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마이클 스콧 지음, 홍지영 옮김 / 사계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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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축의 시대의 정치


"축의 시대에 아테네-로마-노나라에서는 극도의 독재로 인해 누적된 불만, 갈등과 사회불안으로 점철된 현실보다는 더 나은 이상 사회를 향한 갈망이 변화를 촉발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혁명은 공동체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로드맵도 없이 시작되었다. 반대로 중국에서 공자는 국가 통치 방식의 변화를 정교하게 설계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혁신자라기보다 옛 사상의 '전수자'라는 입장을 취했지만, 아마도 자산의 사상과 신조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힌 중국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세 지역에서 변화를 촉발한 원인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의 전통과 당면한 문제의 차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한 사람의 덕망 높은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한 중국, 사회계급별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로마의 '중도', 그리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사회계약과 관계 개념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3개의 통치 체제가 등장했다."(27-8)


1장 아테네 민주주의 : 민중의 힘을 향한 갈망


"(기원전 508~507년에 클레이스테네스가 제안한 개혁안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행정구획의 최소 단위인 '데메스demes(대략 오늘날 구區에 상당)'를 모든 시민의 참여-권리-책임의 기본 단위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논란의 소지가 더 컸던 두 번째 제안은, 4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기존의 부족을 해체하고 데모스를 근간으로 하는 10개의 부족을 신설하여 아테네 시민이 국가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 의견을 제공하는 창구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부족 개념이 획기적이었던 이유는 기존의 부족 제도에 내재된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와해시키고 각 부족이 국가 운영에 동등한 발언권과 권한을 갖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각 부족에서 국가 운영에 참여할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관직을 담당할) 사람을 뽑을 때 선거가 아니라 무작위 추첨제로 선출하여 모든 이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돌아가도록 보장했던 점이다."(34)


"이 시기의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사용된 적이 없다. 이 용어가 만들어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솔론은 '디스노미아dysnomia(무질서)'와 대조되는 '에우노미아eunomia(질서)'에 대해 얘기했다. 기원전 510년과 508년의 아크로폴리스 포위 사태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이소노미아isonomia(법 앞의 평등)'가 논의되었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시민에 의한 통치)'가 최초로 개념화되고 언급되는 것은 기원전 490년과 480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겪고 난 후의 일이다. 아테네의 정치체제가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네제국 시대의 민주주의체제로 진화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었던 민중 봉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460년대에 이르러, 아테네 성인 남성 시민 모두가 천부의 권리로 누리게 된 정치체제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에서 태어난 한 남자아이에게 데모크라테스Demokrates라는 이름이 주어졌다."(49)


"로마 공화국 형성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기원전 3세기 말에 로마 원로원 의원 퀸투르 파비우스 픽토르가 쓴 책과,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인 폴리비오스가 쓴 『역사』가 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압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그 주요 요인으로 로마의 군사조직과 공화정체를 꼽았다. 그는 민주정체의 일시적 성공이 "우연과 상황의 산물"이었다면서 "민주정체의 비일관적인 속성"을 혹평했다." "이들은 아테네가 기원전 510~508년에 경험한 정치적 위기와 극적인 변화를 중요한 역사적 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한 명은 그리스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공화국은 로마인들이 폭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510~509년에 참주를 축출했다. 고대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어로 글을 쓴 로마인) 역사에게 이것은 꽤나 마음에 드는 우연의 일치였다."(54-5)


"로마와 그리스(아테네)의 정치 격변에 관한 역사 기술은 단순히 날짜가 겹치는 것 이상의 깊은 관련이 있다. 민주주의가 출현하기까지 수세기 동안 아테네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 과정에 등장했던 개념과 촉매 역할을 한 인물들이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룬 기록에서도 등장한다.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문화권은 밀접한 관계였으며, 특히 기원전 6~5세기에는 매우 활발하게 문화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더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로마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한 후에도 계속해서 아테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갔다는 점이다. 공화국 수립 직후 로마 대중과 리더들이 다수의 권리와 소수의 권력 간의 균형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격동의 반세기 동안, 로마의 입법자들은 아테네에 체류하며 그곳의 법률 제도와 헌법─특히 로마인 자신들과 비슷한 딜레마를 겪었다고 여겼던 솔론의 개혁─을 연구하여 로마에 도입했다."(59-60)


