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학사 -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
게오르그 이거스 지음, 임상우.김기봉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서설 근대화 담론의 쇠퇴와 20세기 역사학


"(랑케적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사회·경제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사회과학적 역사학이 근거했던 근대 세계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낙관론은 후기 산업 세계의 사회적 존재의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함에 따라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사회과학적 역사가들은 근대 세계를 랑케 학파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 질서의 구축에 합리성을 적용하는 시도를 근대적 실존을 규정하는 긍정적 가치로 간주하였다. 역사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가정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통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여러 측면에서 1960년대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던 근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위기 의식이 전면에 부상한 전환점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이 창출했던 상황들이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그러한 상황에는 식민 제국의 종말과 비서구인들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각성이 포함되었다."(21-2)


성, 인종, 종족 및 생활 양식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구분들이 점차 부각되는 가운데,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의 전환은 의식에 한층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경제 성장이 배태한 부정적인 측면이 인식되어 안정적인 환경을 위협한다고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 학살Holocaust이 몰고 온 충격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새로운 세대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의 의식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문명화 과정이 지닌 파괴적 측면이 점차로 의식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몇 가지 측면에서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많은 역사가들에게 '거대 담론grand narrative'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서구 문명은 점차 여러 문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 어떤 문명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근대성 또한 그 특권을 상실하였다."(22-3)


"객관적으로 역사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의문시되었다는 사실은 한층 심각한 도전이었다. 근대 서구 문명의 특성에 대한 환멸로 인해 근대 과학관은 통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은 삶을 이해하고 영위하는 데 있어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이 '야만적인' 신비적 사고에 비해 더 유용하다고 보지 않았다." "니체는 이미 초기 저작인 『비극의 탄생』(1872)과 『삶을 위한 역사학의 효용과 오용에 관하여』(1874)에서 과학적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유용성은 커녕 그 가능성까지도 부정하였다. 그는 연구 대상은 역사가의 이해 관계와 편견에 의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던 하나의 믿음, 즉 사유자의 주관성을 넘어서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지지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논리적 사고가 신화적 혹은 시적 사고 같은 전논리적 사고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부인하였다."(25-6)


"포스트모던적 비판에는 중요하고 타당한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단선적인 통합적 역사의 개념은 지지될 수 없으며, 역사는 연속성뿐 아니라 단절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전문적 역사학의 지배적 담론에 깊이 새겨진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올바르게 지적했을 뿐 아니라, 전문가의 권위로 말하는 과장된 주장들을 정당하게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합리적인 역사 담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과 허위의 개념을 의문시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던져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는 역사 담론과 주로 실재를 해석하는 것을 추구하는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적 경계뿐 아니라, 정직한 학문과 선전·선동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역사 사고와 서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 도전이 이전의 개념 및 실행과의 연속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32-3)


제1부 전문 분과로서 역사학의 출현


"(역사학이 철학을 대체하여 인간 세계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과학이 될 수 있다는) 랑케의 주장처럼 사물을 '비당파적unpartheyisch'으로 파악한 결과는 모든 가치의 상대성과 무의미성을 보여주기는커녕 사회 제도들이 역사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윤리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사회제도란 비록 헤겔의 철학적 방식을 역사학적 방식으로 대체했을지라도, 랑케는 헤겔에 동의하여 현존하는 국가는 그 자체가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서 하나의 〈도덕적 에너지〉, 즉 〈신의 생각〉을 구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랑케는 에드먼드 버크의 입장에 근접하여, 혁명적 수단이나 광범위한 개혁을 통해서 기존의 정치·사회적 제도에 도전하는 것은 역사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실제 일어났던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랑케의 과거에 대한 '비당파적' 접근 방식은 사실상 현존 질서를 신이 의도했던 것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47-8)


"(독일과 달리) 프랑스와 미국의 역사가들은 역사학과 사회과학 간에 좀더 긴밀한 연관 관계를 확립하는 데 더욱 개방적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두 나라의 상당히 다른 정치적 환경이 그러한 환경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독일의 경우 사회사는 수세적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프랑스의 경우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 역사 연구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한 것은 사회학이었다. 1888년에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 강의」에서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사학은 특수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경험적 검증을 할 수 있는 일반적 진술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험적 검증이야말로 과학적 절차와 사고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역사학은 엄격한 과학이 될 수 있는 사회학에 정보를 제공하는 보조 과학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경제학자 프랑수와 시미앙은 경제사만이 사회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역사학의 한 분야라고 주장했다."(61)


