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기우기(附記雨期)





쏟아붓던, 당신 생각이 잠깐 그치다


검은 일기장 위 흘러가던 문자들이 잠시 반짝거리다


꿈틀 고개 내미는 추억의 지렁지렁, 사랑 아니던 날들보다


사랑이던 날들이 더 슬퍼서 구름은 신발처럼 무거워진다


약은 왜 달게 만들지 않는 것일까, 물었던 물길로


걸어들어가면, 기억이 기억하는 수많은 답장보다


내 부고가 먼저 당신에게 가닿을 것 같은데. 둥기둥기


타악기 같은 두통이 혼자 비 그친 여름을 건너가다


나는 여기 비 맞은 유리창처럼 서서 홀로 땀을 흘리다.


(P.65)






플라시보 당신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 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못 적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스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러움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발 다가서면


또 한발 도망간다던 당신 걱정처럼 참 새카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P.31)






각성





어느 순간 그릇이 손을 이탈하여 깨어지는 일,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나는 비로소,


오늘까지 보던 것을 이제 오늘로 끝내는 일, 부레 없는 물

고기가 되어,


돌아보면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나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고,


그리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싶던 그릇의 마음을 헤아려보

는, 그런 온순한 일 따위는  아니고,


가령 그것은 어둔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번개의 일, 손목

이라도 그어,


불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비를 맞고 있다


어른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나는 여러 번 기도했었다


그런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오늘, 나는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어쨌든 비는 구름의 각성


(P.82)








/ 천서봉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천서봉(지은이)의 말



불행이 기다릴까 자주 버스에서 내리지 못했다.
존재를 증명해내는 불행의 기이함에 끌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 가치는 종종 무의미했으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겨우 두번째 시집을 낸다.

의미를 두자니 변명에 가까웠고 여백으로 남기자니 공허했다.
나의 말들은 웬만해선 잘 뭉쳐지지 않았고 그래서 멀리 던질 수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날아가는 나비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고등어
또 발목이 사라져버린 사람까지,
그 유령 같은 이음동의어들을 간신히 한데 모아두었다.
이제
가운데 선을 긋고 오 엑스로 나누어지는 게임,
그 게임에서 나는 무리를 버리고 혼자 그 선을 넘어온 것만 같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게,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가볍게,
부디 목요일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나의 생일 다음날을 골라 떠나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

2023년 여름














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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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책장에 체 게바라 평전이 보이고

청년 전태일이 보이고

봉두난발 전봉준이 보인다

죽은 그들이 그렇게 모여 있다

혁명은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다

남이 만든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함께 사는 것이다


(P.15)





그저, 안녕




죽고 사는 일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구나

네가 벗어놓은 신발 속에

따뜻한 어둠이 가득 찼다


너의 맨발은 너무나 선명해

신들이 벗겨놓은

비명 같았다

함께 멱감던 시냇물도 말라버리고

너를 데려간 깊은 소도

울음을 멈춘 지 오래


오래전 내 기억을 다녀간 것은

너의 맨발

짫은 여행을 마친

햇살 한줌


(P.58)





지렁이




사는 것은 방향이지

노력이 아닐지 몰라

온몸을 유언으로 남겼다


잠든다는 것은 평화

당신이 가져간 평화만큼

지상에 그늘이 졌다


검은 개미들이

당신이 향했던 곳으로

당신을 나르고 있다


(P.112)




/  윤관 시집, <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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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어 - 양희은 에세이
양희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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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천천히 시간 될 때마다 읽어도, 구절마다 마음에 와닿고 힘이 되는,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바람같은 산문집. ˝바람처럼 스치면서 지나자. 한 번 불어가는 바람이 되어 머물지도, 되돌아가지도 말자.˝ ˝결국 남는 건 마음을 나눈 기억이다. 마음과 마음이 닿았던 순간의 기억이 우리를 일으키고 응원하고 지지하고 살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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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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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갑자기 죽었는데, 곧장 사라지지도 않고 희미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남아 ˝나 리젠(regeneration)됐어요.˝말하며 궁극적 삶의 대상에게 건네는 마지막 ‘사랑의 인사‘.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해지려고 애쓰는 이들을 다만 애정 어린 눈으로 끝까지 지켜 보는 것.‘ 저는 이제 어디로 가죠? ˝좋은 곳. 좋은 곳으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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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낙낙 시인의일요일시집 16
조성국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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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얼척없이 난망하고 슬픔에 절인 간장게장 같을 때, 호박꽃 등불 같은 詩 한 편 한 편 읽노라면 ‘언행일치‘의 삶에 기대어 어쨌거나 견디어지고 한줄금 해낙낙 쪽을 향할 수 있는 정제(精製)된, 아름다운 모태어 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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