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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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봉암의 정당조직 활동과 대통령선거


1절 한국전쟁기 정당조직 활동과 제2대 정부통령 선거


"이 시기(1951년경)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것이었다. 조직면으로는 그가 중시한 원내의원들도 상당수를 조직대상으로 하여 끌어들이는 작업을 벌였지만, 무엇보다도 농민과 노동자층을 당의 조직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이 주목된다. 신당을 조직하는 데 농민이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1950년대 초반에 전국적인 농민조직으로 농민회의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또 조봉암의 '자유사회당 비밀서클'과 관련 있는 인사들 가운데는 중도파나 혁신계, 족청계 인사들도 있었지만, 노동계와 농민단체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을 정당조직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등 좌익정당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노동자 농민정당을 표방하기도 하였지만, 조봉암 신당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봉암의 신당은 조직면에서도, 표방한 논리에서도 짜임새가 갖추어져갔지만, 이승만의 탄압으로 신당 창당은 불가능해졌다."(45-6)


# '대남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을 비롯한 실무진들을 옭아매는 방식으로 탄압


"조봉암이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하였을 때 이시영과 신흥우도 후보 출마를 포명하였다. 민국당 측에서는 조봉암의 단독대결이 야측을 대표하게 만들고, 조봉암을 키워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봉암이 야측에서 나오는 후보가 없어서 자신이 나선 것이라면, 이시영이 대통령후보로 나섰을 때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봉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봉암은 처음부터 대통령에 출마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제3세력으로서 크게 제약을 받아오던 조봉암이 그러한 기회를 중시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일후보 소망을 깬 것만 해도 용서받기 어려웠을 터인데, 극우반공체제 하에서 이승만 같은 사람과 대결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정치생명, 나아가 자연인으로서의 생명마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조봉암은 돌이키기 힘들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정치이념과 야망이 그 길로 가게끔 하였다."(58-9)


"김성주는 1953년 6월 25일 헌병총사령부(헌총)에 연행되어, 9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김성주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봉암 등과 사회민주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치제도로서는 구미식을 택하나 경제적으로는 자유경제체제를 버리고 계획경제를 수립하려 한 것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죄목은 1952년 8·15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대통령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다는 더욱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4월 16일 김진호 중령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인 김성주를 헌총 취조시로 끌고가 고문을 하다 사망하자 헌총 취조관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암매장되었다. 김성주는 19세 때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46년에는 평안청년회와 그 후신인 서북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극우반공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것은 조봉암과의 관련 때문이었다."(77-9)


2절 범야신당운동과 진보당추진위원회


"1954년 11월 27일에 표결된 '사사오입' 개헌안은 이승만 권력의 절대화를 초래하였다. 그와 함께 도시화 현상 속에서 늘어나는 도시민, 그 중에서도 교육받은 층은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사사오입개헌을 연결시켜 생각하였고, 그것은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강한 반이승만·반자유당 정서를 증폭시켰다. 또한 이승만의 무소불위의 행위에 위협을 느낀 야당계 의원들은 대동단결된 거대 신당을 만들기 위해 결집하였고, 이로 인하여 은퇴중인 조봉암을 다시 정치의 장으로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만들려던 신당이 가능하게 되는 역설을 가져왔다. 사사오입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번복 주장된 지 2, 3일만에 야당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였고, 호헌동지회에서는 신당을 강력히 추진하기로 하였다."(82) "후에 이 신당 결성의 주류가 되는 보수세력은 민주당을 조직하였고, 그것의 대항세력이 되는 대동혁신세력의 일부가 진보당 결성에 참여하였다."(86)


# 보수파가 조봉암 합류를 결사반대하면서 통합 신당 무산


"호헌동지회가 분열된 원인은 헤게모니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오랫동안 쌓였던 감정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당의 주도권 문제에 민국당 내 극우세력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며, 그리고 휴전협정 체결시의 포로석방 문제에 대한 조병옥의 이승만 비판 등으로 민국당 내 극우세력은 계속 수세에 몰려 당의 실권을 신익희 등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러한 당내의 조류에다 장면을 중심으로 한 원내자유당 흥사단계가 들어오고, 호헌동지회 내 민주대동파가 조봉암과 함께 들어오면, 조병옥, 김준연 등의 한민당 정통파는 당의 운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많았다. 민국당은 계속 위축되어 신당이라는 인기있는 새 말로 갈아타야만 정치생명이 살아날 수 있었지만, 새 당의 영도권에서 밀려나서는 안되었다. 당의 주도권 문제는 다음해인 1956년 정부통령 선거 후보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96-7)