2장 로마 공화국 정부의 완성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로마의 모든 거주자에 대한 인구조사 및 그들이 보유한 재산에 대한 국세조사를 시행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급별로 분류하여 병역의 의무와 정치 참여 방식을 규정한 것이다. 첫 번째 계급 '에퀴테스equites(기사)'는 로마군의 기병대를 구성하는 로마의 가장 부유층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그 아래로 재산 정도에 따라 1등급에서 5등급까지 5개의 계급이 있었다. 최하층 계급은 가장 가난한 시민, 흔히 '프롤레타리proletarii'라 불리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각 계급은 '켄투리아centuriae' 또는 '백인대'로 세분되었다. 이는 정치와 군사적 기능을 모두 가진 소규모 공동체로, 시민들은 백인대 단위로 투표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이들 계급이 한자리에 모인 정치 의회를 '코미티아 켄투리아타comitia centuriata(켄투리아회會)'라 불렀다. 각 켄투리아는 수와 무관하게 한 표씩 행사했는데, 이는 유산계급에 편향된 체제였다. 투표 순서도 늘 상위 계급에 우선권이 주어졌다."(66-7)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마련한 이 선거제도는 (이후 1등급 켄투리아 숫자가 약간 바뀌기는 하지만) 로마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지속된 로마 정체의 기반이었다. 공화국의 최고 관료들을 '선출'하고, 법률을 마련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는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 기구다." "기원전 510~509년 로마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반세기도 더 전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 의해 도입된 선거제도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후 구성된 새 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새로운 체제는 '로마인의 공공재'라는 의미의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 로마나res publica romana'로 불렸다. '공화국republic'과 특정 종류의 정체를 의미하는 '공화정체republicanism'라는 용어가 여기서 유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켄투리아회를 통해 두 명의 집정관(공동 리더)을 선출하고 그들에게 시민과 군대를 소집하고 지휘하는 권한인 '임페리움imperium(명령권)'을 부여했다."(67-8)


"신생 공화국은 항구적인 전시 상황이 불러온 사회 내부의 문제와 요구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스에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솔론에 의해 불법화된 채무 노예제가 로마에는 남아 있었고, 적대 관계인 인접국들의 위협으로 인해 무역이 제한되어 경제도 침체되었다. 동시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고, 토지 분배를 두고도 갈등이 커졌다. 로마는 공화국 초기의 반짝이던 성공을 뒤로한 채 급격하게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사태는 하층 계급 출신으로 구성된 보병들이 채무 노예제에 반대하며 로마 인근 언덕에 진을 쳤을 때 정점에 달했다." "로마 근교 언덕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로마 사회에 존재하는 가난과 빚을 뿌리 뽑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화국에 평민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부 관직을 신설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기원전 494~493년경 최초로 평민 계급을 대표하는 정무관이 선출되었다. 이 새로운 정무관은 '호민관tribune'이라 불렸다."(77-9)


"로마 공화국은 한 세기 가까이 거의 매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 압력은 로마를 아테네와 같은 방향으로 떠밀었다. 전쟁의 위협과 그로 인한 시민의 이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로마 원로원은 호민관 제도를 신설하는 등 민중의 요구를 빠르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를 방어할 수단을 가진 자에게 더 큰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왕정을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방어를 위해 일시적일지언정 한 사람에게 독재권을 부여한 것이다." "전쟁은 로마 사회가 도시를 방어하고 외적을 물리친 '군인'에게 특별한 명예를 부여하게 된 배경이다. 로마의 생존이 달린 핵심 전투가 모두 육지에서 치러졌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하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처럼 하층 계급이 전투를 주도한 경험이 없다. 로마의 전쟁은 유산계급이 국가 방어의 책임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정당화하는 계급사회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85-6)


