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워 1945-2005 1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플래닛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포스트워 유럽사의 주제

1. 유럽의 축소 : 국제적으로 제국의 지위 상실

2. 19세기 역사 담론들의 쇠퇴 : 20세기 유럽에 에너지를 공급한 진보와 변화, 혁명과 변혁 모델

3. 유럽 모델의 (뒤늦은) 등장 : 유럽연합

4. 미국과 유럽의 관계 : 전후 복구의 수호자이자 유럽 쇠퇴의 상징, 거부당하는 모범이나 표준 역할

5. 침묵의 역사 : 전쟁과 점령, 국경 조정, 추방, 종족 학살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사람들은 대체로 살던 곳에 계속 살았던 반면 국경선은 다시 만들어지고 조정되었다. 1945년 이후 일어난 일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 가지 중요한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국경선은 대체로 원래대로 유지되었고 대신 사람들이 이동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 살아남은 소수 민족들이 실질적으로 국제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면, 그들을 더 편안한 곳으로 보내는 것도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란 용어는 없었으나, 그러한 현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전혀 대대적인 비난이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민족적으로 훨씬 동질적인 국민 국가들로 구성되었다."(59-61) 고향만 아니라면 지구상 그 어디라도 기꺼이 가겠다는 소련과 동유럽 출신의 난민들은 상당수가 재건 사업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던 서유럽에 정착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란들은 유럽의 전쟁이 독일인들이 떠난 1945년에 종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내란이 남기는 깊은 상처 중 하나는 적이 패퇴한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내전들이 제2차 세계대전─히틀러의 전쟁─을 가장 진정한 의미의 사회 혁명으로 변환시켰다. 우선 외세에 의한 일련의 영토 점령은 불가피하게 현지 통치자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침해했다." "독일과 소련 중심부를 제외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최소한 두 번씩 점령당했다. 처음에는 붉은 군대에, 그 다음에는 해방군에. 몇몇 나라들─폴란드, 발트 국가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은 5년 동안 세 차례 점령당했다. 연이었던 각각의 침공 뒤에는 앞선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그 정권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엘리트들은 격하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옛 계급 전체가 의심을 받고 그 대표자들의 명예가 더렵혀져 완전한 백지 상태가 초래되었다."(74-5)


"점령된 유럽에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법의 위반을 뜻했다. 우선은 점령군이 시행한 법(통행 금지, 여행 규제, 인종 법률 등)의 위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습법과 규범의 위반이었다." "특히 폭력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근대 국가의 최종적인 권위는 언제나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무력의 독점과 필요할 경우 무력을 배치하겠다는 그 의지에 있었다. 그러나 점령된 유럽에서 권위는 오로지 제한없이 배치된 무력의 함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가는 바로 이 상황에서 폭력의 독점권을 상실했다. 빨치산 집단들과 군대들이 합법성을 두고 경쟁했는데, 합법성은 주어진 영역에서 자신들이 영장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했다." "폭력은 냉소를 낳았다. 나치와 소련은 둘 다 점령군으로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조장했다. 그들은 앞선 정권이나 국가의 소멸한 권위에 대한 충성뿐만 아니라 개인들 간의 예절이나 유대 의식도 성공적으로 방해했다."(76-7)


"해방된 유럽의 정부들은 정통성을 찾고 올바르게 구성된 정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먼저 신뢰를 잃은 전시 정권들의 유산을 처리해야 했다." "파시스트 정권들의 활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그 죄를 처벌하는 것이 중요했다.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근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보복의 열망은 한층 더 강한 욕구의 표현이었다."(83) "해방된 동유럽에서도 무정부적인 보복 폭력 행위가 만연했으나 그 형태는 달랐다. 서유럽에서는 독일인들이 적극적으로 협력자를 찾았으나, 슬라브인들의 피점령국에서는 독일인들이 직접 무력으로 통치했다. 독일인이 지속적으로 조장했던 유일한 부역은 (그들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현지 분리주의자들의 부역이었다. 그 결과 독일인이 퇴각한 뒤, 동유럽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보복의 첫 번째 희생자들은 소수 민족들이었다." 아울러 "자발적인 원한의 해결은 공산주의의 전후 야심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지역 엘리트들과 정치가들을 더 많이 제거하는 데 기여했다."(86)


"점령으로부터 이득을 취했던 사업가들과 고위 관리들은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고초를 겪지 않았다." "그러한 타협들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1945년의 파괴와 도덕적 붕괴는 엄청났기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미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벽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해방기의 임시 정부들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무력하고 굶주린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복, 연료를 공급하려면 경제와 금융, 산업 엘리트들이 무조건 협력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했다(그들의 협력은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경제적 숙청은 생산을 저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큰 손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불한 대가는 정치적 냉소주의와 해방에 대한 환상과 희망의 소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사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독일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견해가 매우 널리 퍼져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최초 희생자'로 선언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99-100)


