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장 수출전쟁과 안보전쟁 / 1973년


"6개의 전략 산업을 선정해 육성하겠다는 1 ·12 선언에 따라 1973년 5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 정권은 재정·금융·조세상의 특혜와 지원을 주어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산업별로 울산(석유화학·비료), 구미(전자), 포항(철강), 옥포(조선), 온산(비철금속), 창원(기계) 등에 특화된 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박 정권은 1974년엔 '국민투자기금법'을 마련하여 조성한 기금 가운데 해마다 68%를 중화학공업 부문에 지원하였다. 또 14개 중요 산업에 처음 3년 동안 100%, 다음 2년 동안 50%의 내국세 감면 혜택을 주었고, 중화학고업 제품을 수출하여 생긴 소득에도 소득세와 법인세를 50% 감면하는 파격적인 조취를 취하였다. 이러한 여러 특혜 때문에 국민의 조세 부담은 점점 늘어나 1973년에는 12.6%이던 것이 1981년에는 18.2%까지 뛰었다."(16-7)


"1972년 사토 이후 총리가 된 다나카는 포항제철에 대한 일본의 자금 및 기술 지원에 대해, 포항제철이 건설되면 남한은 북한보다 더 우월한 철강 생산 능력을 갖게 될 수 있으며 일본의 1차적 의도는 남한 내의 저항 세력이 북한의 이익에 따르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2차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자본이 침투하면서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깊어지고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미국의 지위를 점차 대신해 나갔다. 한국의 공장들은 주요한 설비재뿐만 아니라 원자재·중간재와 기술을 일본에서 계속 도입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가동할 수 없었다. 한국은 일본에서 반도체·통신장비·기계 같은 자본재·내구소비재·중간재를 수입하고 이를 텔레비전·자동차·철강재로 만들어 미국에 되팔았다. 한·미·일 무역구조는 일본이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줄이는 데 이용되었다.〉"(54)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는 1971년 9만 6천여 명에서 1972년 21만 7천여 명으로 급증하였고, 1973년에 43만 6천여 명으로 또 한번 급증하였는데, 그것은 1972년 일본이 중국과 외교 정상화를 하면서 대만과의 유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바뀐 것에 기인한다." "1973년은 외화벌이를 위해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부터 관광 기생들에게 허가증을 주어 호텔 출입을 자유롭게 했고,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박 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실시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교육 내용은 〈일제시대 정신대를 독려하였던 독려사와 너무 흡사하여 '신판 정신대 결단식' 같았다.〉"(58-9)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는 비단 일본인 관광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70년대부터 주한미군이 그러한 국책사업의 주요 고객으로 등장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박 정권은 기지촌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7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의 발표 이후에는 주한미군을 붙잡아 두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주로 미군의 기지촌 환경 개선 요구에 적극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주한미군과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합동으로 '군기지 정화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 운동은 사실상 박 정권이 전담하다시피해서 추진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교양 강좌에서는 시장, 지역의 공보관, 경관 등이 인사말을 하면서 〈미군을 만족시키는 여러분 모두가 애국자들이다. 여러분 모두는 우리 조국을 위해 외화를 벌려고 일하는 민족주의자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70-1)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1970년 대통령 선거 당시 그걸 예견했던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 다음 날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비상계엄령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이다.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행위는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위대한 한국민의 손에 의해 반드시 실패하리라고 확신한다.〉"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를 연 김대중은 4일 후 한민통 동경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 입국한 7월 10일에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 김대중은 동경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78-80)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터진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가공할 공포로 다가왔다." "정부는 유류 공급을 17%로 줄이고 제한적으로 송전 조치를 단행하였다. 공장들은 일제히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11월 8일자 신문들에 실린 대형 기사의 제목들은 당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차량, 난방 유류 5% 절감〉, 〈걷기운동〉, 〈대낮 소등 생활화〉, 〈광고 네온사인 규제〉, 〈목욕탕 신규허가 억제〉, 〈광광, 레저여행도 규제〉, 〈계속 악화되면 택시 풀제 등 2단계 조치 실시〉. 거리엔 가로등이 꺼졌고, 상점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밤거리는 어두워져 사람들은 서둘러 귀가했으며 가정에서도 전등을 한 등씩만 켰다." "이듬해 3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가를 3개월간 동결하겠다고 발표해 한숨 돌리긴 했으나, 그 파동의 영향은 1974년에 물가가 42.1%나 인상되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100-2)


5장 긴급조치와 민주화투쟁 / 1974년


"1973년 12월 24일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윤수, 김찬국, 안병무, 홍남순 등 각계 민주 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 날 민주 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걸 선포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1시간 40분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특별연설에서 개헌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면서 강력한 처벌을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는 다음 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개원 청원 서명운동은 그런 정도의 위험으로 주저앉을 성질의 운동이 아니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박 정권은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이른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었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121-3)


