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3
정태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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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식민지자본주의란 기업가를 뒷받침할 주권국가가 없는 가운데 외래 식민권력의 무력을 기반으로 형성된 식민지사회에서 전개되는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개념입니다. 조선 경제의 축적기반이 됨은 물론 축적의 보루가 되는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외래 권력과 외래 자본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되는 자본주의지요. 한마디로,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 없는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식민지자본주의 경제는 조선인을 위한 경제정책이나 분배정책에 따른 내적 발전이 불가능한 구조였습니다." "일각에는 식민지 경제가 성장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상한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이 질문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식민지자본주의에서 개발과 성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수탈이 가능했겠습니까? 문제는 개발과 성장의 주체가 누구였으며, 식민지자본주의의 귀결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지요."(16-7)


"경성제대 교수였던 스즈키 다케오가 해방 직후에 쓴 글은 역설적으로 당시 한국 경제의 실상을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역시 일제하의 조선 경제에서 자원개발과 공업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는 해방 이후 조선 경제의 구매력이 크게 축소된 이유로 재조선 일본인 및 일본 자본의 철수와 빈농층의 퇴적을 지적합니다. 결국 그는 해방 이후에도 한국이 일제시기처럼 식량공급국가로서 1차 산품을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에서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수직적 한일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의 주장에서 두 가지가 눈길을 끕니다. 먼저 40여 년간의 식민지 '개발'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한국은 여전히 빈농층이 다수를 차지하는 농업국으로 남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1942년 현재 한반도 총인구의 2.9%에 불과했던 극소수 일본인들이 퇴각한 탓에 구매력이 격감했을 정도로, 조선 경제는 철저하게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18)


"일제시기 이래 강고했던 전통적 식민지상의 뼈대는 '제국주의 이중성론'과 그에 따른 '교조적 봉건론'이었습니다. 즉 제국주의는 식민지사회를 본국처럼 자본주의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식민지사회에 봉건제를 온존·강화시킨다는 논리이지요. 이는 엄연히 식민지 경제에 관철되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실체를 부정하고, 식민지사회를 자본주의보다 뒤떨어진 봉건사회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억지스러운 논리를 주장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고 발전적인 것인데 제국주의가 그것을 식민지에 이식할 리 없다는 근대주의의 관성에 휩쓸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식민지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일제가 "하여간 빼앗아갔다"라는 타성적 인식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이를 '원시적 수탈론'으로 개념화할 수 있겠네요. 일제가 어떻게 수탈했고 지배했는가에 대한 과학적·현실적 분석이 결여된 논리였습니다."(26)


"식민지 자본주의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교조적 봉건론은 근대-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본래의 뜻과 달리 사실은 근대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호미와 보습밖에 모르는" 미개한 조선 농촌을 "청소할 수 있는 유일한 대도大道는 조선 농업을 근대화의 방향으로 재편성하는 것이고, 농경 기술을 기계화하고 농민생활에 과학과 문명을 취입하도록 하는 방법"뿐인데,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촌 재편성정책'이 그것을 실현했다는 거지요. 결국 근대주의의 박제화된 봉건론은 일제가 조선사회를 근대화시켜준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동화정책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과거 식민사관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제하 조선 경제를 인식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식민지 경제에 자본주의를 적용할 수 없다면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던 이들입니다."(29-30)


1부 구한말·대한제국 시기


"196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는 일제가 심어놓고 해방 후까지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식민사학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자주적인 흐름을 밝히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본주의 맹아론'이었습니다."(44) "그런데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개념보다는 '내재적 변화 또는 발전'이라는 개념이 19세기까지 조선사회의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한 폭넓은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 고유의 탈중세적 변화와 발전이 사회·경제·문화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국가주권을 빼앗기면서 자체의 힘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탈중세 방향의 변화가 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종속적으로 흡수·재편되거나 배제되었다고 보는 시각이지요. 사실 내재적 변화 또는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하지요. 모든 사물에 변화하지 않는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워낙 한국사만은 그렇지 않다는 식민사학의 영향이 해방 후에도 강하게 남아 있다 보니 그걸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지요."(46-7)


