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학술총서 6
류대영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1부 기독교와 근대 한국


1장 기독교에 대한 개화기 지식인들의 태도와 근대성 문제


#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견해

1. 전통적 중화주의 : 서양 문물을 야만으로 간주한 성리학자들

2. 현실적 중화주의 : 양무洋務운동에 영향을 받은 온건개화파

3. 일본식 서구주의 : 메이지 일본에 영향을 받은 급진개화파

4. 미국식 서구주의 : 미국식 교육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세례를 받은 자들


"개항기 미국 공사관에서 일했던 윌리엄 샌즈는 조선의 지성인들이 기독교 속에서 진정으로 찾았던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는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조선 지식인들이 기독교 속에서 매력을 느꼈던 요소는 인도적·윤리적 삶, 정치적 원리, 그리고 서구적 생활이었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수용하는 일이 조선 지식인에게 "그들의 윤리와 조화되지 못할 것 없는 서구적 윤리규범을 받아들여 그것을 마치 편리한 탈것을 이용하듯 타고 서구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관찰했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구 종교와 서구의 학문을 구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샌즈에 의하면 조선 지식인들이 기독교에서 진정으로 목격했던 것은 영적인 일과 결부되어 있는 어떤 정치적인 힘의 작용이다. 즉 조선인은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미국 선교사들 속에서 미국의 힘을 보았다는 것이다."(41)


"윤치호와 서재필은 미국 기독교 신자였고, 개항기의 개혁가 가운데 가장 친미국적이고 친선교사적이었다. 그들이 해외에 있는 동안 미국 선교사를 선두로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입국하였고,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구 문물과 개신교를 국내에서 접할 수 있었다." "(계층과 개종 동기가 다양했던) 개종자들의 대부분은 평민, 상인, 천민 등 중하층 계급 출신이었다. 양반 출신 개종자는 극히 드물어, 몰락한 집안사람이거나 개인적으로 극한의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 가운데 개종자가 발생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국과 개신교를 배울 때는 그들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생각하다가, 무기수 신분으로 옥중에서 개종한 이승만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승만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이며, 미국으로부터 도덕적·물질적 도움을 받아 자강과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50-1)


2장 한말 기독교 신문의 문명개화론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의 문명관이 특히 강조한 것은 "반개화"와 완전한 "문명개화"의 차이점, 그리고 반개화에서 문명개화로 이르는 길이었다." "조선이 반개화의 지경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 그 증상들을 알려줌으로써 독자들을 일깨우고, "개화의 가장 높은 데" 이른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여 그 진보됨과 편리함을 독자들이 사모하게 한 후, 어떻게 그런 지경에 이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두 신문의 목표였다. "인종과 개화의 등급" 기사가 조선 사람들은 문명의 등급과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부국강병의 실효를 힘써 급히 진보하야 가히 문명 개화의 사람이 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결론 맺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신문〉은 반개화의 전형을 청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청이 반개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오랫동안 중국을 문명의 중심으로 여겨 온 조선을 일깨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67-8)


# 반개화문명과 개화문명의 차이점

1. 물질적 차원 : 농공상업이나 지식·기예가 어느 정도 발달했는가, 철도·기선·인쇄술 같은 기술분야는 어느 정도 발달했는가

2. 법률적·정치적 차원 : 법률이 얼마나 공정하고 엄정하게 집행되는가, 위정자와 백성들이 얼마나 단결되어 있으며 애국적인가

3. 정신적 차원 : 이기적이지 않고 몽매하지 않으며 실속 없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문명인의 염치와 도덕을 갖추었는가


"〈회보〉와 〈신문〉의 문명개화론에 따르면 근대적 법률을 제정하고 그것을 공평무사하게 실행하는 일이 개화의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법률과 관련하여 선교사들은 문제의 근본은 법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문화되었거나 아니면 공평무사하게 집행되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법률체계의 도입이 시도된 이후에도 과거의 악법이 여전히 사용되는 데 대한 비판은 특히 날카로웠다." "조선의 법이 진보하기보다 퇴보하고 있다는 〈신문〉의 비판은 구체적으로 1898년 9월 김홍륙 일당이 독이 든 커피를 진상하여 고종과 황태자를 위해하려 한 사건과 관련 있었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중추원은 이미 폐지된 연좌법과 참수형을 부활시켜 관련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두 신문은 황제와 황태자의 독살음모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엄중히 따지면서도 이미 폐지된 옛 악법을 다시 살리는 일을 격렬하게 비판했다."(80-1)