3장 공자와 성군


"중국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논의하는 방식을 보면, 중국 문화에서 개별 통치자가 가진 중요성(그리고 인품의 중요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능하고 도덕적인 군주가 등장하여 새 나라를 세우지만, 후대 왕들이 개국 군주처럼 위대한 통치자인 경우는 드물다. 결국 극도로 무능한 군주가 즉위하고, 그와 그의 왕조가 강하고 도덕적인 새 통치자에 의해 물갈이되고 신생 왕조가 탄생하는 흐름이 중국 역사의 전형이다."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중국 역사서 중 하나인 『서경書經』은 상고시대를 왕조별로 정리한 산문집으로, 공자 시대 이래 국가의 통치 철학을 정립할 때 본보기로 삼아온 중요한 서적이다. 『서경』은 상나라가 멸망한 이유로 마지막 왕의 결점을 지목하며, 왕의 잔혹한 통치를 견디다 못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명시한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통치자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결과 자멸하는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서경』에서는 특히 하늘이 내린 천명을 강조한다."(97-8)


"공자의 세계는 대략 5,000만의 인구가 수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세상이었다." "주나라 제후국들의 내부 갈등은 동원된 병사의 수나 전쟁의 지리적 범위, 그리고 지속 기간이라는 면에서 아테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규모였다." "주나라 제후국들은 육지에서 지속적인 영토 방어전을 치르면서 통치 계급에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와는 달리 군주의 힘만으로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거나 그들을 먹이고 무장시키기 위한 물자나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더 크고 중앙집권화된 행정 조직이 구축되었다. 그 결과 진정한 의미의 관료제가 탄생했다. 관료층은 학문과 기술을 익혀 직위를 획득한 신생 하급 귀족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사士(선비/문관)'라는 사회·정치적 계급이 발달했으며, 공자의 가문도 이 계급에 속했다."(102-4)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나무랄 데 없이 행동할 것을 요구했지만, 특히 군주의 기준은 더욱 엄격했다." "그에 따르면, 훌륭한 군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을 지킬 때 탄생한다. 첫째는 덕德이요, 둘째는 의義요, 셋째는 예禮다. 의 없는 용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군자가 용맹스럽고 의로움이 없으면 문란한 짓을 하고, 소인이 용맹스럽고 의로움이 없으면 도둑질을 한다.〉 만일 의로움과 양립할 수 없다면 삶의 모든 것을─삶 그 자체까지도─거부해야 한다. '예'는 유교의 다른 덕목과 마찬가지로 평생 갈고닦아야 하는 덕목이다. 오랜 기간 독서와 교육, 자기 수양을 통해 사회적 의례와 전통을 익히고 따름으로써, 단순히 의식을 위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갖고 진심을 담아 따르고 행함으로써 통치자는 천명을 얻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는 예가 귀족들의 도를 넘는 행위를 교화하고 통제하여 국가 전체에 혜택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다."(109-10)


"로마 사회에서 중시했던 미덕과 공자가 꼽은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예를 들어 '인'은 후마니타스humanitas, '덕'은 디그니타스dignitasm '의'는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로마 공화국의 지도자들에게는 끊임없는 금욕적 수양이 강조되지 않았다." "로마 공화국에서 개인의 도덕성, 공정함, 학습, 고결함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는 것은 원로원 의원 소小카토 같은 비판자들이 당시 지도층에 만연한 도덕성 부재를 한탄한 공화국 말기에 이르러서다. 이런 경향은 공자 시대의 중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한 로마 제정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로마와 그리스 저작에서는 품성의 중요성과 통치자의 결함이 드러날 때의 위험을 논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당대 군주들에게 외면당했다.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던 난세에 군주 개인에게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해결책─직설적으로 설파되었을 때─이 호응을 얻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114-5)


맺음말


"이 시기에 탄생한 정치혁명과 정치철학이 고대 사회가 직면했던 문제에 대응하고, 한발 앞서 나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테네, 로마, 그리고 중국 노나라는 몇 차례의 대내적 사회 변혁과 대외적 전쟁을 경험하면서 몇몇 인물의 주도하에 국가 구성원들의 요구를 조율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모색했다." "직접민주주의, '혼합정체', 그리고 공자가 주창한 수기치인의 덕목을 갖춘 공정하고 현명한 군주가 모든 이를 다스리는 왕정이 그것이다. 서로 다른 도전에 직면했던 사회에서 등장한 서로 다른 성격의 이 세 체제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세 체제의 공통점이다. 공자, 로마인들, 그리고 아테네인들도 (기원전 4세기 이후) 솔론처럼 책임을 동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격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했던 통치자, 즉 국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개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동의했다."(122-4)