"어느 나라건, 자본주의가 발흥할 때는 국가권력과 유착하면서 특권을 가진 계층이 시장을 지배합니다. 일본에서는 정상政商이라고 부르지요.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도 그렇지요. 한국사에서 탈중세의 궁극적 방향이 어떻게 갈 것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서민지주, 객주나 여각, 개성상인이나 경강상인 같은 사상私商집단, 혹은 시전상인이나 보부상들이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주도하는 경제를 만들어가려고 애를 썼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장악하자마자 시행한 화폐정리로 조선 상인의 부는 일거에 소멸되고 일본인을 위한 시장이 조성되었습니다." "일제나 식민사학이 주장한 대로 조선사회 내의 역량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일제가 이런 정책을 시행할 이유가 없었지요. 결국 조선인 자본의 성장은 식민정책으로 막히거나 왜곡되어 이후 존재형태나 인적 구성까지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51-3)


"잡세혁파와 특권상업 폐지 등 갑오정권의 자유주의적 상업정책은 외상外商의 경제침탈에 대응하는 방식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에 반해 대한제국의 상업정책은 특권상인의 보호육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상인들에게 독점특권을 주고 세수입을 거두는 형태로 이해관계를 나눈 거지요. 어느 나라에서든 자본축적의 초기단계에는 영세상인을 침탈하고 시장을 독점하는 정책이 나타납니다. 1895년에는 상인단체와 국가권력의 연합체인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고 민간상인조직은 금지되었지요. 관료가 상무사 임원을 맡음으로써 국가가 상인단체를 적극 통제한 것입니다." 대한제국 시절까지 개항장의 거래를 독점하던 "상인단체들은 특히 을사조약 체결 뒤에 그들의 보루였던 관허제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즉 객주는 외상과 경쟁하기 위해 정부-황실과 결탁하면서 특권을 통해 상권을 유지하려 했지만 국가주권이 없어지면서 기둥을 잃게 되었던 것이지요."(61-2)


"일제가 조선에서 일본은행권을 유통시키지 않고 한국은행권-조선은행권을 따로 발행한 가장 이유는 조선에 일본은행권이 유통되면 유사시 일본은행권의 태환기초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은행권은 1910년대부터 만주에 유통되어 일제의 각 점령지역에서 유통되었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은행은 일본 전비조달의 핵심기구가 되어 중국 점령지의 엔계 통화권을 매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특히 조선은행권 발행제도가 1941년 최고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발행준비를 할 수 있는 '최고발행액 제한제도'로 바뀜으로써, 중국 점령지와 만주의 엄청난 인플레이션 파고가 고스란히 점령지·식민지 민중의 고통으로 전가되었습니다. 일본 경제는 조선 경제를 방벽 삼아 인플레 부담을 최소화했지요. 즉 조선은행과 일제가 식민통치비를 현지에서 조달하기 위해 고안한 화폐발행제도인 조선은행권은, 조선 경제와 무관하게 일제의 대륙침략정책 수행을 위한 도구로서 운용되었습니다."(74-5)


2부 일제 식민지 시기


"19세기 후반 들어 상품화폐경제와 토지상품화가 촉진되어 먼 지역 사람과의 거래가 많아지다 보니, 사문서를 넘어 국가가 소유권을 공인하는 제도가 필요해졌습니다. 갑오개혁도 소유관계를 근대법 형태로 보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식산흥업을 추진하자는 것이었지요. 또 개항 후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확대해가는 상황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한성부는 1893년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광무양전은 이런 변화된 상황에 따라 전통적 관습을 토대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로 개혁해 재정을 확보하고자 1898~1904년에 시행된 것입니다." "모든 토지의 소유권에 대해 국가의 법인을 꾀한 광무양전은 이전 시기의 양안과 질적으로 달랐고,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조선토지조사사업'과 목적이 같은 것이었어요. 그러나 광무양전은 전국 군의 2/3 정도 되는 218개 군의 조사를 마친 시점에서 메카다가 재정고문으로 부임하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95-6)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의 토지약탈에 중점을 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고'주의를 잘 몰랐던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겼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지요." "1980년대 들어 연구수준이 높아지면서 토지약탈론과 전혀 다른 인식들이 모색되었습니다. 즉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근대적 소유권과 지세제도 확립은 대한제국 정부가 광무양전을 통해 지향했던 지주적 개혁을 계승했다는 것이지요. 두 사업에 반영된 계급관계가 같았고 일제가 식민지 지주제를 체계화하기 위해 지주층을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둘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대한제국은 대한제국은 근대화의 축적기반─개혁의 물적 토대를 구축해 지세수입을 증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를 저미가·저임금정책을 위한 식민통치의 재정기초로 삼았습니다. 결국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농업을 일제의 수탈공간으로 바꾼 거죠."(101)


