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건축, 현대 음악, 현대 철학,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과거를 통해, 혹은 과거와의 대비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무관한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정신은 역사에 무관심해졌다." 그러나 역사적 변화는 "개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사회 그룹 전체에도 죽어버린 신념 체계를 개정하거나 교체하도록 강요한다. 역사의 멍에를 떨쳐버리려는 시도는 모순적이게도 역사 과정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과거와의 모든 관계에 무관심해진 탓으로 상상력이 해방되어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구조가 마구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때 연속성이 지배하던 곳에 복합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현재하는 역사의 신속한 변화에 대한 의식은 관련성 있는 과거로서의 역사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사회적·정치적 해체의 진동이 날카롭게 느껴지던 세기말의 비엔나는 무역사적인(a-historical)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다."(18-9)


신비평(New Critics)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문학계를 주도하던 문학적 역사주의 연구자들을 무시간적·내면주의적·형식적 분석에 몰두하는 학자들로 교체했다. 정치학계에서는 뉴딜정책이 퇴조함에 따라 전통적 정치철학의 규범적 관심과 공공정책의 문제에 대한 실용주의적 관심이 행동주의자들의 무시간적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배에 밀려났다. 경제학에서도 수학적 취향의 이론가들이 사회적 성향의 제도학파와 정책 지향적인 케인즈주의자들을 밀어내고 세력을 확장했다. 음악 분야에서도 쇤베르크와 솅커에게 영감을 받은 새로운 명망가들이 음악학의 역사적 관심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 자체의 역사적 성격과 연속성에 대한 높은 자각을 본질로 하는 철학에서도 분석철학파가 전통적 문제의 타당성에 도전했다. 새로운 철학은 언어와 논리라는 제한적이고 순수한 기능성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역사 일반과 그 학과 자체의 과거와의 연결을 모두 단절해버렸다."(21-2)


"프로이트의 도시에 있는 새로운 문화 제작자들은 거듭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항이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반항 대상에는 자기들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려받은 가부장적 문화의 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폭넓은 전선을 형성하여 공격한 대상은 자신들을 길러낸 고전적 주류 자유주의 체제의 가치였다." "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특징인 문화에서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문제는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의 후유증으로, 일종의 부르주아의 아방가르드적 자기비판으로 발생했고, 제2제국 때부터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1890년대에 대부분의 현대적 운동이 나타났으며, 그 후 이십 년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고급문화는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29-30)


# 오스트리아의 정치 상황

1. 귀족정치와 절대주의에 대항하던 영웅적 자유주의가 1848년의 충격적인 패배로 퇴장

2.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순화된 자유주의자들이 어부지리로 권력 획득, 1860년대 입헌 체제 성립

3. 제한된 참정권을 바탕으로 의회 권력 유지 (도심 중산층에 국한된 취약한 지지 기반)

4. 농민, 도시 기술자, 노동자, 슬라브족 등의 참정권 요구 : 1880년대에 대중 정당을 결성하여 자유주의 체제와 대립

5. 반유대주의, 교권주의敎權主義,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현대의 대중운동의 물결 속에 1900년 무렵 자유주의 권력 몰락

☞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무기력, 불안, 사회적 생존의 무자비함에 대한 자각 등의 분위기 형성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를 프랑스나 영국 부르주아와 구별해주는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없애버리지 못했고 완전히 그들에게 용해되지도 못했다. 또 그러한 취약성 때문에 황제를 경원하면서도 아버지-보호자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의존했으며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독점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탓으로 부르주아는 항상 뭔가 국외자 같은 존재였고 귀족계급과 통합하고자 애썼다. 수도 많고 부유한 비엔나 거주 유대인 세력은 동화하려는 성향이 강했으므로 이 같은 추세를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오스트리아 귀족계급은 "속속들이 가톨릭적이고 관능적이며 감수성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는 자연을 신성한 법칙에 따르는 질서를 부과하여 장악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본 반면,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귀족 문화는 그것을 즐거움의 무대, 예술로 찬미되어야 할 신성한 은총의 현현으로 보았다."(41-2)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비엔나 중산계급 사회에서 예술이 발휘하던 기능이 변했고, 이 변화에서는 정치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비엔나 시민들이 처음에는 귀족계급으로 동화하는 대신에 그 대체물로 예술의 신전을 후원하는 길을 택했더라도 결국에는 예술을 하나의 도피처, 점점 더 위협적인 정치적 현실의 불유쾌한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로 삼게 되었다." "귀족이 되고 싶은 허세꾼으로서든 예술가 또는 정치가로서든 부르주아란 결코 자신의 개인주의적 유산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호프만슈탈이 "미끄러짐(das Gleitende)"이라 부른 것, 즉 세계가 슬며시 사라져버린다는 느낌이 커짐에 따라 부르주아는 자신에게 적절한 미적 문화를 내면으로 돌려 자아를 갈고 닦으며 자신의 개인적 특이성을 더욱 연마했다. 이런 경향은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정신적 생활에 몰입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예술에 대한 헌신과 정신에 대한 몰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된다."(43-4)


