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된 정신 - 정치적 반동에 관하여
마크 릴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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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반동反動, reaction이란 무엇인가?" "혁명의 발생과 활력 그리고 소진에 관한 수많은 이론들과 달리 반동에 관한 한 그런 이론은 없고, 그저 반동이란 비록 사악한 동기까지는 몰라도 어쨌든 무지와 비타협성에 뿌리를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도취적인 확신만 있을 뿐이다. 이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두 세기 동안 세계 전역의 정치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혁명의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을지언정, 오히려 혁명에 맞서 생겨난 반동의 정신은 살아남아서 중동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역사적 힘을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해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대신 우리는 일종의 우월감에 젖은 분노를 표출하다가 그나마도 그냥 접어버리고 만다. 반동주의자들은 훌륭한 지적 탐구의 변두리로 내몰려 있는 마지막 남은 '타자他者'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8-9)


"반동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반동주의자들 역시 혁명가들 못지않게 나름대로 급진적이며 역사적 상상의 산물들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 구원의 새 사회 질서와 회춘하는 인간을 기대하는 새천년의 꿈이 혁명가들을 고취시킨다. 반면에 반동주의자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새로운 암흑시대에 돌입하고 있다는 묵시록적 공포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같은 반反혁명 사상가들에게 1789년은 영광스러운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그 여정의 종말을 의미했다. 가톨릭 유럽이라고 하는 그 견고한 문명이 순식간에 거대한 난파선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드 메스트르와 그의 수많은 후예는 일종의 공포 이야기를 늘어놓는 달변가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 걸친 문화와 지성의 발전이 어떻게 계몽주의라는 정점에 도달했고 그것이 구체제를 대체 어떻게 갉아먹었기에 그 체제는 도전을 받자마자 산산조각 나버렸는지 흔한 신파조로 늘어놓았다."(11-2)


"반동주의자의 신앙 고백은 억지 인과 관계로 점철되어 있다."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늘 원래 모습 그대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보지만, 반동주의자들은 천국의 파편 더미가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반동주의자는 시간의 망명자다. 혁명가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찬란한 미래가 보이며 그 미래에 감전된다. 지금 시대의 거짓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온갖 광채를 발하는 과거만을 바라보는 반동주의자 역시 그런 과거에 감전된다. 반동주의자는 자기가 적수보다 더 강력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는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의 예언자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의 수호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동 문학에 면면히 흐르는 그 기이하게도 신명 나는 절망감, 그 선명한 사명감을 설명해준다." "반동주의자가 전통적 인간상이 아닌, 확연히 현대적인 인간상으로 비치는 이유는 그가 가진 노스탤지어의 호전성 때문이다."(12-3)


1부 사상가들


"19세기 내내 헤겔은 옳든 그르든 세계 역사의 합리적 전개 과정을 발견한 인물로 이해되었다. 그 과정이란 근대 관료주의 국가, 부르주아적인 시민 사회, 프로테스탄트적인 시민 종교, 자본주의 경제, 기술의 진보, 그리고 헤겔 자신의 철학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터였다." "이런 주장에 맞서 역사(철학)으로부터 사유의 독립성을 되찾고자 희망했던 일부 반反헤겔주의자들은 칸트나 데카르트 같은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회귀하라고 장려했다. 다른 이들은 더 주관적 행로를 택했다. 니체나, 세기말에 때마침 독일어로 번역되고 있던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역설들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헤겔의 역사의식이 전체 문화를 상대주의의 위기로 이끌었다는 느낌이 점점 자라나는 가운데 이러한 전환들은 뒤이어 에드문트 후설과 청년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저술들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철학의 오류는 오로지 인간을 일상의 경험으로 되돌려 보내줄 새로운 종류의 치료적 사유를 통해서만 교정될 수 있을 터였다."(32-4)