"일제 시기에 조선은 식민지정책에 따라 일본으로 무관세로 싼 값의 쌀을 수출해서 일본 경제의 임금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미곡생산지대로 규정되었지요. 이를 '식민지 지주제'라 부릅니다. 경제성장론자들은 쌀을 일본에 파는 거니까 거래일 뿐 수탈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조선인의 국가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요. 일본 자본주의의 절대적 필요 때문에 일본으로 수출되는 식량이었으므로, 관세주권을 통해 조선 내 축적 조건을 만드는 데 활용했겠지요. 또 농공 간 협상가격차 때문에 농업국으로만 남을 수 없었을 테니, 공업화를 추진하는 재원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조선인에게는 '국가'가 없었습니다.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농업국과 공업국이 '서로 비교우위에 있는 영역으로 교역하면 상호이익'이라는 식으로 식민지 지주제 아래의 쌀 단작單作 경영을 시장질서에 따른 거래의 결과라고 우기면 참 난감하지요."(111-2)


"식민지자본주의란 국가가 없는 가운데 식민지에서 전개된 자본주의의 운영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개념입니다. 즉 자본축적기구의 확보를 위해 조선인 자본가계급을 뒷받침해야 할 국가수립이 압살된 채, 일본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이 조선 경제의 운영과 정책결정의 주체가 된 경제체제이지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식민지자본주의의 재생산과정은 식민 모국과의 종속적 연결로 완결되기 때문에, 조선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에 따른 경제구조를 만들지 못합니다. 둘째, 이런 재생산과정은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부의 유출을 수반하고 이를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결정합니다. 셋째, 식민지자본주의는 조선의 직접생산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하지만, 직접생산자의 재생산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의 필요에 따라 조선인과 조선 경제를 고려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점에 초점을 두거나 고려할 책임도 없었습니다."(113-4)


대공황을 전후하여 조선 농가가 파탄하고 민중 운동이 급성장하자 "1931년 우가키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전의 지주층 중심 농업정책의 전환을 모색하고 1931년 만주침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조선공업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식민지 공업화는 1930년대 전반기의 조선공업화, 1930년대 후반기 이래의 병참기지화정책 등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본은 대공황에 따른 위기를 타개하고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폐쇄적인 '엔블럭' 자급자족 전략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 중요산업별 생산·판매 독점체인 카르텔체제를 규정한 '중요산업통제법'(1931. 4)을 시행했는데, 여기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부자본이 대거 발생했지요. 그리고 일본을 정精공업지대, 조선을 조粗공업지대, 만주를 농업지대로 만들자는 일선만日鮮滿 블록을 형성하여 중국 침략과 구미세력과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과 만주를 잇는 조선은 풍부한 석탄, 전력, 노동력 등을 활용하는 공업지대로 설정됩니다."(135)


"관동군사령관을 지낸 뒤 1936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1938년에 병참기지화정책을 천명합니다." "중국침략을 목전에 둔 1937년 3월부터 '중요산업통제법'을 조선에 적용하고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합니다. 경금속, 석유 및 소다, 황산암모늄, 폭약, 공작기계, 자동차, 철도차량, 선박, 항공기, 피혁 등 중요산업으로 지정된 업종을 중심으로 통제경제가 시작된 것이지요. 지하자원 개발, 가공공업, 인조석유공업 등이 중요업종이 되었습니다. 즉 병참기지화정책은 일본이 전쟁을 위해 조선을 "내지경제의 대륙전위"로 규정하여 자금, 물자, 인력 등 조선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군수(관련)산업에 집중하는 옥쇄玉碎 동원책이었습니다." "병참기지화정책의 특징은 광산개발에 집중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중요광물의 종류가 적었기 때문이었죠. 1937년 이후의 광산액(41억 2700만여 엔)이 식민지 기간 전체의 84%나 차지했습니다."(136-9)


