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848년 튈르리 궁전의 약탈과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창조적 파괴의 달콤씁쓸한 경험을 겪은 뒤 보들레르가 느낀 근대성이라는 개념에는 모순이 있다. 현재와 맞붙어 싸우고 미래를 창조하려면 전통은, 필요하다면 폭력에 기대서라도 전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닻을 빼앗기고 무력하게 표류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1860년에 이렇게 썼다. 예술가의 목표는 근대를 '영원하고 확고부동한 것'을 다루는 예술의 다른 절반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일시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플로베르의 딜레마와도 공명하는 어떤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히 빠르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종합이 도출되고 그것을 손에 넣기도 전에 우리를 끌고 가던 유령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온통 이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인간쓰레기가 뒤에 남겨진다. '뿌리 뽑힌 무수한 인생'을 무시할 수는 없다."(28-9)


발자크는 도시에 충만해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제거하여 부르주아들의 혼탁한 욕망이 연출하는 연극을 꿰뚫어보았다. "발자크는 대개 시골 출신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적인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이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설령 자기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골 출신이라는 것, 시골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신화이다."(52) 파리에서 "하층계급이든 중간계급이든 명문귀족이든 온갖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은 모두 '필요'라는 무자비한 여신, 돈과 명예와 오락의 필요가 휘두르는 채찍질로 이리저리 달리고 뛰고 법석을 떤다. 이곳을 관장하는 것은 자본의 순환이다."(54)


발자크는 부르주아들이 친밀성이나 내면적 감정을 느낄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차가운 계산과 돈 계산을 기준으로 한 이기주의, 의제자본擬制資本과 이윤 추구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70) "시간과 공간의 말살이라는 관념은 숭고함에 대한 특별히 자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해석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의 정복과 세계(어머니 대지)의 정복은 무수한 자본주의적 환상에서 축출되었지만 숭고한 성적 욕구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부르주아적 근대성의 신화에 관해 뭔가 결정적인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발자크에게서 미래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무너져 현재의 시간으로 바뀌는 때는 바로 희망, 기억, 욕구가 수렴되는 순간이다. "미래에 대한 열망과 과거의 회상을 통해 현재의 더없는 행복을 세 배로 늘린다." 이것은 개인적 계시와 사회적 혁명의 최고의 순간, 발자크가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고상한 순간이다."(78-9)


발자크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업 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이다."(85) 그러나 오스망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명제로 근대성의 신화를 포장한다. "풍선과 삼각측량용 망루로 무장한 오스망 역시 그것을 땅 위에서 재구성하는 일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파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발자크는 도시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의 감정적 존재인 것처럼 관련된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지시하고 꿰뚫어보고 해부하고 내면화하는 반면, 오스망은 그 환상적 충동을 전환시켜 표현과 행동의 기술면에서 국가와 자금주들이 선두를 차지하는 확연하게 계급적인 기획을 만든다."(81)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사회적·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98) 신체정치 하에서 "정신적 권력은 사제의 손에서 지성인들─과학자와 예술가─의 손으로 넘어가야 하며 속세의 권력은 산업인 본인들 가운데서 지도적 인물이 가져야 한다. 후자의 관심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최소비용과 효율적 형태의 행정을 고안하여 직접 생산자들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정부의 기능은 "유용한 업무가 방해받지 않도록" 보장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효율적인 행정이 지시에 의한 통치를 대신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일할 것이다." 생시몽은 1803년에 이미 이렇게 선언했다. 결국 사회체제의 질병이 치유되려면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적절한 생산조직과 유용한 노동이다."(103)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구상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심 의제였다. 그러나 프루동은 "생산조합이 개별적인 자유와 주도권을 질식시킬까봐 우려했고,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분을 철폐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관계들을 좀더 조화롭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프루동은 공동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사유재산이 장물"이라면 "공동체는 죽음"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840년의 공산주의자 회의에 참가한 많은 연사들은 공동체와 공산주의가 호환 가능한 용어라고 말했으며, 프루동은 중앙집중식 정치권력과 의사결정과정을 혐오했다."(116-7) 하지만 프루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이므로 그들이 생산한 가치에 따라 급료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노동의 화폐numeraire라는 것을 주창하려고 애쓰다가 풀 길 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120)