"호프만슈탈과 슈니츨러 두 사람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즉 고전적 자유주의 인간관이 무자비한 오스트리아의 현대 정치 앞에서 해체된다는 것이었다. 둘 다 낡은 문화의 폐허에서 심리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슈니츨러는 비엔나 자유주의 전통의 도덕적·과학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다. 사회에 대한 그의 직관은 호프만슈탈보다 더 탁월했지만, 죽어가는 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는 가을 같은 분위기의 염세주의에 빠져 작품에서 비극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호프만슈탈은 "예술 원리를 정치에 적용했다. 그는 감정의 비합리적 힘을 억누르기보다는 물꼬를 틔워주는 형식을 찾으려 했다. 전체의 제례에 참여한다는 그의 정치학은 시대착오에 물들었고, 그 때문에 비극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비이성적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증언은 포스트자유주의 시대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60)


건축 분야로 눈을 볼려보면 "유용성이 아니라 문화적 자기 선언이 링슈트라세를 지배했다. 1860년대의 거대한 프로그램을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된 개념은 '쇄신'이나 '재개발'이 아니라 '도시 이미지의 미화(Verschonerung des Stadtbildes)'였다."(69) "전체적으로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물들은 주류 자유주의 문화가 내세우는 최고 가치를 훌륭하게 표현했다. 자유주의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연병장의 폐허에서 입헌국가의 정치제도를 양산해냈고, 자유 시민의 엘리트를 교육할 학교를 세웠으며, '신인간(novi homines)'을 저열한 출신성분으로부터 구원해낼 모든 문화를 문화를 한데 모으는 박물관과 극장을 지었다." 이 기관들은 옛 문화와 제국적 전통의 연결을 강화하는데, "상승하는 부르주아들은 그곳에서 사회적·경제적 권력의 새로운 형태를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귀족계급과 만난다. 그곳은 승리와 패배가 사회적 타협과 문화적 종합으로 변형되는 '메자닌(mezzanine)'이다."(87)


# 링슈트라세 : 비엔나 중심부에 위치한 순환 도로


지테는 1875년에 비엔나 바그너 동호회에서 연설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반대하고 수공업적 가치를 옹호하는 "자기 자신의 지적 사고틀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음악가) 바그너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밝혔다. 지테에 의하면, 현대인의 존재에서 근본적 사실은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일관된 가치의 조합이 없다는 점이다. 현대 세계를 만든 사람들은 갈릴레오에서 다윈에 이르는 과학자이거나 개척자-정복자와 상인 모험가였다." 그는 "실제 세계 바로 곁에, 그 위에" 서서 현재 인간의 파손된 가치를 응집력 있는 미래의 이미지로 주조해낼 새로운 이상을 주문했다. "지테는 예술가의 특별한 임무가 이 구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작업임을 인식한 천재로서 바그너를 찬양했다. 과학과 무역의 뿌리 없는 탐색자들이 세계를 파괴하여 고통 받는 민중이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신화를 박탈했으므로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114-5)


지테가 <도시건설>을 출판한 4년 뒤인 1893년에 건축가 오토 바그너는 지테와는 아주 판이한 전제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비엔나 개발계획 경연에서 우승했다. 바그너는 링슈트라세 계획을 지배했던 '표상'과 '도시 이미지의 미화'라는 목적을 폐기하고 "필요만이 예술의 주인(Artis sola domina necessitas)"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지테가 역사주의를 확대하여 인간을 현대 기술문명과 효율성에서 구원하려한 데 반해 바그너는 한결같이 합리적이고 도시적인 문명의 가치에 유리하도록 역사주의를 격퇴시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지테가 "현대 도시주의의 아노미 현상을 상대하기 위한 시각적 모델을 공동체적인 과거에서 불러오는 동안 바그너는 자신이 기쁘게 끌어안은 분방하고 합목적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도시성의 진리를 표현할 새로운 미적 형태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건축가이자 논쟁가이며, 교사이자 도시이론가인 바그너는 링슈트라세 문화를 벗어나 최고의 모더니스트로 등장했다."(119-21)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상류 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 계급의 폭발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했다. 귀족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이 받은 답변은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다민족 국가에 유리하도록 게르만주의의 어조를 완화하자 반자유주의적인 게르만계 프티부르주아는 그들을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경제를 과거의 족쇄로부터 풀어놓기 위해 고안된 자유방임주의는 미래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을 불러들였다. 귀족계급 압제의 시녀라는 죄목으로 학교와 법정에서 발본색원되었던 가톨릭교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종교로 복귀했는데, 그들 생각에 자유주의란 곧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란 유대인을 의미했다."(172)