"식민지 공업화의 와중에서도 납입자본금의 조선인 회사 비중은 1931년(10.3%)보다 1942년(8.3%)에 축소되었습니다. 영세규모였던 조선인 공장은 화학, 식료품, 요업, 방직공업 등에서 두드러졌습니다. 정어리에서 어유魚油를 추출하여 일본질소 등에 공급하는 화학공업처럼 대부분 하청업이었습니다."(142) "또한 고용구조는 미숙련 단순노동과 강제동원 및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총노동자수에 대한 기술자수의 비율은 1937년(2.7%)보다 1940년(3.5%)에 약간 늘어났지만, 기술자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교육정책은 조선인 기술자양성과 고급기술교육을 억제하는 것이었지요." "'조선공업화'는 자본과 기술 측면에서 일본인 대자본, 특히 일본에서 건너온 대자본이 압도하는 가운데 조선 산업과의 연관이 약해 하청구조하에 이루어진 지역 공업화였습니다. 일국적 차원의 재생산구조 확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144-5)


"조세나 예금만으로 일제의 자금흡수는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시행한 것이 강제저축이었습니다.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 박탈감을 상쇄시킨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도 훨씬 효율적인 수탈방식이었습니다. 강제저축액은 1936년부터 패전 때까지 80~90억 엔 정도에 이르러, 조세의 3~4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더구나 매년 10배 이상 뛰는 물가고 속에서 예금은 바로 손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도 강제저축이 '양호한' 성적을 거둔 것은 일본에서보다 훨씬 강제력이 컸기 때문입니다." "일반농가는 저축부담 때문에 영농지출비와 생활비를 아무리 줄여도 적자를 면할 도리가 없었지요.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증언들이 공연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증산의 절대요청에 따라 비료비를 줄이기 위해 퇴비사용을 독려했지만, 징용이나 징병 등에 따른 노동력 유출로 갖고 있는 모든 노동을 소진해도 점차 생존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157-9)


"강제저축으로 흡수된 자금은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국공채 매입에 충당되거나 전쟁관련 업종의 대출자금으로 대부분 유용되었습니다. 패전 때까지 각 금융기관과 개인이 매입한 일본국 공채액은 약 106억 엔(민간보유액 추정치 약 15억 엔 포함)이 넘는 천문학적 수치였습니다." "거기다 조선은행은 만주로 군사비를 송금하는 업무의 중개과정에서 일시 보유하게 된 일본은행권으로 일본 국채를 매입하고, 이 일본 국채를 보증준비로 조선은행권을 증발했습니다. 발행고는 1936년 기준으로 1945년 8월 14일까지 무려 23배(연평균 2.6배)나 폭증했습니다. 이런 식민지적 발권제도는 국채매입량만큼 일본은행권 통화량을 줄이는 반면, 조선인에게 인플레를 전가시키는 장치였지요. 직접적 물자수탈이나 자금수탈 이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입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후유증은 해방 후까지 계속되어 한국의 경제재건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159-60)


3부 해방 이후


"해방 직후 조선에서 은행을 비롯한 중요기업은 모두 일본인이나 조선총독부 소유였습니다. 새 국가가 일단 이를 국유·국영으로 접수하는 단계를 설정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요. 이념적 잣대 이전에 현실적 문제였던 겁니다. 국유·국영이라는 단어에 집착할 게 아니라, 왜 그런 개념으로 경제재건을 구상하게 되었는지 봐야 합니다. 물론 새로 수립된 국가가 정비된 뒤 국유·국영 자산을 민간에 불하할 것인지, 국유·국영형태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여부는 국가의 정책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 단계가 되면 이전의 국유화와 전혀 다른 차원의 과제가 되는 거죠. 즉 임정의 경제정책안이 국유·국영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두고 특정 이념에 따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냉전시대의 이념을 일제시대에 그대로 투영한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입니다. 이런 인식으로는 해방 후 힌국 우익의 본산이 된 한국민주당이 '주요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를 주장한 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185)