"로젠츠바이크가 '20세기적 의미에서 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요청한 것은 헤겔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더 근거리의 목표물은 19세기 내내 독일의 종교적 사유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여러 학파였다.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신학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교리들을 근대적 사유와 타협시키려는 시도에서 출발했고, 이런 노력에서 헤겔은 유용한 동맹군으로 입증되었다. 헤겔은 종교가 단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계몽주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또한 근대적인 자연 정복이 종교를 소멸시킬 것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주의와 근대 국가가 근본적으로 사실상 조화를 이루었으며 역사가 절정에 이르더라도 종교는 계속해서 도덕과 시민 교육을 통해 개인을 국가와 화해시키는 일을 도우면서 준準관료주의적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4-5)


19세기가 양산한, 스스로에게나 유대주의에게나 어떤 위험도 없는, 일체의 수식어가 붙지 않은 '유대인'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귀환이라는 생각은 "역사에 반대하고 종교를 옹호하며 두 전선에서 싸우는 로젠츠바이크의 전투를 연결하는 고리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절정에 도달한 근대 철학은 인간을 삶에서 떼어놓았고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로부터 소외시켰다. 기독교이건 유대교이건 근대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신에게서 소외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신의 명령은 훌륭한 시민 정신과 부르주아적 예의범절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에게 귀환하고자 한다면, 만약 다시 완전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모종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 속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치료법이 로젠츠바이크의 저술들이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37)


"《정치 종교들Die politischen Religionen》에서 그 싹을 전부 찾을 수 있는 뵈겔린의 이야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해 고대 근동 지역의 초기 문명들에서 시작한다. 이곳의 국가들은 자기들에게 정통성을 제공하는 신의 기운을 하사받았다." "(기독교의 부흥 이후에 등장한) 초월적인 신국神國을 인간의 지상 국가와 구분한다는 생각은 서구 역사에서 심오한 영적·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 구분은 한편으로 왕궁을 통과하지 않고도 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직접적인 인도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정신적 풍요는 정치적 빈곤의 위험을 수반했고 마침내는 인간이 신의 감시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유혹까지 생겨났다. 17세기와 18세기의 과격한 계몽주의는 그 유혹에 기꺼이 굴복하면서 기독교가 시작한 그 과업을 완성했다. 뵈겔린의 말을 빌리자면, 〈신을 참수해버린 것이다.〉"(59-60)


"하지만 정치가 신으로부터 근대적 해방을 이룩한 것이 곧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계몽주의는 신이 국가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문명을 처음 생겨나게 한 신격화의 관행을 철폐할 수는 없었다. 뵈겔린의 견해에 따르면, 계몽주의 이후 근대 서구 역사에서 벌어진 일이란 곧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를 신성한 어휘들로 진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인간 자신이 전통적 권위의 원천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한 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근대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전부 다 자기 의지대로 바꿔버릴 수 있는 신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신이 세상의 뒤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세상의 사물들이 새로운 신이 되었다〉는 뵈겔린의 말을 이해하고 나면, 20세기의 거대한 이념 운동들인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은 모두 선지자들, 사제들, 신전에 바쳐진 희생 제물들로 가득 찬 '정치종교들'이 된다."(60)


"뵈겔린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된 사상, 곧 그노시스적인 '기독교 종말론의 내재성'을 통해 현 시대가 탄생했다는 사상 덕분에 그는 냉전과 대중문화와 학생 반란, 그리고 그 밖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에서 '서구의 위기'를 목도한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많은 숭배자를 거느렸다. 뵈겔린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그노시스적인 선지자이자, 〈그노시스의 정신이 그 속을 휘젓고 있는 시시한 중재자들〉로 격하함으로써 그들과 그 아류들을 떨쳐낼 수 있는 세계사적 이유들을 제공했다. 근대 정치 혁명들, 자유 진보주의, 기술의 발전, 공산주의, 파시즘의 이력들이야말로 초월적 질서라는 바로 그 관념에 맞선 그노시스주의의 반란을 증언하는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뵈겔린이 이런 반란에 대해 기독교가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나, 미국 혁명이 그런 반란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어쨌든 그의 보수주의 독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67)


