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 :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


# 빨강 모자 소녀 이야기 : 엄마의 심부름으로 할머니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가던 소녀는 숲속에서 늑대를 만난다. 늑대는 소녀의 행선지를 물어보고 길을 가로질러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한 후, 할머니를 죽인 뒤 그 피는 병에 담고 살은 썰어서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잠옷을 입고 침대 속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늑대는 집에 도착한 소녀에게 천장의 고기와 포도주(할머니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한다. 소녀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 이불 속에 있는 할머니의 손톱과 이빨이 왜 이렇게 크고 날카롭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늑대는 "너를 잘 먹기 위해서란다, 얘야."라고 말하고 소녀를 잡아먹었다.


"정치사와 같은 인습적인 장르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요구하는 장르인 망탈리테의 역사에서 정확성이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적합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관은 정치적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연도를 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덜 '사실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의 세계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으로 들어가는 예비 단계의 정신적 배열이 없이 정치학은 발생할 수 없다. 상식은 그 자체로서 실재를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화마다 다르다. 상식은 어떤 집단적 상상력을 임의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질서 내에서의 경험의 공통적 근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구체제하에서 농민들이 세계를 보았던 방식을 재구성하려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것은 무엇인가, 그들 마을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경험은 무엇이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하여야 한다."(43)


"마을의 차원에서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주 제도와 생존을 위한 경제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흙에 몸을 굽히고는 원시적인 농사 기술 때문에 몸을 세울 기회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는 마을 내부에 균열의 틈바구니를 열었고 부채는 피해를 가중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빌리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그 사람들은 '마을의 장닭 coqs du village'이라고 불리던 몇 안 되는 비교적 부유한 자들로서 시장에 잉여 곡물을 팔고 가축을 키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빚에 의한 노역 때문에 부유한 농민들은 영주나 교회의 십일조 징수자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었다. 증오, 선망, 이익의 상충은 농민 사회를 관통하고 있었다. 마을은 결코 행복하고 조화로운 공동 사회 Gemeinschaft가 아니었다. 46-7)


"먹는가 못 먹는가,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민담에서도 농민들이 당면하던 문제였다. 이것은 대단히 많은 이야기에서, 때로는 사악한 계모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구체제의 난롯가에서 특수한 반향을 울렸을 것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요술 막대기, 반지, 혹은 초자연적인 은인이 생겼을 때 농민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음식이다."(55-6) "농민들에 일상 생활 속에서 소송, 장원의 세금에 대한 속임, 밀렵 등으로 부유하고 권세 높은 사람들을 속이려 하듯 환상 속에서도 그들을 속임으로써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 속에서 공화주의의 맹아를 찾는다는 것은 허황된 일일 것이다.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왕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꿈은 구체제의 도덕적 기반에 도전한다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92-3) 속임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작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95)


# 다양하게 변주되는 민담들 : 영혼을 노리는 악마를 속여 양껏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얻어내거나, 위험을 눈치챈 빨강 모자 소녀가 늑대를 기만하고 탈출한다거나, 왕을 속이거나 곤란에 빠지게 하여 공주를 차지하는 등의 이야기들


제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


고양이 대학살에서 "우리가 웃음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산업화 이전 유럽의 노동자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거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그 거리를 인식하는 것이 문화 연구의 출발점인데, "왜냐하면 인류학자들은 낯선 문화에 침투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최고의 입구는 그것이 가장 불투명하게 보이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115) "콩타는 그 사건을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이의 운명의 불균형, 즉 일·음식·잠이라는 삶의 기본적 요소에 있어서의 불균형에 대한 언급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위치시켰다. 그러한 부당한 처사는 견습공들의 경우에 특히 극악했다. 그들은 동물처럼 취급되었던 반면, 동물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 그 소년들이 차지했어야 하는 자리인 주인의 식탁으로 승진되었다. 견습공들이 가장 혹사당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텍스트는 고양이를 살해한 것이 노동자들 전체에 퍼져 있던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였던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16-7)


