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8
정재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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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본제국의 유산과 남북 분단국가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키치가 보건대,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한국강점을 '일한 양국이 대등하게 합일'하는 것처럼 이해하여 '합방'이나 '합병'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자가 있었다. 이는 일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인이 정말로 일본인과 동일한 대접을 해달라고 달려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완전히 폐멸로 돌아가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폐멸'이나 '식민지' 같은 노골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냐고 항의한다거나, 외국이 일본에 대해 한국을 침략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해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폐멸'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선택하여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양두구육'이라는 고사성어가 딱 어울리는 작태였다."(35)


# 일제와 맺은 조약(한일의정서~한일병합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한국의 입장

1. 강폭·협박에 의해 강제로 맺어졌다.

2. 조약 정본에 황제의 서명날인이 없다.

3. 조약에 대한 비준서가 없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부당한 강점(군사점령)이다.


# 한국(당시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한일의정서~한일병합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일본의 입장

1. 강제행위가 있었더라도, 국가 대표자에 대한 협박인지, 국가 자체에 대한 협박인지 국제법상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2. 조약서 정본에 기명 조인하는 사람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특명전권대사, 공사 또는 외무대신인 경우가 통례이다.

3. 모든 국제협정에 비준서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비준서가 없다는 사실이 무효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2장 한일조약 체결과 국교재개


# 한일조약과 부속협정

1. 기본조약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 부속조약 : 청구권협정,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 어업협정, 문화재협정


# 한일회담의 역사

1. 예비회담(1951. 10. 20~1952. 2) :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와 어업 문제 해결 등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거부함

2. 제1차 회담(1952. 2. 15~1952. 4. 21) : 일본이 한국의 대일 청구권과 연합국의 대일 배상청구를 상쇄할 목적에서 한국에 남겨놓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함

3. 제2차 회담(1953. 4. 15~1953. 7. 23) : 한국은 일본의 대한 청구권 철회를, 일본은 평화선 철폐를 요구함

4. 제3차 회담(1953. 10. 6~1953. 10. 2) :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식민지배가 정당했다는 망언을 하면서 무산됨

5. 제4차 회담(1958. 4. 15~1960. 4) : 기시 노부스케가 구보타 발언을 철회하고, 106점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등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으나 재일한인 '북송' 문제와 4·19 혁명으로 중단됨

6. 제5차 회담(1960. 10. 25~1961. 5. 15) : 5·16 군사정변으로 중단됨

7. 제6차 회담(1961. 10. 20~1964. 4) : 동아시아 안전보장을 위한 경제협력론이라는 전제 하에서 진행. 청구권을 경제 협력 방안의 하나로 다루는 선에서 합의함

8. 제7차 회담(1964. 12. 3~1965. 6. 22) : '기본조약' 내용을 최종 검토하고 문서를 작성함


"6차 한일회담에 임한 이케다 정부가 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한국 정부의 의중을 꿰뚫은 것이었다. 이케다 정부는 경제적 곤란과 개발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군사정부에 유상·무상으로 일본 역무役務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선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하기 위해 1962년 10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여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와 담판 짓도록 했다. 이때 작성된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메모에는 자금의 명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한국은 '청구권자금'으로, 일본은 '경제협력자금'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93-4)


"7차 회담에서 한국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협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과거 조약이 일본의 패전 혹은 대한민국의 수립까지는 유효하며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은 한반도 전역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주장했고, 일본은 북한을 고려해 유엔 총회 결의에 명시된 범위의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결국 구舊조약 무효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무효이다'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유일 합법성 문제는 '유엔 총회 결의 제195(3)호에 명시된 바와 같은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문구를 채택했다. 한국 정부는 '이미'라는 시점을 구舊조약을 체결한 때부터로, 일본 정부는 일본의 패전 이후로 해석했다. 한국의 관할권도 한국 정부는 한반도 전체를, 일본 정부는 38도선 이남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후처리의 근본과 관련된 역사인식의 괴리를 메우지 못한 채 마무리된 '기본조약'은 두고두고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화근을 남겼다."(96)