"초기 저술에서 스트라우스는 '신학-정치적 문제'와 그것이 근대 계몽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 독특한 시각을 발전시켰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 전쟁들에 혐오감을 느끼고 고전 철학의 현실초월성에 좌절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와 고전 철학 둘 다에게서, 즉 아테네와 예루살렘 둘 다에게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종교를 조롱하면서 그것의 분쇄를 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철학의 주된 관심이 진리나 아름다움이나 선에 대한 사색에서 벗어나 더 실천적인 목적들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했다. 이 방향 전환의 기념비가 바로 프랑스의 《백과전서》다." "계몽주의의 사상가들이 기껏해야 철학과 세계가 더 악화되도록 방치함으로써 철학의 사명을 왜곡하자, 철학은 19세기에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탄생시키면서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자기확신을 신속히 잃어버렸다."(80-1)


"스트라우스는 소크라테스의 활동에서 비롯된 고대와 중세의 플라톤적 전통이 정치적 관계나 교육상의 관계에서 비밀스런 전승을 실천했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스트라우스가 포착한 특징에 따르면 중세 초기의 이슬람 철학자 알파라비와 중세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자신들이 고전 세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계시 종교들이 설정한 강력한 규약들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시와 철학은 결코 서로를 논박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한 쪽을 버리지 않고 지성적으로 종합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독자에게 진정한 철학이란 모든 신학적·정치적 몰입에서 벗어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알파라비와 마이모니데스의 성취는 철학이 비밀스런 전승으로 실천될 때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고 또 통속적으로 실천되었을 때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였다는 것이다."(83-5)


"그의 관심은 이 전통이 근대기에 들어서 어떻게 사라져버렸는지를 규명하는 데 고정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서구 사상의(그리고 암묵적으로 서구 문명의) 쇠퇴와 타락의 미토스로 전환했다. 여기서 스트라우스가 하이데거에게 진 빚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저작을 함께 읽으면 역사적 비관주의가 지적 노스탤지어로 옮겨지고 그런 다음 정치적 행동으로 되먹임 되는 상이한 방식들과 관련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도 한다. 하이데거 자신이 바로 이 주로를 따라 달린 사람이다. 전도유망한 현대 철학의 위대한 희망으로 출발한 그는 10년 후 '국가사회주의의 내면적 진리와 위대성'을 찬양하는 열정적인 파시스트가 되었고 시종 〈오로지 신만이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예언하면서 정치적 불명예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트라우스는 정치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창도한 학파가 양성해낸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 정가의 열성적인 정치 파벌로 경력을 쌓았다."(85-6)


2부 흐름들


"초기 문명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사용했던 가장 흔한 역사적 신화들이 숙명적인 쇠퇴의 이야기들이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심리학적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째서 지금의 삶이 그렇게 고단한지에 대한 현세적인 이유들을 제공한다. 우리는 황금시대 우리의 원천들에서 한참 멀리 내쫓긴 '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 "기독교는 숙명적 쇠퇴라는 이 옛날이야기에 등을 돌렸다." "기원후 4세기 초 사람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든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은 섭리의 한 손을 사용하여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히브리의 역사를 인도함으로써 '복음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신은 작은 공화정이었던 로마를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건설했다." "에우세비오스는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라는 비관적인 이교異敎 신화에 맞서, 낙관적인 '이제 모두 안녕'을 제공했다."(105-6)


"당연히 에우세비오스주의는 신학적 올가미다. 나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신화와 거기에 매여 있는 희망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0년 로마 약탈 사건 이후에 이를 직접 목격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즉시 절망감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버린 고대 이교의 신들에게서 벌을 받은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식 사고의 방향을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종말론적 결말을 지향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이교적인 로마를 번성케 해서 교회와 결합시킨 이유를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신이 로마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이유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의 소관이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옳게 처신하며 계속 독실하게 신을 섬기는 것이다. 나머지는 신의 두 손 안에 있다."(106-7)