확실히 '부르주아'는 "다른 문화권에 소속되었는데 그 문화권은 무엇보다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규정된다."(122) 반면 18세기 직공들은 "게으르고,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공통적인 가정" 아래 취급되는 '물건' 같은 신세에 놓여 있었다.(120) 그렇다면 왜 하필 고양이인가? 폭동과도 같은 환락이 허용되는 기간인 사육제 때 젊은이들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사회적 경계를 시험했고, 그의 일환으로 고양이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양이는 6월 24일 하지에 거행되었던 세례 요한 성인의 축일에도 등장했다. 군중들은 모닥불을 피워 그 위를 뛰어 넘고 주위에서 춤을 추며 그해의 남은 기간 동안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 희망에서 마법적인 힘을 지녔다는 물체를 불 속에 던져넣었다. 이때 즐겨 던지던 것이 고양이로서 자루 속에 넣어 묶거나 끈에 매달아 늘어뜨리거나 말뚝에 묶여 태워졌다."(123-4)


# 고양이가 상징하는 의미

1. 마녀로 변신하거나 악마와 관련된 주술적인 힘

2. 가정에서 발동되는 (여)주인과의 일체감

3. 성적 은어


불완전하게나마 부르주아의 착취를 상징하는 고양이가 저지른 죄는 "견습공들에게 혹사를 시키고 제대로 먹이지 않은 죄, 죄인들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사치 속에서 살았던 죄, 한두 세대 전에 혹은 인쇄업의 출발시에 존재하였던 초기의 '공화국' 속에서 주인들이 하였다고 전해지듯이 일꾼들과 같이 일하고 먹는 대신에 인쇄소에서 물러나 임금 노동자로 인쇄소를 채우려고 하였던 죄 등이다." "확실히 그들은 인격 모독을 느꼈고 죽임의 항연 속에 그것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분노를 축적하였다. 반세기 후에 파리의 직공들도 같은 방식으로 폭동을 일으켜 무차별의 학살과 즉석의 인민재판을 결합시켰다. 고양이 학살을 프랑스 혁명의 9월 학살의 예행 연습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고양이 학살이 상징의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폭력성의 분출은 민중 봉기를 시사하였다."(142-3)


"고양이는 그들의 목적에 완전하게 부합되었다. (안주인이 키우는 고양이인) 그리스의 등뼈를 강타함으로써 그들은 주인의 아내를 마녀이자 동시에 음란한 여자라고 부른 것이었고 동시에 주인을 속고 있는 남편인 바보로 만들었다. 이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달된 환유적 모욕이었고 그것이 성공한 이유는 고양이가 부르주아의 생활 방식에서 편애받았기 때문이었다.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부르주아'에게 낯선 것이었던 만큼 애완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낯선 일이었다. 이리하여 병존할 수 없는 감수성 사이에서 함정에 빠진 고양이는 양측 세계 모두에서 최악을 맛보았던 것이다."(147) 다만 이러한 장난은 19세기말에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체적으로 상징적인 단계에 국한"되었던 바, 인쇄공들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파업을 감행하고, 때로는 임금 인상을 강요하였지만 (여전히) 부르주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148)


제3장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 텍스트로서의 도시


<1768년에 만든 몽펠리에 시의 상태와 설명>을 쓴 그는 "한편으로는 귀족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민들과 자신을 구분하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 주장에 공개적으로 집착하며 매페이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그의 공감대는 도시 사회의 중간 범위 어디엔가 그를 위치시킨다. 즉 그는 의사·법률가·행정가·금리 생활자 등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 인텔리겐치아를 형성하였던 자들에 동조하였다. 이 사람들은 '구체제의 부르주아'에 속한다. 그들은 18세기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였고 그 당시의 사전은 부르주아를 단지 '도시의 시민'이라고 정의하였을 뿐이다."(164) 몽펠리에 대행진은 여전히 귀족 계급에게 귀속되는 "도시 사회의 집합적인 질서를 표현하였다. 이것은 도로 위에서 펼쳐졌던 진술이었고 그것을 통하여 도시는 그 자체를 그 자체에게 내보였다. 그리고 때로는 신에게도 내보였다. 왜냐하면 몽펠리에가 한발이나 기근에 시달릴 때에도 행진은 벌어졌기 때문이다."(173-4)