"조선의 문명개화를 논한 〈회보〉와 〈신문〉의 기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이 교육의 중요함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물질적 개화든지 아니면 정신적 개화든지, 무지몽매한 백성을 일깨워 일하는 근대적 시민으로 만들고 나라를 문명개화케 하는 모든 일이 교육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부강한 나라들이 교육에 힘써서 효험을 얻은 것을 증거로 "교육은 국가의 대본"이라고 선언한 것부터, 사람이 읽고 쓸 줄 모르면 "금수보담 나흘 거시 없나니"라는 자극적인 권면에 이르기까지 두 신문은 교육찬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글들의 논지는 결국 교육이 문명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를 세워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하는데, 만약 정부에서 이 일을 충분히 추진하지 못한다면 교회라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진리가 교화敎化의 기능을 반드시 담당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98-9)


3장 20세기 초 한국 교회 부흥현상에 관한 재검토


1907년 1월 평양에서 있었던 부흥집회에서는 흔히 성령세례 혹은 성령강림이라고 불리는 비상한 육체적, 정신적 현상이 나타났다.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당시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좁은 농촌 공동체에서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또한 제국주의 침략 앞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왕조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삶은 극도로 불안했다. 왕래를 어렵게 하는 한국의 산악지형, 전통적으로 폐쇄적인 향촌 사회, 불편한 교통, 그리고 인구비례로 볼 때 얼마 되지 않는 기독교인 수 등을 고려한다면, 수백 명 혹은 그 이상씩 모이는 규모가 큰 사경회나 부흥집회는 대단한 종교적-사회적 모임이었다. 또한 그렇게 큰 모임은 일 년에 한 번씩 밖에 열리지 않는 귀한 기회였다. 망해가는 나라의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사경회나 부흥회가 한편으로는 강렬한 집단적 종교경험을 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교제와 학습, 정체감 확인 등 의미 있는 사회적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17)


20세기 초 부흥운동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났던 것은 "통회자복痛悔自服"이라고 불렸던, 격정적인 회개였다. "유교에 기초한 이성적이고 공적인 질서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구원"이나 "믿음"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차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개종자들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속하는 것, 즉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 그리고 윤리규범을 이성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부흥운동에서 벌어진 통회자복 현상은 한국 교인들이 개인적이고 초이성적 차원의 기독교를 비로소 경험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점은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 교인들이 일본인들을 증오한 죄까지 회개하고, 고종이 퇴위했을 때 극도로 고조되었던 반일감정을 길선주가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진정시킨 현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123-4)


4장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 1890~1930


"존스의 논문 〈한국인들의 정령숭배〉는 당시 한국에 유행하던 세 가지 종교였던 유교, 불교, 샤머니즘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들에 대해 배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며, 세 종교가 공존하면서 중첩되고 상호침투하여 구별할 수 없는 뒤범벅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존스는 세 종교가 이론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하나의 혼합되고 소화되지 않은 가르침과 믿음의 덩어리"로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의 한국인은······ 세 종교제도 모두의 추종자"라고 말했다." "서로 혼합되어 한국인의 종교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세 종교전통 가운데서도 존스는 특히 정령숭배spirit worship가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종교행위로서 다른 두 종교에 있는 거의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를 흡수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인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그들은 한국인이 믿고 있던 정령의 놀라운 다양성과 그 수효에 놀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57-8)