"한일 간의 청구권 논의는 연합국과 일본 간의 전후처리 협상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다. 곧 미국의 대일 강화 방침인 배상요구 포기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이를 방패삼아 한국에 법적 근거에 입각한 청구권 문제 제기를 요구하고 경제협력 방식의 채택을 유도했다. 미국 주도의 전후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개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청구권협정'에서 불거진 문제는 민간 차원의 보상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국가보상의 방법을 채택하도록 압박함으로써 청구권자금을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정부는 국내에서 개인보상의 액수를 줄이고 시기를 늦추며 청구권자금을 경제개발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개인보상은 1974년에 관련법을 만들어 불충분하게나마 시행했다. 이로써 개인의 청구권과 재산권이 국익에 종속된 형태로 처리된 셈이다."(116-7)


# (청구권협정, 제2조)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


"한일조약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총체적으로는 한국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먼저 정치적·국제적 효과를 살펴보자.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공산당·사회당 등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좌파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대체로 남북한 문제에서 음으로 양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집권 자민당 안에도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작은 변화만 생겨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나 국교수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 논거가 바로 '기본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유일한 합법정부' 조항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북한과의 정치적 교류를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121)


"다음은 경제적 기여의 측면이다. 한국 정부는 회담 초기에 '변제권'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다가 막판에 '청구권'으로 선회함으로써 6억불 이상의 경제개발자금을 획득했다. 국내적으로는 청구권자금이라는 명분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청구권자금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이라고 주장했다." "청구권자금은 당시 일본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일본 상품의 수출이 크게 증가할 것을 감안하면 일본 정부에게도 큰 부담은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이 자유 진영의 반공국가로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일본의 안보방벽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한일 간의 청구권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미국 정부도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로 동북아시아에 한·미·일 협력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는 기반이 조성되었다고 환영했다."(122-3)


"한일회담은 애초부터 '과거사' 청산을 제기할 만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능력이 없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의 민족 간 대립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반공을 국가수호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반공논리는 친일논리와 연결되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둘째, 일본 안에서 과거를 반성하는 세력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므로 일본 측에서 보더라도 한일회담이 '과거사'를 반성하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셋째, 한일회담의 법적 근거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반공논리에 기초하여 일본에게 배상책임을 지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회담에서도 '과거사'를 청산하는 조약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결국 한국은 '과거사' 청산이 불가능한 조건 아래서 한일회담을 추진한 셈이었다."(126)


"1965년 한일조약의 체결에는 한일 양측 모두 '만주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은 만주국 산업부 차장, 오히라 마사요시, 시나 애쓰사부로, 오노 반보쿠 등의 막전막후 인물들은 만주국 관리나 관동군 출신이었다. 전후 한일 인맥의 원류를 이룬 이들은 양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내세워 공생했다. 정일권-김종락 라인, 고노-우노-시마모토 라인은 한일교섭에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아울러 '독도밀약'이라는 공동전략을 수립하고, 기시-야쓰기 라인과 경쟁하면서 '파트너십'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비공식적 조정활동을 통해 한일회담 타결에 큰 역할을 하고, 한일조약 체결 이후에는 밀월시대를 구가했다." "만주인맥은 양국의 협력과 공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정책결정자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 네트워크로 기능했다."(134)


3장 재일한인과 남·북·일 관계


"재일한인이 귀환을 망설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미·소 점령하에 있던 한반도의 정황이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아래 일본 정부가 송환 정책을 마련하면서 귀환할 때의 소지금과 수하물을 제한한 것이었다. 재일한인이 현금 1,000엔, 화물 250파운드 이상을 가지고 귀국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재일한인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일한인 중에서 한반도로 일단 귀환했다가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사례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또 일본인과 결혼하여 일본인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그냥 일본에 주저앉는 재일한인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60만 명 가량의 재일한인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었다. 재일한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현실을 생각하면 당장은 일본에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166)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귀환의 물결이 한 고비를 넘긴 1946년에 접어들어서도 재일한인의 국적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반면에 일본 정부는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재일한인은 일본 국적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가 재일한인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말 선거법을 개정하여 대만인과 한국인의 참정권을 정지시켰다. 또 1947년 일본국헌법 발효 전날에는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시행하고, 재일한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재일한인에게도 외국인등록이나 강제퇴거 등의 규정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재일한인을 일본 국적자로 규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외국인으로 관리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대했던 셈이다."(168)


