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4
리처드 D. 앨틱 지음, 이미애 옮김 / 아카넷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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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빅토리아 시대 : 1830년이나 1832년(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혹은 1837년(빅토리아 여왕 즉위)에서 1901년(빅토리아 여왕 서거)까지를 가리킨다.


"1830년대의 영국에서 조지 4세(웨일스 공) 섭정 시대의 오만한 사치는 새로운 산업화로 초래된 불결하고 비참한 상황과 나란히 존재했다." "디즈레일리의 소설 <무녀>(1845)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여왕의 나라,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나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국가"가 실제로는 "두 나라이고, 그 두 나라는 교섭과 공감이 전혀 없어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거나 혹은 다른 혹성에 살고 있듯이 서로의 습관과 사고, 감정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으며 양육되고 다른 음식을 먹고 서로 다른 관습에 지배되고 동일한 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 그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이다."라고 묘사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해마다 넓어져갔고,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당대의 큰 난제였다."(38-9) 여기서 등장한 것이 이성의 시대를 대변하는 합리주의였으며, 벤담주의자과 계몽적 합리주의자들은 새로운 권위와 막강한 실제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두 개로 나뉜 나라 중에서 영광의 시대를 대변한 것은 1851년에 개최된 수정궁의 축전(제1차 세계박람회)이었다. 수정궁 축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혹은 역사학자 W. L. 번이 표현했듯이 '평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했다. 그 시대는 15년이나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우리가 빅토리아 시대의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릴 때 가장 쉽게 연상하는 시절이고,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적용될 수 있는 상투적인 문구를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 "굶주린 40년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온 후에 경제는 큰 도약을 이루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는 영국이 과거에 그 비슷한 풍요도 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 시절이었다. 대영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세계의 선두에 선 은행이자 선적회사였고 제품 공급자였으며, 해군을 통해 상선들의 항로에서 평화를 유지했다."(40-1)


과거 영국에서 "인쇄물과 정치활동의 관계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한 권력자들을 상대로 저술된 논쟁적인 팸플릿과 서적을 통해서 주로 형성되어 왔었다. 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력은 "공적 의견"─실은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는 정선된 집단의 의견에 불과한─의 지지를 받은 사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토리당의 지주들과 교회의 저항을 극복하며 1832년에 통과된 선거법 개정법안은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산층의 대변인이었던 휘그당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은 신문과 잡지가 유통시키고 형성한, 전례 없이 엄청난 규모의 여론이었다."(119) "1832년과 다시 (곡물법 폐지에 성공한) 1846년에 기치를 올린 주장, 즉 "민중이 승리했다"는 주장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집합의지'라고 부른 것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인쇄물이 그 의지를 표현하는 주요한 도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21)


빅토리아 시대의 출판물이 보여주는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목소리 덕분에, 서로 다른 계층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서로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출판물들이 논쟁의 도가니를 계속 끓어오르게 하는 한, 국민의 마음은 침체될 수 없었다. 또한 동시에 이 출판물들이 해를 끼치지 않고 계급적 증오심과 잠재적으로 위험한 의견 차이를 터뜨려놓을 수 있는 안전밸브가 되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신문과 잡지가 설교단이나 대포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고, 이치에 맞는 인쇄된 활자로 인해서 병든 사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은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로 번영을 누리면서 20세기에 들어섰고, 그 마음이 활력적이며 그 자유가 축소되지 않았으므로, 출판에 대한 믿음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124)


당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철도와 도시는 "문명의 최고의 승리이자 동시에 가장 큰 재앙을 불러온 문명의 과오였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지 간에 도시는 압도적이었다. 젊은 시절의 디킨스와 여러 해 후의 헨리 제임스 같은 사람들은 도시가 복잡하고 대조적인 광경들과 사람들로 활기를 돋워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도시의 만화경 같은 움직임, 끊임없이 들떠 있는 분위기, 부수는 사람과 건설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변화들, 곧 영국에서 오랫동안 익숙했던 변화와 달리 규칙적으로 순환하거나 반복되지 않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 광경이 매혹을 느끼게 했다면, 그것은 또한 소름이 돋아나게도 했다. 도시의 밀도와 확장은 속박감, 무기력증, 폐소공포증과 같은 감정을 일으켰다. 도시의 꼴사나운 모양새가 그 장엄함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대다수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은 소수의 사치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132)