"단기 기억에 대한 불신과 유용한 반파시즘 신화─독일인에게는 반나치의 신화, 프랑스인에게는 저항 투사의 신화, 폴란드인에게는 희생자의 신화─의 모색은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 남긴 가장 중요한 보이지 않는 유산이었다. 그 유산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티토 원수나 샤를 드골, 콘라트 아데나워 같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 심지어 자랑 가득한 설명을 동료 국민들에게 제시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국민의 회복을 촉진시켰다. 동독조차 1945년 4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부헨발트 '폭동' 같은 고귀한 기원을 주장했다. 그것은 대체로 조작된 설화로 일종의 만들어진 전통이었다." "1945년의 상황에서, 폐허 더미로 뒤덮인 대륙에서, 마치 과거는 정말로 죽어 매장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얻을 것은 많았다. 대가는 주로 독일에서 선택적이고 집단적인 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특히 독일에서 잊어야 할 것이 많았다."(116)


전후 폐허만 남은 유럽 대륙에는 경제 계획을 주도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정부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모두에게 유용한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하게 존재했다."(127) "1940년대의 통념에 따르면, 지난 전간기의 정치적 양극화는 경제 불황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둘 다 사회적 절망이,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엄청난 간극이 키워냈다.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려면, '인민의 상태'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복지 국가'─'사회적' 계획─는 정치적 격변에 대비한 단순한 예방책에 머무르지 않았다. 종족, 우생학, '퇴화' 같은 개념들은 20세기 전반에 유럽인의 공적인 사고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의 신체적, 도덕적 상태는 공동의 관심사이며 그러므로 국가의 책임에 속한다는 폭넓은 합의가 존재했다."(132)


"삶이 여전히 진실로 고단하고 물자는 극도로 부족했을 때, 유럽 국가들은 왜 그렇게 많은 자금을 보험과 기타 장기적인 복지 공급에 기꺼이 투입하려 했을까? 첫째,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후 복지 제도는 최소한의 정의나 공정함에 대한 보증서였다. 복지 제도는 전시의 레지스탕스가 꿈꿨던 정신적, 사회적 혁명은 아니었지만, 전쟁 이전 시기의 절망과 냉소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둘째, 서유럽의 복지 국가는 정치적인 분열을 야기하지 않았다. 복지 국가의 전반적인 취지는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느낀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수혜를 입은 자들은 전문직과 상인들로 구성된 중간 계급이었다." "유럽의 복지 국가는 사회 계급들을 분열시켜 상호 간 적대하기 만들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긴밀하게 결합시켰고, 따라서 복지 국가의 보존과 방어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다."(138-9)


"마셜의 제안은 (까다로운 조건으로 집행된 차관이나 채무국의 경제 정책 개입 같은) 과거의 관행과 깨끗이 단절하자는 것이었다. 우선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 외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을 것인지, 받으면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유럽인들에게 맡겨졌다." "둘째, 원조는 수년 간에 걸쳐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따라서 재난 기금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복구와 성장을 위한 전략적인 계획이었다. 셋째, 원조금의 규모는 실제로 매우 컸다. 1952년 마셜 원조가 종결되었을 때, 미국이 지출한 액수는 약 130억 달러로 그 전까지 외국에 지원한 총액보다 많았다."(162-3) "마셜 플랜의 논리는 독일의 생산물에 대한 모든 규제의 제거를 요구했다. 독일이 다시 한 번 유럽의 경제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국무장관 마셜은 자신의 계획이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아 내려는 프랑스의 희망을 종식시키는 것이었음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혔다."(175)


동유럽에 이어 독일마저 소련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는 사태를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되살아나는 독일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겠다고 장담할 수 있었으며, 미국의 정책은 독일의 경제 회복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으로도 독일의 물자와 자원을 프랑스가 특권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의 확보라는 프랑스의 오랜 딜레마는 해결되지 못했다." "이후 몇 달 동안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책은 독일 문제의 '유럽화'였다." "요컨대 독일을 파괴할 수 없다면 일종의 유럽 체제에 합류시켜 독일이 군사적으로 해악을 끼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이득을 가져오게 하라는 얘기였다."(203-4) 반면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까지 영토를 확장한 "소련의 관점에서 볼 때 서쪽의 '제방', 즉 외부에서 특히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 할 때 지나야만 하는 넓은 띠 모양의 지역은 안전에 지극히 중요했다."(206)


