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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평전 -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트리스트럼 헌트 지음, 이광일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1월
평점 :
상인과 제조업자를 겸한 엘리트층을 독일어로 '파브리칸트Fabrikant'라고 한다. 엥겔스가 태어나고 자란 파브리칸트들의 세계는 "제조업과 상업,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가정에 충실한 일상으로 꽉 짜인 세계였다."(64) 엥겔스의 고향인 "부퍼탈에 와본 사람들은 (오염물질을 부퍼강으로 마구 흘려보내는) 공장 말고 다른 것에도 주목했다. "바르멘과 엘버펠트는 둘 다 종교적 감수성이 매우 강한 곳이다. 교회들은 거대하고 출석률도 높다. 교회마다 성경과 선교사는 물론이고 주보週報 같은 것을 발행하는 협회도 있다." 당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면 교회 첨탑이 공장 굴뚝 사이로 자리를 다투듯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엥겔스에게 부퍼탈은 '몽매주의자들의 시온 산'이었다. 바르멘과 엘버펠트를 지배하는 정신은 과격한 경건주의였다."(66) "근면과 부는 신의 은총의 징표였으며, 가장 열렬한 경건주의자는 대개 가장 성공한 상인들이었다. (엥겔스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엥겔스2세도 그런 사람이었다."(68)
당대 독일은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의 낭만적 충동이 휘몰아치고, 헤르더가 주창한 민족 이념을 계승한 시인 노발리스(1772-1801)와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의 열정이 분출하는 시기였다. 피히테는 "프랑스 치하에서 고통받는 베를린 청중들에게 개인도 민족과 하나 됨을 통해서만 완전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민족 자체가 하나의 영혼과 하나의 목적을 지닌 아름답고 유기적인 실체라고 선언했다."(78)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에 가슴이 벅찼던 엥겔스는 1836년에 쓴 짧은 시에서 "활의 명수인 스위스의 영웅 빌헬름 텔,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 부용Bouillin, 중세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에서 사악한 용을 죽인 지크프리트 같은 낭만적인 영웅들을 찬미했다." 엥겔스는 평생에 걸쳐 문화적 애국주의를 간직했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 연대를 주창하고 조국에서 추방당했을 때도 영웅적 운명의 세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81)
낭만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엥겔스의 정치 의식화는 "브레멘에서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청년독일파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주세페 마치니(1805-1872)가 결성한 청년 이탈리아당에서부터 귀족주의적인 토리당 분파로 존 매너스 경이 주도한 청년 영국파, 청년 아일랜드 운동의 공화파 서클까지 다양한 청년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운동들은 하나같이 낭만주의적인 민족 이념을 중심으로 애국적 열정의 부활을 주창했다."(88) 엥겔스는 "문학적 차원에서는 영웅 신화에 여전히 끌렸지만 독일의 정치적 미래는 중세에 대한 봉건적 향수로 후퇴하는 차원이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청년독일파의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90) "엥겔스는 헤겔이 1822-23년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사후에 출간한 <역사철학 강의>를 접하고 거기 제시된 합리적이고 정연한 역사의 발전 과정에 곧바로 매료됐다."(106)
헤겔 철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독법은 보수적인 입장이다. 역사가 이성이 자유로 향하는 개선행진을 총괄하는 과정이라면, 어떤 단계 이후의 시기는 전 단계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시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헤겔이 국가를 "그 법률체계와 정치구조를 통해 이성과 자유를 토대로 한 특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살아 있는 실체로 격상시킴으로써 국가의 목표가 극적으로 고양됐다. 국가는 이제 사적 소유권을 보호하고, 영토를 방어하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필요악이 아니었다. 국가는 훨씬 고상한 목적을 갖게 됐다. 절대이성의 구현과 같은 것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베를린 궁정 사람들도 헤겔 철학 중에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현상학 부분은 잊었을지 몰라도 국가의 권위를 높여주는 그런 이론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용하다는 것은 잽싸게 간파했다."(117-9)
