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 인종주의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나인호 지음 / 역사비평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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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타자 증오의 이론적 원천으로서의 인종주의 역사관


"인종주의자는 낯선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혐오하고 미워한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인종주의가 단순히 우발적이거나 비합리적이고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양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진 대표적인 근대사상 혹은 체계적인 근대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모스가 적절하게 지적했다시피 인종주의는 광기의 우발적인 표출이나 편견의 산발적인 표현, 혹은 단순히 억압의 메타포가 아니다. 인종주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독특한 구조와 담론 양식을 지닌 완전히 발달된 근대적 사상체계이다. 인종주의는 과학에 대한 믿음, 근대적 철학과 종교사상, 시민계급의 도덕, 민족주의 등 서양의 근대정신을 대표하는 주류 사조와 결합되어 있으며, 근대 서양인들의 경험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자 근대 세계를 특징짓는 중심적 현상이다."(9-10)


제1부 계몽사상과 인종 우월주의 세계사의 탄생 : 크리스토프 마이너스를 중심으로


"근대적 인종주의의 등장은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대항해와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의 확대는 평화로운 교류를 통한 것이 아니라 정복과 문화파괴, 학살 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엔코미엔다(encomienda)와 수천만의 살상, 그리고 전통문화의 파괴로 대표되는 에스파냐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폭력적 정복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나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결과를 낳은 폭력적 현상이 있었는데, 당시 막대한 이문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검은 상아(black ivory)로 호명된 흑인노예무역과 흑인노예제로 특징지어지는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근대 초의 역사적 변화와 근대적 인종주의의 출현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행되었다."(28-9)


"15세기 중엽에 등장한 '유대인raza'라는 표현은 'raza'라는 용어의 두 가지 뜻, 즉 '혈통'과 '천의 얼룩진 부분'이 결합하여 '세례를 통해서도 지울 수 없는 얼룩을 지닌 유대인 혈통'의 의미로 쓰였다." "16세기 이후에는 또다른 인종 차별적 어휘들이 출현하고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메스티소'(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 '물라토'(흑백 혼혈, 원래 말과 당나귀의 잡종인 노새를 지칭하던 단어), '니그로'와 같은 단어들이 그것이다." "17세기까지 인종 개념은 단순히 '가계', '혈통'을 뜻하면서 주로 신분/계급과 관련된 사회적 용어로 쓰이거나, 이러한 용례의 연장선상에서 점차 타종족이나 종교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수집단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들어와 근대적 인종 개념이 탄생했다. 이제 인종 개념은 과학적(생물학적) 학술용어로 격상하면서 전 세계의 인간을 분류하는 보편적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0-2)


# 당시의 신생학문인 자연사(박물학)가 인종차별적 믿음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줄기'나 관념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


"마이너스는 독일 계몽사상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 지혜(Weltweisheit)" 교사로 불렀다. '세계 지혜'라는 개념은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거두 볼프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철학' 개념을 대체하여 종종 쓰이곤 했다. 볼프에 의하면 성서의 가르침인 '신의 지혜'에 대비되는 세속적 전체 지식이 '세계 지혜'였다. 특별히 '세계 지혜'라는 개념에는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담겨 있다. 이에 의하면 추상적 사변은 비난받아야 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란 곧 실용성, 진보, 이성의 독립성, 국가의 위엄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이너스는 인간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할 때 그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계몽〉이라고 했다. 여자들이 언어나 수학을 배우거나 농민들이 학술저서를 읽는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비판이 결여된 마이너스는 계몽사상이 실제로 얼마나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47-9)


"인류사적 세계사로 구체화된 계몽주의의 역사관은 무엇보다 환경결정론에 입각해 있었다. 당대의 박물학자, 철학자 및 역사가 사이에서는 환경결정론이 인류의 역사를 자연사와 결합시키는 매개체로 각광을 받았다. 이는 그다지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환경 조건들과 정신(psyche)의 관계를 탐구했고, 이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마이너스는 인류사 서술에서 '인종의 위계 서열', '유전/피', '자연법칙으로서의 인간 불평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인종결정론이다. 다수의 계몽사상가들이 인종 또한 환경의 산물이라는 대전제를 쉽게 넘어서지 못했고, 자신들의 백인종 우월주의적인 시각을 단지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을 때, 마이너스는 자신의 역사관에 근거하여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내부로 전위시켜 보편적인 인종 우월주의를 정초하려 했다."(62)