"재일한인들은 한민족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1945. 10~1949. 9)은 당시 재일한인 최대의 상호부조단체로서 이런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조련은 나중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1955. 5~현재)로 계승되었다. 조련이 주력한 것은 민족교육이었다."(168-9) "재일한인들은 한반도 정세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반응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영·소·중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가 결정되자, 신탁통치 반대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민족단체로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 1946. 10. 결성)을 조직했다. 민단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조직명을 개칭했다. 민단은 강령 첫머리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준수한다"라는 조문을 두어 한국 국민이라는 주지主旨를 분명히 밝혔다. 민단은 1994년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171)


"1955년에 출범한 조총련은 재일조선인운동의 임무에 대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활동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재일조선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이고, 본국 동포와 단결하여 조국통일과 민주적·민족적 권익을 옹호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일본공산당과의 공동투쟁을 중지하고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조총련이 이러한 주의주장을 실천에 옮긴 상징적 사업이 바로 재일한인 '귀국운동'이었다." "북한이 주거·교육·의료와 식량까지 무료로 지급한다, 실업이나 차별의 걱정은 전혀 없다, '귀국' 동포는 조국의 공민이 된다는 등의 장밋빛 선전은 빈곤과 차별 속에 허덕이던 재일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일본에서 고생할 거라면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며 고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6년 생활보호비 삭감 이래 체험한 궁핍한 생활과 북한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이 선명하게 대비되었다."(180-1)


# 북한이 북송을 추진한 의도

1. 중국 지원군의 귀국 공백을 메울 노동력 확보

2. 재일한인의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발전 성취

3. 한미일 관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효과

4. 선전선동에서 남한을 제압하는 효과


"1965년에 한일 '기본조약'과 더불어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해방 전부터 일본에 살아온 한국 국적자와 그의 자손(2세)에 한해 일본영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협정영주자'에게는 강제퇴거명령의 적용을 완화하고, 국민건강보험 가입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재일한인의 재류조건이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한인보다 조금 유리하게 개선되었다. 이런 연유도 있어서 그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재일한인의 수가 늘어나 '조선' 국적의 재일한인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1970년의 외국인등록에 기입된 국적란을 보면, 한국이 약 33만 명(54%), 조선이 약 28만 명(46%)이었다." "그런데 '협정영주자'가 되어도 강제퇴거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조차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틀 밖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또한 3세 이하 후손들의 영주권은 협정 발효 이후 25년 이내(1991년까지)에 다시 협의하도록 미뤄두었다."(190-1)


4장 경제발전과 상호의존


"한일 경제관계는 다음과 같이 몇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① 한일교역의 재개부터 6·25전쟁을 거쳐 장면 정부가 붕괴된 1960년까지, ② 5·16쿠데타 이후 한일조약 체결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③ 신군부 집권부터 민주화 과정을 지나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까지, ④ 민주화 실현 이후 여야 정권교체를 경험하고 국제금융위기를 거친 2013년까지이다. 이 시기구분은 한국의 정치변동을 지표로 삼은 것처럼 보이지만, 각 시기마다 한일간의 경제관계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①의 6·25전쟁은 한국 경제가 다시 일본 경제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고, ②의 한일조약은 경제관계의 밀월을 창출했으며, ③의 플라자합의(1985)는 3저호황의 배경이 되었고, ④의 외환위기는 일본의존에서 탈피하는 전기가 되었다. 각각의 시기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는 한일 경제관계의 양적·질적 변화와도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210)


"패전 이후 곤경에 처해 있던 일본 경제를 단숨에 부흥시킨 것은 1950년 한국에서 벌어진 6·25전쟁이었다. 미국이 대량의 군수물자를 일본에 주문함으로써 일본 경제는 고도성장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른바 '6·25전쟁 특수'였다."(213) "6·25전쟁의 특수수입으로 일본의 국제수지는 흑자로 돌아서고 외화보유고는 급증했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1950년 10월에 이미 아시아-태평양전쟁 전(1934~1936) 수준을 돌파했다. 1953년도에는 6·25전쟁 발발 이전보다 85%나 증가했다. 실질국민소득도 1951년도에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수준을 넘었고, 1953년도에는 6·25전쟁 시작 이전보다 38% 상승했다." "그리하여 일본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3종의 신기神器'라 불린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를 마음껏 사용하며 소비와 안락의 꿀맛을 즐기게 되었다. 6·25전쟁을 현장에서 겪은 한국과 한국인의 비참한 신세와는 너무나 다른 일본과 일본인의 처지였다."(215-6)