프랑스 혁명 이후로 페인 같은 급진파들을 선두로 평민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노동자들 대다수는 아직 정치권력이라는 유혹적인 환영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소음이고, 이 소음은 그것을 들은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많은 중도파의 가슴에도 두려움을 일으켰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자코뱅주의와 동일시되었고, 영국이 처음에는 혁명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와, 나중에는 프랑스 제국과 몇 십 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실로 역모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해협 너머에서 일어난 격동적인 이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슬로건을 퍼뜨리는 선동가들이 대중을 일깨우면 내란이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무정부 상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140-1)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는 1860년대 말의 어딘가에서 막을 내렸고, 1870년대 중반 이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빅토리아 시대 중반의 황금기를 후기와 구분하는 한 해를 꼽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제2차 선거법 개정안으로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어 유권자의 수가 두 배로 확대된 1867년일 것이다. 그 법안으로 말미암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간 서서히 쌓여왔지만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논쟁거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평민이 점유하게 된 권력이 영국의 정치구조 및 그보다 더욱 중요한 영국의 문화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지난 몇 십 년간 중산층은 영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왔다. 이제는 육체노동자의 차례였다. 민주주의의 도래를 몹시 한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떻든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42)


"제1차 선거법 개정(1832)은 영국과 웨일스의 유권자 수를 43만 5000명에서 65만 2000명으로 늘렸고 대략 50퍼센트가 증가한 것이지만 이는 성인 남자 여섯 명 중에서 아직 다섯 명이 투표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147) "1867년에 중산층의 나머지 절반은 도시 노동자들 대다수와 더불어 투표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첨가되었다. 이에 따라 의석을 재배분하면서 대도시들은 1832년에 얻지 못했던 의원 선출권을 갖게 되었다. 1884년의 세 번째 마지막 선거 개정안으로 투표권은 200만 농업 노동자들에게 확대되었고 그리하여 시골 지역에서 지방정부의 선거가 가능해졌다." 투표함의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자유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은 것은 새로 투표권을 받은 노동자들이 옛 양당 체제 내에서 움직이는데 얼마간 만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156-7)


이처럼 영국에서 변화의 물결은 온전히 체제 내 개혁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에드먼드 버크의 정치국가와 사회에 대한 유기체론적 사상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인위적인 수단과 혁신으로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내적 성장 원칙을 가진 유기체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몇 백 년의 전통이 살아 있는 결정체로서 명확히 규정된 사회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의 신비스러운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습된 특권에 기반을 둔 계층구조에 신성함이 있다는 믿음은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도 존속했고,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 내내 하위 계층민들은 '윗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원한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중대한 시점에서는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관습적인 존중심 덕분에 이런 감정들이 계급 전쟁과 같은 것으로 점화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50-1)


"남자들의 세계가 유용성(utility)이라는 이념을 최고 가치로 삼고 그 이념에 지배되고 있었던 때에, 상류층 여성의 세계가 거의 모든 행위의 시금석으로 삼은 것은 무용성(uselessness)이었다."(94-5) 여자는 가정을 "헌신적으로 수호하는 여사제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여성의 농노 상태는 정당화되었다." 인습적으로 여자는 "연약한 존재여야 했고, 시골의 오솔길을 함께 걷거나 정찬 식탁으로 인도하는 신사의 팔에 늘 기대야 했다."(98)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까지 점잖은 집안 출신이지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여자들에게 개방된 거의 유일한 직업은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처럼) 학교 교사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제인 에어처럼) 개인 가정의 가정교사가 되는 일이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일은 고되고 사회적 지위는 그녀가 받는 보수만큼이나 낮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정교사의 지위는 상급 하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102)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빅토리아인들은 현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과거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향수'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분위기에서는 혁신적인 것, 진보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들은 낭만적 기질과의 친화력으로 말미암아 오래된 것, 보수적인 것, 감정적인 것에 대한 공감도 똑같이 키워나갔다."(165) 빅토리아인들이 "중세 시대를 되풀이하여 환기한 데에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안정되고 더욱 공정한 사회를 중세 시대에서 찾으려는 욕구, 의혹이 없는 더욱 통합된 지적 분위기를 찾으려는 욕구였다.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자신들의 방향성이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질수록 확고한 질서를 갈망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중세 시대는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그처럼 정신적으로 '굳은 땅'을 제공했다고 그들은 믿었다."(169-70)