# '존재의 대연쇄'라는 형이상학적 자연질서를 '인종의 대위계'라는 경험과학적 자연질서로 대체


"다른 자연사가들이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인종 차별적 언사들은 무수히 발견된다." "특히 〈니그로와 타인종 일반은 백인종보다 자연적으로 열등하다〉는 흄, 〈니그로는 검기 때문에 우둔하다〉고 주장하고 〈백인종의 순수함을 보존〉할 것을 염원한 칸트, 노예제는 자연법칙에 위배됨을 지적하면서도 심지어는 〈흑인들이 인간일 수가 없다〉고 말한 몽테스키외 등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발언들은 계몽사상이 인종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인종 담론을 통해 타지역의 후진성과 대비되는 유럽의 문명적 성취 및 진보에 대한 자부심, 다시 말해 유럽중심주의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인종 담론은 인종의 불평등보다는 인종의 다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인종의 해부학적 특징과 지적·도덕적 소질을 직접적으로 결부시키는 데 조심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인종결정론이 아닌 환경결정론에 의해 주도되었다."(68-70)


# 인류의 인종적 차이의 근본적 원인은 기후/환경이라는 관점


제2부 혁명의 시대와 염세적 인종주의 역사철학의 탄생 : 아르튀르 고비노를 중심으로


"이 책은 고비노가 ('인종주의의 아버지'라는) 모든 기억들과는 달리 그가 계몽사상기의 인종 우월주의와 제국주의 시기, 특히 19/20세기 전환기의 인종 증오주의를 매개하는 인물이란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는 인종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인종주의의 매개자였다."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고비노가 결코 독창적인 인종이론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비노의 역사철학은 내용적으로 인류학, 언어학, 역사학 등 당대의 다양한 학문적 성과의 종합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역사가 모스는 고비노를 "인종주의의 조합자"라고 불렀다." "고비노의 역사철학은 염세주의적 문명비판, 귀족의 인종주의, 반민주적·반혁명적인 정치·사회사상을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인종 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구체제와 봉건적 신분질서를 옹호한 당대의 보수반동 이데올로기를 근대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89-90)


"특별히 프랑스에서는 전문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종'이 역사서술을 위한 용어로 부각되었다. 역사를 '인종 간 투쟁'으로 정의하고, '인종'과 '계급'을 동일시하면서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의 불평등성을 강조한 티에리에서부터 '인종'을─크건 작건 간에─역사진행에 대한 설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파악한 샤토브리앙, 기조 등을 거쳐, '단지 선사시대 및 상고시대의 역사에 있어서만 인종이 역사적 요소'로서 중요하다고 본 미슐레에 이르기까지 그 입장은 다양했지만, 역사서술을 위해 '인종'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범주가 되었다." "당대의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고비노의 『인종불평등론』은 '전체 역사' 혹은 '역사 자체'의 보편적 의미를 성찰함으로써 인종론적 역사해석을, 특별히 인종주의적 성격의 역사해석을 일종의 근대적 역사철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당대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94-5)


"『인종불평등론』은 세계사, 정확히 말해 세계 문명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특별히 프랑스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자국의 역사를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프랑스 역사는 한편으로 정복민인 프랑크(게르만)족과 다른 한편으로 피정복민인 갈리아족(켈트족) 혹은 갈로-로마족이라는 두 종족(ethnos)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다. 종족 간 투쟁의 역사는 훗날 여기에 '인종' 개념이 들어오면서 지배계급인 프랑크(게르만) 인종과 피지배계급인 갈로-로마 인종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정복민인 프랑크(게르만)족(인종)의 후손임을 내세워 지배계급으로서의 정당성과 봉건제적 정치체제의 적법성을 이러한 역사해석으로부터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계급'과 '인종/종족'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귀족의 인종주의'라는 프랑스 특유의 이데올로기다."(115-6)