1848년 6월에 부르주아적 근대성 개념과 맞부딪힌 또다른 근대성 개념은 "인구 전체를 양육할 수 있고, 시골과 성장하는 도시에 사는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겪고 있던 빈곤과 몰락의 여건을 다룰 능력이 있는 사회공화국social republic의 이상에 기반을 두었다. 그것은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고, 걸핏하면 평등, 자유, 공동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혼란을 빚었지만, 노동과 공동체 활동이 결합된 형태가 보다 적절한 사회관계와 보급 표준의 형태를 위한 대안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는 데 깊은 믿음을 품고 있었다."(130) 이처럼 당대 파리에서는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들의 온갖 사상이 들끓었지만, 1848년 이후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하면서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겨준 것은 오스망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133)


"오스망이 업무를 완수한 뒤인 1869년에 출판된 <감정교육>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 (그리고 아주 뛰어난) 묘사가 풍부하다. 그 도시는 우리의 감각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지만 '감정을 가진 존재'나 '신체정치'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루이 나폴레옹이 그려나간 제2제정의 역사는 "자본의 축적이 가지는 힘에 맞서 황제권력 주위에 신체정치의 감각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자본의 축적이 그러한 정치 형태에 적대적이라고 본 클라크의 관찰은 아주 타당하다. 경제적 해방(예전에는 생시몽주의자이던 미셸 슈발리에가 1860년에 맺은 영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으로 시작하는)은 황제 권력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다. 제국을 몰락시킨 것은 공화주의자(어쨌든 이들도 대부분 사유재산과 기업의 자유에 이끌리고 있었다)라든가 노동자의 저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도 했다."(133-4) 


1848년에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는 건조환경에 대한 대규모 장기 투자 계획을 통해 흡수될 예정이었는데 이는 공간관계의 개선에 초점을 맞춘 계획이었다. 제국이 선언된 지 1년이 못되어 1,000명 이상이 튈르리 궁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미처 등록되지도 않은 수천 명이 철로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1851년만 해도 한산하던 광산과 제련소는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 가동하고 있었다. 아마 자본주의 최초의 대위기였을 사건이 자본과 노동력 과잉을 수송과 교통 시스템의 재편 작업에 장기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극복된 것으로 보였다."(161) "하지만 자본과 노동의 과잉을 흡수하는 그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생산적' 고용이란 항상 이윤을 내는 고용을 의미한다는 것이 문제였다."(162)


생시몽의 영향을 받은 페레르 형제는 "오래전부터 신용 시스템이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의 중추라고 생각했다. 홍수처럼 선전을 쏟아부으면서 그들은 소액 저축을 동원하여 장기 프로젝트를 감당하도록 신용기관들을 치밀한 위계 형태로 조직하여 저축을 민간 차원으로 확산하는 길을 모색했다. '자본의 연합'이 그들의 주제였고, 미래의 발전에 대한 거대하고 대담한 투기가 그들의 실천이었다."(175) "위대한 투기자는 파리와 그 도시 형태를 만드는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전 지구를 지휘할 열망을 품는다. 그 열망을 달성하는 수단은 자본 연합이다. 졸라가 생시몽주의 원리가 처음 형성된 지 70년 가량 지난 뒤 그것을 극히 자신만만한 형태로 불러내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에서 19세기 내내 이 사고 모델이 꾸준히 존속해왔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준다. 졸라가 불러낸 공식, "과학의 도움을 받은 돈은 진보를 만든다"는 공식은 모든 차원에서 공감을 얻었다."(182)


