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부터 온다.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 본 자전거는 세 가지 종류였다. 하나는 옆 마을에서 출퇴근하는 국민학교 황선생님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였는데, 안장 뒤에는 손수건으로 싼 도시락과 몇 권의 책이 항상 묶여 있는 신사 자전거였다. 퇴근하여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달릴 때면 빈 도시락의 딸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멋있는 날씬한 자전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장집 술 배달꾼 춘풍이네 아버지가 타고다니는 짐바리였다. 춘풍이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동네개라고 불렀는데 얼굴에 땀구멍이 승승 나고 붉으스름한 코에 아침인데도 늘 술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짐바리 자전거에 한 말자리 술통을 예닐곱 개씩이나 매달고 종일토록 인근 동네까지 돌아다녀 모두들 근동에서는 가장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하나는 조합장 아들이 타고 다니던 세발자전거인데 그 빨간 자전거는 동네의 크고 작은 모든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가장 깊게 각인되어 있는 자전거는 아버지의 삐거덕거리는 낡은 자전거다. 아버지는 만주와 베이징 그리고 함흥 근처 어디를 떠돌다 삼팔선이 굳어질 즈음에 어머니의 동네에 정착했다는데, 어찌어찌하여 낡을 대로 낡은 자전거 한 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전거는 아버지를 만나면서 더 삐거덕거렸다. 어머니의 말을 옮기면 아버지는 새벽밥을 먹자마자 바로 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고 한다. 임실을 거쳐 남원을 지나 아버지의 외가가 있는 운봉까지 가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 늦은 점심때가 되었고, 돼지 새끼 대여섯 마리를 사서 짐바리 자전거에 실으면 해가 기울기 전에 출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새끼 돼지들과 함께 밤새도록 아무도 없는 산길의 신작로를 달리다 보면 남원 어디쯤이 나오고 선잠을 깬 노인네가 길가에 나와 오줌을 싸며 지금이 몇 시인지나 알고 이 밤중에 다니느냐며 말을 걸었단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를 이고 집에 오면 아직 여명의 새벽이었는데, 도착한 즉시 잠잘 틈도 없이 고봉밥 한 그릇 먹고 다시 정읍 태인 장까지 이내 달렸단다. 태인장에 가서 그 돼지를 다 팔면 새끼 돼지 한 마리 정도의 이문을 남길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저 양반이 되야지 한 마리 생기는 맛에 잠 한 소금도 안 자고 이틀 동안 자전거만 타고 댕긴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말린적이 없었단다. 7남매를 낳을 때까지 그렇게 번 돈으로 아버지는 신작로 가에 조그만 가게를 내고 아들이 셋이니 별이 셋이라며 삼성상회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달았는데, 동네에서 함석으로 만든 간판을 단 점방은 우리집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잠도 없이 이틀을 꼬박 달려야 했던 자전거와 아버지의 세월,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세월을 생각한다. 삐거덕 거리는 자전거와 길가에 버려진 단잠이 우리 일곱 형제를 키웠고 아버지의 병을 키웠다. 아버지는 돈이 아까워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도 하지 않았건만 간경화로 세상을 버렸다. (P.36~39 ) / 절망에서 건져낸 시
-작은숲 에세이, <상처 위에 피는 꽃>-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