"고비노는 '귀족의 인종주의'를 특유의 염세적 기조 속에서 '아리아 인종주의'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귀족의 지배계급으로서 정당성을 위한 역사적 전거를 중세 초에서부터 시작된 프랑스 역사에서 선사시대부터 시작하는 세계사로 확장했으며, 게르만주의를 아리아주의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했다. 이른바 '외래 인종에 의한 정복'이라는 것은 프랑스사의 시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동일한 현상이 나머지 세계에도, 즉 "인류의 아리아적 기원"에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문헌학자 존스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켈트어, 게르만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언어들 사이에는 공통된 어머니 언어가 있는데 그것을 '아리아어'라고 했다. 존스의 연구는 인종사상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언어군이 하나의 인종과 일치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로써 '아리아 인종' 관념과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피의 신화가 탄생했다."(122-3)


"1894년 2월 12일 독일에서 고비노협회가 창설되면서 고비노는 명실상부한 인종주의 역사철학의 아버지로서 부활했다." "고비노 르네상스는 제국주의가 그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일어났다. 고비노의 염세적인 인종주의 역사철학은 이제 인종 증오주의를 위한 무기로 변화되어갔다. 고비노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각국의 수많은 인종 과학자들, 인종 신비주의자들은 그의 인종 퇴화론을 진지한 현실의 경고로 받아들여 민족의 인종적 재생, 나아가 민족을 엘리트 인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매진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민족의 몸을 해하려는 안팎의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 및 박해는 이러한 민족 재생 프로젝트와 동전의 앞뒷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세기말의 인종 증오주의 속에서 고비노의 역사철학적 기본 개념, 이론 틀과 명제들, 그리고 역사 내러티브는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통해 수정되면서 다양하게 수용되고 변형되었다."(154-6)


제3부 인종 증오주의와 '악마적 인종'의 발명 1 : 유대인의 위험


"급진적 민족주의와 결합된 인종주의는 자신들의 민족 혹은 인종을 위협하는 '적대 인종'을 향해 '사탄주의적' 메타포를 사용했다. 1860/70년대 이후 1900년을 거치면서 서양의 인종주의 담론은 전통적 반유대주의를 새롭게 포장했을 뿐만 아니라, 황화론과 결합되면서 진행되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유대인이,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민족들, 즉 황인종이 위험한 '적대 인종', 나아가 무시무시한 '악마적 인종'으로 표상되었다. 이른바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 담론과 황화론은 종말론적 플롯을 지닌 인종투쟁의 역사관과 결합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종주의는 이전의 우월주의나 염세주의에서 벗어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 그러나 '적대 인종'에 대한 두 담론은 내용적으로는 명백히 상호모순 관계에 있다. 전자가 유대인으로 체화된 근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있다면, 후자는 황인종에 맞서 서양이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수호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0-1)


"그렇다면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어떤 점에서 새로웠는가?"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혹은 사회적·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유대인의 특정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그 자체'라는 추상적 존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유대인을 '우리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원흉인 악마적 인종', 그것도 모든 것을 '유대화'할 정도로 가공할 능력을 지닌 '악마적 인종'으로 추상화시켰다. 이에 상응하여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논리적 근거와 도덕적 정당성을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찾았다. 역사는 빛의 세력인 '우리 민족공동체'와 어둠의 세력인 유대 인종과의 투쟁의 역사이며, 현재는 유대 인종의 최종적 승리와 '우리 민족공동체'의 멸망을 바로 목전에 둔 역사의 마지막 환란 단계라는 종말론적인 인종투쟁 사관이 그것이다."(168-9)


"마르는 유대인을 악마적 인종으로 형상화하면서 매부리코나 안짱다리 같은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을 정형화시키는 전통적 토포스(topos)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의 인종적 특징을 정신적인 것, 18세기 식으로 말하면 타고난 자질과 성향(Anlage)에서 찾는다. 특히 "유대화"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대 인종의 내적인 소질과 성향이 독일인마저 오염시킬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유대 인종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혈연집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악마적인) 영적·정신적 실체를 의미했다. 이 같은 논리를 따를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유대화"되었다면 그는 정신적 혹은 내적인 유대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혹은 특정 자본가든, 나아가 근대 문명 전반을 대변하는 세력이든, 자신이 적대하는 모두는 유대화된 존재 혹은 내적인 유대인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악마 세력인 것이다."(171-3)