3절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신익희 후보의 사거 다음날 민주당은 "다시 대통령후보를 지명하여 싸우고 싶으나 법적 불비로 그 길이 두절되었고, 본당 이외의 대통령후보자는 그 정치적 행상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정권교체로서 우리 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하려던 초지의 관철은 후일로 미룬다"고 성명하였다." "민주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익희 지지표가 조봉암 쪽에 가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나왔다. 5월 9일 김준연은 "대통령후보자인 조봉암 씨를 지지할 수는 도저히 없으므로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천명하였다." "같은 날인 5월 10일 장면 부통령후보는 "대통령후보 없이 부통령후보만이 선거전에 임하는 것이 명분상 불합리한 일이라고 일부에서는 말하나, 우리나라의 헌법상 부통령의 직위는 대통령을 보필하는 것만이 그 임무의 전부가 아닌 만큼 부통령후보만이 선거전에 임하는 것도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피력하였다."(126-8)


"신익희가 5월 5일 사거하였으므로, 진보당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야 했으나, 5월 6일경부터 거의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중앙 간부진이 각도 유세반을 편성하여 마지막 유세를 하고 선전유인물을 배포하려 하였지만, 선거방해로 할 수가 없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겼으며,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되어 경고를 받고 쭃겨왔다. 진보당 경북도당 선전부장 이병희는 5월 6일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선거자금 출처가 어디냐"며 고문, 폭행을 당하여 실신하였다.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11일경부터 잠적하여 일체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5월 17일 선거결과가 확정될 무렵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 한 신문은 이 무렵 진보당 당본부가 선거운동을 멈춘 것 같았고, 간부들 얼굴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적한 분위기였다고 보도하였다."(146)


"5·15선거의 부정에 대하여 가장 충격적인 증언을 한 사람은 4년 후에 치러진 3·15정부통령선거의 주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최인규의 자서전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90% 이상 나온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의 70% 이상이 조봉암한테 투표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5·15정부통령선거 이후 이승만 정권이 잇달아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3·15선거에서 이승만은 그의 소망대로 단일후보가 되었으며, 정국이 경색되어 장면 후보의 부통령 재선은 아주 어려웠는데도 상식을 초월한 부정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이승만 자존심의 심각한 상처, 장면이 부통령이 됨으로써 맛보았던 자유당의 낭패감과 위기의식, 5·15선거가 총체적으로 보여준 민심 또는 '민의', 이승만과 자유당 스스로가 느꼈던 비도덕성과 열패감은 모두 다 5·15정부통령선거와 연결되어 있다."(153-4)


"1956년 8월 8일에 실시된 시·읍·면의회 의원선거와 시·읍·면장 선거, 8월 13일에 실시된 서울특별시 및 도의회 의원선거는 5·15선거 이후 치러진 첫번째 선거였는데, 부산·경남지방에서는 대부분의 민주당원들이 시의원 등에 입후보 등록조차 못할 정도로, "관념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 온갖 방법이 천하의 이목을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공공연히 대담하게 자행"되었다. 9월 28일에는 부통령에 취임한 지 겨우 한 달이 넘은 장면에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회에서는 자유당에 의하여 한편으로는 부통령의 계승권을 말살하기 위한 개헌방안이 모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對장부통령 경고안이 발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날 (당분간 몸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조봉암의 경고대로) 장면 부통령은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피격당하였다." "총을 쏜 범인의 배후에는 자유당 간부와 이익흥 내무부장관, 김종원 치안국장이 있었고, 김종원은 법정구속되었다."(165-6)