"(대학생 총궐기가 일어난) 4월 3일 밤 10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는데, 이는 민청학련 관련자 처벌을 주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문교부 장관에게 학생들이 반체제운동을 계속하면 대학을 폐교시킬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했으며,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 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도 선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130) "핵심 주동자인 이철이 체포된 다음 날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을 적발하였다〉고 주장했다. 민청학련은 학생들이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호칭이었는데도, 중앙정보부는 이를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노린 전국적인 불순 학생조직인 양 거창하게 부풀려서 발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만들어내는 낯익은 용공 조작 수법을 되풀이했다."(132)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서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천2백4명에 달했으며, 피고인들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나병식, 윤한봉, 정상복, 안양로, 이근성, 김영일(김지하), 류근일, 김병곤 등 기독청년 및 학생운동권 핵심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약 3개월 후 군법회의는 1백80명의 피고인 중에서 14명에 사형, 13명에 무기징역, 그리고 28명에는 15년에서 20년을 구형했다. 당시 선고는 구형한 그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변호사 한승헌은 그러한 재판에 대해서 '자판기 판결' 또는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천6백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 사법사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울러 또 하나의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는데, 변호사 강신옥이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나가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133-4)


1974년 8월 15일에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8월 21일,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신앙과도 같은 충성심을 지녔던) 차지철은 경호실 차장 밑에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새로 만들어 현역 장성들을 데려다 앉혔으며, 청와대 내외 경호병력인 수경사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대대급에서 연대급으로 격상시켰다. 또 경호실 요원의 복장을 히틀러의 SS친위대 복장처럼 변경시켰다. 더욱 놀라운 건, '경호목적상 필요한 경우 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을 제정하여 민간인 경호실장이 군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었다.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는 대통령의 '신변 경호' 뿐만 아니라 '심기 경호'를 내세웠는데, 차지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위(保衛) 경호'라는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152-3)


"또 차지철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대통령 경호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차지철이 친 '인의 장막'은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장관도 차지철이 허락하지 않으면 박정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를 꼭 하루 전에 자기 방에 갖다 놓도록 요구했다. 그는 〈일본 명치유신 때 어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 놓은 일이 있었다〉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 핑계를 대고 정보를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 1976년 12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유로 장관의 정강이를 발로 차는 차지철과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상호 충돌은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에 따른 '정보 전쟁'과 그 여파는 박정희 유일체제를 용납한 한국 사회의 비극이었다."(156-7)


"박 정권은 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서는 『동아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12월 16일에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이는 박정희의 〈『동아일보』를 혼내 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획책한 것이었다. 박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1975년 1월 23일까지 『동아일보』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광고탄압을 주도한 중앙정보부 뒤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당시 대미 로비스트 김한조는 미국의 반응이 나쁘므로 광고탄압을 중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하여 『동아일보』 광고면은 한동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 같은 국민들의 격려문으로 채워졌다."(182-3)


6장 폭력과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 1975년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새벽 6시에 사형을 집행했으니 상고가 기각된 지 채 하루도 안 된 20시간만이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흥선, 이수병, 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중형 선고를 받은 학생들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니, 이는 당시의 법이라는 건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는 걸 의미한다. 김삼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 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 시위가 북한측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227-8)


"4월 30일 패망한 베트남은 한국에게 무엇이었을까? 베트남 특수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파병 군인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 군인들은 지금까지도 고엽제 피해와 다른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정부는 그간 그들을 외면해왔다. 또다른 문제도 있다. 문부식은 베트남전쟁과 광주민중항쟁이 무관치 않다며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끔찍한 폭력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참전 용사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그들의 부모 형제가 사는 한국 사회의 농촌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한국인들이 그야말로 고루고루 '달러의 맛'을 본 시기가 그때이다. 그것을 대가로 한국인들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윤리적 감각의 황폐화, 말하자면 '성장의 열매'와 폭력이 공존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249)


"5월 13일에 공표된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였다.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 금지〉 등도 당연히 따라 붙었다." "변호사 이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하여 긴급조치 9호!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 재정 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 9호의 올가미가 다가오고 있었고, '헌법'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유인물만 들고 다녀도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 망치질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제3의 쿠데타임과 동시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1974년 1월 8일에 나온 긴급조치 1호 이래로 그간 공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반민주성을 포괄한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긴급조치는 한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는 햇수로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250-2)


"1975년 7월 8일 사회안전법, 민방위기본법, 방위세법, 교육관계법 개정안 등 소위 '4대 전시입법'이 발표되었고, 7월 16일 국회 회기 만료 직전에 휴회 선언을 틈타 새벽 3시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사회안전법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해 출옥 후에도 보안처분을 하도록 규정하였고, 보안처분은 2년 단위로 무제한 연장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방위법은 '베트남 사태'를 계기로 안보 위기 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제정된 것으로 17~5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준군사적인 민방위대를 조직하도록 규정하였다. 교육관계법 개정안은 교수 재임용제의 신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법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병영 체제화를 위한 것이었다." "1971년 4월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복역 기간 중인 1975년에 제정된 바로 이 사회안전법에 소급 적용당하여 모두 4차례에 걸친 보호감호 처분으로 계속 감옥살이를 하였다."(261-3)


"4·19 이후 폐기되었던 이승만 시기 어용의 대명사인 학도호국단이 이름 하나 바뀌지 않은 채 25년 만에 다시 등장하였다. 학도호국단 창설 설치령은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이 있은 후 5월 2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고, 그 결과 9월 2일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하였다." "그 시절 학도호국단을 직접 겪은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일주일씩 경주 화랑 수련원에 보냈는데, 일정에는 매일 한두 시간씩 박정희 전 대통령 어록을 들으며 명상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정신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일주일 후 퇴교할 때에는 정말로 애국심에 불타 올라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 부르면서 감격에 겨워 엉엉 울면서 나오게 만들었다. 나치 치하 독일이나 북한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 대한민국이 이야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랐던 청년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으니, 그에게 당시의 청년문화는 사회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27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