"단지 거쳐 지나가는 순례자의 교회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미지와 승리의 교회라는 에우세비오스의 이미지가 빚어내는 이 긴장은 중세 가톨릭의 시대에서는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내부 갈등 및 동방 교회가 오스만 튀르크와 빚은 외부 갈등이 수세기 동안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승리를 거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랬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받은 종교개혁의 충격은 410년 이후 로마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충격만큼이나 컸다. 단,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루터와 칼뱅과 과격한 개혁가들의 맹공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결코 그들의 근대판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도전들에 맞서 혁신자들을 비난하고, 일부 차이들은 묵인하고, 마지막에는 그런 혁신들이 본래 가톨릭 교리와 잘 맞는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07-8)


"그러나 여러 문명이 단일한 하나의 '프로젝트'가 규정해놓은 불연속적인 시기들을 거치는 것처럼, 〈중세 기독교가 실패했고, 종교개혁이 실패했고, 신앙 고백적인 유럽이 실패했고, 그리고 서구 현대성이 실패하는 중〉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삶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직전의 수십여 년 동안 서구 문명이 절정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는 것도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 문명이 초기 칼리프 정권 때나 중세 스페인에서 절정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는 일이 무슬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신화들은 '가보지 않은 길'(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데에 정치 활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더 음헌한 몽상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일밖에는 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대로 우리는 우리가 가는 대로 우리의 길을 포장해야 할 운명이다. 나머지는 신의 소관이다."(125-6)


바울을 좌파의 보고寶庫로 승격시킨 최초의 인물은 슈미트를 숭배한 유대인이었던 야콥 타우베스다. "그의 중요한 주장은 〈바울의 당면 과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을 확립하고 적출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슈미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한 용어인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 부르는 것의 본보기다. 그가 의미하는 정치 신학은 법적·정치적 구조물들이 적법성을 얻거나 잃는 방식에 관련된 논의다. 이 절차는 인간이건 신이건 '주권자'가 내린 임의의 결단에 의존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계시에 암묵적으로 의존하며 이 계시는 그 어떤 보편적 원리도 반영하지 않고 그 어떤 자연적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단지 무언가를 있게 하는 의지와 능력일 따름이다." "슈미트뿐만 아니라 타우베스도 진지한 정치학은 모두 이러한 신비로운 이중적 성격을 띤다고 보았다."(132)


"1993년에 타우베스의 강연 원고가 정식 출간되자 유럽 좌파는 사도 바울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바울에 관한 책과 논문이 드문드문 선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흥미롭고 일부는 싸구려다. 가장 놀라운 사람은 확실히 알랭 바디우다. 1960년대 초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루이 알튀세르에게 배운 학생이었고, 1970년대에는 급진적인 마오주의자이자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의 옹호자였던 바디우는 이제 거의 여든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중국의 문화혁명을 따뜻하게 묘사하는 글을 쓴다. 그러던 바디우가 1997년에 《성 바울 : 보편주의의 토대》를 출간했을 때 프랑스는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성 바울의 급진적 보편주의를 재발견해서 혁명 정치에 적용할 것을 좌파에게 요청한다. 바디우가 바울의 특출난 광신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그는 '민주주의'라는 멋진 단어 뒤로 숨어서 너무도 졸렬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야비한 '자본가-의회주의'를 비난할 때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청중을 발견한다."(133-5)