# 독일을 둘러싸고 벌어진 서방과 소련의 관점 : (민주주의) 체제이식과 (유럽 전체를 위한) 경제부흥 vs (공산주의) 체제이식과 (소련 경제를 위한) 물자약탈


"소련은 서쪽 이웃 국가들의 내정에서는 위압적인 군대 주둔 외에 다른 수단을 거의 갖지 못했다." "따라서 신중하기 이를 데 없고 어쨌거나 여전히 서방 강국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스탈린은 처음에는 스페인 내전기에 쌓은 공산당의 경험과 30년대 인민전선 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친숙했던 전술을 추구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여타 '반파시스트' 정당들의 제휴를 독려한 이 전술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신중하고 '민주적'이며 개혁적이었다." "연립은 공산당이 역사적으로 허약했던 지역에서 권력에 이를 수 있는 길이었다. 연립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224-5) "공산당은 (대개는 더 큰)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좌파 '통합'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반드시 공산당의 후원을 통해 통합이 이루어져야 했다. 해방 이후 동유럽이 처한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합리적인 제안으로 들렸다."(227)


"공산당은 주요 정적들을 살해·투옥하거나 동화시킨 후에 1947년과 그 이후의 선거에서 정말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잔존한 정적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 투표소에서의 위협, 명백한 개표 부정도 선거에서의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다."(229) "돌이켜 보건대 1945년 이후 민주주의적 동유럽을 기대하는 일은 언제나 절망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는 토착 민주주의 전통이나 자유주의 전통이 부재했다. 전간기에 이 지역 정권들은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잔학하게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과거의 지배 계층은 흔히 돈으로 매수되었다. 전간기의 진정한 지배 계급은 관료였다. 관료를 배출한 사회 계급은 공산 국가에도 행정 간부를 공급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후진국에서 공산당의 '인민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사회주의'의 그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매우 짧은 기간에 쉽게 이루어졌다. 역사가 그렇게 방향을 바꾼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234)


1948년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추방당한 뒤 "티토와 그의 추종자들은 '비열한 반역자들과 제국주의자의 고용인들', '전쟁과 죽음 진영의 재난의 사자, 위험한 전쟁광, 히틀러의 장한 상속자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밀정, 앞잡이, 살인자들의 패거리', '제국주의자들이 던져준 뼈를 갉작거리며 미국 자본을 얻으려 짖어 대는, 미국의 가죽끈에 묶인 개들'로 비난받았다. 티토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공격이 스탈린 개인숭배의 만개와 다가오는 숙청과 시범 재판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탈린이 티토에게서 진정으로 위협과 도전을 보았으며 다른 공산주의 정권과 정당들의 충성과 복종을 침식하는 효과를 두려워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에 이르는 모든 '민족적' 길이나 '특수한' 길은 거부되었고 '경계의 배가'가 요구되었다. 스탈린주의의 제2빙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247-8)


사전에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각본이 짜여진 헝가리의 러이크와 불가리아의 코스토프에 대한 공개 재판은 "동유럽 지역 공산당 정권이 티토주의자를 사냥하기 위해 도발한 비밀 재판과 비밀 법정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헝가리에서만 약 2,000명의 공산당 간부들이 즉결 처형되었고 15만 명이 다양한 형기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약 35만 명이 당에서 축출되었다(축출은 종종 직업과 아파트, 각종 특권, 고등 교육을 받을 권리의 상실을 의미했다)."(301-2) 스탈린은 전쟁 기간 동안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민족들을 동부로 추방했고, 유대인에 대해서도 확실히 유사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분명 정권에 불리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이는 대중의 반유대주의를 성공적으로 이용한 히틀러에 대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반유대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306)


"스탈린의 편견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보상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숙청과 기소, 자백, 재판의 완전한 연극을 상연한 스탈린의 의도다." 공산 국가 진영에서 시범 재판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재판은 본보기에 의한 일종의 대중 교육이었다." "시범 재판은 대중에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말해 주었고, 정책의 실패를 비난했으며, 충성과 복종을 칭찬했고, 심지어 대본을 쓰기도 했다."(314) "자백은 상징적으로는 책임을 전가할 핑계로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교리를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다. 스탈린의 세계에서 의견 차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이단뿐이었다. 비판자는 없었고 오직 적뿐이었다. 실수도 없었고 오로지 범죄뿐이었다. 재판은 스탈린의 덕을 예증했고 스탈린의 적의 범죄를 확인하는 데 이용되었다."(316)


"스탈린이 동유럽에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또 거듭하여 주장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스탈린이 독일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스탈린이 베를린을 봉쇄한 목적은 (포츠담 의정서에서 연합국의 지상 접근이 문서로 보장되지 않은) 서방으로 하여금 도시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별개의 서독 국가 수립 계획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베를린을 협상의 수단으로 활용한) 스탈린이 진정으로 원한 바였으나, 결국 그는 둘 중 어느 것도 확보하지 못했다." "서방 연합국은 그들 몫의 베를린을 고수했다. 또한 소련의 봉쇄는 프라하 쿠데타에 뒤이어 서방 연합국들로 하여금 서독을 위한 계획을 더 단호하게 추진하도록 했으며, 독일인들이 나라의 분할을 더 잘 받아들이도록 했다. 1949년 4월 프랑스가 2국 공동 지구에 합류하여 (소련 지구의 1,700만 명에 대해) 4,900만 명을 포괄하는 단일한 서독 경제 단위가 창출되었다."(248-50)


