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깔고 누워, 2003년에 나온 이성복과 최승호의 詩集을 꺼내 놓고 읽는다.
최승호의 시집이라 생각했는데, 다 읽고 보니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었다.
그럼 어떠하랴. 즐거웠으면 됐지, 그만일 뿐,
1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심
코 지나가는 말이거나 심심풀이로 해본 말, 우리가 말하
기 전에 말은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의 둘
째 구절은 無染受胎, 교미도 없이 첫 구절에서 나왔지만
빛깔과 소리는 전혀 다른 것. 시의 셋째 구절은 근친상
간. 첫 구절과 둘째 구절 사이에 태어났으니, 아들이면서
손자, 딸이면서 손녀. 눈 먼 외디푸스를 끌고 가는 효녀
안티고네. 말들의 혼례가 끝나는 마지막 구절에서
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13
내게는 오직 한 분
내 발이 내 손톱이 내 머리칼이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파블로 네루다, [산책]
동네 할매들과 아침 테니스 한 판 붙으려고, 시지동 시
멘트 계단을 사뿐히 오른다. 헤드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
야지, 무의식적으로 불끈 쥔 주먹 천천히 휘두르며, 이
(李)생(生)우(雨), 정(鄭)사(士)현(顯), 최(崔)명(命)돌(乭),
이런 상징적인 문패들을 해독하다가, 아직 불켜진 가로
등 아래 기어코 찾아낸다. '깊은 밤 깊은 그곳에서 1대1
로 하자'는 전화 데이트 전단. 내 마음 일편단심, 나는 철
갑을 두른 중세 기사가 아니지만, 내게는 오직 한 분, 내
가난한 테니스를 번번이 좌절시키는 일흔일곱 살 회장
할머니가 있다.
35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어떤 영혼들은...]
어떤 순결한 영혼들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
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
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
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
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받을랩니
다'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
거나 언짢은 기색 아니었다. 어릴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이성복 詩集,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