부동산 소유권의 사회적 의미와 방향이 빠른 속도로 바뀌면서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의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자본 형태로 평가되었다."(185) "1840년대의 자산 소유자 비율을 보면 점포주와 수공업자들이 지배적(절반)이었고 자유전문직과 대상인이 나머지 1/3을 차지했다. 1880년이 되면 이 유형은 완전히 변한다. 점포주와 수공업자의 비율은 13.6%로 떨어졌고 자유전문직도 8.1%로 떨어졌으며, 오로지 지주이기만 한 사람들 계층(53.9%)이 그 공백을 메웠다. 대상인(특히 '회사'라는 새로운 범주와 결합했을 때)만이 예전 지위를 유지했다." "중하류층과 소부르주아들은 부동산 소유권에서 계속 배제되었고, 그들의 자리는 지주와 대상인들로 이루어지는 상류층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그러한 변화는 수공업과 소생산자와 점포주가 대상인과 금융에 종속되는, 상업, 금융, 제조업 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일치한다."(187-8)


"좀더 순수한 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르는 토지와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신용시스템의 성장에 고무되어 재편성된 현상(좌안에서처럼 전통주의자의 저항 중심지도 물론 있지만)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파리 내부 공간의 재편성이 공간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격 경쟁에 점점 더 예속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변두리(일터까지 더 먼 길을 가야 하는)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도심 가까이의 집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비좁게 살아야 했다. 공장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노동 과정을 바꿀 것인가, 근교로 나갈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했다. 파리의 재건설을 통해 노동과 자본의 잉여를 흡수하는 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병적이라고 여겼던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퇴거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늘어나고, 일하러 더 먼 길을 가야 하며, 치솟는 집세와 인구과밀의 환경─을 가져왔다."(205)


"1848년 혁명이 파리를 해체하고 재조직했던 만큼, 수도에서 완전고용의 문제는 절박한 사안이었다. 이 문제는 공공사업의 진행 속도가 빨라지자 부분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1868년 이후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랬듯이 공공사업을 주춤거리게 되면 세금 수입의 감소와 건설 분야의 실업사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 된다. 이것이 부르주아들의 견해와 달리, 일반적인 생각처럼 오스망 반대파가 결코 아니던─그는 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주 원천이었으며 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노동자들을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코뮌에 참여한 사람들 중 건설노동자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컸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212) 1860년대에 실질임금이 감소하자 "사회가 진보한다는 주장은 웃음거리가 되고 축제는 노동계급의 비용 부담으로 개최된 소름끼치는 사치처럼 보였다."(218)


오스망은 권력 기반이 허약한 나폴레옹 3세와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도시 안에서 (지주와 상업 자본가, 그리고 노동자 간의) 계급 연대를 꾸려내고, 황제 권력을, 또 그 연장선에서 자신의 권력까지를 좀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우는 일을 도와야 했다."(222) 오스망은 "제2제정기 내내 파리의 국가 기구를 지배했다. 그가 그저 자본의 급속한 축적을 통해 고삐 풀린 사회 세력의 폭풍을 잘 견뎌냈을 뿐이라고 한다고 해서 결코 그의 입지를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폭풍을 절묘한 기술로 타고 넘었고, 놀라운 기술과 전망을 가지고 그 소용돌이치는 힘을 약 16년 가량이나 조율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만든 폭풍도, 길들인 것도 아니었고 프랑스의 경제, 정치, 문화의 진화에 내재하는 깊은 소용돌이였으며, 결국 그것은 중세적 파리를 철거반원demolisseurs에게 내던진 것만큼 무자비하게 그를 내던졌다."(224)


"임대료에 비해 노동자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주거 상황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오스망이 벌인 사업은 도시의 슬럼을 없애기는커녕, 노동자 소득이 정체한 시기에 임대료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슬럼 형성 과정을 촉진했다." "그러한 암담한 주거 상황이 사회적 영향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가족 형성에 강력한 장애물이던 상황을 더 확실하게 약화시켰다."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던 콜레라와 티푸스의 위협이 비위생적이고 시설이 부족한 주거 때문이라는 증거도 상당히 있었다. 공간이 워낙 부족하다보니 사회생활은 대부분 길거리로 밀려났고, 요리 시설 부족 때문에 이러한 추세가 심화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을 카페나 카바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장소가 정치적 선동과 의식 형성의 집단적 중심이 되었다."(286-7)