2부 전쟁과 변화하는 세계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는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고대 세계'에서 대부분 젊은이로 구성된 일단의 통치자들과 장군들이 국경을 다시 긋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행군하고 항해하고 전투를 벌이고, 계략을 꾸미고, 통치하고, 목숨을 잃던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시기였다." "그 결과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지 고작 80년 만에 지중해와 중국, 동서양의 두 세계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132-3)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그리스의 코린토스를 쑥대밭으로 만든 로마는 기원전 140년대와 130년대에 지중해의 패자로 부상했다. 한편 한무제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고, 그 압박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박트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를 집어삼키게 만든다. 이는 동서양의 역사가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이다. 두 세계의 접촉이 로마에서 중국 낙읍에 이르는 영구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40)


4장 새로운 세대의 부상


"로마는 끈질긴 저항에 부닥쳤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중앙부는 혼란에 빠졌고 동방에서는 진나라가 세력을 확장했다.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하밀카르의 지휘하에 스페인에 새로운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로마는 제1차 포에니전쟁의 승자로 부상했지만 하스드루발과의 (스페인 분할 지배) 합의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중유럽의 갈리아인들로 인해 스페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로마가 스페인으로 세력을 넓히고, 그리스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소아시아 트로이의 독립을 요구하고, 카르타고에게서 빼앗은 지중해 패권을 만끽하는 동안, 북쪽에서 온 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북부를 초토화시키면서 로마가 새로 점령한 지역의 갈리아족을 선동했다. 향후 5년간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에 군대를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침략자들을 내쫓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165-6)


"동쪽에서는 사면초가에 몰린 셀레우코스 2세가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일에 한계를 느꼈다. 위협이 발생할 때마다 광대한 제국을 가로지르며 행군하던 그는 마침내 기원전 225년경, 적의 칼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군주로서 매우 굴욕적인 죽음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셀레우코스 3세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러 가는 도중 자신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아마 그들은 전투 경험이 전무한 사령관 밑에서 아탈로스처럼 전장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과 맞붙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안티오코스 3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마케도니아에서는 기원전 221년에 열여섯 살이 된 필리포스가 섭정인 당숙의 그늘에서 벗어나 필리포스 5세로 등극했고, 같은 해 이집트에서는 이십대 초반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코엘레 시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166-7)


"하스드루발의 대표적인 성과는 로마와 스페인을 분할 지배하는 협상을 성사시킨 것이다." "카르타고는 에브로강 남쪽에 설립된 로마인 정착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페인의 광대한 영토 대부분을 자유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 하스드루발이 켈트족 왕의 노예에게 암살당하자 스페인 주재 카르타고군은 즉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 한니발을 사령관으로 선출했고 카르타고 원로원이 이를 비준했다. 한니발은 그로부터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맺은 조약을 파기했다. 외교 대신 전쟁을 선택한 그는 에브로강 남쪽의 로마인 거주지 사군툼을 공격했다. 그리고 피레네산맥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그의 성姓이 '전광석화'라는 뜻의 '바르카'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후대 로마 역사가의 표현처럼, 〈알프스산맥을 헤치고 혜성처럼 등장한 한니발이 마치 창공에서 던진 무기처럼 눈 덮인 산꼭대기로부터 이탈리아로 쏟아져 내려왔다.〉"(166-7)


5장 관계의 성립


"기원전 215년 무렵,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는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로 다른 대륙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양국을 위협하는 공동의 적(로마)을 제압하기 위해 단합했으며, 서로의 세력 확장을 기꺼이 지원하고자 했다. 필리포스 5세와 한니발은 국제 공조를 통해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이집트에서는 최근 즉위한 젊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젊고 미숙한 왕 안티오코스 3세와 힘을 겨루면서 명성을 키워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의 도전에 맞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광대한 영토를 방어해야 했다. 중국의 진시황제도 수세기 동안 전화가 휩쓸고 간 땅을 새질서 아래 통합하고, 갈수록 팽창하는 유목민 세력으로부터 국경을 방어하고, 신생 제국의 생존을 보장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확장하는 체스판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동맹을 활용한 전략적 공격과 방어가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 여겼음이 틀림없다."(169-70)