"박정희 정부(1961~1979)는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고 근대화 정책을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박정희는 만주경험 등의 배경을 살려 메이지유신의 부국강병 이념을 수용하고, 일본의 개발국가형 발전전략을 적극적으로 모방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은 사양화된 섬유산업을 한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의 하청생산과 가공무역을 통해 섬유산업을 발전시켰다. 일본에서 포화상태에 이른 섬유 이외에도 화학, 철강, 자동차, 전자산업 등이 하청, 설비이전, 기술이전, 합작, 직접투자 등 다양한 형태로 한국에 진출했다. 한국은 일본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학습하여 물건을 생산했다. 핵심기술, 핵심부품 및 자본재 등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거나 일본에 의존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이같은 기술 수준과 산업발전단계의 차이는 수출구조, 투자내용, 소득 수준 등 경제 전반에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시켰다. 이른바 수직적 분업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220-2)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라는 이른바 '3저'에 힘입어 침체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저달러'는 쌍둥이 적자(재정적자, 무역적자)에 시달려온 미국이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용인한 데서 기인한다. 이로 인해 '엔고현상'이 나타난 해외시장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화되었다." "각국은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침체에 빠진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금리인하 정책을 펼쳤다. 플라자합의에 의한 달러화의 평가절하는 그 추세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더욱 다행스럽게 1985년 12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이 고정유가제를 폐지하고 시장점유율 확대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저유가' 현상이 나타났다." "(3저는 한국 경제에 수출 증대와 외채상환 부담 경감은 물론) 생산비 절감과 가격경쟁력 회복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도 흑자를 기록했다."(241-2)


"198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조성된 '3저'라는 호조건 속에서 한국의 중화학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한일 간의 수직적 분업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은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기술도입 및 투자유치를 다각화했고, 일본은 부메랑 효과를 두려워하여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박정희 정부 붕괴 이후 기존 네트워크의 약화와 정치정세의 불안이 일본의 대한對韓 투자를 감소시켰다. 1986년 이후 일본의 대한 투자건수가 3~4년 동안 일시적으로 증가한 것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강세와 자본잉여로 일본 자본이 해외로 적극 진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0년대 들어서 직접투자의 핵심시장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으로 전환했다. 그에 따라 대한 투자건수와 평균 투자금액도 점차 감소했다. 1992년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한 이후 일본 자본의 해외진출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245-6)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외국 자본 유치를 원활하게 하고자 규제를 완화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압력 하에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외국 자본의 투자지분 50% 상한선 철폐, 외국 자본에 의한 인수합병 자유화 등이 단행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이래 시행해온 수입 다변화제도를 해제함으로써(1999) 자동차 등을 포함한 일본 수입품이 한국 시장에 대거 몰려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12월 외국인투자촉진법을 개정하여 외국 자본이 부동산 및 주식시장에도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이후 하향일로에 있던 외국인 투자가 다시 상승기조로 돌아섰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부동산시장이나 금융시장의 수익률이 높아질 것을 예상하고 투자를 확대했다. 문화·오락사업에도 일본의 직접투자가 급증했다. 김대중 정부가 IT 및 문화산업을 두텁게 지원한 것이 일본 자본의 투자를 촉진했다."(249)


5장 인간왕래와 문화 교류


"1960년대 들어 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과 문화 교류를 시작했다.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이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발전을 위해 일본의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반면에 국민감정에 거부감을 주는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했다. 한국 유학생은 일본에 보내되, 일본 가수는 한국에 오지 못하게 했다. 한국의 필요에 맞게 선택적으로 일본 문화를 수용한 셈이다. 한국의 여론은 언제나 일본의 대중문화가 '저질', '퇴폐'라는 이유를 들어 유입을 금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통해 공산주의나 반정부사상이 침투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외국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 정책을 실시했다. 1961년 '반공법'에 기초하여 '공연법'을 만들었다. 그 골자는, 외국인이 상업적인 공연을 하거나 외국인이 출연하는 공연의 경우 정부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다."(277-8)