"유신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접근했던 선교사들은 유교가 과연 종교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선교사들이 만든 상해 중서서원과 미국의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한 윤치호가 유교를 비판하면서, 신앙을 파괴하는 불가지론적인 가르침으로 오직 현세에만 관심을 가지며, 영적spiritual이지 못해서 "경건한" 사람을 기르지 못하며,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서 끝난다고 지적한 것은 이와 같은 서구적 관점을 드러낸 대표적인 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교는 오직 현세에서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행위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 도덕"이었다." "초월적 신과의 사적인 관계를 종교의 핵심으로 파악했던 선교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유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면은 죽은 자에 대한 "숭배"였다. 존스는 유교가 만들어낸 "사자死者숭배"가 한국의 국가 종교라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사자숭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패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173-4)


"조상제사에 구복적인 요소가 있다고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클라크는 제사를 올리는 이유가 단순히 효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자손들이 번영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제사를 올려 죽은 사람을 먹이지 않으면 죽은 이가 화난 악령이 되어 산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클라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평화가 제사에 달려있다는 것이 조상숭배의 "교리"라고 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조상제사는 영생을 바라는 한국인의 소망을 반영했으며, 남아선호 현상 및 그것과 연관된 여러가지 폐습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제사를 통해 사후에도 삶을 누리게 되므로 제사는 영생을 위한 조건이었고, 아들만 제사를 모실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여성 비하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믿었다."(176-7)


2부 기독교와 사회주의


5장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련 연구 : 현황과 과제


"사회주의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 것 가운데 하나가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도입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교회에 일기 시작한 자본과 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반영한 사회복음은 192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는데, 여기에도 사회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될 만한 측면이 있었다." "(민중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성격의 단체들에서 추진된) 사회복음은 유물론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기독교사회주의와 구별되었다. 그러나 실천에서는 두 흐름 모두 실력양성운동, 농촌운동, 협동조합운동, 그리고 이상촌운동 등으로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이상촌운동은 미국의 기독교사회주의와 사회복음에서도 볼 수 있는, 기독교적 공산사회를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의 모습이었다."(207-8)


이론적 측면이 아닌 역사적 연구 측면에서도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남 대동군의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 강돈욱의 딸이었던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일요일 예배뿐 아니라 새벽기도회에 성실하게 참가하던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인이 아니면 입학할 수 없었던 숭실학교에 다녔고 다른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다. 김형직, 손정도를 비롯하여 김일성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 그 자신도 길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손정도의 교회를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를 했으며, 그곳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 소년회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그런 태도는 기독교와 북한 사회주의가 "민족"을 접점으로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211-2)


6장 김일성과 기독교, 기독교인


"북한의 종교인과 종교시설 가운데는 그 계층적·물질적 기반이나 반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반제반봉건 혁명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서북지역에 기반한 기독교인들은 계층적으로 중농, 부농, 지주, 자본가 층이 많았고, 친미반공주의를 견지하여 김일성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사회주의 정권 건립에 반대했다. 예를 들어, 해방 후 북한지역 장로교의 대표기관으로 형성된 5도연합노회는 1946년 10월에 임시인민위원회에 전달한 5개조의 결의문을 통해 인민위원회위원 선거일로 지정된 일요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도 참가하지 않으며 예배당은 예배 이외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김일성은 종교인들을 향해 선거참여를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흉악한 의도"를 지닌 "반동분자"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하는 애국적 행위를 금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223)


"1948년 9월에 건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은 선교나 종교 교육을 포함한 포괄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 즉 "신앙의 자유"만 가능하게 했다.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북한 헌법이 반反종교 선전의 자유 조항을 빠뜨렸다는 점이다. 소련의 헌법, 또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진 다른 사회주의 국가 헌법들은 모두 신앙의 자유와 아울러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보장했다. 북한 헌법이 반종교 선전의 자유 조항을 넣지 않은 것은 감리교 목사 홍기주가 부위원장, 장로교 목사 강량욱이 서기장으로 인민위원회에 참여햐는 등 북한정권이 광범위한 통일전선적 연대 속에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전체 인민위원 가운데 2.7%가 종교인이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목사들이었다. 북한 정권은 헌법에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포함시키지 않았을뿐 아니라 조직적으로 반종교 선전을 행하지도 않았다."(226-7)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하여 볼 때 종교는 "비과학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아편처럼 "해독"을 끼치는 무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는 여전히 "례배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헌법이 그들의 종교행위를 보장했다.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중심으로 친정권적인 사람만 교수나 학생이 될 수 있기는 했지만 신학교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사경회 같은 집회도 개최되었다. 북한 정권 초기의 통일전선적 상황에서 김일성이 종교인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건국사업"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국가를 종교 앞에 둔) "하느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김일성이 어렸을 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들었다는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고쳐서 사용한 것이었다. 이 말은 이후에도 종교인에 대한 김일성의 기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발언으로 자주 인용되었다."(228-9)