4절 진보당 창당


#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발당대회 개최


"진보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국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잔혹한 테러를 사주하거나 방조하였다. 진보당의 조직활동은 그야말로 칼날 위를 걷는 형극의 길이었다. 진보당에 대한 테러나 탄압에 민주당은 침묵을 지켰고, 언론도 조금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공적 사회적 조직이나 기구가 진보당한테는 없었다. 진보당은 창당되고 얼마간은 사무실조차 얻기가 어려웠다."(199) "진보당과 당원들에 대한 탄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이 극악했는데, 백주에 테러, 납치, 감금, 매수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의 터전을 짓밟아버리기 일쑤였다. 신문광고란에는 거의 매일같이 강압과 조작에 의한 진보당 탈당성명이 끊일 새 없었다. 전남도당 결성대회에 즈음하여 일어난 심야의 가정침입 테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진보당원으로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과 대단한 용기, 때로는 가족 전체의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203)


"자유당, 민주당의 선거법 협상도 조봉암-진보당의 활동을 옥죄었다. 이른바 협상선거법은 선거공영제를 채택한다는 구실 밑에 선거운동을 전반적으로 제한하였다." "조병옥과 민주당이 자신을 지켜주고 키워준 『동아일보』 등 언론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야당에게 불리한 선거법을 자유당과 합작하여 통과시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투개표에서 참관인 권한을 확대하고 야당도 비율에 따라 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하게 한 것은 민주당에게는 유리하였지만, 군소정당에게는 불리하였다. 선거운동 관계 부분은 권력을 업은 자유당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준 반면, 민주당에게도 불리하였지만 군소정당에게는 특히 악랄한 규정이었다. 이 선거법은 진보당 등 혁신계를 봉쇄하는 데, 그리고 무소속 당선을 막는 데 유리하게 되어있었다. 급속히 민심이 이반되어가고 있는 자유당을 부축해주어 기존의 극우정당 일변도로 의회를 편성하려는 민주당의 야합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204-5)


"1958년 1월 초순 치안국 자문위원 홍원일이 사태의 심각함을 직감하고 권대복과 함께 조봉암을 찾아가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자신도 진보당 탄압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이기붕이 출마할 서대문구에 입후보하겠다는 성명을 신문에 내라고 권유하였다. 이기붕 출마 에정지구에 입후보하겠다고 하면 노골적인 탄압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간부 중 일부가 그 문제는 상무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해서 상무위원회 소집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있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하겠다고 전하였다.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206)


"진보당에 대한 여론재판 또는 언론 테러는 사건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민당 재건사건에서보다 훨씬 길고 또 심하였다. 먼저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전날인 1월 11일, 서울지검 조인구 검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의 남침 구호로 단정하여 엄단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언론은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조의 인삼이 든 상자를 받을 때 그 속에 든 괴뢰의 지령문을 보고 불태워버렸다느니, 조봉암 집 비밀장소에서 불온문건을 찾아냈다느니, 김일성 지령 실천을 위한 7인위원회를 구성한 사실을 장건상, 김성숙 등이 증언하였고, 조봉암도 간첩과 접선하여 야합한 사실을 시인하였다느니, 또 박정호, 김경태, 정우갑 등 14명의 간첩이 진보당 확대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조봉암과 직접 협의를 하였다느니, 박정호, 장건상도 진보당의 비밀당원임이 드러났다느니 등등으로 연일 보도하였다."(208)


1958년 7월 2일 유병진 재판장은 불법무기 소지 혐의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2심 재판은 1·4후퇴 때 월남하여 대검찰청 오제도 검사 등의 주선으로 판사로 복직된 김용진이 맡았다. 10월 25일 재판장은 양명산이 1심 판결에서 고개를 숙이고 인정하였던 것을 2심 재판에서 대부분 부인하였는데도 1심 재판에서의 진술을 인정하여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 다른 진보당 간부들에게 3년 내지 2년 징역을 선고하였다. 재판장은 앙명산 피고인이 2심에서 부인한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의 기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자체가 문제시되었고, 불고불리(不告不理)의 원칙까지도 무시하고 공소사실에도 없는 '혁신정치의 실현' '수탈 없는 경제체제' 등도 유죄의 증거로 내세웠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주심 김갑수 대법관)은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 다른 진보당 주요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213-5)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이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에 이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체제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조봉암의 정치이념이나 정책은 그것을 교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정책에서도 미국의 자유주의와 대립되었으며, 민족자주의 지향은 미국의 대한정책과 충돌할 수 있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조봉암은 가족과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 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기도 하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된 나를 처단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 수가 있겠느냐. 과히 상심하지는 말아라." 재심이 청구되었으나, 상고심을 맡았던 재판부가 다시 재심을 맡았고, 1959년 7월 30일에 기각되었다.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고 준비중인 7월 31일 오전, 4월혁명을 8, 9개월 앞둔 시점에 조봉암은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0이었다."(218)


