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2 - 유형원과 조선 후기
제임스 버나드 팔레 지음, 김범 옮김 / 산처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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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관제개혁


"국왕의 정통성을 의심치 않았음에도 유교적 경세학자로서 유형원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독재의 가능성을 막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방안을 고안했다. 이런 쟁점과 관련해서 유형원은 주로 세 가지 분야를 다뤘다. 첫째는 국왕이 자신과 종친과 총신에게 쓰는 지출과 궁극적으로는 국가 재정, 특히 호조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내수사의 지출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혼례·장례·연회를 치르고 정치적 충성의 포상을 받을 만한 공신을 임명하는 등의 국왕 자신과 관련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결정권도 포함됐다." "두 번째 영역은 일정한 유교적 가치를 존중하도록 설득하는 상징적 방법으로 국왕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 관심은 관료체제를 운영하고 매일의 국무를 처리하는 권한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후자는 매일의 국무를 처리하는 데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상정된 국왕과 그의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신하 사이에 적절한 권력의 분배와 관련되어 있었다."(11-2)


"유형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의식 중 하나는 국왕이 적전籍田을 의례적으로 경작하는 고대의 전통이었는데, 그것은 중국과 유학에서 중농주의적 전통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굶주림에 직면하면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은 부정과 이단적인 신앙을 불러왔다.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토지에 정착해서 농업에 시간을 투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이 발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농업을 버리는 이유는 번잡한 농법의 변화와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 그리고 세리·서리·채권자들의 약탈로 고통받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황제가 농업 생산을 증가시키는 데 관심을 쏟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통치자의 의례적인 경작은 농민들에 대한 관심과 양육을 통해 농업 생산을 유지하고 관원들의 불법을 근절하는 데 헌신하겠다는 것을 상징화하려는 의도였다."(24-5)


"유형원은 중앙 각사의 이서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제안 중 하나는 모든 이서에게 녹봉을 줌으로써 조선의 관료제도에 고착된 부패의 주요한 원인 하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서의 조직을 두 등급으로 나누고 시험을 거쳐 서리가 녹사로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역설적이지만, 관료제도가 시행된 조선시대보다 귀족제도가 우세했던 고려시대에 이서는 정규 관원으로 좀더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고, 16세기 초반까지도 녹사는 대신의 자제 및 급제자와 동등한 지위로 간주됐으며, 6품까지 오른 뒤에는 과거를 치르거나 정규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직능의 숙련도와 교육 수준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쪽에 가까웠다. 그는 정규 관원과 이서의 근본적인 구분을 받아들였지만 이서에게만 해당되는 취재시험을 개선하고 그들 자체의 승진체계를 만들려고 했다."(88-9)


"유형원은 중국의 역사와 최근 조선 사대부들의 조언에서 도덕의 교육과 실천은 등용의 기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관원의 행동에서 항상 시험되고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과거로는 개인의 충실한 덕행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선발과 승진은 모두 관찰과 천거로 전환되어야 했다. 유형원은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관료제도에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지 보장할 수 있는 향촌공동체의 특징(즉 주대 봉건제도의 기초)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런 목표를 이루려고 했다. 그는 모든 관원에게 천거제도를 확대하고 후보자에게 어떤 결함이 발견되면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그 제도를 강화하자는 송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천거는 이조와 병조의 업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더라도, 보충했다. 그 제도의 정점은 정호가 구상한 연영원筵英院이었는데, 그것은 촉망되는 후보자를 수도에 모아 조언을 듣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일종의 두뇌집단이었다."(127)


"관원을 장기 근속시키면 빠르고 잦은 이직으로 야기된 부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유형원은 16세기 후반 관원을 다른 관직으로 옮기기 전에 현재의 직책에서 충분히 근무케 해야 한다면서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매우 공감했다." "16세기 후반 이이는 국왕에게 (칭병稱病을 핑계로 전보를 신청하는)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형원은 유능한 관원을 다른 관직에서 필요로 할 때 이동시키는 당시 조선의 방식은 용인했지만, 현재의 임기를 마친 뒤에만 허용했다." "이이는 이런 상황이 모두 일반 관원의 잘못은 아니며, 그들이 공무는 물론 사적으로도 고대 성인의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나친 요구를 제기한 삼사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관원이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이 불법행위라는 탄핵을 쏟아냈는데, 그 결과 많은 관원들은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를 비우거나 그밖의 구실을 만들어 방어할 수밖에 없게 됐다."(113-5)