"자유주의가 실패하자 유대인은 희생양이 되었고, 그 희생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민족의 고향으로 도피하는 시오니즘이었다. 다른 민족들은 혼란이라는 무기로 오스트리아 국가를 위협했지만 시오니스트들의 무기는 분리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쪽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모으기는 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냈다. 자유주의는 낡은 정치질서를 해체하기에는 힘이 충분했지만, 그 해체 덕분에 풀려나서 관대하지만 융통성 없는 자유주의의 후원 하에서 새로운 지방분권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세력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다. 새로운 반反자유주의적 대중운동─체코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오니즘─은 아래로부터 솟아올라 교육받은 중산 계급의 신탁통치권에 도전하여 그 정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역사의 합리적 구조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173)


"건조하고 합리적인 자유주의 정치와 대조적으로 이런 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더 예리한 조성(調性)'(the sharper key)이라 알려지게 된, 즉 자유주의자의 신중한 스타일에 비해 더 무모하고 더 창의적이고 감정의 삶을 더 만족시키는 정치적 행동양식을 개발했다. 새로운 조성의 대표적 대가 두 명─범게르만주의의 게오르크 폰 쇠너러(Georg von Schonerer, 1842-1921)와 기독교사회당의 칼 뤼거(Karl Lueger, 1844-1910)─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감을 주고 그의 정치적 모델이 된 인물이었다. 세 번째 인물인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히틀러의 희생자들을 위해 이교도의 공포정치에 맞서는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한 정치적 답변을 제공하게 될 분야의 개척자였다. 그리하여 비엔나의 지식인들이 20세기의 고급문화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기도 전에, 그 문화의 자식 세 명은 합리주의 이후의 정치를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174-5)


"민족주의 학생연대가 범게르만주의자 쇠너러를 고대했다면, 사회주의적 반유대주의자 쇠너러는 수공업자 운동이 고대했던 존재였다."(185) "유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누구보다도 더 '국가적 국민'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 단위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슬로바키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처럼 소위 비역사적인(unhistoric) 민족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시민적이고 경제적인 것으로서, 게르만인이나 체코인처럼 하나의 민족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런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민족 국가의 초超민족적 국민"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비극적이게도 "자유주의 신조 그 자체의 운수가 유대인들의 운명과 뒤엉켜버렸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왕국의 핵심 권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유대인들은 모든 나라의 이름으로 공격당했다."(186)


"칼 뤼거는 로제나우 기사(쇠너러)와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자유주의자로 출발했으며, 둘 다 자유주의를 처음에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다가, 결국에는 반자유주의 신조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배교자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반유대주의를 이용하여 주민들 가운데서 똑같이 불안정한 분자인 기능공과 학생층을 동원했다. 그리고─우리의 논의 목적에는 이것이 결정적인데─두 사람 모두 의회 바깥에서의 정치 기술, 폭도와 오합지졸의 정치 기술을 개발했다."(191) "가톨릭은 뤼거에게 민주주의, 사회 개혁, 반유대주의, 합스부르크 충성심이라는 제각기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던 서로 이질적인 반자유주의 요소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거꾸로, 뤼거는 그 산산이 부서진 구성요소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현대의 세속 세계에서 제 갈 길을 찾을 만큼 강력한 조직으로 만들어낼 정치적 지도력을 가톨릭교에 줄 수 있었다."(199)