"독일과 서유럽에서 반유대주의 선동이 기대했던 정치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새로운 반유대주의 선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보다 완결된 형태와 스토리를 갖춘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이 그것이다. 이 음모론에 의하면, 유대인은 세계비밀정부 지휘하에─정부회합은 프라하의 공동묘지에서 밤에 열리는데─정치·경제·문화적 권력을 이용하여 각국을 다양한 위기와 혼란에 빠트리면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한층 진화하게 되었다. 유대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 가능한 무서운 능력을 지닌 채 모든 악의 원흉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세계정부 음모론의 진원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 비밀경찰의 지휘 아래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위서僞書인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은 이러한 음모론의 최상의 표현이자 유포 수단으로 기능했다."(192-3)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상세한 주석과 실증적 고찰이라는 살을 입혀 유대인 세계정부 음모론을 보다 그럴듯하게 스토리텔링하고 전 세계에 확산시킨 사람은 '자동차 왕'이라 불리는 미국의 기업가 포드였다. 포디즘(Fordism)으로 대량생산체제와 소비자 사회를 창조한 이 미국의 '국민영웅'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의 반유대주의의 성장과 확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포드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평화주의자로서 평화선을 유럽에 보내 전쟁을 중지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 평화선에서 이 전쟁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유대인 금융자본가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졌음을 듣게 되었고, 이후 유대인들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문건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위서임을 주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건의 사실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대변했다."(194-5)


제4부 인종 증오주의와 '악마적 인종'의 발명 2 : 황인종의 위험


"황화 담론 속에 '황화黃禍(Yellow Peril)'라는 표어가 등장한 것은 1895년 청일전쟁이 종식될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황화' 표어의 등장과 확산은 황화 담론의 대중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지표에 불과하다. 이 표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황화 담론이 대중적 담론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화'라는 표현이 없다 하더라도 황화 담론은 이미 청일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이 담론 속에서 아시아 민족들의 위험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 슬로건이 다양하게 동원되곤 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나치 이데올로기의 주요소 가운데 하나였던 '생활공간(Lebensraum)'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라첼은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 이민문제와 관련하여 1876년 '엄청난 인구를 가진 몽골 인종의 걷잡을 수 없는 홍수라는 의미'에서 "황색공포(Gelber Schrecken)"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미국에서는 비슷한 맥락에서 "황색유령(Yellow spectre)"이라는 표어가 등장했다."(215-6)


"계몽사상의 시대는 유럽인들이 동아시아인을 백인종에서 황인종으로 변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16/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선교사, 상인, 여행가들은 대체적으로 동아시아인을 '백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린네 같은 박물학자들은 동아시아인을 백인에서 퇴화된 변종인 '황색인'으로 분류했고, 블루멘바흐는 형질인류학적 관점에서 '몽골 인종'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마이너스가 블루멘바흐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인을 '못생긴 몽골 인종'의 하위 범주로 분류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윽고 19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인을 '황색 몽골로이드'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럽인의 역사의식 속에 확고히 뿌리박힌 훈족, 헝가리, 몽골의 침입에 대한 기억과도 연관이 있다. '러시아가 유럽을 정복할 것이고 나중에는 러시아 역시 타타르족에 의해 정복당할 것', '타타르인의 지역에서부터 새로운 민족이동이 일어날 것'과 같은 토포스들이 반복되곤 했다."(217-8)


