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쟁사 2 - 탕평과 세도정치 : 숙종조~고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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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숙종이 송시열계 서인들을 축출하자 남인 정권과 김석주 등 외척 세력이 득세하였다(갑신환국). 정권 교체 이후 남인은 허적·권대운 등의 탁남(濁南)과 윤휴·허목 등의 청남(淸南)으로 분열되었다.


(2) 주요 사건/인물

- 경신환국(1680) : 남인 세력에게 염증을 느끼던 숙종을 등에 업고 외척 김석주는 모종의 정치극을 꾸몄다. 기름장막 사건을 계기로 허적이 제거되고, 윤휴 역시 복선군 역모 사건에 엮여 제거된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한다.

- 이이·성혼의 문묘종사(1681) : 서인은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인 학맥의 원천인 이이와 성혼을 문묘종사하여 퇴계 이황과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 서인의 분열 : 훈척들에 대한 이해 관계와 태조 존호가상 등을 둘러싸고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서인은 송시열과 윤증 부자간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주자 절대주의를 부정하는 윤휴의 사문난적 시비를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선거·윤증 부자가 대립한 사건)’ 갈등으로 결국 노론(송시열 당)과 소론(윤증 당)으로 갈라진다.

- 기사환국(1689) :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 균(?, 훗날의 경종)이 태어난지 석 달도 안 되어 원자 명호(후궁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될 수 있도록 명호를 정하는 일)를 밀어붙이자 송시열이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 사사, 인현왕후 민씨 폐출, 이이·성혼 문묘 출향 등을 단행하여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정권을 재수립한다.

- 갑술환국(1694) :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인이 재차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생모) 독살설이 불거졌다. 여기에 왕비 장씨가 숙원 최씨를 모질게 탄압한 사실이 밝혀지자 숙종이 심경을 바꿔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이·성혼도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 병신처분(1716) : 숙종이 ‘회니시비’의 빌미가 된 윤선거 묘갈명과 ‘신유의서’를 읽은 후 노론의 손을 들어주자, 이에 힘을 얻은 노론은 윤선거 부자의 문집을 파기하고 관작을 추탈하였다. 아울러 소론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노론 전제정치가 개막된다.


경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경종은 자신을 지켜주던 소론 세력이 아버지 숙종에 의해 와해되자, 대리청정 기간동안 그의 흠결을 찾아 폐세자 명분으로 삼으려던 노론 세력의 거센 압력을 이겨내야 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신축옥사(1721) :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노론이 경종의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을 건의하여 성공시킨다. 그러나 세제 책봉 2개월만에 또다시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는 무리수를 두자 소론이 경종에 대한 불경·불충죄를 공박하여 일시적으로 조정을 장악했다.

- 임인옥사(1722) : 목호룡이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포함한 역모 기도를 고변하자, 소론은 경종의 통치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옥사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처리하였고 노론은 최대의 참변을 겪었다.


영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영조는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종통상의 문제점과 노론의 재집권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한 경조 독살설에 시달렸다.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노론과 역습의 기회를 노리는 소론 사이의 당쟁은 여전히 치열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을사처분(1725) : 영조는 즉위 직후 3정승 모두를 소론에서 임명하고 노·소론의 충역시비에 일체 간여하지 않겠다는 ‘시비불분(是非不分)’의 입장을 고수하는 등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순식간에 정국을 개편하여 신임옥사를 무옥(誣獄)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의 신원을 명하는 조치를 내려 노론 집권의 명분을 세워주었다.

- 정미환국(1727) : 영조가 을사처분에 이은 정치보복을 경계하여 탕평을 환기시키면서 노론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노론 강경파는 노소병용(老少竝用)에 협조하는 노론 온건파를 극렬하게 공격한다. 노론 강경파에게 염증을 느낀 영조는 소론 정권을 수립하고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취소하였다.