"행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를 부여하였던 반면 상인들을 위한 장소는 별로 없었고 제조업자를 위한 장소는 전혀 없었다. 또한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였던 거의 모든 장인·일용 노동자·하인들도 배제되었다. 그리고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존재하던 신교도들도 제외되었다." "행진자들의 존엄성은 행진자들과 길가에 늘어선 세수하지 않은 일반 구경꾼들 사이에 그어진 구분보다는 (성직자·귀족·평민으로) 행진 대열 내에서 그어진 구분에서 발생하였다. 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펠리에에서도 인간의 신분homo hierarchicus은 사회의 양극화라기보다는 단편화를 통하여 번성하였다. 계급으로 구분되는 대신에 사회적 질서는 세분화된 정도의 존엄성을 따라 구경꾼들을 통하여 파문쳤다." "제외와 포함은 경계 설정이라는 동일한 과정에 속하며 그것은 길거리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났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경계는 실행됨으로써 그 힘을 획득하였다."(177-9)


"<설명서>의 후반부는 구조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반부에서 휩쓸고 지나갔던 행진에 대조되는 몽펠리에의 견실한 주택 하나를 연상시킨다. 부르주아는 이 건물에서 본층을 차지하면서 귀족을 '귀족의 층piano nobile'에서 상층 꼭대기로 밀어올렸던 반면 평민들은 계단 밑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신분의 언어는 존엄성의 언어만큼이나 전근대적이었다. 우리의 저자는 일련의 구식 범주를 사용하였고 그것에서 구식의 의미를 제거하고 재배열하여 19세기에야 공개리에 출현하게 될 사회적 질서와 흡사한 모습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 사회란 옛 귀족과 신흥 부자의 혼합체에 의해 지배되는 '명사들'의 사회로서, 그 사회의 근본적인 동인은 부富였지만 그 부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토지·관직·금리·무역 같은 전통적인 원천으로부터 파생되었던 발자크식의 사회였다."(181-2) 


<설명서>의 저자는 '부르주아 신분'을 귀족과 평민 사이에 위치시키면서, 그 단절면에 대해 밀접한 경계를 유지했다. 즉 부르주아의 지위를 "소극적으로, 즉 적대적인 이웃 신분과 관련하여 정의했다."(184) 그가 진정으로 경악한 지점은 "평민의 '부르주아화'였다. 제2신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제3신분과의 접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민들의 사악성을 네 개의 항목으로 요약했다. 1) 그들은 가장 작은 기회라도 생기면 고용주를 기만하고 속인다. 2) 그들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적이 없었다. 3) 그들은 방탕의 기회를 포착하기만 하면 일손을 놓는다. 4) 그들은 부채를 쌓고 결코 상환하지 않는다."(188) "평민들은 그 자체로서도 악이었지만 그들의 신분을 벗어나게 된다면 사회 질서 전체에 대한 위협이었다. 사회의 단층면은 신분·지위·집단·계급, 또는 모든 종류의 단체가 만나는 접합선을 따라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가능한 모든 지점마다 경계선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195)


'점잖고 행실이 좋은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상은 <설명서>의 여러 지점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귀족주의적인 17세기 관념의 고상함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1768년에 이르면 이것은 부르주아적인 색채를 획득한다." "신사와 부르주아라는 두 용어는 몰리에르의 시대처럼 웃기는 모순이 더 이상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귀족의, 다른 한편으로는 장인의 옆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어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부르주아 신사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개발하였다. 부유하고, 잘 먹고, 깔끔하게 입고, 취향에 맞는 물건에 둘러싸여 있고, 자신의 쓸모에 대해 확신하며 자신의 철학이 굳건한 그는 새로운 도시성에 기뻐한다. "행복한 자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우리의 저자는 결론하였다. 그 결론은 식량 무료 배급을 받으려는 줄이나 구빈원이나 정신병원이나 교수대를 참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추구를 선도하였던 사람들, 즉 제2신분의 '정직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200-1)


제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 : 문필 공화국의 해부


요즘 말로 하면 반체제 인사를 관리하던 데므리는 보고서를 기안하면서 오늘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문학적 감수성과 관료적 질서의 결합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자들의 종교적·정치적 견해의 성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 문체의 품격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226)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데므리는 "문필 공화국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가 감시하던 사람들의 경력 속에서 그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가령 드 베르니 원장 신부의 경우를 보면 데므리는 "가족 관계, 후견 관계, '보호제'의 그물망 속에 그를 위치시켰는데 그 단어는 중심적 용어로서 보고서 전반에 걸쳐 나오고 있다. 군주와 왕비에서부터 싸구려 팸플릿 작가에 이르기까지 경찰 명부 속의 모든 인물들은 보호를 찾고 받고 베풀었다." "이것이 그 체제가 움직이던 방식이었다. 경찰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원리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전제로 받아들였다."(235-6)