급진파는 스승의 저작에 대해 좀 더 진보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은 프로이센의 현실─권위주의의 확대, 종교적 규제, 헌법 제정 가능성의 상실 등등─을 접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기리기 위해 자유의 나무를 심기도 했던) 스승이 그런 상태를 진실로 이성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로 믿었다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엥겔스가 보기에 "정신이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모든 기성 정치 체제와 그 지배적인 의식 형태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같이 가는 것이었다. 각 단계는 그 자체 안에 포함된 그런 긴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약화되면서 종국에는 이성과 자유가 지배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따라서 변증법적 긴장을 중시한 급진파에게 "불변의 영원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문명은 나름의 현실과 철학과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정되고 수렴될 운명을 지닌 것이었다. 나아가서 이는 헤겔 이전의 철학은 물론이고 헤겔 자신의 사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였다."(119-21)
1842년 10월, 자원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훈육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은 "아들을 멀리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는 것이었다. 거기서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의 인근 샐퍼드 투자 상황을 체크하면서 영국식 장사 수완을 배운 다음 돌아와서 엥겔스키르헨 공장 일을 돕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굉음 요란한 공장과 무뚝뚝한 상인들이 많은 면직도시Cottonpolis에서 일하다 보면 분명 더 과격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역시 헛된 기대였다. 맨체스터로 가는 길에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만나게 된다."(140) 종교적 유산을 내버리고 사회주의 인간 이데올로기로 그 자리를 메운 "헤스의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이론화 작업은 청년 헤겔파를 공산주의적인 방향으로 끌어갔다." 1842년 가을, 엥겔스에 따르면 일부 청년 헤겔파(본인도 포함시켰다)는 "정치적 변화를 더욱 촉진시켜야 한다며 공유재산에 토대한 사회 혁명이야말로 일반 원칙에 부합하는 유일한 인류의 상태라고 선언했다."(153)
"엥겔스에게 사적 소유란 정치경제학의 모든 자질구레한 측면까지(예를 들면 임금, 교환, 가치, 가격, 화폐 등등)를 망라하는 개념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는 맨체스터에서 두 눈으로 목격했다. 엥겔스는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전제인 동시에 제거 대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적 소유의 폐기 및 그에 따른 개인적 탐욕의 제거는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역사의 종언 및 공산주의의 도래로 귀결된다." "파리 센 강 좌안左岸 아파트에 살고 있던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에 매료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91)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특출한 재능을 과시하면서 청년 헤겔파의 '환상'과 '이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허튼소리'를 '살아 있는 현실'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이렇게 정치철학과 물질적 현실을 결합함으로써 이후 엥겔스의 많은 논쟁적인 저작의 선구가 된다."(193)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는 "정치적 설득을 목표로 한 유연한 선전 작업이었다. 풍경, 사람들, 산업 등등 모든 부문에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부여했다." "맨체스터의 다양한 경제 분야별 차이─면방적공장 외에 유통, 서비스, 건설, 소매업 등등─는 슬며시 무시되고 노동과 자본이라는 흑백 대립이 도시의 핵심으로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노동계급 시민사회─노동자들에게 기술교육을 제공하는 기계공 연구소나 친선모임, 노동자 클럽, 정당, 각종 기관의 부설 교회 등등─도 전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엥겔스는 오로지 역사적 소명을 성취하고자 열망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획일적인 모습만을 제시한다."(207) "후일 주류 마르크스 사상으로 여겨지는 것 가운데 상당 부분─계급 분리의 본질,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정성, 부르주아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시각,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피성 등등─은 엥겔스의 이 탁월한 저서에서 이미 최초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211)