"19세기 말에 이르러 몇몇 중요한 신칸트주의 철학자들, 특히 빌헬름 딜타이와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그들이 자연과학에 대비하여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ten' 혹은 '문화과학 Kulturwissenschaften'이라 불렀던 것을 위해 명확한 방법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방법론들은 모두 과학의 지위를 요구했기 때문에 명확한 개념화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생명 없는 자연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유형을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 explain'하는 '법칙 정립적인 nomothetic' 혹은 일반화하는 공식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은 구체적인 문화적·사회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간 행동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 understand'하기 위해 '개성 기술적인 idiograpic' 개별화의 방법을 적용하였다." "랑케는 이러한 과정을 '감정이입 Einfuhlung'이라 칭했고, 딜타이는 '체험 Erlebnis'이라 표현하였다."(66-7)


"역사를 합리적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견해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여전히 적어도 히브리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서구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성화 intellectualization'와 '합리화 rationalization'의 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볼 때, 베버는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콩도르세, 헤겔 또는 마르크스의 낙관적 믿음이나, 역사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질서를 낳는다는 랑케와 드로이젠의 낙관적 믿음은 거부했을지라도, 역사에는 연속성과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역사주의자의 신념과는 결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역사, 적어도 서구 역사를 특징짓는 일관성에 관련된 19세기의 핵심 개념들을 유지했다. 또한 초문화적 타당성을 지닌 논리를 따르는 과학적·사회과학적 탐구가 '객관적'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70-1)


"(역사학에 수학 모델을 적용하는) 엄밀과학을 바탕으로 작업한 역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로는 미국의 '신경제사 The New Economic History' 연구자들을 들 수 있다. 신경제사가들은 고전경제학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정치와 사회에서 분리된 경제 성장의 모델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따라서 『철도와 미국의 경제 성장』이라는 유명한 '반 사실적 contrafactual' 연구에서, 로버트 포겔과 더글러스 노스는 경제 자료만을 이용하여, 철도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포겔은 역사과학의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인 성격을 주장했음─역사가의 비당파성과 객관성을 강조한 랑케와 다르지 않게─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치 중립적인 전제들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기존의 성장 지향적·소비 지향적 경제학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학에 내포된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78-81)


제2부 사회과학의 도전


"프랑스의 '아날' 학파는 19세기와 20세기에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견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시간 개념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랑케로부터 마르크스와 베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후 미국의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가들은 역사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일차원적 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차원에서 파악하였다. '아날' 역사가들은 시간의 상대성과 다층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였다."(85-6) "프랑스 역사학이 지리학과 경제학, 인류학 간에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는 반면, 베버를 포함한 독일의 전통은 국가와 행정, 사법을 강조하면서 그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배경에서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익명의 구조에 대단히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역사인류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집단 망탈리테에 깊이 새겨진 감정과 경험의 측면들에 주목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88)


"푸코는 '하나의' 관념은 이미 종결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간주한다. 대다수의 '아날'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시간 대신에 그들은 상이한 문명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각각의 문명 내에 공존하는 시간의 복수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관념은 지중해를 다룬 페르낭 브로델의 저작의 구조 속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발전되고 있는데, 그는 각기 고유한 속도를 지닌 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간, 즉 하나의 지리적 공간으로서 지중해의 '거의 정지된 시간 longue duree'과, 사회·경제 구조 변화의 '느린 시간 conjonc-tures', 그리고 정치적 사건의 '빠른 시간evenements'을 구분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자크 르 고프는 「중세에서 상인의 시간과 교회의 시간」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을 저술했던 것이다. 직선적 시간 개념이 폐기됨과 더불어 진보에 대한 확신과 서구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 또한 파기되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거대 담론이 기반할 수 있는 통일된 역사 발전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94)