"(남한을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목적을 앞세워 일으킨) 파괴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에 "종교허무주의"가 광범하게 확산되어 갔는데, 개신교인들이 특별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교회와 신학교 건물이 거의 파괴되어 전쟁 후에는 모이려고 해도 모일 장소가 없을 지경이었다. 미국이 절대 교회를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습경보가 나면 방공호가 아니라 교회로 모였다가 희생된 경험은 쓰라렸다. 결국, 기독교가 증오하는 미국의 종교로 인식되면서 신자들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내놓고 다니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탈교脫敎하는 사람도 많았다. 회고록을 쓰면서 김일성은 미군이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도 죽였는데, 신이 그런 만행을 제어하지 못하자 기독교 신자들이 "스스로 신앙을 버리고"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세계의 창조자라는 주체사상의 신봉자가 되었다고 말했다."(231)


"(1972년 12월에 채택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은 최고인민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내각을 폐지한 후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의 대표자인 주석을 신설했다. 주석제 신설은 1960년대 말부터 전개해온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 작업, 그리고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자인 "수령" 김일성이 지닌 절대권위의 헌법적 표현이었다. 1974년 2월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공식 선포하며 조선로동당의 지도사상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종교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헌법에 "반종교선전의 자유"가 새로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종교의 자유와 관련하여 구헌법이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한 데 비해서 사회주의 헌법은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 정부는 공연물과 문서를 통해 활발한 반종교 선전을 하였다."(241-2)


3부 기독교와 남한 사회


7장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


"한국기독교연합회(NCCK)의 "파월 장병을 위한 전국 기도회" 권고문은 베트남에 파견된 장병들이 "아세아의 평화와 월남 국민의 자유수호"를 위한 "승공전쟁"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면서 장병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다. 백마부대 환송예배를 주선하고 사회를 본 NCCK 전도부장 김활란은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위장僞裝 없는 영구한 평화를 아시아에 심고자" 몸 바치고 나선 그들을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부르며 신의 가호를 기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무 유호준은 환송사를 통해 "자유월남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무찔러" 지켜주는 일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사랑이 아니고 한국 및 "세계적 전선戰線"과 직결된 문제라고 말했다. 그 전선의 일부가 무너지면 한국과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자유진영"의 자유와 평화가 위태롭다는 것이었다."(271-2)


"한국 교회가 베트남 전쟁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했던 것이 "임마누엘" 부대였다. 임마누엘 부대는 백마부대 안에 지휘관과 병사가 모두 기독교인들만으로 구성된 중대(제29연대 5중대)였다. 기독교인들만으로 구성되고 기독교적인 이름을 지닌 부대의 편성을 허락한 것은 베트남 파병과 관련된 정부와 교회의 밀월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백마부대 환송예배에서 설교를 했던 NCCK 총무 길진경은 백마부대는 "임마누엘 소대를 지체肢體"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십자군", "정의의 군대"라고 말했다. 그는 임마누엘 소대 때문에 백마부대에 "하나님의 가호하심이 더욱 극진할 것"이라고 기원했다. 임마누엘 중대의 군목 박귀현은 〈교회연합신문〉으로 보낸 편지에서, 임마누엘 중대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20세기의 자유 십자군"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과 한국 교회를 연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베트남에 파견된 군목들이었다."(277-8)


