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별
고 두현
한 사람이 평생
가꾼 숲을
누군가 일순간에
베어버리고
한 은하가 잠깐
밝힌 별을
누군가 일생동안
바라보며 산다 (P.14 )
(쿨트라 여름)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
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
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 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 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
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
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이다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P.17~18 )
(창작과 비평 가을)
손에 대한 예의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로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 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힌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P. 154 )
(문학사상 10월)
극치
고영민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가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 보는 것
소가 제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 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 녘,
고개 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 오는 것 (P.174 )
(고영민시집, '사슴공원에서')
적막을 사온 저녁
선안영
날 비린내 달라붙는 남광주 재래시장
멱살잡이 싸움 판 한쪽에서 졸고 있던
벙어리 할머니가 파는
묵 한 모 사왔다
벗겨지고, 깨어지고, 팔팔 끓여져, 굳어진
정지된 시간 나란히 누운 침묵
그 침묵 완성되기까지
꽉 눌려 생략된 말....
모서리 날 선 각이 부드럽게 뭉개지고
이빨과 잇몸까지 받아들인 물렁함에
내 안의 사나운 아우성
묵 앞에서 침묵한다 (P 188 )
( 선안영 시집, '목이 긴 꽃병'에서)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