"세기말의 인종주의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악마화시키면서 타자에 대한 차별의 이데올로기에서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해갔다. 이제는 타자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공동체의 타락/쇠퇴/몰락에 대한 염세주의적 우려 또한 악마적 적대 인종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북돋우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유대 인종의 '황금색 위험'이나 황인종의 '황색 위험' 이외에도 이른바 남아프리카의 헤레로(Herero) 부족과의 전쟁으로 촉발된 '흑색 위험'(흑인종의 위험), '적색 위험'(사회주의의 위험), '색깔 없는 위험'(인종 간 혼혈의 위험), '아메리카의 위험', '러시아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강조하는 표어들이 난무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찾아 헤매던 폭력적 인종주의는 국가와 민족들 간의 무한투쟁이라는 제국주의의 문법 앞에서 민족주의와 결합되었을 때 그 파괴력이 극대화되었다."(250)


제5부 내적 인종 증오주의의 탄생 : 민족주의에서 국가인종주의로


"인종주의는 이제 단순히 인종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머물지 않고 공격적인 인종 증오주의로 진화했다. 이러한 인종 증오주의는 외부의 적에 대한 국민/민족의 단결과 내적 통일을 강조했음에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내적인 인종 증오주의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은 '국민/민족을 엘리트 인종으로 만들기'라는 인종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제 내부의 적과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인종 재생 프로젝트는 인종주의가 과학 담론의 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정치 담론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수많은 다양한 과학적 인종이론들은 사회다원주의와 우생학 혹은 인종위생학이라는 공리를 공유하면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결합했다. 인종적 재생의 정치는 한편으로 국가적 효율성과 시민적 도덕규범의 이름으로 시민계급 여성에 대한 출산 강요 등 국민/민족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을 규제하고 억압했다."(255-6)


"19/20세기 전환기에 이르러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밀접하게 결합했다. 이 시기에 들어와 민족/국민의 인종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용어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과학적 인종주의의 전성시대였다. '생존투쟁', '자연선택과 최적자의 생존', '우수한/열등한 유전자', '인종 개량' 같은 사회다원주의와 우생학/인종위생학의 공리를 공유한 수많은 인종이론이 유행했다." "이러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인종위생학을 매개로 사유럽, 북유럽, 중부 유럽 및 남동 유럽의 여러 나라, 나아가 북미 지역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제 한 민족/국민의 인종적 자질이 그 민족/국민의 성격을 결정하며, 조국의 장래와 안녕은 민족/국민의 인종적 자질의 향상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 민족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어갔다. 특별히 이들은 우생학/인종위생학을 "민족주의의 과학"으로 간주했다."(271-2)


"또한 급진민족주의 담론에서는 '민족의 몸'과 이를 위협하는 '낯선 몸들'이라는 메타포가 빈번히 쓰이고 있었다. 원래 몸의 이미지는─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공동체를 '신성한 몸'으로 표현한 것처럼─전통적으로 공동체의 올바른 질서, 기원, 목표 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몸의 메타포는 종교적·정치적 공동체의 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급진민족주의자들은 몸의 메타포를 통해 생물학적, 의학적, 인종위생학적 개념들과 유추들을 사용하면서 민족공동체의 인류학적 확립을 의도했다. 나아가 '민족의 몸' 메타포는 푸코가 말한 이른바 '생명정치'의 영역으로 전위되었다. 남녀 성역할, 성정치, 인구정책 등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건강한 민족의 몸을 재생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남녀 고유의 역할이 장려되었으며, '민족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적 남성성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남성'과 '남성 아닌 자'의 구별 속에서 여성성이 혐오되었다."(273)


"인종과학자들은 국가인종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종종 그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일반 수준의 민족주의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곤 했다. 특히 인종과학자 가운데 일부는 인종 개량의 최종 목표로서 단순히 '인종의 순수한 보존'과 '건강한 민족의 몸'을 넘어서서 '완전한 인간', 즉 '초인超人으로서의 민족'을 지향했고, 이러한 사회생물학적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배제, 억압, 통제뿐 아니라 말살의 수단까지 고려했다. 이와 같은 급진적인 국가인종주의야말로 문자 그대로 한 사회 내에 〈살아 마땅한 자와 죽어 마땅한 자〉를 나누는 "생명 권력"(푸코)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국가인종주의를 인종과학자들의 과학적 인종주의로만 한정시킬 수는 없다. 인종 신비주의에 입각한 민족(인종)종교운동 역시 국가인종주의의 한 형태다. 그러나 과학적 국가인종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의 공공여론과 정부정책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275-6)