"지방 행정의 네 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유형원은 면적과 인구에 따라 각 행정 단위와 진관의 서열을 좀더 일정하게 재배열함으로써 면적과 조세 분배의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관찰사를 가족과 함께 비교적 오래 재직케 해서 지방의 사무에 익숙해져 통제력을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좀더 강력한 지방 행정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관찰사와 병사·수사의 이서를 감축해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 그는 녹봉을 받지 못하는 이서와 조예의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국가에서 기본적 녹봉을 지급하고, 공비公婢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서 국역을 면제함으로써 관청의 착취는 물론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복잡한 문제는 중앙의 관원 및 그 부하와 향촌 사회 사이의 권력의 분배였다." "유형원은 (세금과 요역 징발, 구휼과 환자 등을) 수령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데서 폐단이 발생했다고 결론짓고 권력을 수령에서 향촌 사회로 옮긴 중국의 제도를 선호했다."(166)


"샤오콩취엔蕭公權은 청에서 향약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열거했는데, 그 대부분은 조선의 상황에도 들어맞았다. 전반적으로 생산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이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무식한 농민은 유교의 교훈보다 비유교적 종교운동과 도적활동의 호소에 훨씬 더 호응했으며, 향정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휘둘렀고 향약은 보갑과 단련團練의 임무를 맡으면서 지역의 경찰 및 민병과 동일하게 됐다. 조선에서 향약은 표면적으로는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렸기 때문에 시행이 중단됐지만, 훨씬 중요한 이유는 처벌의 권한을 수령에게서 향촌으로 이관하면서, 특히 유학 교육을 받은 양반의 이상인 위계적 사회 구조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와 규율을 시행하는 데 불신이 컸기 때문이다." "향약의 옹호자들은 구속받지 않는 개인 생활의 가능성을 거의 모두 제거하고 통제된 사회조직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사회적 조화와 정의를 이루려고 했다."(205-6)


6부 재정개혁과 경제


"유형원은 정규 세입으로 지불해야 하는 정규 지출에 논의를 국한하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대동법이 지출을 계산해서 세입을 확정한다고 비판했는데, 세입에 따라 지출을 제한하는 고전적 방식을 사용하면 당시 정부 재정의 더욱 심각한 문제인 추가적이고 자의적이며 잡다한 세금을 제한 없이 부과하는 관행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는 균형 잡힌 예산에 대해서 논의했던 것이다. 그는 국가의 부채가 발생할 가능성을 막고 재정의 부족을 개인 단체에서 충당하는 데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 부족을 막기 위해서 미리 지출을 계산해 예상된 세입에 맞추어 그것을 줄이려고 했으며, 긴급 상황이나 예측하지 못한 변화, 또는 계산 착오로 생긴 부족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게 잡은 예상 세입에 따른 재정 부족을 국가 부채를 야기시키지 않고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추가 과세를 그때그때 허용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유형원이 극복하려고 노력한 관행이었다."(315)


"유형원은 (공물의) 시장 구매와 관련해서 판매자와 무비주인貿備主人이 서로 협상해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정부가 당시의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유형원은 상인들이 대동법을 반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정부에 물건을 판매해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수도로 상품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대동법이 시장의 발전에 주요한 자극이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유형원은 생산자들이 경쟁을 통해 비용이나 가격을 낮추거나 비효율적인 생산자를 도태시키는 자유시장의 이점을 옹호하는 경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유형원의 경제이론은 객관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가치 평가를 배제한 채 분석하기보다는 도덕적 기준에 바탕했기 때문에, 상인과 생산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서 정부 관원들의 이익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웠다."(324-5)


"유형원은 동전은 주의 정전제와 합치된다고 언급했는데, 그것은 동전이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농민은 생계를 벌 수 있는 수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인은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받음으로써 "사민은 각각 자기에게 합당한 위치를 얻었다[四民各得其所]." 동전은 상품의 가격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상인은 동전을 유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인은 동전이 유통되는 데 충분한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활발히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경제의 번영에 필수적이었으며, 동전의 유통은 가뭄과 물자가 부족할 때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데 필요했다. 유형원은 위기 상황이 닥치면 국가에서는 요역을 동원해 동전을 좀더 주조하면 됐고 동전의 공급은 기후조건에 의존하는 곡물처럼 변동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전은 미곡이나 면포보다 유용한 교환수단이라고 지적했다."(396)