# 베를린 봉쇄의 여파

1. 두 개의 독일 국가 탄생

2. 미군이 독일에 대규모로 주둔

3. 서방의 군사 계획 재검토 → 미국의 NATO 참가


독일의 재무장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른 바로 그 순간에 우연의 일치로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인들과 서유럽인들은 즉시 한국이 주의를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한 기만 전술 또는 전주곡에 불과하며 독일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발터 울브리히트는 신중하지 못하게 다음으로는 독일연방공화국이 몰락하리라고 떠벌임으로써 이러한 추론을 조장했다. 소련은 8개월 전 원자폭탄 시험을 성공리에 마쳤고, 이 때문에 미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소련의 전쟁 대비 상태를 과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인들의 자신감을 진작하기 위한 심리적 부양책이었던 나토는 중대한 군사적 서약으로 바뀌었다."(257-8) 예상 밖으로 미국이 유럽 군사 동맹에 참여하자,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은 환영을 표했다. 1952년 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이즈메이 경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목적이 "러시아를 막고, 미국을 붙들어 두고, 독일을 억누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의 영국은 지불 불능 상태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최대 채권국에서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한 영국은 "급격하게 감소한 수입으로 엄청난 달러 채무를 변제하려 분투했다. 마셜 플랜이 영국에서 산업의 투자나 근대화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한 가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충자금의 97퍼센트가 국가의 대량 채무를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전히 해외 식민지를 많이 거느린 상황에서 "빚지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례 없이 엄격한 자제와 자발적 궁핍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즉 필수적인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이, 이를테면 고기, 설탕, 의복, 가솔린, 외국 여행, 심지어 사탕까지도 배급되었다. 1946년에는 빵도 배급되기 시작했다." "그 통제들 중 여럿은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재차 강요되었고 영국에서 기본 식량 배급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한참 늦은 1954년에 가서야 종결되었다."(273-4)


"동유럽과 서유럽의 중간 계급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의 미래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 열광에는 프롤레타리아, 즉 육체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독특한 열등감 콤플렉스가 수반되었다. 종전 직후에는 숙련 노동자의 수요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적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대공황 시기와는 현저히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산업 노동과 산업 노동자의 전반적인 지위 상승으로 나타났다.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당들에게는 명백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자신들의 사회적 기원을 알고 당혹스러웠던 중간 계급 출신의 교육받은 좌익 성향 남녀들은 공산주의에 투신함으로써 불편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새로운 시작에 전념하고, 실제든 상상의 산물이든 노동자 공동체를 숭배하고, 소련(그리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붉은 군대)을 찬양함으로써 전후의 청년 세대는 자신들의 사회적 기원과 국민적 과거에서 떨어져 나왔다."(334-5)


"프랑스에서 폭력적 해결에 대한 호소는 단지 근래의 경험을 전방으로 투사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유산의 흔적이기도 했다. 부역과 내통과 반역의 고발, 처벌과 새로운 출발의 요구는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서 깊은 프랑스의 전통을 재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서유럽의 어느 국민 국가보다도 더 지식인 계층이 폭력을 공공 정책의 도구로 인정하고 나아가 숭배하기까지 한 나라였다." "사르트르와 당대인들이 공산주의 폭력은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이요 '역사의 산파'라고 역설했을 때, 그 사람들은 스스로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관습적이었다."(353-4) 공산당들은 '반파시즘'이라는 도덕적 수단을 활용하여 반대파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파시스트, 나치, 프랑코 당, 민족주의자)은 우파이고, 우리는 좌파다. 그 사람들은 반동이며, 우리는 진보다. 그 사람들은 전쟁을 대표하며, 우리는 평화를 대변한다. 그 사람들은 악의 세력이며, 우리는 선의 편이다."(360)


"스탈린의 사망으로 대부분의 동유럽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품었던 열정은 그 열정이 가장 강력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수정 공산주의'나 '개혁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몇 년 더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공산 국가들 내부의 분열은 이제 공산주의와 그 적 사이의 분열이 아니었다. 중대한 차이는 당국과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냉전의 단층선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가 아니라 동유럽과 서유럽 각각의 내부에 생겼다."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체제와 얼마나 친밀한가에 따라, 다시 말해 공산주의 덕분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실질적인 사회적 이익을 맛본 사람들과 공산주의 때문에 차별과 실망과 억압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유럽에서도 동일한 단층선에 따라 지식인들이 양 편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론상의 공산주의에 대한 열광은 실제 공산주의의 직접 경험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었다."(338-9)