"문인들의 존엄성과 그들 소명의 고결성은 이미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하나의 중요 주제로 등장하지만, 데므리의 보고서에서는 그러한 주제를 찾을 수 없다. 비록 경찰은 한 작가를 보면 그를 알아보고 그를 데므리의 명부에 포함시킴으로써 다른 프랑스 사람들과 다르게 분류하였지만, 그들은 작가가 하나의 직업 혹은 사회 속에서의 지위를 지녔다고 말하지 않았다." "작가는 아직 현대적인 형태를 취하지도, 보호자에게서 자유롭지도, 문필 시장에 동화되지도, 한 직업에 전념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경찰은 작가를 어떤 인습적인 범주에도 위치시키지 못하였다." 데므리는 종종 작가들을 최저 한계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소년들garcons'이라고 지칭했는데, 이것은 "경찰 명부에 '신분이 없는 사람들gens sans etat'이라고 등장하였던 사람들, 그늘 속에 있던 현대 지식인들의 선구자들, 즉 위상을 정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위상을 정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246-7)


데므리가 궁극적으로 수호하고자 했던 "파벌이나 가신 집단이 비방을 받았다면 그것은 국가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궁정 정치의 체제 속에서 인격은 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고 개인의 신용은 잘 씌어진 팸플릿에 의하여 침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범을 다루는 경찰 작업은 팸플릿 작가들을 잡아내고 비방이 인쇄되어 나타난 형태를 가리키는 중상libelles을 억제하는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252) "데므리는 혁명을 예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필 공화국을 수사하면서 그는 적대적인 대중 여론의 물결에 더욱더 나약하게 노출된 왕국을 보았다. 후견인이 바뀌어가며 정신廷臣들이 부침하던 당시에 팸플릿 작가들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그 체제에 대한 존경을 잠식시켰다. 그리고 위험은 모든 곳에 숨어 있었다."(255) 데므리는 무신론이 왕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믿었고, 그가 보기에 디드로나 달랑베르 같은 자유사상가들은 중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제5장 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 :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


"분류 정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사과quadrivium가 아니라 삼과trivium로 분류된 과목이나 '경성硬性' 과학이 아니라 '연성軟性' 과학으로 분류된 과목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시들지 모른다. 잘못된 서가에 꽂힌 책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인간 이하라고 규정된 적은 절멸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 행위는 도서관의 도서 목록이나 조직 도표나 대학의 학과처럼 명확하게 다듬어졌건 아니건 분류의 도식에 의해 결정된 경계를 따라 흐른다."(272) "디드로의 <백과전서>의 서두에 있는 도해, 즉 베이컨과 체임버스에게서 이끌어낸 유명한 지식의 나무는 새롭고 과감한 것을 제시하였다. 기존 체계 내에서 학문들이 어떻게 변경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대신에, 이것은 신성하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던 것의 대부분을 학문의 세계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알려진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를 표명하였다."(274)


"종교를 철학에 종속시킴으로써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종교를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시켰다. 물론 그들은 정통을 지키고 있음을 공언하였다. 신은 '신성한 역사' 속에 스스로를 계시하였다고 그들은 기록하였다." 백과전서파의 전제는 "경건한 것처럼 들리지만 결론에서는 신학을 이성에 종속시키려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단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마치 감각적 인식을 쌓아올려 보다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만들어내면 신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던 것처럼 그들은 로크류의 방식으로 이성을 묘사하였다." "베이컨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성한 학문'을 '인간적 학문'이나 정신의 능력과는 상관 없는 다른 나무에 위치시켰다. 이렇듯 베이컨은 실지로 계시 신학과 자연 신학을 위하여 두 개의 지식의 나무를 상정하였던 반면 백과전서파는 계시 신학과 자연 신학을 합쳐 단일한 나무에 올려놓고 그 양자를 이성에 종속시켰다."(284-5)