"자유주의의 정치적 토대가 부식되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 그 사회적 기대치가 실현되지 못함에 따라 자유주의 문화에 몰두했던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구해내기 위한 새 토대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테오도어 헤르츨이 있었다. 그는 슈멜링의 합리주의적 전제("지식이 자유롭게 하리라") 위에서가 아니라 창조적 환상, 욕구와 예술의 꿈 위에서("욕구가 자유롭게 하리라") 자기 민족을 위한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을 찾았다. 헤르츨은 시오니즘을 제창하여, 자유주의 주도권의 시대에 좀 얄궂게 어울리는 기념비이자 쇠너러와 뤼거가 시작한 창조적 파괴의 위압적 작업에 어울리는 속편을 구축했다." "그가 자유주의를 뛰어넘는 환상의 정치학에 도달한 것은 쇠너러와 뤼거 같은 사회적 적대감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개인적 좌절과 심미적 절망감을 통해서였다."(207)


"알렉스 바인은 헤르츨이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점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드레퓌스 대위의 고발이 그 절정이었음을 밝혀냈다. 여러 사건─반유대주의 연극, 장교가 유대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다가 죽은 사건, 반유대주의 시위, 명예훼손 소송, 파나마 스캔들─을 차례차례 겪으면서 헤르츨은 보도하고, 성찰하고, 점점 더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헤르츨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뤼거와 반유대주의자가 오스트리아의 모든 선거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각각의 자유주의 질서의 운명에 대한 그의 우려는 한 점에서 만났다. 그 과정에서 그의 사고 속에서 유럽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한 징후─이교도들의 좌절감을 배출하기 위한 벼락─이던 '유대인 문제'는 이제 희생자들이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로 변했다."(220-1)


헤르츨은 "꿈과 백일몽과 무의식과 예술을 분열적 사회 현실을 극복하고 형성하는 힘의 근원으로 긍정했다."(228) 헤르츨이 생각하는 정치 운동의 개념에서는 목표의 내용이 아니라 행동의 형태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의 이념은 이와 유사한 심리적 추상주의를 반영한다. 거기에 유대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모든 국가는 똑같이 "아름답다"고 그는 결론짓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개별적 장점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국가가 국민에게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덕목 때문이다. 모든 국가는 "개인들의 최고의 어떤 것[자질]으로, 즉 충성심, 열정, 희생의 기쁨과 이상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태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적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에너지를 조직하는 수단일 뿐이다."(231) 헤르츨이 구상하는 약속의 땅은 사실은 유대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유주의 유토피아였으며, "헤르츨의 시온은 현대 자유주의 유럽의 문화를 환생시켰다."(240)


"<꿈의 해석>은 저자의 이성과 감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자신의 업적 전체의 정초석이 되는 가장 중요한 과학적 작업이며,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고통스러운 삶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 저작으로 간주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신국> 속에 엮어 넣는다거나, 루소가 <참회록>을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부수적 플롯으로 통합시킨다고 상상해보라.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의 구조를 엮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런 식이다. 외견상 드러나는 과학 논문 방식의 구조에서, 그는 독자들을 위쪽으로, 체계적인 장을 따라 인도하여 심리학적 분석의 더 복잡한 수준으로 끌고 올라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적 서술에서는 독자를 아래쪽으로, 중요한 꿈을 차례로 이으면서 파묻힌 자신의 자아의 지하 후미진 곳으로 끌고 내려간다."(255-6)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룰 때도 프로이트는 그가 왕이라는 사실에 무관심하다. "니체 및 다른 현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프로이트도 오이디푸스의 모색을 도덕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그 제왕적 주인공이 행동하는 동기가 테베에서 재앙을 물리친다는 정치적 임무가 아니라면, 즉 공화국이라는 무대가 없다면 구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오이디푸스의 죄책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처벌하려는 노력은 공적인 문제이고 공화국의 질서를 재건할 책임에서 나온다. 그에 비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는 왕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모색하는 사색가이다. 정치를 해체하여 개인의 정신적 범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개인적 질서를 재건하지만 공적 질서는 손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헝가리 꿈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왕으로까지 승격시켰지만, 여전히 정치라는 재앙으로 괴로워하는 테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275-6)


"고전 문화와 고고학적 발굴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던 프로이트처럼 클림트도 본능적인 삶, 특히 에로틱한 삶의 발굴지로 건너가는 은유적 다리 역할을 고전적 상징에 맡긴다." "클림트는 여성을 관능적 존재로 보았고, 여성의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의 잠재력을 철저하게 개발했다. 끝없이 그려댄 소묘에서 클림트는 여성성의 느낌을 포착하려고 애썼다."(307) "클림트는 현대 인간에게 거울을 들이대면서도 쾌락을 부여하는 에로스의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도덕주의적 문화의 구속으로부터 관능성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에 수반된 심리학적 문제들을 노출시켰다. 에로스를 탐험하며 즐거워하던 남자는 '촉수를 가진 여자(la femme tentaculaire)'에게 휘감겨 버렸다. 새로운 자유는 불안의 악몽으로 변하고 있었다."(310) "니체의 시인처럼 클림트의 지혜도 삶의 신비스러운 전체성을 긍정하기 위해 고통을─더 나아가서 욕망 그 자체를─꿈속으로 흡수해들인다."(316)


