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6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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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피해대중과 극우반공체제


1절 조봉암의 피해대중론과 농민


"조봉암은 제헌국회 초기부터 인민에 대한 권력의 횡포를 경계하였다. 그는 헌법제정시 경찰이 하고자 하면 어떤 구실로든지 양민을 구금할 수 있어 신체의 자유가 없는 상태이므로 그에 대한 제한은 오직 현행범에 국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1952년 8·5정부통령선거에서 제시한 10가지 정견에서 네번째로 "억지로 반대파를 공산당으로 만들려는 죄악적인 파쟁을 근절할 것"을, 여섯번째로 "독재적 경향이 빚어내는 질식 상태에서 모든 국민을 해방시키고 관권남용을 방지함으로써 민폐를 일소하고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리를 절대적으로 옹호할 것"을 내세웠다. 이 두 조항에서 조봉암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극우반공독재에 의하여 반대파가 공산당으로 몰리고 있고 인민이 질식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었다. 네번째도 그러하거니와, 여섯번째의 독재적 경향이라는 것도 우회적 표현일 뿐, 극우반동독재를 가리킨 것이었다."(535-6)


"〈피해대중은 단결하라〉는 구호는 평화통일 구호와 함께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 결과가 말해주듯 극우반공세력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더욱이 그들은 직접 피해대중을 양산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피해대중의 단결,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의 주장은 평화통일론 다음으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진보당 내에서도 (구호의 재검토를 요청하는 식의) 동요가 있었다." "사상검사 오제도는 조봉암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쓴 글에서, 진보당이 강령에서 매판자본을 비판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지적한 것은 북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호소문과 같고, 조봉암이 1956년 11월 진보당 발당대회 개회사에서 진보당은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대중의 전위대라고 표현한 것은 북의 노동당 규약에서 조선로동당은 조선노동대중의 이익의 대표이며 옹호자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539)


"농민들이 가장 시달린 것은 군관계나 경찰에 대한 부담이었다는 점을 특히 유의하여야 한다. 군·경 관계자나 관공리, 유력자들, 각종 형태의 백수건달들이 권력을 믿고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사복을 채우거나 '생활비'를 조달한 방법이 정부수립 이후 기부금 또는 잡부금으로 통칭되었다는 점도 잡부금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예산상의 이유 못지않게 이 부분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잡부금의 징수대상이 주로 농민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많이 거머쥐었건 적게 가졌건 '힘센 자'들은 각종 위협에 떨고 있는 농민들을 주대상으로 하여 잡부금을 거두었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농민들이었지만, 무서운 세상을 목도하였던 그들은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짜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정약용의 '애절양(哀折陽)'은 조선후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산골 대통령'(지서 주임을 가리키는 말) 앞에 농민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548)


2절 학살


# 학살 : 전투원 혹은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총기 소지자가 비전투원 곧 민간인을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살해한 행위


1 인민군, 빨치산(무장대), 좌익단체 소속원에 의한 학살


"북한은 남한점령정책의 일환으로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도모하였다." "시·군 내무서-면 분주소(分駐所)-리 자위대로 이어지는 정치보위국 산하 치안조직은 숙청의 핵심부서였다. 주요 대상자는 악덕 지주, 경찰, 공무원 등과 전향하여 보도연맹 간부로서 좌익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은 북의 법령을 기준으로 한 면단위 '인민재판'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으나, '즉결처분'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후퇴시에는 정치보위부에서 처형을 결정하였고, 입산하여 제2전선을 조직한 후에는 당이 직접 판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숙청과 학살의 자행은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하여 저질러졌던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생존한 보도연맹원이나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가족의 보복이 그러하였다. 인민군 남하 이후 보도연맹원과 그 가족들은 경찰은 물론 그 가족과 반장, 구장까지 인민재판에 부쳐 공개'처형'하였다."(562)