"기계는 자연을 굴복시키고 이용한 그 시대의 두드러진 상징이었고, 그 비유를 자유로이 확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또한 사회적·정치적 혁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새로 발명된 기계가 아무리 독창적이거나 인상적이더라도 그 자체가 선善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낳은 산물이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더 사려 깊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변화(과정)와 향상(진보)의 동일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이들은 목적지와 무관하게 과정이 직선적으로 끝없이 전진한다는 가정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들은 다른 종류의 움직임들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진보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다."(177) 앨프레드 월리스의 이론과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1858)으로 대표되는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의 진전 역시 "자신만만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줄 메시지를 전했다."(178)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는 공리주의와 복음주의다. 이 중에서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 주위에 몰려든 교조적 열광자들이 주장한 철학의 순수한 형태를 가리킨다. 벤담주의자인 국회의원들과 그 추종자들의 신조를 가리키기 위해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또 다른 명칭은 '철학적 급진주의'이다." "이 명칭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이 신봉한 사회-경제-정치 이데올로기와 일련의 가치들을 가리켰고, 또한 그 시대를 지배했으며 이 강령을 채택하여 행동과 목적, 습관과 편견을 정당화했던 기업가 정신을 가리킨다."(187)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보다 우위라는 것이 입증되는가의 문제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수학적 계산이었는데, 벤담의 용어로 말하자면 "행복을 가져오는 계산법" 혹은 "도덕적 산수"를 통해 얻어졌다."(191)


벤담주의는 뉴턴의 기계장치를 윤리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공리주의와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은 고전주의 경제학─대체로 실용적인 목적에서 그 두 학파는 1830년경에 하나로 융합되었다─이었고, 혹은 공리주의의 또 다른 동의어로 종종 부정확하게 사용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하자면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자들, 즉 칼라일이 "음울한 과학"이라고 불렀던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분야에도 물리학에서의 중력의 법칙이나 벤담주의 윤리학의 쾌락/고통의 원칙처럼 최고의 경제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체계는 확고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었으며,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경제학은 철학적 권위뿐 아니라 수학적 권위로 공식 인가된 표시를 달고 있었다. 정치경제학이 의존한 철의 법칙 가운데 첫 번째는 토머스 맬서스 목사가 그의 <인구학 개론에 관한 소고>에서 상술한 것이었다."(194-5)


애덤 스미스와 달리, 벤담은 "현재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선호만 고려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스미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과 사회 이익이 동일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혹은 직관적으로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208)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벤담주의의 목소리가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면, 그것을 주장하도록 여론을 형성한 점에서는 벤담주의의 노력이 공헌하 바가 상당히 컸다. 대개의 획기적인 사회개혁 법령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제가 필요한 상황을 대규모로 조사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는데, 과학적 성향을 가진 일부 선도적인 벤담주의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전문적으로 사실을 수집했다. 그들이 속해 있었거나 간부로 봉사한 위원회에서 발간한 "청서"는 구제 입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12)


# 벤담주의의 긍정적 유산

1. 입법부와 법률 개혁 주도(특히, 형법 개정)

2. 당파를 초월한 전문가가 주도하는 공공 행정체계 수립

3. 약자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국가의 역할 강화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 경건파의 한 형태로서 교리와 예배의 형식보다는 인간들이 살아야 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두었고, 더욱이 삶 그 자체를 위해서보다는 내세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삶에 관심을 두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온갖 도덕적 오점을 찾아내고 영혼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한 "영원한 현미경"을 언제나 근심스러운 눈길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복음주의에 공감하지 않은 칼라일은 그것을 "병적인 자기 성찰"이라고 불렀다."(250) "복음주의는 179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격변이 종교적 무관심과 이신론적 합리주의, 철저한 무신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면서 이전에 유행하던 입장을 배격하고 다시 근본주의적 종교와 유사한 것으로 달아났다." 복음주의와 공리주의는 개인의 성격 안에 융합되어 있었는데, "평일에는 사업가인 사람이 주일에는 복음주의자라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 역사에서 진부한 말에 불과했다."(253-4)


"공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속세의 운명을 이행하는 최고의 수단이 노동이라는 윤리에 똑같이 동의했고,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노동이 천국의 보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255) "맬서스주의와 신빈민구제법의 냉혹한 사상이 기독교가 설파하는 자선과 엄밀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는 개인적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노동이고, 그와 관련된 금욕의 실천이라고 대답했다. 훈련된 노동자는 결국에 노동자로서 성공했다. 가난이 게으름과 낭비 습관의 결과라는 것은 거의 자명했다."(257)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으로 분열된 국가에서 도덕적 복음주의의 원칙이 널리 수용되면서 화해를 추구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윤리적 민주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계층을 결합시켰다. 이따금 마찰을 일으킨 계층들 간의 관계는 공동의 도덕을 소유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다."(263)