8장 1980년대 이후 보수교회 사회참여의 이론과 사례


"한국의 보수교회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전두환의 군사독재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가운데 정교분리, 전도, 반공 등의 논리에 기대어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데 대한 신학적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 악 앞에서 침묵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한국 보수교회의 새로운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이 실현되는 영역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성격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 그 완전함은 미래에 올 것이라 가르쳤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동참하는 일이 곧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되게 해주었다."(303-5)


"1980년대 한국 보수교회가 전반적으로 어용화되거나 제도적인 불의 앞에 침묵하고 있을 때 사회참여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이만열은 당시 보수교회의 사회참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만열은 매우 보수적인 교단인 "고려파(즉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출신으로 한 번도 자신의 교단을 떠난 적은 없으면서도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 기독교 사회활동가들과 교류하며 협력한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서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학문적으로 설파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만열은 스스로의 신앙적, 학문적 화두를 "신앙과 역사 그리고 민족"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특히 친구인 김창락의 권유로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안병무, 서남동 등 민중신학자들과의 만남은 "신앙과 신학상의 개안"을 가져올 정도로 이만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324-5)


"사회참여에 대한 손봉호의 가치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선지자적 비관주의prophetic pessimism〉다." "문제는 비관주의가, 허무주의나 상대주의처럼 패배주의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였다." "손봉호는 그 가능성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에서 보았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이 이런 역설적 기능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구원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오게 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손봉호는 철학자와 선지자에게 비판이 각각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선지자적 비관주의"는 낙관주의에서 오는 교조주의와 비관주의에서 오는 패배주의를 철학자들이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제공한다고 보았다."(334-5)


9장 2천년대 초 한국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의 친미·반공주의 이해


"근본주의를 포함하여 현대 복음주의의 신학적, 역사적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적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ity" 속에는 당시 사회·문화적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진보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의 복음적 기독교인들 중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애쓴 사람, 여권신장에 힘써 오늘날 여성주의의 선구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19세기 내내 진보적, 개혁적 역할을 담당했던 복음적 기독교인들의 후손들이 20세기에 들어서 보수적인 사회, 정치, 문화적 행동을 보인 현상을 두고 "대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부른다. (대반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근본주의자들은 당시의 역사적 "변화"를 총체적으로 상징했던 근대성이 1920년대 이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수용되어 보편적인 미국의 가치가 되었을 때 여전히 근대성을 거부하고 그들이 생각한 이상적 과거를 "보수"했다."(357-8)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직후부터 미국 사회에 퍼졌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위협을 가장 심각하게 느낀 사람들은 서구 문명을 "성경에 근거한 문명"으로,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생각한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무신론적 공산주의는 진화론과 더불어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탄의 주무기였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가치와 미국의 섭리적 위치에 대해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성경적 서구 문명과 기독교적 미국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그들이 판단했던 근대성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던 터라 공산주의 러시아의 등장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공산주의 음모론은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흥미로운 점은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극단적인 애국적 종말론과 연결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358-9)


"한국 기독교인들이 견지하고 있던 반공주의는 해방공간과 6·25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와 직접 충돌하면서 극단적으로 강화되었다. 일본의 반공정책 때문에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주의 세력과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던 교회는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을 장악해가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과 충돌했다. 일제에 순응하고 자본주의적, 비민중적이었던 북의 교회는 반봉건·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 주도세력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조화시킬 수 없었고, 미국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남쪽으로 "대탈출"을 감행했다. 한경직을 비롯하여 이렇게 남하한 지도자들은 반공주의를 신학화 하여 북의 공산정권을 종말론적 적그리스도라고 단정했다." "반공주의를 종말론 신학과 연결시킨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 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반공·멸공의 선봉에 섰으며, 전쟁 중에는 휴전을 끝까지 반대했다."(368-9)