"경기도 고양군 금정굴 사건은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보복학살의 악순환이 일어난 사건이다. 금정굴 양민 대량학살극은 9월 20일경 우익계 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인 태극단 동지회원 38명을 '처형'하면서 발생하였다. 이들은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되었는데, 내무서원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하여 죽창으로 이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곧 유엔군과 국군이 들어와 수복이 되자 이제는 치안대, 경찰, 태극단에서 대대적인 좌익색출에 나서 수백 명에서 1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잡아다 9월 말부터 12월까지 금정굴에서 학살하였는데, 어린아이와 여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좌익가족이 많았던 것으로 유족들은 증언하였다. 금정굴 발굴에서 1995년 10월 6일 지하 15m 지점에 이를 때까지 유골수가 모두 1,500여 점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는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 150점이 포함되어 있어 희생자의 규모를 가늠하게 하였다."(566)


2 군·경찰·우익청년단체·우익인사에 의한 학살


1. 제주 4·3 학살

2. 여순사건 등에서의 학살

3. 전쟁 직후 형무소 수감자,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

4. (인민군을 가장한) 나주경찰부대의 학살

5. 미군에 의한 학살

6. 수복 후 주민집단학살 (거창양민학살 등)


"놀라운 것은 (제주 4·3 학살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을 가져오게 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법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이 억압적 조치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하였던 대통령령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경부터 준비하여 6월 5일에 발족되었다. 오제도의 말을 빌면, 이것을 기획한 것은 오제도 등 사상계 검사였고, 이들이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과 김준연 등 '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실시한 것이었다. 일제가 준전시통제에 들어가면서 1936년에 공포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7년에 만든 '사상보호단체'인 대화숙(大和塾), 1938년에 출범한 시국대응전선(全線)사상보국연맹 등을 상기시키는, 수십만 명의 인권을 철저히 통제하는 조직을 법도 없이 만들었다는 것은 법 위에 군림하는 파시즘적 국가관에서 나온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602)


3절 학살의 원인과 책임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된 데는 누적된 관행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것과 깊숙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해방 후 경찰과 청년단원들한테 만연하였던 '테러의 습성화'와 (공권력이 테러를 방조·조장하는 차원을 넘어 테러와 구별되지 않는 '공권력의 테러화'를) 들 수 있다. 여운형은 해방된 지 3일밖에 안 된 8월 18일에 해방의 정치공간을 특징짓는 테러를 당하였고, 그 후 십수 차례의 테러를 당하다가 비명에 갔는데,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테러는 1945년 12월 29일 반탁투쟁의 와중에서 좌익계의 대변지인 조선인민보사에 대하여 자행되면서부터 있게 되었다. 초기 반탁투쟁기에 테러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는 1946년 1월 7일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 등 4당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중대한 합의사항 두 가지 중 하나로 이 문서 후단에 쓰여 있는, 테러행위를 절대 반대하고 테러단체가 자발적으로 해산할 것을 요망한다는 것에 잘 집약되어 있다."(656)


"한민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여순사건 발생에 대하여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담화를 내고 내각을 개조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하여 정부가 책임지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더러 공산당의 편을 드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신상태와 11월 5일 발표한 담화의 정신상태를 비교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 특히 여학생이 여수에서 어느 정도 좌익에 가담하였는지는 증언에 따라 엇갈리지만, 설령 무기류를 들고 좌익편을 들었다고 하여, 인정(仁政)을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을 무시하더라도, 왜 어린아이 또는 여중생이 가담하였는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노대통령으로서 어린아이, 여중생들에 대하여 타이르는 대신 남녀·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하여 불순분자는 제거하라고 지시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지시가 김종원 같은 장교들한테 내려갔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승만은 생각지 않았을까. 한국인은 무서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고 있었다."(668)