# 국가인종주의의 양대 이론적 지주 :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


"1883년 다윈의 조카 골턴은 인종 재생을 목표로 우생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탄생시켰다. 우생학의 밑바닥에는 '역선택'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이미 「유전적 재능과 형질」(1865)이라는 논문에서 골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개 상태에서는 생존경쟁에 의해 퇴화해야 할 허약한 개체가 문명사회에서는 살아남는다. 궁핍한 가정의 건강한 사람보다 유복한 가정의 병약한 사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다. (···) 문명사회에서는 자연선택의 법칙과 그 법칙에 의한 정당한 희생자 사이에 화폐와 제도가 방패막이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문명화의 결과로서 '역선택'이 일어나고, 이는 곧 인종의 질적 하락을 가져온다는 것이 골턴의 비관적 진단이었다." "'역선택'을 막는 처방과도 같은 우생학은 온 국민을 '정상'과 '비정상' 혹은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구분하고, '비정상' 혹은 '부적격자'를 제거하며, '정성' 혹은 '적격자'의 결혼과 생식을 장려하는 인종 재생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284-5)


제6부 범민족주의의 역사철학 1 : 루트비히 볼트만의 인류학적 역사론


"급진민족주의는 특히 해외 식민지가 적었거나 없었던 나라들에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범민족주의(pan-nationalism)로 발전해갔다.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대동아공영권 이념으로 발전한 범아시아주의 등이 제국주의 전쟁의 파노라마에 등장했다. 범민족주의는 자민족을 세계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선민 내지 초인적 지배 인종으로 내세우면서, 자민족의 지도하에 문화적 혹은 혈연적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 여러 국가의 국민을 모아 새로운 제국을 만들거나, 최소한 이들에게 '세계정책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적 기획이었다. 범민족주의에는 종족적·문화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결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나아가 게르만 인종에 속하는 모든 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던 범게르만주의는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룬 범민족주의의 결정판이었다. 범게르만주의는 분열된 독일민족운동 진영을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327-9)


"'역사·사회인류학' 학파는 바세르 드 라푸즈의 인류사회학에 준거하여 코카서스 인종, 즉 백인종을 그 형태학적 특징에 따라 유럽 인종, 알프스 인종, 지중해 인종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이러한 가장 인종주의적인 인종이론을 독일 민족주의와 결합시켰다. 먼저 이 학파는 인도게르만(아리아) 인종의 기원을 아시아가 아닌 고대 게르만족의 원거주지로 추정된 중서부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의 북유럽이라고 주장했다. 볼트만은 이러한 학설이 "새로운 시대를 연 진보"라고 자찬했다. 그동안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한 이 인종의 아시아 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학파는 언어학 이론과 인종사상의 결합물인 '아리아 인종'이라는 말보다는 '인도게르만 인종'이나 '북유럽(북방) 인종'이라는 인류학적 용어를 더 선호했다." "아울러 오랫동안 독일 민족의 우월함의 근거가 된 게르만 신화를 인종주의적으로 재구성하여 게르만 인종 우월신화로 변모시켰다."(348-9)


# 역사·사회인류학 학파의 주요 논지

1. 인류는 인종 간 육체적·정신적 고유성에서 불평등하다.

2. 인류가 출현한 홍적세 이후로 각 인종들의 근본적 속성은 불변하다.

3. 인종과 사회계급은 일치한다. 즉 인종 등급에 따라 사회적 위계질서가 구성된다.