# 동아시아 냉전 체제를 교란할 수 있는 조봉암의 정치이념이나 경제정책 그리고 민족자주 지향에 대한 우려


2장 조봉암-진보당의 평화통일론


3장 사회민주주의와 1950년대


2절 조봉암-진보당과 사회민주주의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자료는 한결같이 소련을 비난하고 미국을 옹호하였다. 특히 조봉암이 1954년에 쓴 「우리의 당면과업」에서나 1955년에 쓴 「내가 본 내외정국」에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던바, 그것은 그 이후의 것과 약간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반소 친미의 입장은 진보당 강령에서도 확연하였다. 「우리의 당면과업」과 「내가 본 내외정국」은 후자가 더욱 심하지만 냉전적 사고가 적잖이 들어있다. 전자에서 조봉암은 "미국의 존재는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의 원천이 되고 있으나, 크레믈린의 세계침략의 야망은 날이 갈수록 도를 가할 것이며, 그 자들의 평화의 '탈'은 내부정리와 전쟁준비를 위한 시간 쟁취에 불과한 것"으로 일축하였고, 나아가 후자에서는 미국을 "세계 자유진영의 모범적인 기사로서····· 공산침략을 격파하고 공산당 모략을 분쇄하고 공산권 내의 인민들을 해방시킬 세계 자유진영의 선봉대"로 위치지었다."(368)


"조봉암은 스탈린과 그의 일당이 북한괴뢰로 하여금 불의의 침략전쟁을 도발시켰고, 그리하여 크레믈린의 충복인 북한 공산도당은 좌익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야기하여 그들의 괴뢰성과 민족반역성을 완전히 폭로하였다고 북의 공산주의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진보세력으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게 하였고,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였다. 곧 우리 민족은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쓰라린 생활경험과 처참한 전쟁의 심각한 체험과 무능 부패한 사이비 민주정치하에서의 곤궁한 생활경험을 통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곧 사회적 민주주의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사상적 결론 내지 확신에 도달하였고, 이 강토에다 민주적 평화적으로 사회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유엔 및 반공 서방세계의 영도자인 우리의 위대한 맹방 미국과 긴밀히 제휴 협력하여 국제공산주의의 무력적 위협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369)


# 그 외에도 제3세계가 주도하는 반둥회의에서 반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 주창


3절 사회민주주의 경제정책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극우보수세력도 공산당으로 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성수, 김준연, 조병옥 등 민국당 간부들을 군과 경찰에 잠입하였다는 조작된 남파간첩과 연결지으려던 1950년 4월에 있은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은 너무나 치졸한 작품이었다. 치졸성은 1952년 5, 6월에 발표된,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의 하수인들을 검사로서 취조하였고,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이었던 선우종원 등을 대한민국정부혁신 전국지도위원회라는 국제공산당사건 등으로 몬 것이나, 같은 시기 그와 유사한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민국당 간부 못지않게 극우반공주의자로서 이승만 일민주의의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상도 자유당 내에서의 족청계 숙청의 여파로 1954년 6월 부산 민병대훈련 강조기간 기념대회 축사에서 대한민국이 부패하였다는 등의 연설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피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았다."(448-9)


