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여우
아무도 모른다
나의 꼬리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비정규적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일년에 한번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마다
내 꼬리는 자라나려고 용을 쓴다는 것을
이런, 더러운 퉤, 하고 나오고 싶어도
내 꼬리가 자라는 만큼 딱 그만큼 참는다는 것을
내년에 혹시
계약서를 입으로 꿀떡 삼키고 나올 수 있다거나
들키지 않기 위해 꼬리를 물고 있을 수도 있다거나
꼬리의 털들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러면
나의 찬란한 묘기를 보여주며
우왕좌왕 신호등에서 흔들리고 있는 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훔칠 수 있을까
내 꼬리가 자라면 나는 무거워질 수 있을까
하지만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데 꼬리는 거추장스러운 일상일
뿐이고
나는 아무도 모르는 가벼운 여우인걸
그러니까 제발 누구든 내 꼬리를 훔쳐갔으면 좋겠어 (P.14 )
남극에서 살아남기
견고하고 빈틈없는 빙상氷床으로 뒤덮인 백색 대륙이다
서초동 법원은 너무 가깝고 얼음계단은 너무 멀다
뉴욕제과는 너무 가깝고 뉴욕의 빵은 너무 많다
파고다는 잉글리쉬를 팔고 있고 파고다는 탑골공원으
로 바뀐 지 오래다
저기 서류가방을 걸친 황제펭귄들이 무리를 지어 간다
화장실 벽에 010-222-2222 장기 삽니다,
스티커를 붙이던
가방 속에는 아직도 팔아야 할 장기들이 남아 있을까
강남역 계단에서 일렬로 줄을 지어
미끼처럼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바다표범들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8차선 차도는 얼음 자동차들로 덮여 있어 빈틈이 보이
지 않는다
조심해서 건너지 않으면 크레바스에 빠져
태양이 가득한 아프리카로 떨어질 수 있다
언제 충돌할 지 모르는 빙산들에 둘러싸여
황제펭귄들처럼 나도 무엇인가를 팔지 않으면 안 된다
남극의 제국은 화이트아웃이 되고 방향감각을 잃은 나는
같은 자리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드라이 밸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
를 하는
긴수염고래들은 신기루일까
현기증이 난다
내 피는 얼지 않아 적십자혈액원에 제공되지 않을 것
이다 (P.38 )
어머니의 청계천
거북이처럼 등을 구부리며 열심히 미싱을 밟으셨다
일어서면 형광등에 머리 닿을까 145센티미터 어머니는
평화시장 어두운 다락방에서
청계천의 물이 점점 멀어지는 것도 모르고
미싱소리가 물소리인양
깜박거리는 구름에 가린 햇빛인 양
열아홉 청춘을
남들도 다 그렇게 살겠거니 청계천과 함께 그렇게
미싱을 밟으셨다
그 이듬해 전태일과 함께 청계천이 살짝 살아났을 때
스무살 어머니는 여전히 미싱을 밟으셨다
사람 죽는 거 늘 보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으셨다 한다
여름이면 목덜미와 등짝 땀띠, 긁어 피고름이 살을 파
고들고
겨울이면 얼어 곱은 손가락 발가락이 미싱 바늘에 옷감
따라 박혀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즐겁게 흥얼거리셨다던
서울 사람들 다 모인 청계천 평화시장 물줄기 중간
자꾸 번듯하게 변해버린 청계천 평화시장 이층 자리만
내내 올려다보고 계신다
길을 잃어버린 듯 청계천에서
물소리가 미싱 소리인 양
구름에 가린 햇빛이 깜박거리는 형광등인 양
내내
조각보처럼 일정한 청계천 평화시장 이층을 올려다보
고 계신다 (P.62 )
-유현아 詩集,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에서
![](http://image.aladin.co.kr/img/shop/2012/bd_t18.gif)
그밖의 여러분을 위한 왈츠의 시편들
2006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유현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유장한 호흡과 이야기적 요소는 기존 여성 시인에게서 맛보지 못한 신선함도 안겨준다.
신자유주의시대에 상위 1%를 제외한 99%의 기타 등등으로 살아가는 ‘그밖에 여러분’들에 대한 묵시록이다. 그러나 밝음을 내장한 그늘이다. 슬로우슬로우퀵퀵, 스텝을 기억하며 시를 읽다보면 어느결 따뜻한 위무를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은 시인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독자들이 첫 시집을 어떻게 읽어줬으면 좋겠는지요?
“오래된 것들이 낡았다고 과거의 것들이 추하다고 모두 헐어버리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오래되고 낡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희미한 것들이 기억 속에 남아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되는 듯해요.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우리들에게 시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위로가 눈물이 아닌 모든 감정들, 웃음, 분노, 찌질함, 부끄러움, 무식함, 어이없음 등이 들어있는 시로 읽혀졌으면 해요.
슬픔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슬프듯, 객관적 거리에서 쓰려고 노력했는데…. 소외된 삶들이 제 시로 인해 건강한 삶이라는 것을, 정당한 삶이라는 것을,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