"다른 형태의 전가 행위와 마찬가지로 반反유대주의 역시 역사적 비관론이 먹여 살리고 있다." "반식민주의 운동들은 일당 독재 정권으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모형은 소멸했고, 학생들은 정치를 포기하고 취업 경력을 좇았으며, 서구 민주주의 정당 체제는 고스란히 현상 유지 중이고, 경제는 부富를 생산했고(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채로), 세계 전체가 연결성connectivity에 홀려 있다. 페미니즘, 동성애자 인권, 가부장적 권위의 쇠퇴 등 성공적인 문화 혁명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은 서구 바깥으로도 퍼저 나가기 시작한 상태다. 그러나 정치 혁명은 없었고, 이제는 일어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겨냥할 것인가? 누가 지휘할 것인가? 그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무도 이런 질문들에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우리가 오늘날의 좌파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역설적 형태의 노스탤지어가 전부다. 바로 '미래'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다."(141-2)


"그리하여 그 노스탤지어에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는 지적 보고寶庫를 찾는 아주 절박한 탐색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정치적 지배는 맨눈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존한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에테르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다. 그다음은 슈미트의 복권이었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면서 태연하게 옹호한 피아彼我의 구분이 정치는 투쟁이지 숙고나 협의나 타협 같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생각들에다가 반 토막만 이해된 성 바울의 종말론을 보태보라. 기적과도 같은 구원의 혁명에 대한 확신이 실제로 다시 한번 가능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역사에 작용하는 힘들이나 논쟁과 조직화라는 고된 노력을 통해 분출된 혁명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기 어려울 때, 한밤의 도둑처럼 그렇게 도래하는 혁명이다."(142-3)


3부 사건들


"2015년 1월 7일 아침에 두 명의 프랑스인 무슬림 사이드 쿠아치와 셰리프 쿠아치 형제가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지의 파리 사무실에 침입해서 열두 명을 살해했다. 도주하기 전에 그들은 이 신문사가 여러 해 동안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카툰을 여러 편 실은 데 대한 복수라고 외쳤다." "이 살인 행위들은 경악보다는 공포를 자극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적어도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파리의 학살은 프랑스 사회에서 이슬람의 본분을 둘러싸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문화 전쟁을 재연했으며 그 방식이 매우 심각했다. 뒤이어 나타난 격렬한 대중 토론의 양상은 친숙한 양태였다. 좌파 언론인과 정치인은 신속하게 그 공격이 〈이슬람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언하고 프랑스의 실패한 경제·사회 정책의 희생자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멈추라고 경고했다. 우파 진영의 비판자들은 그들이 현존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 이민, 다문화주의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있다며 비난했다."(147-9)


"그런데 그때 새로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우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까운 과거만이 아닌 세계 역사의 흐름 전반에 관해 낭랑한 선지자의 논조로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훨씬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들로, 제3공화국의 흥망성쇠로, 나폴레옹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심지어 계몽주의나 중세 때까지 한참을 뒤로 말이다. 이런저런 정부 정책이나 이런저런 개혁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참극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저 눈을 감고 있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더는 우리의 운명을 통제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제의 진실이다. 우리가 비로소 깨달은 상황은 프랑스를, 어쩌면 서구 문명 전체를 파국의 경로에 기어코 들어서게 만든 비참한 정치적·문화적 실책들이 빚어낸 예견된 결과다. 그리고 이제 그 계산서가 도착한 것이다."(149-50)


"문화적·물리적 약점 탓으로 돌려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패배 이후로 지금껏 프랑스인들은 출생률에 집착해왔다. 오늘날 출생률은 유럽 기준으로는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북·중 아프리카 이민자 '인종' 가족들의 높은 출생률이 그 수치를 떠받치는 것으로 보인다.(정부는 민족별 통계를 내놓지 않는다.) 이것이 극우파에게는 주요한 강박 관념이 되었다. 그들의 저술은 인구학적 관성의 힘으로 프랑스를 조용히 무슬림 국가로 바꿔놓게 될 이른바 '거대한 대체grand remplacement'가 임박했다는 예측들로 가득 차 있다. 백인 여성의 자궁은 페미니즘 때문에 시들어버렸다. 다문화주의 덕분에 밀물처럼 쇄도하는 다산多産의 이민자들이 계속 허용된다. 이것이 프랑스 무슬림들을 '국민 속의 국민un peuple dans le peuple'으로 여겨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다. 이는 사실 우파가 현재의 위험에 맞춰 번안한 유럽 반유대주의의 고전적 주제일 뿐이다."(157)