"(기나긴 전쟁 끝에) 카르타고가 '새로운 제국'이라 여겼던 스페인은 이제 로마의 손에 넘어갔다. 한니발의 동생은 전사했고,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기원전 205년, 20년 전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해졌지만 전쟁에 지친 리더들이 고대 세계의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제각각 달랐다. 사십대에 접어든 한니발은 로마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른 살의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스페인에서의 승리에 한껏 고무되어 한니발과의 정면승부를 고대하고 있었다. 삼십대의 필리포스 5세는 더 이상 자신이 로마의 목표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역시 삼십대인 안티오코스 대왕은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일 제국의 전성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분열된 지중해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정치에 발을 들일 준비를 마쳤다. 한편 그의 오랜 적수였던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 사후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204)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에서는 에우티데모스와 젊은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동쪽 유목민으로부터 셀레우코스 제국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확립해나갔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의 수장 유방이 통일 제국 한나라를 통치했다. 그리고 이 신생 제국의 북서쪽 국경 너머에서 고도로 훈련된 흉노 부대를 이끄는 젊고 대담무쌍하며 무자비한 묵특이 한나라를 넘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가 속한 공동체 관계를 재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대 세계를 더욱 가까이, 주로 폭력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그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확장하고 동맹을 구축하면서 전쟁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단일 통치자의 지배하에 거대하고 통합된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특히 동쪽에서 외견상 무질서하게 시작된 대이주로 인해─세계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204-5)


6장 동방과 서방의 제국


"대륙을 재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묵특의 등장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북쪽의 국경선 방어에도 신경을 써야했다. 방대한 제국의 통치와 방어라는 이중의 도전은 로마 공화국 역시 수십 년 내에 직면하게 될 문제이기도 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 신전 벽에 자신의 업적을 새기며 지난 세월을 반추할 무렵, 젊은 스키피오를 로마군사령관으로 임명한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대왕이 지중해를 넘보고 있었기에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충돌도 불가피했다. 고대 세계의 강대국들이 각자의 세력권 내에서 지배권을 다지고 경계선을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시도한 결과 2개의 대제국이 탄생했으며, 그 사이에 위치한 수많은 경쟁 집단들은 불안정한 정세에 휘말렸다."(207)


"기원전 190년 3월 18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가 아시아를 향한 기나긴 행군을 시작하기 위해 로마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그리스 북부로 항해했다." "8월경에는 한니발이 이끄는 안티오코스 대왕의 함대가 로마 편에 선 로도스인들에게 격파당했다. 이제 에게해는 로마와 로마 동맹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로마군은 그해 군사작전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셀레우코스 영토에 진입했다. 사르디스로 가는 길과 에페소스의 해군기지는 안티오코스 대왕이 방어에 만전을 기한 요지였다. 시필로스산 기슭 헤르무스강 근처에 자리잡은 도시 마그네시아 아드 시필룸(오늘날 터기 이즈미르에서 북동쪽으로 65킬로미터 거리)에서 로마군과 안티오코스군이 맞붙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군 전사자는 무려 5만 3,000명인 반면 로마 측 전사자는 단 394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의 정확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날 로마의 승리는 절대적이었다."(241-2)


"안티오코스 대왕은 힘들게 얻은 아시아 연안과 타우루스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로마는 새 영토의 상당 부분을 동맹국에 ('로마의 선물'로) 분배했다. 그리스와 지중해 동부 지역을 구슬리기 위한 능숙한 외교 제스처였다. 그 밖에도 안티오코스 대왕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나, 왕위와 나머지 제국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되었다." 안티오코스의 권위가 무너지자 왕국 내부에서 연쇄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무력으로 병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셀레우코스 동쪽 변방의 파르티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박트리아에서는 에우티데모스 사후 통치자 자리에 오른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정복 전쟁을 벌여 동쪽과 힌두쿠시 산맥 너머 인도로 영역을 확장했다. 로마의 성공을 보고 간이 커진 지방 관료들이 잇달아 독립국을 선포하고 왕을 참칭했다. 안티오코스 대왕이 평성 일궈온 업적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242-3)