"제헌헌법은 국유·국영 중심의 경제질서 위에서 사적 소유, 재산권 행사, 영리추구, 무역을 국가의 통제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즉 공공의 필요에 따른 재산권에 대한 국가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의 권한,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緊切한 필요에 따른 사기업의 국·공유 이전, 국가의 경영통제·관리 권한을 규정했습니다. 물자부족과 물가고 탈피가 시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활수요 충족이 사회정의의 기본이 되었고, 균형 있는 국민경제 건설의 관점에서 개인의 경제 자유를 국가가 제한한 것입니다. 근로자의 단결·단체교섭·단체행동 자유에 대한 보장, 사기업 고용 근론자의 이익분배 균점권도 규정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신장해야 한다는 명분을 누를 자본가층의 영향력은 당시에 그만큼 약했습니다. 또 농지의 농민분배원칙도 규정했습니다. 즉 제헌헌법에는 분단을 지양하려 했던 좌우연합론-경제계획론 정서가 깊숙이 배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94)


"토지개혁은 남한의 공산주의화 억지, 공업화 추구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지가 필요했던 우파 정치세력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민주당도 토지개혁을 하더라도 토지의 대가를 받아(유상매수) 공업자본가로 재출발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 겁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해방 초기에 조선공산당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안을 오히려 경계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상몰수대상은 일제와 민족반역자, 조선인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의 토지와 자경지 외의 중소지주 토지였고, 오히려 소작료 3·7제를 주장했습니다. 이조차도 좌경화된 주장이라고 비판하면서 1945년 10월에는 몰수대상을 일제와 친일지주로 제한합니다. 자신들을 지지할 우군을 넓히기 위해서였겠지요." "세간의 오해와 달리, 토(농)지개혁은 사회주의화가 아니라 안정적인 소농체제를 통해 농민을 체제내화하고 생산력을 높여 자본주의 공업화를 뒷받침하는 필수적인 경로입니다."(219-20)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상호 고양관계입니다. "역대 대통령의 집권기간 동안 연평균 실질성장률을 보면 전두환 시기 9.3%, 박정희 시기 8.5%, 노태우 시기 7.0%, 김대중 시기 6.8%입니다. 수치상 박정희 시기가 두드러진 게 결코 아니죠. 김영삼 정권이 초래한 금융위기 부담을 안고 집권한 김대중 정권기에 비하면, 절대빈곤사회에서 경제규모가 적어 투입한 대로 바로 성장효과를 낼 수 있었던 박정희 정권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입니다. 일정하게 민주화가 제도화되고 사회 분위기가 일신되면서, 경제규모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급증한 이후까지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역적자는 박정희 시기에 233억 달러나 되었지만, 김대중 시기에는 재임기간이 1/4 정도에 불과한데도 846억 달러의 흑자를 보였습니다. 통계수치만 봐도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신화의 과장된 정치적 의도가 드러납니다."(251-2)


"해방 후 한국의 두드러진 경제성장은 기나긴 민주화투쟁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정치적 제도화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즉 생산력과 민주화의 순환논리가 정착되어간 것이지요. 간과해선 안 될 상식이 있습니다. 이 과정이 국가주권을 회복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이에요. 비록 대외종속성을 띠었지만, 국가권력이 국가주권을 회복한 가운데 분단국가의 부실한 내용을 채우려는 국민들의 민주화역량을 의식하고 이에 능동적·수동적으로 대응한 결과였습니다. 민주화의 과제는 끝이 없지만, 그 일차적 출발점은 통치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주권국가의 존재에서 비롯됩니다." "국가의 역할이 효율적으로 수행되고 사회민주화수준이 높아야 생산력의 장기적 발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 속에 통합을 목표로 하는 민주화가 정착될 때, 시장과 기업을 뒷받침하는 국가의 효율적 경제운영이 비로소 높은 성과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252-3)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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