# 담화 내용 : 〈그 중에 제일 놀랍고 참혹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앞잡아기 되어 총과 다른 군기(軍器)를 가지고, 살인, 충화(衝火)하는 데 여학생들이 심악(甚惡)하게 한 것과 ·····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한국전쟁기 학살과 관련해서 먼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전쟁 초기 패전의 문제이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으면서도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큰 책임을 저야 한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의심을 사 절실히 군비증강이 필요한 시기에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거의 경찰력이나 다름없는 군대를 만들도록 제한하게 하였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에 걸맞게 군대를 정비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낙루장관' '지당장관'으로 잘 알려진 사람으로 김구 살해의 배후로 자주 지목되어온 인물인데, 국방에 대해서는 아주 무능하였다. 총참모장 채병덕 또한 김구 암살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등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승만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였지만, 군 지휘에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휘체계가 문란하였고, 군대훈련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부패 속에 입을 것,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매질과 기합에 시달려 사기가 저상되어 있었다."(668-70)


"주민집단학살이 일어날 수 있는 소인은 미군정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을 이용하여 미군정에 비판적이거나 미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여러 단체 또는 정치세력을 억압하였다. 그리고 극우적 정치세력은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승만의 경찰통치는 이러한 미군정의 경찰에 의한 강권·억압통치를 그 인원과 함께 그대로 상속받은 것이었다. 커밍스가 이승만의 억압통치는 한·미 공동작품이었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평이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의 억압과 횡포가 한국인들의 거센 원성과 각종 소요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군·경이 포함된 친일파를 부분적으로라도 제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한민당·이승만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4개월 만에 간신히 통과시켰을 때, 군정장관 딘 소장은 이것을 공포하기를 거부하였다."(692-4)


"미군정이 1945년 9월 한국에 설치되자마자 친일파, 그 중에서도 악질 친일경찰을 대거 등용하여 활용한 것도, 극우청년단체의 테러를 묵인하고 방조한 것도, 제주도에서의 미군 최고 지휘관인 브라운 대령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하고, 미군이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지시하고 방조한 것도, 유럽전선 예컨대 프랑스, 독일이나 이탈리아전선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독일이나 이탈리에서 나치나 파시스트를 연합군의 보조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미국정부가 제주도 주민집단학살, 한국전쟁기의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대처하는 데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미군·미군정·미국정부 일부 관계자들의 이와 같은 비인간적, 반문명적 사고이다. 그것은 미국 등 연합국이 뉘른베르크나 도쿄 재판에서 보여주었던 정신적 자세를 한국에서의 주민집단학살에 대해서도 명백히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709-10)


4절 피해대중과 극우반공체제의 형성


"극우반공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는 학살, 테러, 감옥, 고문 격리로부터 산출된 공포의 산물이었다. 폴 뢰쾨르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사건들에는 공포가 결부되어 있다"라고 말하였지만, 그 말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용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그것을 목도하고 들은 바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경남 거제도 앞 지심도에서 총알을 퍼부었는데도, 경찰이 쏜 총알에 보도연맹원 3~4명씩을 묶었던 철사가 끊어져 살아남은 이학근은 항상 입버릇처럼 "겪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를 모른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한 공포는 학살당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가졌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과 친지의 것이기도 하며, 그 현장 부근에 있었거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언젠까지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후자를 '기억의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713)


"피해의식은 사회의식이나 가치관을 굴절시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역전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가 학살당하는 등 극우반공세력 또는 극우반공체제로부터 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에는 모순되게도 더 극단적으로 극우적 행태를 보이고, 극우반공세력의 일원이 되고자 하며, 극우반공체제 수호에 앞장서기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717) "'기억의 공포'를 새롭게 해주고, 억울하고 불법적인 학살행위의 피해자에게 오히려 공포가 따라다니는 것을 실감케 하는 것이 연좌제였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한 사람이라도 '좌경세력'이나 '불온분자'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으로 지목되면 집안에서건 마을에서건 따돌림을 받고 격리되어야 했다. 경남 남해의 보도연맹원들은 한밤중이건 농사일이 바쁜 대낮이건 지서에서 소집하면 수시로 달려가야 하였으나,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실려 있다. 불평 그 자체가 바로 빨갱이임을 확인시켜주는 분위기 때문이었다."(719)