1950년대 들어 서유럽은 "스탈린이 사망하고 한국 전쟁이 종식되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정치적으로 대단히 안정된 시기에 진입했다." "서유럽인들이 새로이 누린 안녕은 냉전의 불확실성 덕분이었다. 정치적 대결이 국제화하고 그 결과 항상 미국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국내의 정치적 갈등에서 가시를 빼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과거였다면 거의 확실하게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졌을 정치 문제들─해결되지 못한 독일 문제,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영토 분쟁, 피점령국 오스트리아의 미래─이 모두 강대국의 대결과 협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억제되고 적절하게 처리되었다. 강대국들의 논의에서 유럽은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403)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핵 무장과 유럽 대륙의 안정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련의 전략적 관점에서도 중부 유럽과 서유럽에서 재래식 무기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점차 관심사에서 멀어졌다."(412)


# 미국의 유럽 철수가 무산된 이유

1.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기 통제권을 유럽의 통합 방위 기구에 양도할 의향이 없었다.

2. 양 진영을 연결하는 베를린을 관리, 통제해야 했다. 소련은 베를린에서 의도적으로 긴장을 조성하여 서독의 재무장을 저지하고 자신의 동유럽 지배권을 보장받고자 했다. (1961년 8월 19일, 베를린 장벽 건설 시작)


"개혁적인 기독교민주당, 의회의 좌파, 물려받은 이데올로기적 분열이나 문화적인 분열을 정치가 양극화되고 불안정해질 때까지 밀고 나가지는 말자는 폭넓은 합의, 시민의 비정치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 정착된 현상의 뚜렷한 특징이었다."(437) 대표적으로 전후 독일에서 "중앙 정부의 권한은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상당히 제한되었다. 프로이센 전통의 권위주의적 정부에 히틀러 등장의 책임을 돌렸던 서방 연합국이 재발 방지를 위해 중앙 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반면 연방 하원은 선출된 수상과 그 정부를 아무 때나 내쫓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이 보장될 만큼 의회의 지지를 충분히 얻는 차기 후보를 미리 준비해야만 했다. 이러한 제약은 지난 시절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징이었던 정치 불안과 허약한 정부의 반복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콘라트 아데나워와 그를 뒤이은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같은 강력한 수상의 장기 집무와 권위에 기여하기도 했다."(439-40)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이 좋아한 자기 이미지는 희생자였다. 말하자면 세 번이나 희생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첫 번째는 히틀러에게 당했다." "두 번째는 적들의 손에 당했다. 폭격에 망가진 전후 독일의 도시 풍경은 전장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독일인은 적들의 손에 끔찍한 고초를 당했다는 생각을 부추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후 선전의 악의적인 '왜곡'에 당했다. 전후의 선전은 의도적으로 독일의 손실은 축소한 반면 범죄는 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있었다."(446-7) 동유럽 각지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과 퇴역군인들이 희생자 정서를 옹호하는 주요 세력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아데나워의 태도는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신중하게 침묵을 지키는 편이 진실을 공개하여 대중을 자극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했다. 그 세대의 독일인들은 도덕적으로 지나치게 많이 타협했기 때문에 침묵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었다."(449)


붉은 군대가 아니라 "서방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데 대한 초기 안도감이 서서히 약해지자 숨어 있던 다른 감정들이 드러났다. 힘들었던 전후의 연합국 점령기는 나치 시대의 생활과 불리하게 대비되었다. 냉전기에 일부 사람들은 미국이 소련과의 갈등은 '자신들의' 몫인데도 독일을 그 중심에 두어 위험에 노출시켰다고 비난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 특히 가톨릭이 우세한 남부의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가 등장한 원인을 서방이 끼친 '세속화'의 영향에 돌렸으며, 독일이 근대의 세 가지 악, 즉 나치즘과 공산주의와 '아메리카니즘' 사이에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독이 서방 동맹의 동쪽 변경에서 점점 더 두드러짐에 따라 나치 독일이 소련의 아시아 대군에 맞서 유럽의 문화적 보루로서 자임했던 역할이 은연중에 상기되었다."(453) "귄터 그라스 같은 사람들은 독일이 정치에서 개인의 재산 축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사실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민적 책임에 대한 부정을 읽어냈다."(457)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동, 아메리카에 보유한 식민지와 제국의 재산은 유럽 전쟁에서 당한 피해와 굴욕을 진정시키는 진통제였다."(460) 그러나 "전후 첫 번째 프랑스 공화국은 다른 무엇보다도 식민지에서 벌인 싸움 때문에 몰락했다." "제4공화국은 (알제리를 포기하는 데) 불만을 품은 군대가 없었더라도 역사상 최악의 군사적 패배와 수치스러웠던 4년간의 점령을 겪은 지 꼭 10년 만에 맞이한 그러한 도전을 견뎌 내느라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478) "드골이 선택한 영역은 외교 정책으로서 개인의 취향과 국가 이성이 똑같이 강조한 영역이었다. 그는 프랑스가 연속적으로 겪은 굴욕에 오랫동안 과민했는데, 1940년에 적국 독일에 당한 굴욕보다 그후 동맹국 영미에 당한 굴욕에 더욱 민감했다."(480) "드골이 20세기로부터 배운 교훈은 프랑스는 유럽의 사업에 투자하고 그것을 프랑스의 목적에 유리하게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483)