맺음말


"한니발이 생을 마감한 기원전 182년, 그의 위대한 적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눈을 감았다. 그는 일생 동안 지중해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특히 어떤 과정을 거쳐 로마의 지배가 확립되었는지를 남다른 위치에서 지켜봤다." "스키피오는 로마 세력권을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과 집착, 그리고 그에 따른 문제에 직면했으며, 영토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데 요구되는 까다로운 균형을 절감했다. 스키피오가 처음 전쟁에 참가했을 때 로마는 지중해의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가 세상을 뜰 무렵에 이르면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로 변했다." "로마 체제는 모든 남성에게 영웅이 되라고 장려하는 한편, 고위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해 단기적 의사 결정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명성을 탐하는 집정관들을 보면서) 폴리비오스가 카르타고의 단점으로 지적했던 지도부의 불협화음이 로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245-6)


"기원전 2세기 말에 여러 가지 요인─중앙아시에서 벌어진 문화권 사이의 무력 충돌과 이후 중국의 확장, 생존을 위해 기동성과 연결성이 요구되었던 혹독한 물리적 환경, 그리고 장사와 무역에 타고난 수완을 보인 인간 공동체들의 노력─이 맞물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공식 상업망이 출현했다. 수십 년 내에 이 네트워크는 중국(한나라 장안의 대규모 서시西市)에서 티레(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카르타고인 선조의 도시), 그리고 마침내 로마까지 연결된다." "실크로드는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성공적으로 탐사해 새로운 동서 무역 항로와 시장을 개척할 때까지 1500년 동안 동서양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 기능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통로를 통해 물품뿐만 아니라 사상이 이동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에 관한 다양한 개념이 고대 사회 전역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250-1)


3부 연결된 세계의 종교


"한무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무역과 통신을 향상시키고자 제국을 가로지르는 3만 5,000킬로미터 길이의 도로를 건설했으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도입했다.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인 수도 장안은 25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를 가진 거대한 상업 도시로 성장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중국의 세력권을 확장했다. 통칭 실크로드라고 알려진 무역 네트워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양인들이 서쪽의 보배라고 여겼던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평원의 빠른 말, 중국 사료에서 한혈마汗血馬라 찬사를 보내는 명마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한나라의 황금기는 기원후 9년에 왕망이 일으킨 정변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무능했던 '신新'왕조는 10여 년 만에 농민반란으로 무너졌다. 그 후 한나라(후한)가 재건되고, 동쪽의 낙양(과거 주나라의 도읍)이 새 수도로 정해졌다. 이후 수 세기 동안 한나라는 머나먼 지역의 교역 상대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습득했다."(258-9)


"같은 기간에 박트리아왕국을 점령한 월지는 실크로드상의 '원형 교차로'라는 탁월한 입지에 힘입어 중앙아시아에 쿠샨제국이라는 자기들만의 정주 국가를 건설했다. 쿠샨은 국제적인 세계였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베그람 근처 카피사에서 발견된 쿠샨 왕들의 (소유로 추정되는) 저장고 2개는 1세기부터 2세기 초의 로마, 이집트, 인도, 중국산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쿠샨제국의 서쪽에서는 사면초가에 몰려 쇠락해가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독립한 파르티아에 천천히 잠식당하는 중이었다. 파르티아는 쿠샨제국과 마찬가지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제국을 형성했으며, 두라 에우로포스(오늘날 시리아에 위치) 같은 주요 무역 도시가 번성했다. 기원전 1세기에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는 셀레우코스 제국 공주의 아들이자, 훗날 로마에 의해 한니발에 비견될 만한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이 강국으로 부상했다."(259)


"(최초로 세례를 받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치 기간은 로마 세계의 종교적 지형이 끊임없이 변화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기원전 2세기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공화국체제의 강점과 개인의 용기를 강조하는 가치관 외에도 미신이나 신앙을 뜻하는 '데이시다이모니아deisidaimonia'가 〈로마 체제의 응집력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4세기는 로마제국이 주변을 둘러싼 고대 세계의 변화에 점차 적응해나가는 과정의 일부로서, 로마와 기독교의 관계를 다룰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요성은 기독교의 연대기와 지중해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국가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자리 잡은 아르메니아왕국이다." "아르메니아왕국의 기독교 개종은 티리다테스의 개인적 구원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의 왕권이 걸린 문제였으며,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파르티아(이후 사산제국) 사이에 낀 소왕국의 안전이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268-9)


