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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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조선시대 정치사

1. 사대부정치기 : 고려 말~조선 초 유학적 소양을 지닌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

2. 훈신정치기 : 세조대에 등장한 정란공신(靖難功臣)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가 집권한 시기(세조~중종)

3. 권신정치기 : 훈구파의 몰락과 사림파의 집권 사이의 과도기로서, 외척이 정치를 주도한 시기

4. 사람정치기 : 권신들이 물러나고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자기 분열과 붕당 간의 당쟁이 치열해지는 시기(선조~경종)

5. 탕평정치기 : 사림정치기에서 외척세도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영조, 정조)

☞ 이조정랑과 좌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1741, 영조 17)되면서 사림정치의 토대 붕괴

6. 외척세도정치기 : 외척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득세하고 산림이 세도 가문의 시녀로 전락한 시기(순조~고종)


선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명종조에 외척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한 선배 사림들과 선조조에 새로이 등장한 후배 사림들 간의 갈등이 당쟁으로 비화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을해붕당(乙亥朋黨, 1575) : 주요 관직의 인사추천권을 가진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하면서 사림은 한양 동쪽에 사는 김효원을 따르는 동인과 서쪽에 사는 심의겸을 따르는 서인으로 갈라선다.

- 율곡 이이 : 철저하게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펴면서 동인과 서인을 중재했으며 종종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았다. 서인과 가까운 교우 관계 때문에 사후에 서인의 종장(宗長)으로 추대된다.

- 기축옥사(1589) : 동인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다가 자살하자,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역당으로 몰아 처단한다.

- 세자 책봉 논의(1591) : 동인 이산해가 선조에게 정철이 세자 책봉을 빌미로 선조가 총애하는 인빈 김씨와 그의 아들 신성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서인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이때 동인은 서인을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범위를 축소하려는 온건파가 각각 북인과 남인으로 나뉜다.


광해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하여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지원하다가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이 정권을 장악한다.


(2) 주요 사건/인물

- 사림 5현의 문묘종사 : 사림파는 도통(道統)을 천명하고 사림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1570년(선조 3)부터 사림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文廟)종사를 수시로 청하였고, 마침내 1610년(광해군 2)에 광해군의 윤허를 받아 이를 매듭지었다.

-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 : 정인홍은 이황과 불화를 겪던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이 사림 5현에 거명조차 되지 않자 문묘종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분노한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 조목(趙穆)의 도산서원 종향 : 남인의 영수 유성룡은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중시했고, 이황의 제자 조목은 향촌에서의 이황을 중시했다. <퇴계집> 간행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지자, 북인이 조목과 연대하여 유성룡을 파직시킨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그 반대급부였다.

- 폐비와 영창대군 제거 : 권력을 장악한 대북당은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영창대군을 살해(1614)하고 그의 모친인 인목대비를 폐비(1618)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대북 실세들간의 권력 다툼과 전횡은 서인들의 반정을 초래하게 된다.


인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망을 품고, 소북이 비웃는’ 대북정권의 독주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막을 내린다. 반정 후 서인은 남인과 소북 일부를 야당 삼아 연립 정권을 수립한다.


(2) 주요 사건/인물

- 공서와 청서 : 반정공신들이 국정을 전단하며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챙기는 데 몰두하자,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서인의 한 갈래인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했다.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나뉜 두 세력 갈등은 인조 7년을 전후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 대립으로, 다시 병자호란의 와중에 척화와 주화 대립으로 이어진다.

- 원종 추숭(1635) : 할아버지 선조를 계승한 인조는 부친 정원군을 추숭하고자 했다. 공신을 대변하는 산림 박지계는 인조를 지지했고, 조신을 대변하는 산림 김장생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왕통 문제로 몰락한 광해군의 사례를 목도한 인조는 자신의 왕통(王統)과 종통(宗統)을 모두 정통으로 확립하고자 했고 결국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한다.


효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효종조의 서인은 훈구세력을 대표하는 낙당(洛黨)과 원당(原黨), 그리고 김육과 김집을 대표하는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으로 나뉘어졌다. 한당은 청서의 후인들이고, 산당은 사계(沙溪) 김장생 문하들로 구성된 호서산림들이다.


(2) 주요 사건/인물

- 한당과 산당의 대립 : 붕당의 폐해를 빌미로 낙당과 원당이 몰락한 뒤 경화사족으로 구성된 관료지향적 집단인 한당과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 집단인 산당은 대동법 시행(한당의 김육 주장)과 인재 발탁(산당의 김집 주장) 등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 북벌론 : 북벌의 명분은 복수설치(復讐雪恥,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의 치욕을 설욕하자)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북벌의 수단에서 효종은 양병과 군비 확장을, 송시열은 민생 안정과 군덕(君德)을 우선시하면서 각자 왕권 강화와 도학 이상의 실현이라는 다른 꿈을 꾸었다.


현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과 상례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 있는 판국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문제였다. 


(2) 주요 사건/인물

- 기해예송(己亥禮訟) : 효종 사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를 둘러싸고 1년복을 주장하는 서인 송시열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 허목이 대립하는 와중에, 윤선도가 허목을 지지하면서 논의를 효종의 정통성을 둘러싼 당쟁으로 확장시켰다.

- 공의·사의 논쟁(1663) : 산당 김만균이 대의명분을 앞세워 청나라 사신 접대를 거부하자 한당 서필원이 개인의 입장보다 공무가 우선한다는 현실론을 주장하면서 당대에 팽배한 명분론에 일침을 가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 : 효종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가 되살아났다. 현종은 왕의 직권으로 1년복을 선포하면서 기해예송 때 서인의 압력으로 달성하지 못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9개월복을 주장한 서인 관료들을 정계에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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