"수에즈 위기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은 영국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영국은 군사적 자원과 경제적 자원이 부족했고, 그 한계가 너무나 명백하게 증명된 뒤라서 더 강화된 독립 요구에 대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1950년에 겨우 여덟 개 국가였던 영연방 회원국은 1965년에 스물한 개 국가로 늘었고, 향후 더 늘어나게 된다." "영국 사회의 절대 다수가 보기에 수에즈 위기가 준 두 번째 교훈은 영국이 다시는 워싱턴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미국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중요한 순간에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략의 재조정은 영국과 유럽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492-4) 이제 영국의 정치가들에게 "나라의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영국 해협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영국이 유럽이 아니라면 다른 어디에서 국제적 지위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498)


한편 같은 시기에 벌어진 헝가리 봉기는 "이후 세계의 형성에 파괴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우선 헝가리 봉기는 서방 외교관들에게는 실례로 배우는 교훈이었다. 그 때까지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동유럽의 위성 국가들을 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저항 정신'을 꾸준히 격려했다." "1953년 베를린 폭동 이후, 소련이 확고하게 장악한 동유럽에 대한 '불개입'은 서방의 유일한 동유럽 전략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반란자들은 이런 내막을 알 수 없었다."(525) "크렘린이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헝가리 당이 권력의 독점, 즉 '당의 지도 역할'을 포기했다는 사실이었다(폴란드의 고무우카는 이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소련의 관행에서 그처럼 이탈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끌어들일 날카로운 비수로서 여러 곳의 공산당에 저주를 퍼붓는 행위였다. 다른 위성 국가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너지의 퇴위를 결정한 흐루시초프에게 쉽게 동조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526-7)


"공산주의는 이제 혁명이 아니라 탄압과 영구히 결부되었다. 서방의 좌파는 40년 동안 볼셰비키의 폭력을 혁명적 자신감과 역사의 진보를 얻는 비용으로 용서하고 심지어 찬양하면서 소련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서방 좌파의 정치적 환상을 그럴듯하게 보여 주는 거울이었다. 1956년 11월, 그 거울은 박살났다."(530)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공산주의 체제의 동유럽 주민들이 이제 침묵했고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흐루시초프 시대의 소련 지도부는 조만간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지역에─기이하게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헝가리에─일정 정도의 자유화를 허용했다." "누구에게도 공산당을 신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지도자들을 신뢰하라는 요구는 더욱 없었다. 다만 최대한 반대 표명을 자제하라는 요구만 있었을 뿐이다. 국민의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등장한 '굴라시 공산주의' 덕에 헝가리는 안정을 되찾았다."(531-2)


"서유럽 전역에서 정부와 고용주, 노동자는 서로 협력하여 정부의 대량 지출, 누진세, 임금 인상 억제라는 선순환을 만들어 냈다.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목표는 이미 전시 또는 전후에 계획 경제와 어떤 형태로든 '복지 국가'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도출됨으로써 분명해졌다. 따라서 그 목표는 정부 정책과 집단적 의지의 합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미증유의 성공을 촉진했던 조건은 정부 활동의 직접적인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유럽 경제의 기적과 뒤이은 사회적, 문화적 격변을 촉발시킨 것은 유럽 인구의 급속하고 지속적인 증가였다."(543) 이와 더불어 "단기 체류자와 국내 이주자, 국가 간 이주자, 해외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이주자의 수를 전부 합하면 약 4,000만 명에 이른다. 유럽의 대호황은 이처럼 취약하고 대체로 조직되지 않은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자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간 부문은 저임금의 말 잘 듣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유입된 까닭에 대단히 큰 이익을 보았다."(554)


"유럽에서 (경제 호황과 맞물려 나타난) 미국 경제의 존재감은 직접적인 경제 투자나 여타 경제 수단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 똑같이 영향을 미쳤던 소비자 혁명에서 감지되었다. 유럽인은 이제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전화기, 백색 가전, 텔레비전, 사진기, 청소 용품, 포장 식품, 화려하면서도 저렴한 의류, 자동차와 차 부속품 등 엄청나게 많은 제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러한 풍요와 소비는 생활양식, 즉 '미국식 생활양식'이었다. 젊은이들에게 '미국'의 매력은 그 과감한 현대성에 있었다. 미국은 추상명사로서 과거의 반대말을 뜻했다. 거대했고 개방적이었으며 번영했다. 그리고 젊었다."(578) "미국 문명과 그 모든 표현을 원칙적으로 불신하고 혐오하는 반미주의는 전형적으로 문화 엘리트에 국한되었다. 문화 엘리트의 영향력 때문에 반미주의는 실제보다 더 넓게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580)