"국가보안법이 경직되게 운용되던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일종의 국가보안법체제라고 할 만한 현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근현대사에 대하여 무지를 강요한 일이었다. 국가보안법체제에서는 북에 대해 사실을 아는 것이 범죄가 될 수 있었다."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서 이적표현물이라는 조항, 곧 북을 이롭게 한다는 조항을 확대해석하면 걸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지고 있는 사회·인문과학서적도 그러하였고, 정부 비판도 그러하였다. 과거의 기록물을 지니고 있는 것도, 해방 전후사를 증언하는 것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친일파나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연구도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월민주항쟁 이전에 현대사는 물론, 근대사 연구가 제대로 안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고, 다른 이유들도 대개 그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국인은 자신의 근현대사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725)


5절 부역자 문제, 인민군 점령 및 군·경에 의한 피해와 극우반공체제


"전쟁 전이나 그 후도 성격이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쟁이 절호의 기회나 되는 것처럼 전쟁기에 극우세력의 권력남용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산·자산 축적은 부분적 현상을 넘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한 단면으로 극우의 재산축적 메커니즘이었다. 사상검사였던 엄상섭 의원이 경찰이 치안비용 명목으로 주민의 재산갹출을 강요하여 불응하면 빨갱이라는 죄명을 붙여서 함부로 체포, 감금한다고 지적한 것도 하급단위에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김광준 의원은 좌익계 가족이라 해서 토지 등 재산을 빼앗고, 토지이전 등기에 응하지 않으면 좌익이라 해서 구타하고 죽이는 일도 있는데, 모 경찰서장은 그것이 위법행위임을 확신하지만 적법적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적법적으로 처리하면 서장이 빨갱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또 자리를 유지해나가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었다."(760-1)


"이승만·자유당 정권의 테러가 반은 어용 관제단체, 깡패 등에 의존하여 거칠게 자행되었고, 거친 동원체제였는 데 비해, 군부의 정보장교들이 주도한 정보 정권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테러는 막강한 조직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행사되어 훨씬 더 제도화·조직화되었으며, 그만큼 세련되고 빈틈이 없었다. 국가의 동원력 또한 그러하였다. 행정국가 또는 과대성장국가가 주도한 극우반공체제는 이승만 정권 시기보다 더욱 잘 작동되었다." "이 시기 극우반공체제는 유신체제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강화된 '사상범'의 전향 강요,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 등과 같은 류의 '간첩단'사건, 긴급조치, 사회안전법의 역할도 유의하여야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반공교육이 사회와 교육기관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시기 반공교육은 북진통일운동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아 감성에 강한 자극을 주는 정의적(情意的) 충동이 중심을 이루었다."(805-6)


"학살과 관련된 양 극단의 대조적인 현상(적개심 고취와 공포의 침묵)은 박정희 사적 권력의 영속, 곧 유신체제 영속을 위한 기제로 작동되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한 예가 될 수 있겠지만, 무지와 왜곡의 집적화·체계화 현상은 한층 뚜렷해졌다. 해방 전후에 부모가 무슨 일을 하였으며 어떤 이유로 학살당하였는지 자식조차 모르는 사회가 되었고, 왜 자신이 극우적 반공이데올로기의 맹신자가 되었는지 반문해볼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조봉암이 그랬던 것처럼 희생자-피해대중의 눈으로 진실의 역사를 보려고 한다든가 희생자-피해대중과 연대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현기영의 표현을 빌린다면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이질의 세계였다. 한국인은 현대 역사가 실종된 역사상실의 시대에 잡초처럼 모래알같이 그렇게 살았다. 그만큼 자아로부터 소외된 불구적이고 분열된 삶이었다."(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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