후기


"'시대'란 우리가 역사를 읽기 쉽게 만들려고 숫자 표시 테이프 위에 적어놓은 두 개의 연도 사이에 있는 공간에 불과하다. 우리가 혼돈의 경험들에다 '사건들'을 새겨 넣을 때에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더 가까울수록, 그리고 우리의 구분들이 사회와 더 밀접하게 관련될수록 연대학의 책임이 더 커진다. 이 말은 또한 분류법에도 해당한다. 유類 개념을 식물에 적용할 때는 반향을 얻지만,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후자의 위험은 바로 물상화物象化다. 이런 일은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분류에 도움이 되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난 다음(예를 들면 '아리안' 어족) 뒤이어 그 개념이 실재에 아로새겨진 사실이라고 선언할 때 일어난다.(특징적인 문화와 역사를 지닌 동질적인 '아리안' 민족) 우리는 인종과 관련하여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우고 있으나, 역사를 이해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여전히 구제 불능의 물상화하기 족속이다."(182-3)


"진보와 퇴보, 순환의 서사들은 모두 역사의 변화를 유발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우주의 자연법칙일 수도 있고, 신의 의지일 수도 있고, 인간의 정신이나 혹은 경제적 힘들의 변증법적 발전일 수도 있다. 일단 그런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일이 다가올지 틀림없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런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 "이에 대한 응답으로, 매년 해가 지날 때마다 점점 벌어지는 찢어진 시간의 부위가 황금시대 혹은 영웅시대 혹은 그냥 평범한 시대로부터 우리를 점점 멀어지게 한다고 하는 묵시록적 역사관이 발전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실제로 역사에는 오로지 한 사건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의도했던 세계와 우리가 살 수밖에 없게 된 세계를 분리시킨 카이로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 수 있고 또 알아야만 하는 전부다."(185-6)


# 카이로스kairos :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인 기회의 신을 뜻하기도 한다.


"묵시록적 역사 자체에도 인간적 절망의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가 있다." "이 사건들이 결정적 파열구로 집단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묵시록적 상상 속에서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가 타향이다. 그것이 바로 그런 상상이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두 번째 사건을 그렇게라도 꿈꿔보려 하는 이유다. 그런 묵시록적 시선의 초점은 지평선 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 시선은 메시아, 혁명, 지도자 혹은 시간 그 자체의 종말을 기다린다. 오로지 세상의 종말만이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물론 파국에 직면한 상황이라면 이 섬뜩한 확신이 실제로는 간단명료한 상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보건대, 그런 상상은 터무니없는 희망을 자극하여 불가피하게 실망으로 이어졌고 그런 희망을 간직했던 사람들을 훨씬 더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고,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패배와 파멸, 망명의 기억들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렸다."(186-7)


"묵시록적인 역사 서술은 결코 유행에 뒤처지는 법이 없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강하고 고결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나라가 어쩌다 '60년대의 대재앙' 이후 위험한 세속 정부에게 지배되는 방탕한 사회가 되고 말았는지를 말하는 통속적 신화를 선호한다." "사정은 유럽에서 더 심각하다. 특히 동유럽에서 그렇다. 헝가리 사람들은 주변에 유대인과 집시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때 얼마나 살기가 더 좋았는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믿음이 가장 크게 설득력을 얻고 당연시되는 곳은 무슬림 세계다." "독실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선지자가 7세기의 여명에 그랬듯이 지금 이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선지자는 타협하지 않았고, 해방시키지 않았고, 민주화하지 않았고, 발전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말씀을 대변하고 신의 율법을 실행했다. 우리가 선지자의 신성한 본보기를 따라 그 일을 성취하고 나면 영광의 시대가 영원히 되돌아올 것이다. 인샬라."(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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