# 풍요의 시대(1950~1973)

1. 농업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하락

2. 정부와 기업, 노동자들의 협상과 타협

3. 포괄적인 공공 복지 혜택

4. 출생율 급증과 영유아 사망률 하락 : 청소년이 별개의 소비자 집단으로 등장(다양한 의상, 대중음악 산업 활성화)

5. 완전고용에 가까운 실업률 

6. 국경을 넘는 대규모 노동력 이동 : 점차 비유럽 이민 억제

7. 소비혁명 : 가처분 소득 증가로 상품 구매 증가와 슈퍼마켓 급증

8. 냉장고, 세탁기,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대중화(TV는 1960년대 이후 대중화)

9. 운송 혁명 : 자동차 급증(철도 노선 감축)과 교통체증 심화

10. 관광 사업 : 유급 휴가와 여가 선용(휴양지, 야영)

11. 미국 문화와 생활양식 수용


"그때는 완전 고용의 시절이었다. 실제로 완전 고용의 유지는 이 시기 모든 영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목표였다. 따라서 인력과 장비가 놀아 썩어 갔던 1930년대의 끔찍한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단호한 결의는 성장이나 생산성, 효율성 등 모든 고려 사항을 제압했다. 노동조합은 그리고 특히 노동조합의 지역 대표자인 공장 대표자는 전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했다. 노동 계급의 전투성의 징표인 동시에 경영진의 무능함의 징표였던 파업은 전후 영국 산업 생활에서 고질적인 현상이었다." "직물, 광업, 조선, 강철, 엔지니어링 공장들은 모두 전후에 개혁과 구조 개편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산업들이 비효율적인 작업 관행을 공격하기보다는 노동조합의 편의를 도모하기로 결정했듯이, 영국의 공장 관리자들은 새로운 시장에서 새로운 제품으로 새로이 출발하기보다는 차라리 적은 투자, 연구 개발의 제한, 저임금, 고객층의 감소라는 악순환 속에서 움직이기를 선택했다."(588-9)


"전후 유럽의 일반적인 합의 속에는 독특한 시각, 즉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시각이 존재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언제나 잡종이었다. 실제로 좌우의 적들이 한가지로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면서 제기했던 논거가 바로 잡종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론상 끝없는 탐색의 실천이었던 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 초 유럽 사회주의자들 세대에 허용된 통찰력의 결과였다. 즉 현대 유럽의 심장부에서 19세기의 사회주의 몽상가들이 예언하고 계획한 근본적인 사회 혁명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폭력적인 도시의 변란이라는 19세기의 모범은 산업자본주의의 부정의와 비효율을 해결하는 방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도 없었다. 또한 폭력적 변란은 차고 넘쳤다. 모든 계급의 현 상태는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진정 개선될 수 있었다."(595) 사회민주주의는 지향점은 다다를 수 없는 경제적 이상향이 아니라 다다를 수 있는 좋은 사회의 건설이었다.


196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 중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도덕적 파멸과 구분되는 학문적 부분에 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와 루카치, 그람시, 기타 잊혀진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술이 발굴되면서 마르크스 자신도 재발견되었다." 구좌파가 소유한 "'옛' 마르크스는 레닌과 스탈린의 마르크스, 즉 민주 집중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미리 내다보고 그 정당성을 인정해 준 신실증주의적 저술을 남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과학자였다." 반면 신좌파는 "청년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 즉 1840년대 초의 형이상학적 논문과 초고에서 그 전거를 찾았다." 그들이 보기에 청년 마르크스는 "'소외된' 의식을 바꿔서 인간을 자신의 진정한 조건과 능력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 자본주의 사회의 우선순위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자기 존재의 중심에 두는 방법, 간단히 말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에 몰두해 있었다."(660-1)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초 낭만주의자가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인간성을 빼앗는 산업 사회의 충격에 맞서 제기했던 불평은 탈산업 사회의 서유럽 현대인들이 '억압적 관용'에 맞서 보인 저항에 매우 적합했다. 번영하는 자유주의적 서구의 일견 무한했던 유연성, 즉 스펀지처럼 열정과 차이를 흡수하는 능력은 비판자들을 격분시켰다.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억압은 부르주아 사회에 고유한 특성이었다. 억압은 진정으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거리에서 없어진 억압은 분명 '어디론가' 옮겨갔음에 틀림없었다. 억압은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특히 그들의 신체 속으로 이전되었다." " 마르쿠제의 설명에 따르면 서구 소비 사회는 이제 더 이상 가진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경제적 착취에 직접 기대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에너지를 충족(주로 성적인 충족)에서 상품과 환상의 소비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성과 정치의 융합이 "집단 투쟁보다 개인의 욕구를 강조한 것은 객관적으로 반동적이었다."(661-3)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작업을 멈춘 "수백만 명의 남녀는 적어도 한 가지는 학생들과 공유했다. 자신들의 특수한 지엽적 불만이 무엇이었든,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생존의 조건에 좌절했다. 이들은 일터에서 더 나은 계약을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무엇인가 변하기를 원했다." "프랑스는 번창했으며 안전했고, 따라서 몇몇 보수주의 평론가들은 저항의 물결이 불만이 아니라 단순한 권태 때문에 생겨났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르노 작업장처럼 노동 조건이 오랫동안 불만스러웠던 공장들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진정한 좌절감이 존재했다. 권력을 한 곳에, 소수의 제도에 집중시키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프랑스의 관습이었는데, 제5공화국은 이를 한층 더 강화시켰다. 프랑스는 극소수 파리 엘리트가 운영했고 또 그렇게 보였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었으며 문화적으로 특혜를 입었고 거만했으며 계급 조직을 이루었고 냉정했다. 심지어 그 속에 있는 자들도 숨이 막히는 것처럼 느꼈다."(672)