"파리는 '공산주의자동맹' 형성의 무대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의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합류한 정치적 도구였다. 여기서 엥겔스는 조직정치의 음습한 기술을 배웠다. 파리의 여인숙과 공장을 누비면서 엥겔스는 세계 차원의 공산당으로 정점에 도달할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 활동─표 조작에서부터 절차상의 술책까지─은 물론,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논쟁적인 책 <공산당 선언> 집필을 마르크스와 함께 했다."(216) "두 사람의 우정의 첫 결실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1845)라는 제목의 팸플릿이었다. 이 짧은 책은 맨체스터와 파리에서 보낸 시절 이후 청년 헤겔파의 관념론적 잔재에 대한 두 사람의 거부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새로 수용한 유물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역할을 했다."(221)
"바이틀링의 원시적인 공산주의 말고 유럽 대륙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는 마르크스·엥겔스에게 또 하나의 위협이 되는 것은 프랑스 철학자 프루동을 중심으로 한 '진정眞正' 사회주의 또는 '철학적' 사회주의였다." 마르크스는 "프루동 철학의 프티부르주아적 성격, 공상적인 노동 교환 계획,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수행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륀과 프루동의 '진정사회주의' 개념이었다. 진정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소명을 무시하고 공산주의가 요구하는 극적인 사회적 도약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철학이었다. 그들의 접근법은 "부르주아 사회의 존재, 즉 그에 따르면 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체제를 기정사실로 놓고 출발했다."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프티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을 보전하려는 편협한 시도는 공산주의의 최종 승리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244-6)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독일노동자교육협회 런던 사무국에서 출간된 이후 '침묵의 음모'에 밀려 묻히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동맹 회원 몇 백 명은 아마도 이 소책자를 읽었을 것이고, 영어 번역판도 1850년 하니가 운영하는 차티스트 운동 계열 신문 <붉은 공화파>에 연재됐다. 그러나 책은 많이 팔리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현실 역사가 <공산당 선언>을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8년 2월 24일 아침,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파리에 있는 도심 별장에서 걸어 나오다가 얼굴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혁명의 냄새가 떠도는 것이 느껴진다"고 단언했다. 그날 오후 파리의 카퓌신 거리는 피로 물들고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은 바리케이드용으로 베어졌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다시 시작된 프랑스 군주제는 와해됐다."(26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희망적인 시각으로는 1848년의 놀라운 사건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교과서처럼 보였다. 유럽의 낡은 정치·법률 제도는 급변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맞지 않았고, 따라서 새로운 경제 현실에 맞춰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산업화라고 하는 토대와 봉건적인 상부구조 사이의 불일치가 커짐에 따라 다음 단계로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혁명이 올 것은 분명했다. 중산층이 제 손을 더럽히며 구세계를 제거한 다음, 즉 부르주아 혁명 다음 단계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1848~49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촉진한 요인은 경제 불안에서부터 민족 통일의 열망, 왕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도입하고자 하는 공화파의 요구 등등 다양했다." 지역·국가별로 노동자들의 지지 정도, 급진파 지도부의 존재 여부, 반동세력의 반격 수준 등에 따라 상황은 극심하게 요동쳤고, 1848년 혁명은 결과적으로 원래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267-9)
