 및 문화의 정도를 측정하고 서열 짓는 분류 작업들이 행해졌다. 전통적인 '문명' 민족 대 '야만' 민족의 이항 대립적 표현 외에 새로운 개념들이 첨가되면서 더 복잡한 분류가 행해지곤 했다. '비문명적' 민족과 '야만' 민족이 구별되었으며, '야만인' 외에 '역사 없는 민족', 혹은 '반半문화' 민족, '완전문화' 민족 등의 술어가 만들어졌다. '문명' 민족과 '야만' 민족의 구별은 다른 뉘앙스의 '자연 민족' 대 '문화 민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야만 상태-미개 상태-문명 상태'라는 다단계적 분류가 학문적으로 시도되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와 문명이야말로 세계 속 유럽의 지도적 위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었다."(203-4)


3장 미국과 아메리카니즘─독일인이 정형화한 미국


"대개 타자는 부정적으로 규정되고 정형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주제인 ‘미국’ 개념은 다르다. '미국'은 한편으로 '독일'과 반대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정형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독일인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투영된 긍정적 이미지로 졍형화되기도 했다. 이런 내용적 모호함과 더불어, 여타의 비대칭적 반대개념들과 달리 '미국'은, 독일에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고 또 이를 심화시키는 전형적인 기본개념이었다. 그 가운데 미국은 '낯선 땅'이라는 공간 개념에서 '근대성의 상징', 따라서 독일의 미래를 선취하는 탈영토화된 시간 개념으로 바뀌었다. 개념의 변화는 '아메리카니즘'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처럼 '미국'은 단순히 타자 지칭을 위한 비대칭적 반대개념일 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의 변화를 이끈 역사적 선도 개념의 역할도 수행했다."(227-8)


4장 여자─비대칭적 반대개념의 병리학


"근대의 특징은 '남자'와 '여자'라는 일상어가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으로, 더 나아가 정치적 슬로건으로 바뀌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서로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이, 혹은 너무나 이질적인 궁정사회의 남녀와 농촌사회의 남녀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속성, 즉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닌 존재로 추상화되고 불평등하게 구별된 것은,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에 들어서였다. 이와 더불어 '남자'와 '여자' 개념의 사회적 위상도 변했다. 두 개념은 부르주아지 사회와 국민국가의 도덕적·정치적 질서를 지탱해주는 핵심적 규범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단계가 바로 '정상적인' 남자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정상적인' 여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따라서 이런 분업을 여자가 올바르게 수행하는 한 여자의 가치가 인정되었던 단계이다."(264)


"1890년대부터 1920년대에 이르는 세기 전환기를 특징짓는 중간층 남성들의 지적·문화적 운동이자 정치·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여자'의 사회적 의미를 부정하던 '세기말 모더니즘'은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분노와 부정, 자신의 현재적 남성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불안 속에서, 새로운 남성성을 갈구했다. '순수한' 남성성, '새로운 남자', 남자만의 유토피아가 구상되었고, 남자만의 우정과 사랑이─물론 동성애까지 포함하여─강조되면서, 마침내 '여자' 개념이 적대적 개념으로 변했다. 이제 더 이상 '여자'는 열등하지만 우월한 남자의 역할과 남성성의 정체성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여자' 개념은 이른바 '남자에 속하지 못하는 자', 즉 유대인 및 여타의 소수인종, 여성적 남성 동성연애자, 노숙자, 범죄자, 평화를 외치는 정치가, 위선적 남성 등과 함께 진정한 남자가 아닌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닌 기표로 확대되었다."(265-6)


"'여자'가 제거되어야 할 적을 지칭하는 기표로 전화된 것은 '남자'가 정치적인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자' 개념의 정치화 현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시작되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확립되었다. '남자' 개념의 정치화 현상은 방황하는 남성성이 마침내 안식을 얻은 이른바 '남성동맹'이라는 하위문화가 사회에 뿌리내림으로써 시작되었다."(286) "제1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남성동맹의 전투 강령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여성적인 것'과 '여성'은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지 사회와 그 정치적 구성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평등의 원칙과 의사소통,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동일시되었다." "마침내 여성적 민주주의를 이기고 남성적 파시즘이 승리했다. 역사상 그 어느 곳에서도 파시즘 국가만큼 남자다움이 과시되고 남성성이 고양된 적은 없었다. 특히 남자의 몸이 핵심적인 정치적 상징으로 고양된 것은,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난 독일 나치즘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290-2)