"가톨릭 우파인 르플레에서부터 사회주의 좌파인 프루동에 이르기까지, 의견의 범위가 워낙 넓다보니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주거 문제를 사유재산의 틀 안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주택 소유란 정부 보조금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정부는 정치적 기반으로 점점 더 세력이 커지고 있던 지주들의 강력한 계급 이익뿐 아니라 오스망 같은 사람의 결정적인 행동 원칙이던 시장의 자유에 대한 전반적인 집착과도 충돌했다. 강력한 계급 세력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심해져 주거 문제에 관해서는 오스망의 지휘로 이루어진 빈민가 철거 이상의 일체의 행동이 좌절되고 중단되었다. 주거 개혁이 조금이라도 착수되기 시작한 것은 코뮌이 일어나서, 비참한 슬럼과 안마당이 그 어떤 노동자 도시보다도 더 심한 혁명적 행동의 온상임을 개혁가들이 파악한 뒤의 일이었다."(288-9)


"제국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원래 나폴레옹 전설의 대중추수주의와 제국 권력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순수하게 정치적 측면의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외피를 걸치고 유럽 문명의 심장이자 머리가 되겠다는 파리의 도시계획은 오스망이 위임받은 임무 가운데 일부였다."(301) "상품 그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어 갖는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신흥 백화점이었다." "상점의 쇼윈도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혹 장치로 꾸며졌다. 백화점 내부에 눈에 띄게 높직하게 쌓인 상품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상점들은 길거리로 열려졌고, 사야 한다는 강제성을 느끼지 않은 채 대중들이 들어오도록 부추겼다. 한 부대는 될 만큼 많은 호객꾼과 영업 사원, 매력적인 젊은 남녀들이 내부 공간에서의 행동을 순찰하면서 동시에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속에는 노골적인 관능성이 개입되어 있었다."(308-9)


상품화와 스펙터클은 소비와 외관에 근거한 새로운 계급 차별 감각을 양산했고 이는 부르주아들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스펙터클을 통치와 화해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문화 내에서 좀더 불온한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는 징후가 있었다." 일례를 들자면 "1848년이나 1851년의 항거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의 장례식마다 무덤 옆에서 열정적인 조문을 읊는 거창한 정치적 행사가 되는 관례가 생긴 것이었다. 1869년에 나폴레옹의 조카가 공화파 언론인인 빅토르 누아르와 언쟁을 하다가 그를 살해하자, 누아르의 장례식에 참가한 인원은 적어도 2만 명은 되었다. 페르라셰즈 묘지나 벨빌에서의 하강이 혁명의 조짐으로서 정권에 불행을 예고하는 위협적인 스펙터클과 융합되면서, 이 모든 상징적 질서가 스스로에게 화근이 되었다. 연극성과 스펙터클은 양편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요인이었는데,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스펙터클의 구심점이 상품화뿐 아니라 정치적인 반대로도 이동한 것이다."(320)


"1870년에도 계급관계의 낡은 패턴─전통적 지주,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 점포주, 공무원─을 여전히 쉽게 식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계급 구조가 그들 위에 더 확고하게 덧씌워지고 있었고, 그들 자체도 다수의 신흥 상층 부르주아가 구사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파리의 소규모 산업과 상업의 넓은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교환관계로 모든 노동이 점점 더 포섭되는 현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탈기술화는 수공업 노동자가 가졌던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경제적 세력은 이러한 틀 안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자금주들은 적어도 파리의 산업과 상업 분야에서는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노동자 가운데 한 작은 집단은 점점 커져가는 비숙련 노동자와 빈민들의 대집단 내부에서 특권적 노동 귀족의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동은 다분히 긴장감을 발생시켰으며, 그 모든 것들이 1868년과 1871년에 파리에서 벌어진 격렬한 계급투쟁에서 구체화되었다."(332)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는 각종 사상이 종교에 복종하는 데 대항하는 최전방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다른 방어와 저항의 수단을 찾아내야 했다. 쿠르베가 돌연히 열어젖힌 사실주의 회화로의 돌파구, 1848년의 폭력에 의해 훨씬 더 비극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근대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타협 없고 치열한 포용, 그리고 처음에는 혼란을 겪었지만 곧 유토피아적 구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프루동의 태도가 갖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쿠르베, 보들레르, 프루동은 제휴할 수 있었고 또 제휴했다.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그들이 환멸은 1848년에 대한 전형적인 사회적 반응이었고, 그것은 사실주의와 실용적 과학을 인간 감정을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였을지도 모르지만 메스로 무장한 낭만주의자로서, 종교와 제국의 권위주의를 떠나 실증주의와 초연한 과학의 방패 뒤에 아지트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364-5)