"과학이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성서에서 유래한 유대교/기독교적 인간관을 어떻게든 입증해주리라는 희망이 얼마나 남아 있었든지 간에, <종의 기원>은 그러한 희망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조물주가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서 인간을 본래 완벽하게 창조했고 인간의 욕구에 각별히 맞춰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신의 섭리론은 끝나고 말았다."(340) 그러나 진보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신념은 대단히 뿌리 깊은 것이었기에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중재에 의존해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으려면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깨닫고 사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실증주의 윤리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자조自助라는 테마가 더욱 숭고한 표현으로 등장한다."(351)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전진은 '컬쳐'(교양/문화)라는 단어의 의미로 집약된다. 19세기 이전에 "컬쳐(culture)는 기본적으로 '자연 생장물의 재배'를 뜻했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유추하여 인간의 (특히 개인의) 수양 과정을 뜻했다. 그러나 보통 어떤 자질의 수양을 뜻했던 이 후자의 의미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수양 자체, 그 자체로서의 어떤 것을 가리키도록 달라졌다. 그것은 처음에 '마음의 전반적인 상태나 습성'을 뜻했고 인간의 완벽함이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두 번째로 그것은 '한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지적 발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예술의 총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 단어는 '물질적, 지적, 정신적 삶의 총체적 방식'을 뜻하게 되었다." "사회가 더 이상은 그저 인간들이 공동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공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질 수 없었다. 그에 덧붙여서 이제 사회는 그 구성원의 개별적 삶을 향상시킬 책임을 져야 했다."(357-9)


이러한 문화적 이상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널리 만연되어 있는 중산층의 심리 구조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확산, 인간의 삶을 저하시킨 공장 체제의 존재였다."(360) "공장과 슬럼가의 생활이 빚어낸 최악의 결과들 가운데 한 가지는 개인이 대중에 융합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는 가장 큰 사회집단이라고 해봐야 가족과 인접한 공동체에 불과했던 농촌과 시골 마을의 생활조건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자선을 받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개체個體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공장과 제조소와 광산 근처에 음침하게 줄줄이 늘어선 집들을 꽉꽉 채우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대체로 상실되고 말았다. 그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원들로 전환되었다."(363) 개인성과 더 나아가 인간성이 박탈되는 가운데 "무기력과 단조로움이 삶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자각은 공장 체제 덕분에 얻어진, 극소수에 불과한 사회적 이득 가운데 하나이다."(367)


문화의 성장 지체에 대한 답은 교육이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다 같이 구원의 희망이 없는 노동에 구제할 길 없이 종속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낭만주의의 사회적 비전을 신봉하며 그 정신에 따라서 모두 그렇게 주장했다. 교육을 문화적 진보는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사회적 진보의 동인으로 간주하며 그토록 신뢰했던 경우는 서구 역사상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 보통교육을 실시하려는 추진력이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초기에 벤담주의적 개선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친숙한 유행어는 '마음의 행진'이었다. 이 표현은, 과학과 기술로 인해서 물질적 환경이 변화되고 국가의 부가 증식되고 있던 그 시기에 진보가 지속될 수 있으려면 오로지 '유용한' 지식이 끝없이 증가하고 축적되며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을 이용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368-9)


"철학적 입장에서 예술에 반대한 공리주의적 저항은 광범위한 인도주의적인 문화를 도덕적, 사회적 근거에서 불신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399) "복음주의자들은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예술을 거부했고, 몇 가지 동일한 이유에서 그러했다.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아니 적어도 더없이 엄격한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예술에 가장 헌신적인 낭만적 옹호자들의 진술을 어떤 입장에서 살펴보면 예술이 종교만큼이나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였으므로, 복음주의자들은 그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택은 명료했고,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은 불가능했다. 내세의 주장은 현세의 주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므로 시詩는 복음주의자들이 저항하려는 세속적 혼란을 일으키는 한 가지 요소라고 간주되었다."(403)


"공리주의와 복음주의의 시대에 수용될 수 있었던 예술의 기준은 대개 '도덕적 미학'이라는 용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404)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가 보기에 예술에는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이 있었다. 예술은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있고 세계를 인간이 노동하면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417)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철제 다리나 과도하게 장식된 공공 건물, 대량 생산된 실내 설비들, 개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보기 흉한 벽돌 공장들은 "사회의 질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징후이며 그 원인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대인들이 "주위의 도덕적 추악성을 각성하고 아름다움이 어떻게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지적하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최고로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 유용성이란 그들을 주로 몰아세운 정치경제학자들이 결코 생각해보지 못한 의미에서의 유용성이었다."(419)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당당한 정설들에 대항하는 강력한 조류가 18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건하고 시험적으로 보였지만 이전과 비교해볼 때 혁신적으로 확장된 국가 권력 앞에서 경제적, 사회적 개인주의는 물러나고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에 의해서 도덕적 심미주의는 전도되고 말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명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 중산층이 대경실색하도록 충격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습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키웠던 일체의 교리와 금언들은 여왕이 서거하기 오래전부터 공격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라는 형용사 자체도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롱조의 미묘한 어감을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제 빅토리아인들의 마음의 속성이라고 간주된 답답함과 두루뭉술함, 그릇된 진리, 억압과 금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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