"1960년대에 사회과학 전반이 계량화에 경도된 점 또한 '아날'에서도 발견된다. '아날' 역사가들은 점점 더 과학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연구소를 '실험실'이라고 부르고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운위했는데, 이는 의문의 여지 없이 사회과학이었다." "1960년대에 프랑스 사회사의 많은 부분이 계량화에 깊이 의존했는데, 이는 대량의 인구통계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어떤 지역의 '전체사 historire totale'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연구는 출산에 관련된 교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통계 자료에서 출발하여 성적 태도라는 좀더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었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가장 야심적인 계량적 연구는 르 르와 라뒤리의 『랑그독의 농민들』이다. 이는 과도할 정도로 〈사람 없는 역사 history without people〉였는데, 맬서스적 가정이 제공한 인구 성장의 장기적 주기와 곡물 가격 간의 상호 연관성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한 것이었다."(98-9)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과 마르크스주의 사고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의 구현이라 자임해 왔던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이 몰락함에 따라 그 신뢰성과 위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가 근대 역사과학에 기여한 점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베버의 편에 섬으로써 마르크스의 반대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근대 사회과학의 수많은 이론들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획득하자면 역사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고 공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합법칙적 역사 발전의 주 동인을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한 사회적 갈등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토마스 헨리 버클과 텐느와 같은 여타 실증주의자들과는 달랐다. 역사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은 관념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간명하게 진술했듯이 생산력이었다."(124-6)


"그러나 근대사의 거대한 정치적 격변과 산업 혁명을 다루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는 곧이어 익명의 사회 과정에서 관심을 돌려, 이러한 변화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나타난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르크스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와 『독일 농민전쟁』을 통해 그와 같은 역사에 접근했다." "마르크스는 이제 자신과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애국적인 기억과 상징 같은 비경제적 힘이 정치 의식과 행동에서 수행한 역할뿐 아니라 부르주아 내에서 전개된 첨예한 사회적·정치적 분열을 인식한 근대 사회의 상을 제시하였다." "한편 중세와 근대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격변을 고찰한 영국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는 역사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앙리 르페브르는 『1789년의 대공포 : 혁명기 프랑스 농촌에서의 공포』에서 그러한 길을 준비하였다."(135-6)


"민중 문화의 역할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를 지향하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이라고 할 것이다. 저서의 표제는 〈노동계급은 정해진 시간에 뜨는 태양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만들어질 때 거기에 존재하였다〉라는 톰슨의 테제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톰슨은 〈닫힌 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열린 탐구와 비판의 전통〉을 구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첫 번째의 것은 신학의 전통에 서 있고, 두 번째의 것은 활동적 이성의 전통에 속한다.〉 톰슨은 마르크스로부터 계급 개념과 함께 〈계급 경험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속하게 되는 생산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채택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급은 〈하나의 '구조'나 심지어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문화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어떤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137-8)


제3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역사학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는 과학과 기술이 성장과 발전에 공헌했던 팽창하는 근대 산업 세계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상정하였다." "이와 달리 근대 서구 문명의 과정과 특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대다수의 '신문화사 New Cultural History'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와 역설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역사 서술의 해방적 기능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는 공유했지만, 갑남을녀가 해방되어야 할 속박의 구조에 대해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였다. 착취와 지배의 원천은 일차적으로 정치나 경제와 같은 제도화된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젠더 또한 새롭고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겨졌다. 푸코가 권력 및 권력과 지식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가로서 마르크스를 대체했던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152-4)


"(이탈리아의 카를로 긴즈부르그나 카를로 포니 같은) 일상 생활의 역사가들은 역사 연구의 주제를 권력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로 전환해 갔다." "이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군중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세계사적 과정에서 혹은 익명의 군중들 사이에서 잊혀져서는 안되는 개인들로 파악한다. 이미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목표를 〈가난한 양말직공 ··· ··· [그리고] '시대에 뒤진' 베틀 노동자를 ··· ··· 후대의 거대한 오만에서 구해내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역사의 동기를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망각으로부터 구출해 내고자 한다면, 역사를 더 이상 단일한 과정으로, 즉 수많은 개인들이 묻혀 버리는 거대 담론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중심을 지닌 다면적 흐름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개념적·방법론적 역사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이제 역사가 아니라 역사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들이 문제가 된다."(159-60)


"미시사 연구자들은 역사가들이 실재하는 대상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을 비판한 이유는 사회과학이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적 삶의 구체적인 실재에 비추어 검증해보면 지지될 수 없는 일반화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미시사 연구자들은 〈중요해 보이지 않은 단일의 기호를 통해〉 접근해야 하는 '해석적' 문화 연구를 목표로 한다. 레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시사적 접근 방식은 어떻게 우리가 다양한 실마리와 기호, 징후를 통해서 과거의 지식에 접근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실재는 역사적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물론 지식은 매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사적 방법은 〈실재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역사가들이 채택하는 전통적인 단정적·권위적 담론 형태와 결별한다.〉"(167-9)


# 미시사를 향한 비판


1. 역사를 일화적인 호고好古주의로 전락시켰다.