"미국의 경우를 적용하여 분석해보면, 복음주의 우파가 정치적으로 적극적을 띠게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외부적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첫째,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 조성되어야 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우주 전체의 최종 운명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면서 정작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언제나 비관론을 증명하기 마련이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현실적 비관주의는 모든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복음주의 특유의 신학적 경향과 합하여 대개 정치적 침묵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가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든 사회가 개인의 영혼을 위협한다고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느끼는 단계에 이른다. 이 시점이 되면 복음주의 우파는 영혼을 위해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374-5)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는 복음주의 우파의 행동은 그들이 변화지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에 순응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변화가 자신들의 신앙적 세계관에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다. 신앙적이건 정치적이건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언제나 몇몇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의 동기부여와 선동에 의해서다.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 힘의 향방을 대단히 민감하게 감지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근본주의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동에 관해 연구한 한 역사가는 그들이 어떤 "힘의 공백power vacuum"을 감지했을 때 그것을 채우는 데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미국에서 1970년대에 기독교 신우파the Christian New Right나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 Inc. 운동이 등장하여 복음주의자들 다수가 정치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발생한 현상이었다."(375)


10장 한국 기독교 뉴라이트의 이념과 세계관


"기독교 우파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된 현상이다. 그들은 종교적 사명감에 따라 정치적인 활동을 펴고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서라면 종교적 신념도 접어둘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다. 정치집단으로서 기독교 우파가 정치 현장에서 믿는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표의 힘이다. 라헤이는 "중생한 기독교인"이 미국 전체 인구의 25~30%이므로 그 비율만큼의 공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당(대표 전광훈)은 18대 총선에 나서면서 "권력은 표에서 나온다"고 선언했다." "표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우파는 가톨릭 가운데 반공주의와 전통적 윤리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협력했다. 신학적으로 근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기독교 우파가 과거 맹렬한 공격의 대상이었던 가톨릭과 협력한다는 사실은 미국 기독교 우파의 행동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398-9)


# 한국 역시 뉴라이트 기독교연합과 뉴라이트 가톨릭연합 그리고 뉴라이트 불교연합이 모여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구성


"한국 기독교 뉴라이트가 생각하는 대한민국(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에 따라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은 건국세력 및 근대화 세력의 주도로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우파 공화국으로서, 좌파가 정권을 잡기까지 '성공의 역사'를 이루어 온 국가였다. 대한민국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이승만의 "현실주의적 선택"과 "민주적 선거과정을 거쳐" 탄생한, "어떤 정통성의 하자"도 없는 나라다. 분단과 6·25 전쟁의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있다. 한국과 미국의 작전수행 중 민간인 "오인 사격"이 있었지만 인민군의 민간인 납치와 학살에 비할 바 아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빠르고 성공적인 근대화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라는 "조건 하에서" 가능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부의 불균형과 권위주의 정치, 그리고 인권의 제한과 탄압은 산업화 과정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일반적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는 부작용과 희생"이다."(405)


"미국 뉴라이트운동은 크게 종교적 우파, 보수적 기업가, 그리고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지식인·정치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집단은 뉴라이트운동 내에서 각각 독특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종교적 우파, 즉 기독교 우파가 맡은 일은 대중을 동원하는 일이다. 네오콘은 원래 자유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였던 사람들로서 1970년대 후반에 자유주의와 민주당을 버리고 보수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현실에 의해 습격당한" 진보주의 전력자들이다. 보수로 전향하기 이전, 네오콘들은 평등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평등한 삶을 가로막는 인종, 성, 계층 등에 의한 장애물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계급new class"을 형성하게 된 사회운동가, 평화운동가, 급진적 지식인, 교원노조 등이 기회의 균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an equality of outcome"을 추구하고, 반공과 전통적 가치를 버렸다고 판단했다."(406)


"한국의 뉴라이트가 뜻하는 자유주의는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최소화된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옹호한다는 차원, 즉 경제적 차원으로 제한되어 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정치·문화·사상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고 그 조건으로서 양심과 삶의 방식에 관한 개인의 선택을 철저히 보장하려 한다. 사상, 종교, 예술의 자유를 중시할 뿐 아니라 성性, 낙태, 도박, 술, 중독성 물질 등과 관련하여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한 요소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절차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포괄적인 사상과 삶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한국의 뉴라이트, 특히 기독교 뉴라이트가 이런 차원에서도 자유주의를 추구하는지 의문이다."(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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