"또한 오늘날 4대 종교에 포함되는 힌두교와 불교도 이 시기에 중대한 발전과 확장을 이루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의 상호작용이 가져온 종교적 변화를 등에 업고, 그리고 유목 민족의 이동과 실크로드 개척이 유발한 사회 변화를 바탕으로 굽타왕조가 정권을 장악했다. 굽타왕조는 점차 힌두교의 새로운 요소와 오래된 요소를 독특하게 조합하여 그들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종교와 신의 세계, 사회를 창조함으로써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통합했다. 굽타왕조는 종교적 다양성과 문화 발전을 이루며 인도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곧장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뿐만 아니라 여러 사상이 유입되었다. 그중 하나가 '축의 시대'에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다. 기원후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형태의 불교가 서서히 중국 사상에 뿌리를 내렸다."(269-70)


7장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종교 혁신


"(굽타 왕조 시대의) 인도 사회에서 불교의 인기는 힌두교 바르나 체제를 위협했다. 특히 평등 이념에 따라 수행에 전념한 초기 불교는 오직 하나의 계급(브라만)만이 공동체를 위한 제식을 수행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는 기존 체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기원전 2세기부터 브라만 계급이 범상한 직업을 수행하면서 바르나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인식이 한층 강화되었다. 동시에 (실크로드를 포함한) 수익성 높은 무역로를 통해 부를 쌓고 중산층으로 부상한 바이샤 계급과 중요성이 커지면서 바르나 사이의 구분도 엷어졌다. 여기에 더해 이민족(특히 유목민)의 이주는 바르나를 더욱 약화시켰다." "유목 민족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출신 가문의 배경보다 전투에서 얼마나 용맹한지와 부족을 잘 다스릴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인도 전통 신앙 및 계급 체제에 영향을 미쳤으며, 날 때부터 바르나에 의해 사회적·종교적 위치가 정해지는 기존 체제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대안으로 기능했다."(276-7)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와 이교 전통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관용 정책을 펼쳤다.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믿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이교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제국을 다스리는 이교도 황제였다. 그는 즉위 10주년 행사 때 이교 희생제는 거부했지만 전통적인 이교 경기는 허용했다. 그는 새로운 목욕장을 짓는 동시에, 최초의 성 베드로 성당을 포함한 새 성당을 건축했다. 새 성당은 로마 도시 중심부의 전통적 이교 사원들을 위협하지 않도록 왕실이 소유한 땅이나 도시 성벽 밖에, 사회적 다수인 이교도들에게 익숙한 바실리카basilica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교의 '무적의 태양Sol Invictus(솔 인빅투스)'신 이미지와 함께 그를 자신의 '동료'라고 새긴 주화를 발행했으며, 일요일을 휴일로 삼아 태양신 숭배에 전념하도록 했다(일곱째 날은 쉬는 날이라고 선포한 기독교 경전을 따른 것이 아니다)."(281-2)


# 콘스탄티누스 1세의 관용 정책이 직면한 기독교 내부 분쟁

1. 도나투스파 : 기독교 박해 시절 로마 당국의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는 배교자를 강력히 배척하고 그들이 행하는 성사의 효력을 거부한 분파

2. 아리우스파 :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신에 종속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한 분파


8장 종교의 강요, 공존, 결합


"티리다테스 3세는 대내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촉진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레고리우스와 협력하여 국민들의 기독교 개종을 강행했다. 반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통치권을 부정하거나 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었고, 이교 종교 의식에서 황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듯이, 기독교회의 위계 구조에 황제의 자리를 마련하여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인도와 중국의 통치자들도 종교 의례를 변모시켰다. 인도의 굽타왕조는 오래된 힌두교 의례와 새로운 힌두교 의례를 결합하여 통치자의 지위를 강화하고 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도모했다. 반면 서진이 멸망하고 군사 갈등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중국에서 포교승들은 전통적인 중국의 종교 사상 및 사회 관행을 흡수하고 새로 등장한 복수의 통치자들의 필요에 부응하며 불교를 개조했다."(310)


"중국 역사 연대기에서 한나라와 6세기 말에 시작되는 수·당 시대 사이에 위치한 4~6세기는 정치적·군사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분열의 시기다." "불교는 이 시대에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크게 번창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층이나 일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자연재해, 전염병, 기근으로 점철된 끝없는 투쟁이었고, 간헐적인 외세의 침략과 내부 세력 다툼으로 인한 전란의 피해까지 감당해야 했다.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속성상 세속적인 야망은 부질없다고 강조하는 불교는 사람들의 염세주의와 공명했다. 동시에 선업을 쌓으며 착하게 살면 윤회(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사회 모든 계층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이러한 교리는 로마, 아르메니아, 그리고 인도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린 종교 체제와 대비된다."(340)