2. (근대 세계를 혐오하고) 과거 문화를 낭만화한다.

3. 상대적으로 안정된 문화를 연구하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하는 근·현대를 다룰 수 없다.

4. 3번과 관련하여 미시사는 정치를 다룰 수 없다.


"결국 미시사는 대규모의 사회·정치적 과정을 분석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필수 불가결한 보완책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또한 구술사가 일정한 공헌을 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연구는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역사에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그때까지 홀로코스트는 라울 힐베르크가 묘사했던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어 〈악의 일상화〉를 구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들이 책상머리에서 수행했던 광대하고 복잡한 행정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브라우닝은 이제 〈파괴기계〉의 계서제의 밑바닥에서 개인적으로 수백만 명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수행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101 예비경찰대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떻게 대부분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중년의 함부르크 경찰들이 뚜렷한 반유태적 감정 없이 폴란드에서 대량 학살에 가담했는지를 보여 주었다."(175-8)


"포스트모던 역사 서술 이론의 기본 관념은 〈과거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정합적인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역사 서술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의 과거를 준거로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와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 서술은 허구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사료에 대한 문헌학의 비판적 작업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넘어서 역사적 설명을 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화이트의 경우 과학적 고려가 아니라 미학적·윤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계속해서 역사가들은 형식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들이 제시하는 설명의 내용까지도 미리 결정하는 한정된 수의 수사적 가능성만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대문에, 우리가 보았듯이 〈역사 이야기는 언어적 허구이고, 그 내용은 '발견'된 만큼 '창안'되며, 그 형태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한다."(181-2)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1916년 사후에 출판된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연관된 관념을 기초로 해서 언어이론을 공식화했다. 언어는 구문적 구조를 가진 폐쇄적인 자율적 체계를 형성하며, 나아가 언어는 의미와 의미의 단위를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의미가 언어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이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구조주의적 개념의 중심을 이루는 관념에 도달한다. 즉 인간은 자신이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결정하는 구조─이 경우에는 언어 구조들─의 틀 내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에서 전개된 '신비평 New Criticism'의 문학이론과 이와는 독립적으로 바르트에 의해 시작되어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방법론에 이르는 프랑스의 문학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84-5)


"푸코가 착수한 다음 단계는 텍스트 생산에 관계하는 저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자가 사라지면, 의도성과 의미 또한 텍스트로부터 사라진다." "푸코와 데리다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텍스트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텍스트가 저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들은 소쉬르의 언어 개념을 급진화시킨다. 소쉬르의 경우, 언어는 여전히 하나의 구조를 지니며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말(기표)과 그것이 지시한 사물(기의) 간에는 여전히 통일성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데리다의 경우, 이러한 통일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명확한 의미가 없는 무수한 기표들을 본다. 명확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 어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점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을 위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세계에는 인간 행위자, 인간의 의지 혹은 의도가 없으며, 정합성을 완전히 결여한, 의미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85-6)


"문화인류학자인 기어츠는 최근의 역사 사고에서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 방식의 가장 중요한 추동력을 제공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가 짜 놓은 의미의 그물망에 매달린 동물이라는 베버의 주장을 믿기 때문에, 나는 문화를 이러한 그물망으로 간주하며, 그것에 대한 분석은 법칙을 추구하는 실험과학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의미의 그물망'이라는 개념에 베버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인류학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두터운 묘사'라고 말한다. 방법의 대안으로서, '두터운 묘사'는 기어츠가 〈기호학적〉이라 정의하는 문화의 개념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화는 언어의 특성을 소유하며, 언어와 마찬가지로 '체계'를 구성한다. 각각의 행동과 각각의 표현이 전체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해석이 가능하다."(188-90)