"이제 마르크스는 소심한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그르쳤다"고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노동자를 위한 독자 정치노선을 발전시켜갔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1848년의 노동계급-중산층 동맹은 이제 확실히 재조정을 거쳐야 할 시점이 됐다. 프롤레타리아 지배를 곧장 도입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294)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독일 제국 헌법 쟁취 투쟁>을 집필했다. 여기서 "1848년의 수확 전체를 허사로 만들었다는 혹평을 받은 '빌어먹을 악당들'은 바로 부르주아지였다." 유럽의 대전환이 실패로 끝난 이후 새로운 2단계 모델을 재고해야 하는 두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었다. "1848년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비켜간 영국 수도 런던은 이주민과 망명객, 혁명가, 공산주의자들의 피난처였다. 유럽 대륙의 혼란에서 멀찍이 비켜서 있던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보수적인 영국은 이후 40년 동안 엥겔스의 고향이 된다."(305-6)
"다시 맨체스터로 돌아온 엥겔스는 굴욕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로 들어갔다. 여기서 면사綿絲 장사로 보낸 20년은 낙담과 좌절로 점철된 희생의 시기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기간을 '엥겔스의 질풍노도 시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엥겔스가 그렇게 된 것은 상당 부분 마르크스 책임이었다. 1850-70년 엥겔스는 자기 인생에서 의미 있는 많은 것들─지적 탐구, 정치 활동, 마르크스와의 공동 작업 등등─을 포기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대의를 위해 희생했다. 가히 영웅적인 행동이라 할 만했다. 마르크스는 위로조로 "우리 둘은 동업자 관계야. 내가 이론적인 부분과 조직 쪽을 맡고 있는 거지"라고 설명했다. 반면에 엥겔스의 역할은 장사를 통해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선 마르크스와 그의 늘어나는 식구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마르크스가 돈 걱정 없이 <자본론> 집필에 전념하도록 돕는 것이었다."(310)
엥겔스의 헌신은 자신의 경제적 안락함과 철학을 연구할 시간, 심지어 명예까지 모두 내놓은 것이었다. 엥겔스가 <자본론>에 한 기여 역시 단순히 통계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을 먼저 듣고 방향을 잡아주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마르크스와 가정부 헬레네 렌헨 데무트 사이에 태어난 프레디 데무트 문제도 엥겔스는 기꺼이 떠안았다. 데무트의 출생증명서에는 아버지 난이 공란이었는데, "이때 비공식적으로 친부임을 인정해준 사람이 엥겔스였다. 마르크스 부부의 결혼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좀 더 큰 차원에서는 정치적 대의를 위해 (영국에 망명 온 혁명가들은 섹스 스캔들을 빌미로 정적을 매장시키는 데는 선수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아들이 자기 세례명('프레더릭'은 '프리드리히'의 영어식 표기)을 쓰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엥겔스의 명예는 훼손됐다."(340)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엥겔스가 식견을 펼칠 무대를 제대로 찾았다.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발행되는 종급 석간신문 <팰맬 가제트>에 군사평론가로 소개를 해준 것이다." 엥겔스는 양군이 자브뤼켄 근처에서 첫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는 사실을 정확히 예측해 특종을 만들어냈다. "엥겔스의 권위가 더욱 빛을 발한 것은 1870년 8월 프랑스군이 스당에서 패하고 보나프르트 황제가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였다. 이후 엥겔스의 예언이 계속 맞아 들어가면서 마르크스 일가는 그를 '참모부General Staff'나 짧게 '장군The General'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됐다."(371-2) 이를 계기로 엥겔스는 식민주의의 본질에 관해 좀 더 폭넓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 말 어느 시점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연대와 민족해방이 공동의 운명이라는 믿음을 서구의 '유서 깊은 문명화된 민족들'로부터 비유럽권 민족들까지 확대시켰다."(376)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엥겔스가 제공한 빅토리아 시대 공장 생활에 대한 끔찍하고도 살벌한 세부 묘사로 장식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사지를 잘라 파편적인 인간으로 만들었고, 그를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켰으며, 그가 하는 노동의 모든 매력을 파괴해 혐오스러운 고역으로 변질시켰다." 마르크스가 '자본 축적'의 산업 과정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들은 노동자의 삶의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변질시키고 그의 아내와 자식까지 자본이라는 괴물의 수레바퀴 밑으로 집어넣는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오랜 세월 <자본론>을 구상하는 동안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자금, 이런 신랄한 산문을 가능하게 해준 돈은 궁극적으로 바로 그 노동력 착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착취 대상은 자본이 괴물인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 공장 노동자들이었다."394) 엥겔스는 마침내 1869년 6월 에르멘과의 동업자 계약을 끝내고 지긋지긋한 자본가 역할을 청산했다.