9장 종교와 통치


"아르메니아에서는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갈등이 훨씬 더 피비린내 나는 양상을 띠었다.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통치자의 야심, 기독교를 기존의 종교적·사회적 지형에 이식하려는 분투, 그리고 로마제국과 사산제국의 좌우되는 정치적·군사적·종교적 결정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한편 4세기 후반의 인도 굽타왕조에서는 통치자들이 구축해놓은 종교와 통치의 전략적 결합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안정이 도래했고, 이것은─로마와 아르메니아에서 특정 계열의 기독교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죄다 불법화했던 것과는 달리─종교적 다양성, 존경, 관용의 만개로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불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중화하기 위해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교의 서사를 연결하여 중국인들이 불교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불교계의 노력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 결과 황제가 불교로 개종하고 황실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351)


"379년부터 395년까지 로마 황제를 지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율리아누스가 360년에 사망한 후 집권한 여러 황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일정 기간 이상 로마제국 전체를 단독으로 지배한 황제다(그리고 로마제국을 단독으로 지배한 최후의 황제다). 380년 1월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후대에 익숙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한 위엄과 삼위일체 개념 아래〉 하나의 신성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식 노선을 따르지 않는 자는 '미치광이'로 규정되어 신과 황제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383년부터 모든 다른 종류의 기독교 신앙은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강경한 입장을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심각한 외부의 위협에 맞서 거대한 제국을 통합하고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358-60)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세상을 떴다. 그의 추도 연설을 맡은 사람은 종교와 통치의 관계에 뜻밖의 전환을 불러온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였다. 연단에 선 암브로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비록 그는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지만)가 창시한 기독교 통치 왕조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계속해서, 하지만 이것이 곧 콘스탄티누스 1세와 후대 황제들이 자처했듯이 황제가 교회의 최고 권위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며, 황제에게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주교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암브로시우스는 390년 테살로니카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한 책임을 물어 테오도시우스 1세를 파문했고, 황제는 수개월간 속죄한 후에야 성당 출입이 허용되었다. "로마 세계는 이제 하나의 종교를 가졌으나 세속적 통치자와 종교적 통치자를 따로 두었으며, 점점 더 후자의 권위가 강해지고 있었다."(362-3)


"찬드라굽타 2세와 후계자들의 치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특정 종교와 지배 계급 사이에 강력한 유대 관계가 존재하는 동시에 제국의 다양한 신앙이 포용, 권장, 보호되었다는 점이다. 찬드라굽타 2세의 즉위 5년째인 38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투라 석주는 시바를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힌두교 종파가 번영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관용 정책은 굽타왕조의 종교 관행이 가진 위계적 교리 중 상당 부분을 명빅해 거부했던 불교에까지 확장되었다. 실제로 굽타왕조는 관료를 따로 임명하여 불교, 그리고 마투라에 주재하는 수천 명의 승려 및 굽타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주재하는 수백 명의 승려를 관장하게 했다." "굽타왕조가 불교에 보여준 관용은 기원전 6~5세기 축의 시대에 불교와 함께 출현한 자이나교에까지 확장되었다. 자이나교가 굽타제국의 종교와 사회의 위계적 성격에 불교보다 더욱 격렬하게 반대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375-7)


맺음말


"4세기에 일어난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역동적인 변화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고대 세계가 연결되면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각 종교는 전파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변형을 거쳤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간다. 고대 힌두교와 불교가 특히 그런 경우이다." "교류와 혼합에 더해, 4세기가 주요 종교의 역사와 고대 세계사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인 또 다른 이유는 새로 등장한 종교가 로마 세계, 아르메니아, 그리고 인도에서 통치자들이 영토를 통합하고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난제를 풀어나갈 또 다른 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와 통치의 관계는 나라마다 제각각 달랐으며,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가 결합된 곳부터 적대 관계를 이룬 곳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평화와 관용과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종교와 전쟁과 폭력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손잡은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지만, 인간사는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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