4절 결핍성 국가에 대한 대안-근대적 국가의 형성을 위하여


조봉암은 '봉건성'을 '전근대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비민주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파악한다. "해방 후 봉건성이 온존한 것은 식민잔재 또는 파행성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통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자주독립의식, 그것과 표리관계에 있는 근대적 인간의식, 시민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거나 말살하기 위하여 동화정책·황국식민화정책을 군국주의 파시즘 주입과 병행하여 강행하였다. 그와 함께 향교나 명륜회, 그 밖에 봉건적 유지층의 보호 육성책 등을 통하여 충효사상, 숭조사상, 경로사상 등 봉건적 덕목을 장려하였고, 식민통치와 대립되지 않는 한 봉건적 인습이나 인간관계를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수신 교과서는 물론 역사 등의 각종 교과서도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봉건 덕목과 군국주의 덕목을 주입시키는 데 비중을 두었다."(459)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킬 인적 요소를 쇠잔시켰다는 점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은 일제강점하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 적었고, 중등교육을 받은 숫자는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들의 중등교육 이수자 숫자와 비슷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하여 한국에 있었던 몇 안되는 공립전문학교에 한국인은 20~30%밖에 입학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행정면에서건 전문기술자로서건 간부직 지휘자급에 있었던 자들이 소수였고, 친일파들은 근대적 시민의식, 인간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해방 후 한국을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제약이 되거나 역작용을 하였다. 반면 뛰어난 품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들의 다수는 사회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던바, 인적 자원이라는 면과 연결지어 생각할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전문자질을 갖추는 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다."(460)


"경제의 파행성 못지않게 근대적 국가를 갖추는 데 심각한 어려움은 정치와 행정에도 있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관기확립과 행정빈곤의 해결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후도 비슷하였지만 1950년대에 한국의 행정은 한 사람을 정점에 두고 관기가 흐트러진 채 부패, 무능, 직권남용, 아부, 정실이 상호 사슬을 이룬 사인(私人) 대 사인의 관계로 처리되는 거대한 사적 권력체계였다. 한국의 관료는 전문직 관리계층으로 조직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집권세력의 수족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와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 봉건적 관습의 잔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존민비였다. 조봉암이 말한 대로, 관존민비 사상은 실제 면에서 강력히 작동되고 있어 대민봉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관료들은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며 어느 곳에서나 오만하고 존대한 태도를 보였고, 일반서민들은 관료를 두려워하였다."(468)


"공무원 사회에 관존민비, 부정부패, 직권남용, 아부, 무능, 정실이 만연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종극이 지적한바 인플레에 의한 물가고등과 박봉에 있었다. 특히 경찰직과 같이 민원에 직결된 하급직책은 봉급이 아주 낮아 부정한 짓을 하라고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보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무원, 특히 경찰관수를 대폭 줄이고 예산낭비를 줄여 공무원의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자유당과 민주당에서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하였다. 인허가에서 원조물자, 원조달러의 배분, 융자, 귀속재산 불하 등에 관리의 자의가 개재하기 쉽다는 것도 이와 같은 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이것 또한 진보당과 민주당에서는 계속 문제점으로 지적하였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유해무익한 간섭·허가제도를 일소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인허가제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만, 과대한 중앙집권화와 관료조직의 비대화도 그와 같은 풍토를 조성하였다."(472)


5절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기반의 제약


"진보당에 노동운동 관계자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조봉암이 말한 바대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대한노총은 대체로 극우 성향이 강한 데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의 영향하에 놓였고, 1952년 조선방직쟁의 이후에는 더욱 어용화되었으며, 자유당의 '기간조직'이자 외곽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조봉암의 진보당에는 민련 등 중도우파가 꽤 많이 들어왔지만, 대한노총 내 중도우파 또는 혁신파 간부들이 전쟁 때 의문의 죽음을 하거나 실종된 것도 진보당에 노동운동 관계자의 참여가 적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진보당이 진보당 정책 중 '노동문제'에서 노동운동이 부패한 관료와 자본가들에 의해 농단되고 있고, 노동조합이 그들의 어용단체화하고 있는 현상을 시급히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노동문제에 대하여 원론적인 주장을 한 것에 머문 것은 기본적으로 진보당이 노동운동이나 노동조직에 관여할 수 있는 통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489)


# 농민조직도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에 예속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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