런던으로 이주한 엥겔스는 "리전트 파크 로드 122번지 서재에서 얽히고 꼬이고 분파로 갈려 갈등하는 운동 진영을 조율했다." "이제 맨체스터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만큼 엥겔스는 마르크스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리지와 터놓고 동거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정치 게임에 다시 복귀해 평생 동지인 마르크스와 손잡고 공산주의의 대의를 위해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402-3) 두 사람은 급속히 산업화되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태동하는 사회주의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옹호하는 논쟁적인 팸플릿 <프랑스 내전>을 저술했는데, "유럽 전역에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됐고 증쇄를 거듭할 정도로 많이 팔린 이 소책자는 음험한 인터내셔널이 세계 노동계급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인식을 굳혀놓았다."(418)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터내셔널에 침투하려는 바쿠닌의 행동보다 "더욱 위협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제시한 이념의 힘이었다. 바쿠닌이 주창하는 무정부주의는 완벽한 자유와 삶이라는 관념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바쿠닌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는 기존의 불공정한 부르주아 체제 대신 인간을 질식시키는 독재적인 국가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바쿠닌은 산업시대의 낙오자들인 빈민, 소작농, 룸펜프롤레타리아들에게 "구성원 각자가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소규모의 자율적 공동체로 조직된 사회라고 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정치 노선으로 보면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권위를 즉각 폐기하는 운동을 의미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는 사회혁명의 결과로서, 그리고 일시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치면서 저절로 사라질 것(소멸)이라고 한 것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노선이다."(422-3)
"엥겔스는 사냥을 주도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총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순간부터 그는 중앙집권화된 정책 결정 기구로서의 인터내셔널의 근간을 흔들려는 바쿠닌 일파에 대한 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군사적인 마인드를 가진 엥겔스 입장에서는 인터내셔널을 반反권위주의적인 노선에 입각해 "단순히 연락과 통계 정리를 위한 사무소"로 만들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야심은 공산주의의 대의를 깡그리 무장해제할 수 있는 것으로 비쳤다. 또 엥겔스는 바쿠닌의 안티테제를 마르크스의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으로 간주했고, 따라서 또 다른 권력 중심은 제거돼야만 했다."(424)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이미 인터내셔널을 위협할 정도로 깊이 침투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쿠닌과의 노선 투쟁에서 승리했으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인터내셔널은 미국에서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4년 뒤 해체됐다."(426)
한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운동권에는 혁명의 양상을 둘러싼 "두 가지 사상 계파가 있었다. 하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노동해방단 일파로 마르크스주의 정통 노선을 따라 러시아는 서구 유럽의 산업화, 노동계급 빈곤화, 계급의식 발전 노선을 따라야만 프롤레타리아 혁명(러시아의 농민 대중도 합세하게 된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접근방식은 나로드니키(러시아어로 '인민주의자들populists')가 채택한 것으로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저술에 큰 영향을 받아 원시적인 농촌 공동체(러시아어로 옵시나Obschina)라는 독특한 전통에 비추어 러시아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길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구식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사태를 겪지 않고도 토지 공동 소유, 공동체적 생산관계,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농업 등을 토대로 공산주의 체제를 훨씬 빨리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444-5)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직면한 역사적 난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엥겔스는 초기 공산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의 경험을 비교했다. 오언이 1820년대 뉴래너크 공장에 고용한 노동자들의 경우 러시아 옵시나 소작농과 마찬가지로 "몰락해가는 공산주의 소수 집단의 제도와 관습을 따랐지만" 사회주의 원칙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보여주지 못했다. 러시아는 코뮌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더디고도 고통스러운 역사의 행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엥겔스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예언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에서 "50만 지주와 8000만 소작농을 부르주아 차지借地 제도가 통용되는 새로운 계급으로 바꾸려면 끔찍한 고통과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역사는 가장 잔인한 여신이다. 역사의 여신은 수많은 시체더미를 밟고 전진한다. 전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경제적 발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대목이다."(448)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 엥겔스는 과학적 발전에 헤겔을 접목하고자 했다. "과학 탐구의 3대 영역─에너지 보존, 세포 구조, 다윈식 진화론─에 주로 의존하면서 엥겔스는 후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세 가지 법칙을 뉴턴의 3대 운동 법칙 스타일로 제시했다. 첫째 법칙은 '양量·질質, 질·양 전화轉化의 법칙'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질적 변화는 물질의 양적 변화 또는 갈등 누적에 따르는 운동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 법칙은 '대립물 상호침투의 법칙'으로 헤겔 변증법을 충실히 따라 "안티테제의 두 극은 긍정과 부정으로서 대립된 상태인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 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침투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세 번째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어떤 현상의 내적 모순은 다른 체계, 즉 대립물을 낳고, 이 대립물은 다시 목적론적 과정의 일부로서 부정되어 좀 더 높은 단계의 발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469-70)