"시장거래의 확대는 동전의 수요를 자극했으며, 국가는 시장에 동전을 공급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세상을 떠난 5년 뒤인) 1678년(숙종 4) 숙종이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자 동전 공급을 통제하는 문제가 대두했다. 숙종은 수도에서만 주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방으로 동전을 운반하는 비용이 많이 들 것을 감안해 지방에서도 주전하도록 허락했는데, 그 결과 동전 공급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약화됐다. 지방 관원들은 자신들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동전을 주조하려고 했으며, 동전 주조세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주화를 주조했다. 이런 변질된 동전은 백성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가치를 하락시킬 뿐이었다." "숙종은 동전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서 동전의 공급을 늘리려고 했지만, 동전의 가치가 저하된 결과 동전 공급을 줄이고 주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정책에서 심각한 모순이었다."(456-7)


"자연적이며 농업적인 경제의 단순성을 선호하는 견고한 보수주의자들은 동전의 도입을 언제나 반대했지만, 이제는 가격·교환 가치·이율의 변동에 반대하는 새로운 보수적인 견해가 나타났다. 보수적인 비판자들은 정부의 미숙한 행정으로 가격을 충분히 보고하고 조사하지 못했으며, 국가가 보유한 동전의 분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역적으로 동전을 고르게 배급하지 못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화관리의 문제를 동전 자체가 해악을 초래한다는 단순하고 도덕적인 개념으로 축소시켰다. 그러므로 1720년대에 나타난 동전에 대한 부정론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단순히 유교적 근본주의자의 몽매한 생각이라기보다는 '근대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1720년대 후반 동전 사용의 증가와 시장의 점진적인 확대는 동전의 부족과 일용품 가격의 하락을 가져왔는데, 관원들은 그런 변화를 동전이 도입된 이후 사실상 뒤집을 수 없는 흐름으로 보기 시작했다."(469-70)


"1731년 영조는 마침내 동전의 유통과 추가적인 주전을 승인했지만, 이는 왕조의 후반을 휩쓴 잦은 가뭄과 국가의 재정 위기 때문이었으며 설득력 있는 주장의 가치에 동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울러 1726년에 시작된 논쟁에서 많은 신하들은 고액전과 지폐, 유형원의 단순한 '소액전'에 대한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에서 이율의 제한에 관련된 진지한 주장을 제기했지만, 영조는 동전 문제에서 새롭고 진보적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지폐나 어음, 또는 은행을 도입하는 발전은 더이상 없었다. 1867년(고종 4)까지는 고액전은 시도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가치가 금방 떨어지고 상품 가격의 팽창을 야기했기 때문에 즉시 퇴출됐다. 그러나 그 까닭은 대원군이 주로 세입을 올리는 데 치중하고 동전 공급을 제한할 필요성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509-11)


"18세기 말엽 국가는 급격한 경제발전을 향한 길을 주도하려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공인된 독점과 사상 사이에서 심판의 기능에 만족했다." "사상과 도고, 공장은 조선 전기의 공인된 생산과 상업의 좁은 구조를 느슨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자본가계층은 매우 제한된 규모였고, 대부분의 생산이 소규모의 수공업에 국한됐기 때문에 산업적 무산계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경제의 확대를 주도할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국가는 동전을 좀더 주조하는 데 동의했지만 소액전에만 국한됐고, 채광 활동을 제한하고 국내 교통을 개선하지 않았으며, 주로 이전의 공물을 구입하려는 목적에서 일정한 독점을 유지했으며, 중국과 조공관계로 좁게 국한되고 일본과 매우 제한된 대외무역을 유지했다. 외국의 무역상과 선교사들이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조선의 해안에 나타났을 때 조선 관원들은 그들이 국가를 멸망시키는 전조라고 간주했다."(563-4)


맺음말


"조선 후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양상의 일부를 잘못 이해했는데, 조선이 스스로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학문의 노력은 비농업적 상업 분야의 성장, 노비제도의 축소, 조세제도의 전환 같은 일부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진보를 입증하려는 열망은 농업의 지배와 양반 권력의 유지, 지식계층의 사고에 준 유교적 경세론의 영향에서는 관심을 거두었다. 이 책이 밝혔듯이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약화됐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상업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상인과 장인은 여전히 소수였으며, 교육과 고위 관직을 지배하고 부와 토지, 농업 생산의 주요한 원천을 장악한 양반가문의 지배에 도전하기에 그들은 너무 약했다."(5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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