"1988년 서울올림픽은 문화개방 정책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사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말부터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 한국은 일본 음악이나 영화 등의 대중문화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문화부장관도 구 공산주의권 문화까지 수용하는 마당에 일본 대중문화만 금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외무부도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게 좋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 일각은 여전히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수준이 낮다,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속관계에 빠질 수 있다 등이 그 이유였다. 때마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후 50주년 결의' 문제 등이 부상하여 반일여론이 조성되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실행에서 멀어져갔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에 휩쓸리면서 한일 문화 교류는 시급한 우선과제가 될 수 없었다."(280-1)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 방침을 마련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그해 10월에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제1차 개방(1998. 10. 20)은 영화, 비디오 소프트 분야는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어판 만화와 잡지는 모두 공식적인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제2차 개방(1999. 9. 10)은 영화, 비디오의 개방 기준이 되는 공인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70개로 확대했다." "제3차 개방(2000. 6. 27)은 연극, 영화에 대해서는 성인용을 제외하고 전면 허락했고, 대중가요 공연은 전면개방되었다." "제4차 개방(2004. 1. 1) 때는 일본 영화 상영에 대한 모든 규제를 없앴다. 음악 CD, 게임소프트 분야도 완전 개방되었다. 방송에서는 오락 프로그램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규제가 풀렸다."(281-3)


6장 역사갈등과 평화공영


"한국에서는 일본의 주요인사, 곧 고위관료나 유명 정치인이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 비뚤어진 언사를 늘어놓는 것을 '망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을 매도하기 위해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한일 간에 불거지는 역사갈등은 대개 이 '망언'에서 비롯된다." "일본 요인의 '망언'에 담긴 역사인식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것이 아니라 합의에 따라 '합법적'으로 '합방'했다. ②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③ 일본은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발전과 한국인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 '수탈'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실과 어긋난다. ④ '창씨개명', '일본어교육', '징병' 등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똑같이 대우하려는 '일시동인', '내선일체'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조치였다. ⑤ '한일합방'과 그 후의 일본통치는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293-5)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연립정부는 각의결정을 통해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아서'라는 수상 담화를 발표했다(1995. 8. 15).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각의결정을 거쳤다는 점, 근대에 일본이 근린 제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종래 수상 개인의 소신 표명보다 내용과 형식이 크게 진일보한 것이었다. '종전 50년'을 맞아 전후 결산의 일환으로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을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그런데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다. '근린 제국'이라고 뭉뚱그려 표시한 것이다. 이를 한국으로 특정하여 지칭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수상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었다(1998. 10. 8).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성한) 오부치 수상의 발언은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298-9)


"그 후 일본의 역대 정부와 수상은 공식적으론 '무라야마 담화'에 담긴 역사인식을 존중하고 계승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일본 정부와 역대 수상의 역사인식에서 또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병합 백 년'을 맞아 민주당의 간 나오토 수상이 발표한 담화(2012. 8)였다. 여기서 간 수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면서 "3·1운동 등의 심한 저항에서도 보였던 대로, 정치적·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해 행해진 식민지 지배로 인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병합조약'의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의사를 무시한 강제적 행위였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간 나오토 수상의 담화는 민주당 정부가 급격히 몰락함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잊혀져버렸지만, 그 선진성만큼은 좀 더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299-300)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조약에 의해 국가배상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공식 견해를 견지했다. 전후 일본에서 분리된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배상 문제가 없을뿐더러, 분리에 따른 재산·청구권 문제는 한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청구권 협정의 법적 효력범위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밝혔다(2005. 8. 26). 곧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 정부·군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원폭 피해자, 사할린 잔류 한인 등의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종래와 다르게 별도의 보상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안들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의제로 등장하지 않았거나, 한일조약 체결 이후 새롭게 부각된 사안이라는 게 한국 정부의 주장이다."(318-9)


"최근 한국의 사법부는 일제하의 피해보상 문제에 대해 잇달아 엄중한 판결을 내려 소송운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였다.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 문제를 한일청구권협정의 규정에 따라 해결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행위(이른바 부작위不作爲)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2011. 8. 30). 곧 이 문제들이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법적으로 해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한일 사이에 해석상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가 정해진 절차에 의거하여 분쟁해결을 시도하지 않는 행위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한 것이다. 그리고 대법원은 양국 정부 차원에서 이미 소멸되었다고 여겨져온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민사사건 차원에서 살아 있다고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2012. 5. 24). 2013년 들어 고등법원은 대법원 판결에 의거하여, 피소된 일본 기업은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332)


7장 미래와 세계를 향한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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