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3·1운동 당시 이봉창은 무라타 약국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봉창이 3·1운동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1932년 9월 16일에 있은 첫 공판 때뿐이다. 일본인 관선변호사가 "그것을 듣고 어떤 소감을 가졌는가"라고 묻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이봉창은 3·1운동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으며,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로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왜 이봉창은 3·1운동이나 민족운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성장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식민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던 가정환경이다." 이봉창의 아버지 이진구는 식민지배와 약탈에 필요한 건축 수요 및 이주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한일합방 이전 시기부터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영위하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 "이봉창이 민족운동과 무관하게 자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용산의 지역적 특징을 들 수 있다."(35) 


"이봉창이 어린 시절을 보낸 용산 일대는 '조선 내 일본'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의 각종 군사시설과 운수, 통신 기관이 밀집된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용산은 경성 시가지의 외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에 전차 노선이 들어오고, 상수도도 제일 먼저 설치되는 등 도시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이봉창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봉창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을 접하면서 다른 조선인보다 빨리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능력은 1913년에 0.61%였던 것이 10년이 지난 1923년에도 1.81%에 불과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드물었다." "이봉창은 일본인 상점에 취직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면서 일본어에 더 능숙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그가 나중에 일본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36-7)


일본으로 가기 전의 이봉창의 행적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일은 1925년 10월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센서스인 간이국세조사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간이국세조사위원이 '명예직'이었다는 것은 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뒤에 유명한 친일파가 된 이들의 상당수가 관직 경력에 '국세조사위원' 항목을 자랑스럽게 적어넣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국세조사위원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대한 동의 등이 인정되어야만 선발되었던 것이다." "이봉창이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총독으로부터 상금과 함께 나무잔까지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에 불만을 품고 용산역 근무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의 식민정책에 협조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65-7)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이봉창은 조선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자책했다.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결코 그쪽이 나쁜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내가 나쁜 것이다. 유치한 것이다.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사람처럼 얼굴을 내민 것이 잘못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봉창은 자신이 비참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인임에 틀림없다. 신일본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봉창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인이 아니라 '신일본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안정된 직장을 구해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80-1)


"1926년 12월 25일, 몸이 약해 병으로 고생하던 다이쇼(大正) 천황이 사망하자 오랫동안 섭정을 해오던 히로히토가 도쿄 궁성에서 조견례를 갖고 천황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대례, 곧 공식적으로 천황에 즉위하는 행사는 다이쇼의 복상이 끝나는 1928년 11월 10일에 교토 고쇼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이봉창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처음 깨달았다." 아마가자키 출장소 공작계의 상용인부로 일을 나가는 동안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성실한 작업 태도를 인정받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이봉창은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제대로 된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노동자이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겠다고 다짐했다."(93-4)


그러나 정작 즉위식날 검문에서 소지하고 있던 한글 편지 때문에 유치장에 갇힌 신세가 되자 "이봉창은 자신을 '불행한 인간'이라고 체념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자신을 유치장에 집어넣는 '얄궂은 세상'을 원망했다. 그럴수록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압박과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봉창이 당시 느꼈던 분노와 절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책할수록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이었다. 결국 이봉창은 자신이 조선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98) "유치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봉창은 취조를 받거나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은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처음으로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막연한 생각에 불과했다."(100-1)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조선인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쓰루하시에서 생활하면서도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는) 모든 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는 진짜 일본인처럼 행동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과의 교제를 완전히 끊었다. 쓰루하시를 비롯하여 오사카에는 친구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이봉창은 그들을 만나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봉창은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조카딸 은임과의 연락도 끊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정책은 결코 이봉창의 그러한 '소박한 열망'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105-7) "결국 이봉창은 불경기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상황에서 상해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그곳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생각을 품고 상해행을 결심했다. 이봉창이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119)


1931년 1월 초순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한 이봉창을 눈여겨본 김구는 며칠 뒤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의 이 말에 김구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서야 김구는 이봉창이 의기남아로서 살신성인할 큰 뜻을 품고 상해로 건너와서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김구는 이봉창의 위대한 인생관을 듣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봉창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 일에 몸바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김구에게 청했다. 김구는 쾌히 승낙했다."(129)


"이봉창이 도쿄로 떠난 1931년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암흑의 시기'였다. 3·1운동 직후의 혁명적인 열기와 독립의 희망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2~23년을 넘어서면서 국제정세가 점차 안정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기대와 달리 독립의 희망은 점점 멀어졌다. 그럴수록 독립운동가들의 이탈은 늘어났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견뎌야만 하는 긴긴 절망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특히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9년과 1930년 무렵은 뚜렷한 독립운동의 성과가 없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 "특히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독립운동 최대의 근거지였던 만주에서의 무장투쟁도 어렵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최고조에 이르렀던 국내의 대중투쟁도 현격히 줄어들었다."(185-6)


"(천황 폭살을 시도한) 이봉창은 결정적인 실수 두 가지를 범했다. 우선 천황의 행차코스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사 당일 천황의 이동코스를 제대로 알지 못해 시간을 놓치고 당황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실수는 천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않은 것이다. 천황의 사진은 물론이요 천황이 야외행차를 할 때에 행렬의 어디쯤에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았다." "천황 폭살이라는 엄청난 거사를 오로지 이봉창에게만 일임한 김구의 잘못도 있었다. 김구 자신이 일본 사정에 어두웠고, 이봉창을 도와줄 동지 한 명 없이 혼자 파견했다. 물론 당시의 임시정부 형편으로 이봉창을 도와줄 인물을 함께 일본에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봉창 한 명을 도쿄로 보내는 여비를 마련하는 데도 반 년 이상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는 도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이봉창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김구의 결정적인 실수였다."(211)


# 1932년 1월 8일 거사 실행 그리고 실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일본의 천황을 죽이려고 시도한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 첫번째는 이봉창 이전에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가 계획단계에서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경우이고, 두번째가 이봉창의 경우이다. 물론 1924년 1월에 의열단원 김지섭이 천황이 사는 고쿄의 궁성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천황의 폭살을 직접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239) "김구가 테러리즘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승승장구하면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들어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김구는 실력양성이나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조직이나 자금도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해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릴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테러리즘이었다."(243)


"비록 이봉창 의거는 실패했지만 동경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재기에 성공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했던 미주 동포들이 다시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동경사건을 보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김구는 제2, 제3의 동경의거의 임무를 주어 적지로 침투시켰다. 유진식과 이덕주에게는 조선총독 암살을, 최흥식·유상근·이성원·이성발 등 4명에게는 관동군사령관, 관동청장관, 남만철도 총재 등 만주침략의 원흉을 폭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각각 국내와 만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홍구공원 야채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하던 또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장부가 한번 집을 나가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고향을 떠나 상해에 와 있던 윤봉길이었다." "이봉창의 희생으로 인해 꺼져가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다시 불길을 당긴 것은 매우 중요한 공적이라 할 수 있다."(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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