"<예비 논고>의 마지막에서 달랑베르는 자신의 동료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 중의 극치, 뉴턴과 로크의 후예라고 찬양함으로써 '백과전서파'와 '계몽사상가'라는 용어가 의미론적 영역에서 '학자', '현학가', '지성인'과 같은 용어들을 압도하게 되는 의미의 변천에 기여하였다." "<예비 논고>의 부분들은 단일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로 맞물려 있다. 이것은 옛부터의 학문의 여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그 자리로 철학을 격상시켰다. 그러므로 현대판의 <신학 대전>은 중립적인 정보 편찬물과는 거리가 멀게 지식을 형상화하여 그것을 성직자에게서 빼앗아 계몽 사상에 동참하는 지식인들의 손 안에 넣어주었다. 이러한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는 19세기 중에 교육의 대중화와 현대적 학문 분야의 출현과 함께 도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과업은 백과전서파가 지식은 권력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지식의 세계 지도를 그림으로써 지식을 정복하려고 하였던 1750년대에 이루어졌다."(295-6)


제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 :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


계몽 사상가들은 세계를 지도화하여 독자들의 정신에 새로운 세계관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렇다면 18세기 프랑스에서 독서란 무엇이었을까? "18세기에 책은 손으로 만들어졌다. 종이는 낱장마다 개별적으로 정교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책 속에서도 페이지마다 달랐다. 각 글자·단어·행이 저마다 장인이 개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솜씨에 따라 만들어졌다. 책은 낱권마다 자체의 특성을 지니는 개체였다." "독자는 활자의 도안을 살피고 간격을 조사하고 안팎의 인쇄면이 일치하는가를 검토하고 주형을 평가하고 인쇄의 균등성을 검사하곤 하였다. 그는 우리가 한 잔의 와인을 음미하듯 책의 표본을 조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종이 위에 있는 것이 주는 인상을 바라보았지 단순하게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의미에 도달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책의 물리적인 성질을 완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는 정좌하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316)


당대에 유행한 <독해 선집>과 <강의의 원리>를 저술한 비아르에게 이해란 단어의 정복을 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텍스트의 "의미는 문법이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의미론적 단위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아르는 마치 텍스트의 이해는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단어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319) "루소는 독자들을 텍스트 속으로 안내하여 자신의 수사법으로 그들의 방향을 정해주고 그들이 어떤 역할을 맡도록 만들었다. 루소는 독자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시도하기까지 하였고 독서를 통하여 그들의 내적 삶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인습적인 문학과의 결별을 요구하였다. 이야기의 뒤에 숨어버리고 볼테르의 방식대로 등장인물들을 인형극의 인형처럼 줄로 조종하는 대신에 루소는 자신을 자신의 저작 속에 던져넣었고 독자들도 똑같이 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변형시켰다."(323)


루소식의 독서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혁신시켜 낭만주의로의 길을 열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16~17세기에 만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독서법, 즉 신의 말씀을 제삼자의 개입 없이 흡수하기 위한 독서법을 부활시킬 것이었다." "칼뱅파이건 얀센파이건 경건파이건 이전 종교의 독서와 루소식의 독서를 구분시켰던 것은 가장 의심스러운 형태의 문학인 소설을 마치 성경을 읽듯이 읽으라는 요청이었다."(329-30) "이런 종류의 독서는 믿음의 비약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겪으면서 어떤 식으로건 고통을 받았음이 확실하고 그것을 엮어서 문학을 초월하는 진리로 만들어냈을 저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궁극적으로 루소 소설의 힘은 그 자신의 개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저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출발시켰고 그것은 19세기 멀리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엘로이즈>에서 그는 장면 뒤에 숨는 대신 무대의 전면으로 걸어나왔다. 331)


"가장 세련된 학자들, 혹은 볼테르나 그림처럼 정확성에 까다로운 사람들은 <신엘로이즈>의 문체가 과장적이고 주제는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 모든 계층의 평범한 독자들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울었고, 질식하였고, 격노했고, 자신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더 잘 살자고 결심했고, 흉금을 털어놓고 더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루소에게 편지하여 가슴 속을 털어놓았다."(342) "1761년 <신엘로이즈>에 의하여 일어났던 눈물의 홍수는 또 다른 하나의 전낭만주의적 감상의 파도라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수사학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독자와 작가는 각기 텍스트에서 상정된 이상적인 모습을 취하면서 인쇄된 글을 넘어서 교류하였다. 장-자크는 자신을 올바로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열어놓았고 그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일상적인 실존의 불완전성을 넘어 격상되었다고 느꼈다."(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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