"반군국주의는 독일 학생 시위에서 연방공화국과 나치 전임자를 싸잡아 비난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융합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가 강해지면서 서독의 군사적 스승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소수 급진파의 수사에서 늘 '파시스트'였던 미국은 이제 훨씬 더 폭넓은 권역의 적이 되었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범죄적 전쟁을 벌였다고 '아메리카Amerika'를 공격하는 것은 독일의 전쟁 범죄에 관한 논의의 대용물이었다." "더 불길했던 것은 이를 통해 급진 좌파가 진정한 희생자는 독일인 자신이라는 주장을─이제까지는 극우파와 동일시되었던 주장─재차 끌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파시스트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 속에서 나치 강제수용소는 단지 제국주의 범죄의 편리한 은유로 활용되었다. 1966년 일단의 과격파는 다하우 수용소 담벼락에 이런 구호를 긁어 놓았다. "베트남은 미국의 아우슈비츠다."(684-5)


공산주의 사회 혁명의 물결이 도달한 체코에서는 신중한 기다림 끝에 "공적인 복권과 스탈린이 저지른 과오의 조심스러운 시인, 온건한 경제 개혁의 가능성 등이 서로 결합되어 당의 공적 생활 통제에 훨씬 더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63년에 시작된 경제 개혁을 작업 현장의 노동자들이 누구나 다 환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족쇄가 완화될 가망성이 엿보이자 작가와 교사, 영화감독, 철학자들 사이에서 비판과 희망, 기대가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왔다."(715)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건설 시기'였던 이 기간은 이제 지식인들의 비난을 위한 공정한 시합장이 되었으며, 1967년 여름에 개최된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쿤데라와 바출리크, 시인이자 극작가인 파벨 코호우트, 그리고 젊은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당시의 공산당 지도부가 물질적, 도덕적 파멸을 초래했다고 공격했다."(717)


1968년 1월 당 제1서기로 선출된 두브체크는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 같은 해 3월, "당 강령에서 '민주공산주의에서 유례 없는 실험'이라고 칭한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바로 사람들이 즐겨 부르듯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721)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가들은 1956년 헝가리의 교훈을 오해했다.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 임레 너지의 실수는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탈퇴하고 헝가리의 중립을 선언한 데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굳건히 머물러 있고 확실하게 모스크바와 연합하고 있는 한, 레오니트 브레주네프와 그의 동료들은 분명 자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었다. 그러나 1968년 소련은 군사적 안정보다는 당의 권력 독점 상실을 더 걱정했다. 일찍이 3월 21일 소련 정치국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당 지도자 페트로 셀레스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가 자국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불평했다."(724)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킨 "1968년 이후 소련 지역의 안전은 필요하면 무력을 이용하겠다는 모스크바의 의지가 새롭게 평가됨으로써 확고하게 보증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기초가 대중의 동의나 개혁된 공산당의 정통성, 나아가 역사의 교훈이라는 주장은 이때 이후로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는 환상, 스탈린주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며 여전히 교정될 수 있는 실수라는 환상, 민주적 다원주의의 핵심적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집산주의 구조와 양립할 수 있다는 환상. 이러한 환상들은 1968년 8월 21일에 탱크에 짓밟혔고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730-1) "1960년대가 정치 의식이 고양된 시기였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자기 기만이었다." "그러나 60년대는 실제로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 반대 이유로 극히 중요했던 10년이었다. 반으로 나뉜 대륙의 양쪽 유럽인들 모두가 이데올로기 정치에서 결정적으로 이탈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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