"프랑스의 지리적 상상력은 오래전부터 과중한 환경주의와 인종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385) "만약 부르주아들이 걸핏하면 묘사하는 것처럼 노동자가 '야만인'이고 '천박한 대중'이고 그저 범죄자이고 '위험한 계급' 밖에 안 되는 존재라면 1848년은 그들이 어떤 위험을 야기하며 어떤 야만성을 발휘하려는지를 지극히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는 노동자들이 '문명의 야만인들'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1871년에 그랬듯이 1848년에도 이러한 연상이 나아가는 전반적인 방향은 역시 '문명'과 '질서'의 힘은 혁명가들을 개 또는 그 비슷한 존재로 추정되던 야만인들처럼 쏴죽일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단정하는 쪽이었다. 파리에서 노동계급의 '타자'가 그렇게 인종차별적인 용어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계급전쟁이 어찌 해서 그렇게까지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수행되었는지를 해명해준다."(386)


오스망은 도시를 자본가와 투기꾼과 환전상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그 파티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었고, 모든 과정이 혐오스럽고 추잡하다고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보들레르가 제시한 창녀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특별한 의미를 띠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제2제정은 항상 논쟁 중에 있는 파리의 이미지가 변화를 겪는 순간에 처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도시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발자크는 그녀를 신비스럽고 변덕스럽고 걸핏하면 타락하지만 또 자연스럽고 구질구질하고, 특히 혁명이 일어나면 예측불가능해지는 존재로 보았다. 졸라가 그린 이미지는 아주 다르다. 그녀는 이제 타락하고 야수 같은 여자가 되었고, "내장이 드러나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이며, "투기의 대상이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의 제물이 된" 존재이다. 이렇게 야수처럼 변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혁명에서 봉기하는 것 외에 달리 또 있겠는가?"(378)


"부르주아 사유재산권과 계급 지위의 보존이 여성에 대한 통제에 의존하고 있는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이미지를 드 토크빌이 만난 것 같은─그보다도 더 심한, 창녀─무시무시하고 통제불가능한 종류의 여성으로 그리는 것은 틀림없이 부르주아 남성 심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네가 그린 여성(<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은 바로 그녀가 그다지 순종적이지 않은 눈길을 한 보통의 창녀 모습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허츠는 계급적대감과 혼합된 거세 공포(졸라가 <제르미날>에서 그토록 명백하게 표현한)가 "정치적 압력을 받으면 남성 히스테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혁명적 행동에 가담했던 여성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수사법에 담긴 지독한 폭력성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412) "코뮌의 섬뜩한 후유증은 계급과 성별 간의 적대감이 서로 상승작용을 할 때 어떠한 폭력과 참혹함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415)


"1870~71년 사이의 경험 및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의 퇴폐적인 '축제 물질주의'를 상대했던 경험으로 가톨릭 신도들은 광범위하게 영혼을 탐구하는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프랑스가 죄를 범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속죄의 표현이 등장하고, 신비적이기도 하고 거창하기도 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타협적이고 교황지상주의자인 가톨릭 신자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권위의 존경에 의거한 법과 질서와 정치적 해결책으로 복귀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 법과 질서의 약속을 내건 쪽은 전반적으로 비타협적 가톨릭 신자인 군주주의자 본인들이었다. 자유주의 가톨릭 신도는 이 모든 것이 마땅찮았지만, 교황부터가 그들을 "사실상 프랑스의 골칫거리"라고 무시하는 마당에 무슨 세력을 동원할 만한 처지는 전혀 아니었다. 군주주의와 비타협적 가톨릭주의 사이에 연대가 강화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건설을 보장한 것은 이 강력한 연대였다."(468-9)


#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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