"볼트만은 역사를 '우수한 자들에 의한 문명의 발전─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우수한 자들의 퇴화와 사멸'이라는 반복적 사이클이 연쇄적으로 이어진 끝없는 순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진보와 몰락의 순환사관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 인종 진화 관념은 다윈의 무목적적인 진화 관념에 충실하다. 볼트만은 인류 전체의 끝없는 문화/문명적 진보와 완성을 주장하는 계몽사상가들과 일부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진보낙관주의를 "환상적인 표상방식", "미신" 등으로 폄훼했다. 그의 진보낙관주의에 대한 비판과 순환사관은 문명발전을 이룰 수 있는 재능과 천재성은 일부 인종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자연민족'들은 유럽인 및 문명과 조우하면 필연적으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볼트만은 그 멸망의 주원인으로 특히 절멸전쟁을 꼽았는데, 이 논리를 따르면 '자연민족'들에 대한 절멸전쟁은 역사법칙을 따르는 정당한 행위가 된다."(356-7)


제7부 범민족주의의 역사철학 2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인종투쟁의 문화사


"1900년을 전후로 사회인류학과 사회생물학 연구 분야 전반에서 인종 개념 자체에 대한 신념이 도전받고 있었다. 피르호는 게르만 인종과 유대 인종을 가르는 순수한 인종의 경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두개골 측정학 연구의 결론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처럼 인종과학이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에서 인종주의의 비합리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른바 "인종 신비주의"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우생학, 사회인류학, 인종사회학 등 유물론적·실증주의적 인종과학은 인종 이념에 합리성과 객관성의 외피를 덧씌웠다. 인종 이념은 결국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고,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갖느냐 아니냐는 궁극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였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인종 신비주의는 인종의 신화적 기원과 인종의 고유한 성격을 만들어낸 정신적 혹은 영적인 실체를 내세웠다. 이를 신봉하는 자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실패했을 때에도 여전히 인종의 신화, 상징, 신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견지했다."(371-2)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종주의는 특히 반유물론적·반실증적인 지적 조류가 널리 퍼져 있던 독일어권 중부 유럽에서 유행했다. 이곳의 시민계급 문화는 전통적으로 도덕과 가치의 보루였던 기독교와 교회의 힘이 약화됨에 따라 나타난 세계관적 방황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합리주의, 물질주의, 도시화, 기술화 및 산업사회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전반적 불쾌감 속에서 많은 사람은 새로운 신, 새로운 예언자를 찾아 헤매었다. 이들 독일어권 시민들의 "방랑하는 종교성"은 자유주의 신학 및 자유종교 공동체, 자유사상가 운동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속화된 종교들, 즉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일원론에서부터 쇼펜하우어 컬트, 신적 진리의 신비한 체험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지학神智學 및 인지학人智學 등의 비교秘敎들을 거쳐 채식주의 및 생활개혁 운동, 반더포겔 운동, 사회개혁윤리협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체종교와 유사종교들에서 안식을 찾았다."(372-3)


"체임벌린은 인종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인종 개념을 과학적 인식의 대상에서 깨달음의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모든 것은 인종으로 귀결된다'는 신념이 기반하는 세계관적 토대를 유물론에서 관념론,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으로 전위시켰다. 그에 의하면 인종은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총체적 '형상'을 관조하는 것이었고, 인종의 의미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것, 다시 말해 '직관'과 '본능'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었으며, 인종의 고유한 성격은 본질적으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구축하고자 했던 새로운 인종이론에서 중요했던 것은 인종문제에 관한 검증 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이 문제가 현재의 삶을 위해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19세기의 기초』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모든 지식보다 더 높고 신성한 것은 바로 삶 자체이다. 여기에 기록된 것들은 체험된 것들이다.〉"(398)


"괴테와 칸트에게서 체임벌린은 게르만적 세계관/종교의 사상적 주춧돌을 발견했다. 괴테는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자연연구가로도 유명한데, 무엇보다 자연을 수학과 인과율의 원리에 가두어버린 기계론적 자연관에 반대하면서, '예술가적·건축가적 상상력'을 매개로 예술과 과학을 결합한 독특한 자연철학을 전개했다." "체임벌린이 괴테의 이러한 자연신비주의를 통해 실증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무기를 얻었다면, 독일 관념론의 시조가 되는 칸트를 통해서는 유물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관적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과학적 인식론의 공세 앞에서 도덕과 종교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체임벌린에게 칸트는 유물론적 일원론의 공세에 맞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믿음의 세계를 보호해준 이원론적 세계관의 수호신이었고, 이성을 넘어서 신비주의로 빠진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종이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준 스승이었다."(400-1)