- 무신란(1728) : 소론 급진파와 남인 일부가 영조의 왕위 계승 절차와 경조 독살 여부를 문제삼아 일으킨 난. 소론 정권을 붕괴시킨 무신란은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여 탕평을 향한 영조의 각오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 신유대훈(1741) : 영조는 신임의리를 완전히 해결하여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때 형조참판 오광은이 대훈(大訓) 반포를 건의하자 영조는 양 당을 강경책으로 밀어붙여 ‘임인옥은 무옥이므로 피화자는 신원한다’는 최종 단안을 내렸다. 신유대훈은 서원 철폐와 전랑통청권 혁파로 이어진다.

- 을해옥사(1755) : 소론 윤지가 나주에 괘서(掛書)를 걸어 조정을 비방하고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밝혀졌다. 격노한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 일파를 대거 숙청하여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경종조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 소론에 근원한다고 발표하여 완전한 노론 정권을 승인하였다.


정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영조 말기 외척 세력이 성장하면서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부홍파(扶洪派, 북당 혹은 시파)와 홍봉한의 잘못을 공격하는 공홍파(功洪派, 남당 혹은 벽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2) 주요 사건/인물

- 남당·북당의 와해(1777) :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홍국영 중심의 비척신 계열을 규합하여 외척 세력 제거에 나섰다. 우선 공홍파의 지원 아래 홍봉한 계열의 부흥파를 숙청했고, 이어 공홍파의 김구주를 유배보내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 시파와 벽파 :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한 세력이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정조의 정국 운영에 반대한 세력이다. 시파와 벽파는 노론·소론·남인 모두에 산재해 있었으며, 1788년 정조가 김치인(노론)·이성원(소론)·채제공(남인)으로 3정승을 구성하면서 점차 대립이 가시화된다.

- 진산사건(1791) : 남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 노·소론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타도하려는 목적에서 진산사건을 이용했고, 결국 1792년(정조 16) 박종악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채제공 독상(獨相) 체제가 종료되었다.

- 영남만인소(1792) : 갑술환국(1694) 이후 정계에서 거의 배제되던 남인이 채제공의 정승 입각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신원과 임오의리의 천명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다. 정조는 만인소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노론 벽파의 반발을 우려하여 영조의 금령을 환기시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렸다. 

- 오회연교(五晦筵敎, 1800) : 정조는 임오의리를 바로잡되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으며, 임오의리로 인해 신임의리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벽파의 투항을 촉구하는 선언문이었는데, 그로부터 12일 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태는 미완의 종결을 맞았다.

- 산림무용론과 군주도통론 : 정조는 편협한 당색의 의리에 매몰된 산림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군주가 사문의 정통이자 도학상의 권위를 확보한 세도의 주재자이며 의리의 주인이라는 ‘군주도통론’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모색했다.


순조조 이후의 당쟁


(1) 시대 배경


정조의 죽음은 탕평의 종말인 동시에 벽파 정권의 시작이었다. 벽파는 정조의 정책을 무산시키는 데 주력하다가 6년만에 붕괴되고, 정국의 주도권은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외척세력에게 넘어간다.


(2) 주요 사건/인물

- 벽파의 집권(1800) : 수렴청정을 거행하게 된 정순왕후는 벽파 인물들로 조정을 구성한다. 이들은 시파의 군사적 기반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천주교 문제를 빌미로 대대적인 남인 박해를 가하였다(신유박해).

- 벽파의 몰락(1805) : 정순왕후 사후 벽파는 순조의 정치보복을 우려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다가 시파의 역공을 받아 권력 중심부에서 대거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공을 세우면서 외척으로 등장하게 된다.

-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조에는 외척 풍양 조씨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1849)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내부 알력과 조만영의 죽음(1846)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 넘어갔다.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을 두려워하여 국사를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김좌근에게 의지하였다. 정치가 전적으로 안동 김씨 가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면서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고 마침내 진주민란(1862)을 시작으로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 대원군의 등장 : 고종의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은 수렴청정을 하는 조대비의 막후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원군은 비변사를 약화시키고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 결과 대원군파와 안동 김씨의 노론 보수파, 남·북인 및 박규수를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등으로 정치 지형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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