"바쿠닌과 프루동이 그랬던 것처럼 뒤링은 마르크스·엥겔스가 제시한 중앙집권주의와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대신 점진주의적인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여기서 노동계급에게 구체적인 물질적 이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477) <반反뒤링론>에서 엥겔스가 진정으로 성공을 거둔 부분은 "자연과학 연구를 통해 풍부하게 살까지 붙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방법론을 자본주의에 적용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법칙은 이제 생물학, 화학, 진화론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 내부의 긴장을 설명하는 좋은 도구가 됐다."(479) 엥겔스는 일련의 압박이 누적되면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긴장, 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상부구조의 괴리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이어진다고 그는 단언했다."(482)
"루카치를 필두로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를 거치면서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엥겔스가 1880년대에 정식화한 것은 결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유물론이고, 그의 변증법이며, 그의 과학주의이고, 마르크스와 헤겔을 그의 방식으로 잘못 결합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루카치는 "엥겔스의 변증법 설명에서 생기는 오해는 크게 봐서 엥겔스가─헤겔의 잘못된 선례를 따라─변증법을 자연에까지 확대 적용한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엥겔스가 일부러 마르크스의 이론을 왜곡했다거나 마르크스가(!) 반대의견을 말하기를 거북해할 만큼 두 사람의 우정이 탄탄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를 완전히 잘못 파악한 것이다." "마르크스 본인도 1870년대에 다시 헤겔 저작에 관심을 가졌고, 변증법이 자연과 사회에 공히 적용된다고 처음 주장한 것도 그였다."(484-6)
1883년 이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원고를 교정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엥겔스식의 편집의 면모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이 제3권의 "논란 많은 제3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력 절감 기술의 발달로 실제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여력이 점차 줄기 때문에 이윤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이윤율 저하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의 취약성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원고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요"라고 했는데 엥겔스는 좀 더 단정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라고 표현했다. 작은 변화지만 자본주의의 시스템적 "위기"나 "붕괴"를 통해 공산주의의 도래를 주장하고 싶어하는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불도그가 부분적으로나마 자의적인 가필을 한 것은 오로지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해서였다."(492)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19.7퍼센트를 득표한 독일사회민주당SPD이 "보통선거권과 도시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비례대표 투표 시스템까지 주장한 것은 정치 지형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표시였다. 엥겔스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론도 그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1848년 혁명의 영웅이자 줄곧 유혈 폭력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고자 했던 엥겔스는 이제 자신의 정치 전략을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게 가다듬었다. 유럽 경제가 산업혁명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국가 카르텔, 식민지 착취, 대형 금융기관 등의 지원이 따른다─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건한 체제임이 입증됐다."(546) 엥겔스는 한때 스스로를 기요틴을 만지작거리는 프랑스 혁명가 모습으로 그렸지만 이제는 "기습의 시대, 의식화된 소수가 의식 없는 대중을 이끌고 나가는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했다.(548)
"엥겔스는 바리케이드와 무장 봉기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지만 '합법적인 수단에만 의존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고 늘 조심스럽게 사회주의자들의 도덕적 무력 사용권을 옹호했다." "이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엥겔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만행과 SPD의 개량주의 및 정치적 점진주의 노선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549-50) 엥겔스는 참정권 확대 전략으로 노동자들의 표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자들은 1790년대의 프랑스 전쟁이 혁명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처럼 유럽 대륙의 전쟁이 유럽의 노동계급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급진적 의식을 각성시킬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알자스로렌을 합병하고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민족주의적 적대감이 고조된 이후로 엥겔스는 전쟁이 민족주의를 격화시켜 노동자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553)
엥겔스는 기성관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고 자신이 내세웠던 입장에 대해서도 종종 다시 생각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란, 시대에 관계없이 일정한 형태로 고착돼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다른 모든 사회현상과 마찬가지로 계속 변화하고 변형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말년에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 비슷하게 과학의 근본적인 오류 가능성을 경계하는 입장을 보였다. 엥겔스는 "무조건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지식도 결국은 우리가 일련의 오류를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끝없는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무엇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복음으로 생각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1895년 8월 5일 그가 사망한 후, 플레하노프와 레닌은 제각각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마르스크주의를 완벽한 이론체계이자 변경 불가능한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 혁명 과업에 매진했다.(5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