"『19세기의 기초』에서 체임벌린은 무엇보다 서양의 근대적 역사철학의 기본 공리인 "인류의 진보" 개념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오로지 "게르만 인종의 발전과 번영"만이 실제적 진보라고 역설한다. 이때 이러한 '진보'는 역사의 '완성'을 전제로 한 채 역사진행 과정을 해석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정 인종의 뛰어난 문화적 성취 능력과 고유한 발전 방향만을 강조하는 특수 개념이면서, 동시에 '퇴화' 개념과의 내적 연결성 속에서 적대 인종과의 대립과 갈등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는 투쟁 개념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그의 진보 개념은 인종 우월주의와 인종 증오주의를 동시에 표현하는 폭력적인 사회다윈주의의 슬로건이었다. 물론 당대의 많은 인종주의자들은 인류 전체의 진보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인류 진보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을 무엇보다 진보낙관론적 사회다윈주의자들, 나아가 고비노와 같이 생물 분류학적·형태학적 인종 개념에 근거한 인종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연결했다."(417-8)


보론 : '독일 민족의 범게르만적 세계제국' 프로젝트


에필로그 : 인종주의 역사관의 특징과 20세기의 조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서양의 인종주의는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본격적인 증오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우리'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동시에 신체적·지적·도덕적으로 인종적 퇴화에 직면해 있다는 위기의식이 인종 증오주의의 원천이었다. 이 시기 인종 증오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역사 서사는 그 다양한 결에도 불구하고 역사진행을 묘사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생존투쟁'과 '자연선택' 및 '역선택'으로 요약되는 다윈주의와 우생학의 기본 개념에 준거했다. 이제 기존의 '융합', '혼혈', '퇴화' 개념은 이러한 개념들의 의미 장場 속에 편입되었다. 이를테면 잘 관리된 혼혈은 자연선택, 잡혼은 역선택에 속한다. 인종 증오가 표현된 역사 서사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역동적인 역사상을 제시했다. 역사란 '우리 민족/인종'과 '사악한 적대 인종(혹은 모든 우리의 적)' 간에 벌어지는 '생존투쟁'과 '자연선택'의 항구적인 과정으로 묘사되었다"( 464-5)


"인종주의 역사 서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에 상응하여 그것이 인종 증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거로 활용되면 될수록, 점점 더 허구와 사실, 신화와 역사 간의 경계가 사라진 역사 판타지로 바뀌어갔다. 이 속에서 인종 간 투쟁은 마니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적인 존재'와 '동물적 존재', 나아가 선과 악의 대립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인종주의 역사 서사는 본질적으로 신화를 지향했다. 예를 들어 '아름답고 우월한 존재'와 '못생기고 열등한 존재' 혹은 '고결한 피'와 '천한 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전자의 찬란한 성취와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는 인종 신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신화는 가능한 한 '실제 일어난 것(res gestae)'으로서의 역사에 기반하곤 했다. 동시에 이러한 신화적 역사는 자신의 권위와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 성과와 이론을 끌어들였다. 이제 더 이상 역사의 신화화가 아니라 신화의 역사화가 인종주의 역사 서사를 특징짓게 되었다."(465-6)


"인종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백인 인종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인종주의도 출현하곤 했다. 저항적 인종주의는 백인종을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지만, 동시에 백인 인종주의의 역사관과 서사 및 논리를 모방한다." "19/20세기 전환기에 일본이 주창한 범아시아주의가 그러하다. 악마 혹은 귀축鬼畜과도 같은 백인종에 맞서기 위해 황인종의 단결을 주장했던 일본인의 인종주의가 개화사상가로 시작해 친일부역자로 일생을 마친 윤치호에게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덜 알려진 사실은 『환단고기』를 숭배하는 자칭 민족주의 역사가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저항적 인종주의의 포로라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고비노, 볼트만과 체임벌린 같은 범민족주의적 인종주의자, 나아가 서양의 여러 인종 신비주의자들을 모방한 듯 우리 민족은 수메르 문명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문명의 건설자요 지배자인 환족의 후예라는 역사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4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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