클림트는 후반기에 "우의적 그림이나 인물화로 방향을 돌렸을 때,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서 고뇌하는 요소를 약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치장하기까지 했다. 혹은, 자신의 성취를 좀더 긍정적으로 단언하기 위해 심미적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그 작품들이 가진 고통의 잠재력을 중화시켰다." <다나에>에서 클림트는 "다시 한번 그리스 신들을 불러내 현대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클림트의 이 마지막 그리스 여성은 선배들인 아테나, 니케, 히게이아 혹은 복수의 여신들, 자웅동체적인 남근 같은 여성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클림트는 여성 공포증을 극복한 것 같다. 충족된 욕망의 모습이 <다나에>만큼 현란하게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그녀의 살은 제우스의 황금빛 사랑의 빛줄기에 물들어 벌꿀 같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다. 클림트는 이제 더 이상 욕구불만 때문에 위협적으로 변한 여성이 아니라 감각이 충족되어 더 없이 행복하게 웅크리고 있는 여성에게서 평화를 찾았다."(365)


"심리적-철학적 전복자로서 사회와 교류하려다가 상처 받고 움츠러든 클림트는 1908년에는 이미 링슈트라세에서 처음 경력을 시작할 때와 같은 화가-장식가의 역할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의미의 연원으로서의 역사 및 표현의 올바른 양식인 육체적 사실주의로부터의 단절은 역사와 자연에 대한 기대를 배반당한 계급과 그에게 영원한 사실로 남았다. 그는 역사, 시간의 영역은 이미 지나쳐버려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심미적 추상과 사회적 체념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투쟁했다. 하지만 흔히 그리스 신화를 도상학적 안내자로 삼는 분리파의 내면 항해(voyage interieur)에서 클림트는 심리적 경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다. 클림트가 심미적인 차원에서 비엔나 상류층 세계의 섬약한 둥지 속으로 물러나면서 포기한 탐험을 새로운 깊이까지 끌고 나가는 과제는 더 젊은 정신인 표현주의(Expressionist) 운동의 몫으로 남게 된다."(367)


'교양과 부'를 지닌 비엔나 신흥 상류계급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원 숭배는 정원을 자연의 세련된 적용으로 보는 영국식 낭만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급진적 고전주의로 방향을 돌렸다. 정원은 건축으로, 집의 연장으로 구상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경향은 자부심 강한 자수성가형 인간을 이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쇠퇴하고, 전前산업시대의 사회적 모델을 선호하는 추세와 결부되어 있다. 그 모델은 18세기의 귀족이거나 비더마이어 시대의 시민이었다. 미적 측면에서 보자면, 형식주의와 새로운 정원 숭배 현상이 아르누보로부터 아르데코로, 유기체적이고 유동적인 형태에서 결정체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이행되었다. 1890년대에는 '분리파'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본능적 진실을 찾는 역동적 탐구에 참여하던 예술가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발견한 불안정한 보물에서 눈길을 돌려 엘리트들의 일상생활과 가정환경을 미화한다는 더 소박하지만 소득이 많은 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436)


유토피아적 아름다움의 대체물인 정원을 멀리하고, 혼란스럽고 무차별적이지만 포용적인 황무지의 진실을 추구한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서로가 똑같이 위험하고 외로운 작업, 해방이면서 동시에 파괴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이 자라난 심미적 문화와 세기말의 첫 비엔나 모더니스트들의 작업에 반대하여 저항했다. 이들은 그 문화가 결정적인 추진력을 잃은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쿤스트쇼에서처럼 그것이 상류 부르주아의 지배적 관습 문화가 되는 그 순간에 그런 저항을 벌였다. 미술에서의 클림트, 문학에서의 호프만슈탈, 건축에서의 오토 바그너는 교육받은 상류 중산계급이 그 미적 문화를 확장하면서 씌운 정치적 권력의 고삐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계급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예술가들, 코코슈카나 쇤베르크 같은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을 현실의 본성을 은폐하는 문화적 화장술로 사용하기를 거부한 합리주의 비평가들과 연대했다."(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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