"그러나 더 큰 역설을 언급하자. 파시스트 체제가 패한 1945년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탈파시스트화, 탈나치화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민족의 순결성을 더럽힌 부역자를 지칭하는 부정적 기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군과 관계를 맺은 프랑스 여자들에 대한 강제 삭발과 폭행, 그리고 강간 행위를 꼽을 수 있다. 분노한 프랑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가한 폭력을 애국적 행위로 미화했다. 더 나아가 파시즘 자체를 비난하기 위해 또 한 번 '여자' 개념이 동원되었다. 나치는 여자의 본성인 색욕을 전유한 '동성애자'라는 전통적 의미에서 '동성애자'로 비난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 속에서 '나치 팜므 파탈'이 창조되었다. 이처럼 여자들을 부역자로 규정짓고 파시즘을 여성화시키면서 남성사회는 부르주아적 전통을 회복했다. 이후 남자의 전통적 헤게모니는 본질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여자는 정형화된 하위주체로 머무르고 있다."(297)


5장 역사─근대적 역사 개념의 새로움


"헤로도토스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미래 세대를 위해 서술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인간계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잊혀져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역사』를 썼다." "투키디데스는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반복되거나 유사할 것이 틀림없는 미래에 대한 해석을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연구가들에게 본인의 역사가 유용하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저서가 〈영원한 유산〉으로 저술되었음을 강조한다." "중국의 경우도 유사했다. 공자가 『춘추』에서 확립한 유교적 역사해석학은 도덕 정치적 이념에 입각해 있었다. 잘한 일은 칭찬하고 잘못된 일을 호되게 꾸짖는다는 이른바 포폄褒貶의 태도가 그것이다. 향후 중국의 역사 해석은 항상 도덕 정치적 정통성이라는 전제로 했으며, 역사는 도덕적 가르침과 정치적 교훈을 주는 교사의 역할을 했다."(309-11)


"대략 18세기 후반 이전의 서양에서는 '역사'라는 집합단수 대문자 역사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단지 그 경험 주체('누구의')나 서술 대상('무엇에 대한')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던 '역사들'이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특히 코젤렉에 의하면 독일어권에서는 대략 1780년 이후로, 집합단수 '역사' 개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전체적 역사', '역사 자체', 혹은 '역사 일반'이나 '즉자 대자적 역사'라는 새로운 표어들과, 종래에는 복수명사였으나 이제 단수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역사'라는 단어는, 모두 근대적 집합단수 역사 개념을 의미하는 표현들이었다. 동시에 이 새로운 집합단수 '역사' 속에 이전까지 Geschichte라는 말로 표현되던 실제로 일어난 일(사건, 사실)의 의미와 Historie라는 말로 표현되던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서술(이야기) 및 지식의 의미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럼 이렇게 정의된 집합단수 '역사'에는 어떤 함의들이 새롭게 내포되었는가?"(312-3)


"역사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에 대한 서술(이야기) 및 지식이 통합되었다는 데 주목해보자. 이는 곧 사건들이 진행되는 과정과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 혹은 객관적 실재와 그에 대한 주관적 성찰이 하나로 수렴되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역사적 실재가 되려면 단순히 1914년에서 1918년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여러 전투 및 여타 사건들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이것들을 역사적 실재로 인식할 수 있는 역사 자체라는 주관적 인식 범주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는 동시에 역사 자체라는 인식 범주는 역사 자체라는 객관적 실재가 전제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을 일반화시켜보면, 역사란 그것이 인식되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역사를 인식하려면 역사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집합단수 역사 속에는 역사 자체라는 선험적 범주가 없다면 모든 개별 역사들은 경험될 수도 또한 인식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314)


"마지막으로, 이처럼 역사가 실재 개념이자 동시에 성찰 개념으로 수렴되면서 내용적으로도 분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제 역사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관장하는 최종심급이 되었다. 〈세계의 심판으로서 세계사〉(실러)나 〈세계사가 행하는 일〉(헤겔) 같은 표현이 유행했다. 이전에는 역사 자체라는 것을 경험하거나 인식하기 위해 신神이나 자연 혹은 운명(티케Tyche, 운명의 신으로 역사 자체를 관장하는 주체로 인식됨) 같은 역사외적 존재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되는 역사'라는 생각이 집합단수 역사로 표현되면서 이런 역사외적인 존재들이 역사로 대체된 것이다. 이제 역사는 과거 오로지 신만이 지녔던 전지전능함과 절대적 정당성, 신성함을 지닌 주체가 되었다. 이런 생각은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일반화되었다."(315)


"근대적 역사 서술에서는 과거처럼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적 사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열할 것인가 하는 수사학적 문제가 아니라, 특정 사건과 특정한 상황의 역사적 맥락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시간과 그 연속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개별 사건들과 특정 상황들은 시간의 연속 속에서 단순한 연대기적 배열을 뛰어넘어 그것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구조화시키는 설명 맥락, 즉 플롯에 따라 새롭게 질서지어졌다. 그리고 이 통일적인 서사구조를 통해 역사가 체계적으로 이해되며, 개별 사건들에 내재된 보편적인 역사적 의미와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과학적 역사의 발전은 역사 서술의 심미화와 상응한다. 개별 역사들에 내재된 전체적 맥락과 보편적 의미, 즉 집합단수 역사의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역설적으로 개연성을 높이는 서사적 통일성이 강조되면서, 과학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허구적 거대서사가 되어버린 근대 역사학이 등장한 것이다."(323-4)