"낯선 문화의 '의미'는 인류학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이것은 이론으로 유도된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분석적 사회과학자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통적 역사가 모두의 작품을 물들인다고 여겨진 주관적 편견의 도입을 저지한다. 그러나 사실상 기어츠의 문화 해석에는 그 어떤 통제 기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인류학자의 주관성이나 상상력이 그의 연구 대상에 다시 개입한다." "로버트 단튼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민중문화를 되찾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텍스트를 자본주의 근대화의 압력 하에 있던 인쇄업의 경제적 변화에서 유래된 갈등이라는 더 넓은 컨텍스트 내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기어츠의 「발리 섬의 닭싸움」을 연상시키는 고양이 대학살에 대한 두터운 묘사를 통해 어떤 문화가 그것이 지닌 모든 복합성을 고려해서 실제로 재구성될 수 잇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191-3)


"(이와 달리 언어 혹은 담론에 핵심적인 위치를 부여하여 언어를 사회적 실재의 대용물이 아니라 실재의 길잡이로 파악하는) 경향 가운데 문화인류학과는 가장 동떨어져 있는 반면, 전통적 형태의 지성사와는 매우 가까운 것이 포코크와 퀸틴 스키너, 코젤렉에 의한 정치사상사의 연구들에서 발견된다." "이들에 따르면, 사상들은 더 이상 근본적으로 위대한 정신의 창조물로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그 표현이 생성된 지적 공동체의 담론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 "담론은 비교적 자율적인 행위자들의 공동체를 상정하는데, 이들은 정치적·사회적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담론 개념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담론은 정치적 실재의 형성에 기여하며, 역으로 또한 그러한 실재의 영향을 받는다."(193-5)


"역사 연구에서 '언어적 전환'은 이전의 사회경제적 접근 방식에 내재한 결정론을 깨뜨리고, 언어가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적 요소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스테드먼 존스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사회적 해석을 언어적 해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검토하는 문제이다. 언어적 분석은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연구들에서 중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룬 역사가들은 언어와 수사 및 상징적 행위가 정치적·사회적 의식과 행동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체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언어만이 존재한다〉(푸코)라는 극단적 입장을 공유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언어적 차이는 사회를 구조화하며, 사회적 차이들은 언어를 구조화한다〉라는 캐롤 스미스-로젠버그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202-3)


맺음말


"19세기는 역사 발전의 혜택에 대한 확신이 최고조에 도달한 시기이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 문화의 특성에 대한 커다란 불확실성이 싹튼 시기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비판은 19세기 문명이 대단한 가치를 부여했던 과학적 합리성과 기술적 진보, 인권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나왔다. 거기에는 전근대적, 전산업적 세계를 향수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사상가들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기를 원했던 일부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때때로 반민주적인 색채를 띠었던 이러한 비판은 계몽을 통해 인간이 종속과 박탈, 폭력이라는 오래된 해악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거부하였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부르크하르트,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보들레르를 괴롭혔던 것은, 근대 유럽 세계에 내재한 폭력과 불의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들은 대중화의 과정 속에서 통속화된 가치관 및 그것을 수반한 영웅주의의 몰락을 염려했다."(215)


"오스발트 슈펭글러, 아놀드 토인비 등은 역사의 단일적 통일성에 대한 관념을 거부하고, '고급 문화들'에 대한 비교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명화된' 민족과 '원시' 민족 간의 이와 같은 구분은 〈역사 없는 민족들〉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문화인류학에 의해 역시 거부당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역사가들에 의해 무시되었던 인구의 다른 부분들이 역사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초점은 권력의 중심부뿐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 미시사와 복수의 역사들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방향을 제공하는 거대 담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곧바로 역사가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는 여전히 집단과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하나의 의미 있는 과정 대신에 이제 수많은 상이한 집단들의 실존적 삶의 경험들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다원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217)


"명백히 계몽주의는 많은 모순적인 측면들을 지닌다. 가령 계몽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콩도르세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과학적 지식과 그 결과인 기술적 지식을 사회의 영역에 체계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부와 복지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콩도르세에게 과학과 기술은 확실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하는 인간을 무지와 박탈, 압제의 천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수단이었다. 진실로 계몽주의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존재하였다. 즉 계몽주의의 보편성 및 이성적 계획과 통제에 대한 믿음은 로베스피에르에서 레닌에 이르는 급진주의자들의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을 배태하고 있다. 그렇지만 계몽된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독단적 권위와 절대적 통제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비록 계몽주의는 단죄되었을지언정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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