#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관점 : 집합단수 역사를 전제로 한 거대서사, 서구(유럽)중심주의, 과학의 권위로 포장된 역사 서술 및 지식의 권력화 현상,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집합단수 역사 자체에 대하여 비판


6장 자본주의 정신─신조어로 표현된 세기말의 근대 비판


"1902년 독일의 국민경제학자 좀바르트가 『근대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나, 그 2년 뒤 좀바르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 개념을 말했을 때, 이 개념은 단순히 사회 근대화를 위한 발전 이데올로기의 표어로서 사용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을 찬양하고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한 '자본주의 정신' 개념 속에는 오히려 서구의 혁명적인 근대화 과정에 대한 불쾌함, 혹은 비관주의적 근대 진단과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점철된 당대인들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응축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사용하면서 당대인들의 근대문명 비판 담론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화하려 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원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표현이자 동시에 문명 비판의 도구로서 기능했다."(329-330)


"베버에 따르면, 서구의 개신교 시민계급은 오늘날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근대적 주체이다. 이제 모든 인류의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우주〉를 탄생시킨 세계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근대적 주체는 '세속적 금욕주의'에 기반을 둔 자아를 잃어버렸다. 〈승리하는 자본주의〉는 자신의 〈기계적 토대〉 위에서 〈고도의 정신적 문화 가치〉를 집어던졌다. 이제 근대적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합리성, 즉 관료주의적 메커니즘의 〈단단한 강철 구조물(stahlhartes Gehause)〉 속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렇게 자아를 상실한 근대적 주체의 문화적 태도는 배금주의 및 물질주의, 유대인의 〈천민자본주의적〉 에토스, 경쟁의 열정에 입각한 스포츠적 성격의 영리 추구, 공리주의 같은 무목적적이고 비윤리적인 공허한 '자본주의 정신'에 의해 특징지어진다."(346-7)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비관주의적인 근대문명 비판의 상징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한 정치적 함의도 담고 있었다. 이 개념은 비주류로 밀린 민족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인 독일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사회 비판 담론과 보편적인 근대문명 비판 담론을 통합시키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자아를 상실한 독일 개신교 부르주아지에게 한편으로는 민족의 지도계급으로서의 사명, 즉 '금욕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인격체(Personlichkeit)로 발전해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화적 에토스를 지도하는 독일 민족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각성시키려는 베버의 염원이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영미 세계 민족주의의 보편사적이고 시민종교적인 자기정당화에 기여했다. 특히 미국의 퓨리타니즘 신화와 냉전 시대 아메리카니즘의 자기정당화는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에 힘입은 바가 크다."(347-8)


"좀바르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문명을 창조한 주체가 자신의 결과물에서 소외되었음을 강조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고도자본주의 시대〉는 〈관료주의적 거대 경영〉 속에서 기계화 되어버렸다. 그런데 베버와 달리 좀바르트는 그 근본 원인으로서 근대적 주체의 자아 상실 대신 자아 분열과 변질을 강조한다. 그는 근대적 주체를 특징짓는 두 가지 '자본주의 정신' 중 〈사업 정신〉은 소수의 〈영웅적〉인 것과 제도의 틀 안에서 기계화된 〈대중적〉인 것으로 분열되었고, 〈시민 정신〉은 자연과학과 근대기술을 탄생시킨 〈게르만-로마적 정신〉과 상인적 〈유대 정신〉으로 분열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분열의 결과는 전반적인 〈영웅 정신〉의 소멸과 〈시민 정신〉의 탈종교화와 탈윤리화, 마침내 '자본주의 정신' 일반의 〈상인 정신〉으로의 변질이다. 이것이 창조적이었던 〈초기 자본주의〉에서 물화된 〈고도 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 과정이다."(351-2)


"좀바르트는 〈상인 정신〉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한 주체를 때로는 유대인에게서, 때로는 영국이 대표하는 '서구 문명'에서 찾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영미 세계의 퓨리타니즘 정신과 유대 정신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수세에 몰린 자유주의자들과 문화비관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교양시민들의 잡다한 신경질적 근대 비판 담론들을 통합시켜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 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반유대주의와 반영反英 감정 및 반국제주의를 고취시키면서 독일 민족을 정치사회적으로 통합하려 한 급진민족주의의 표어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은 당시 독일 부르주아지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 그로 인한 노이로제적 위기의식, 그리고 역사의 종말론적 반전에 대한 갈망을 잘 표현해주는 지표라는 점에서 핵심적 의의를 지닌다."(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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