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마트
불 다 꺼졌다. 한 작은 젊음에게 맡겨두고 세상 잠들었
다. 밤새 편의점에서 젊음이 팔린다. 겉이 말끔한 비싼 가
게에서 겉이 말끔한 값싼 젊음이 팔린다. 있을 건 다 있는
가게에서 있는 건 젊음뿐인 젊음이 하루를 판다. 폐쇄회
로 카메라가 스물 네 시간 젊음을 팔고, 스물네 살 젊음이
스물네 시간 내내 팔린다. 까만 밤, 어항처럼 투명한 방에
갇힌 젊음이 뜬눈으로 꿈을 꾼다. 도저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저 유리벽 속에서 갈 곳 없는 꿈이 뻣뻣한 지
느러미를 꿈틀댄다. 이력서 한 줄 채우지 못할 스물네 살
의 고단한 밤, 패밀리미트. (P.38 )
늙은 개
- 7월
홑이불
빨래 그늘 속에
늙은 개
배 깔고 누웠다
툇마루 낡은 기둥
중복 날짜 콱 박힌
종묘상 달력
실눈으로 꼬나보다가
일없다고
지그시
눈 감고 잔다
개가 저 정도는 돼야지
요즘 도시 개들은
개도 아니다 (P.108 )
메밀국수
아버지가 내 나이를 먹었을 때였나. 농사꾼들 다 그렇듯
좋게는 못 먹어도 많이는 먹어야 힘을 쓰는 법인데, 하루
는 무슨 일로 아버지와 농사꾼 친구 하나가 서울엘 왔다
가, 밥때가 되어 이 집 저 집 식당을 찾다가는, 만만한 국
수로나 푸지게 배를 채울 요량으로 국수집 문을 밀고 들
어갔더랍니다. 칼국수 콩국수 잔치국수야 촌에서도 일쑤
먹는 것, 서울 사람 먹는 것 한번 먹어보자고 메밀국수를
한 판씩 시켰다지요. 한데 메밀국수 나온 걸 보니 손바닥
만 한 채반에 사리 한 덩이 달랑. 이걸로 무슨 요기가 되
나, 기가 차더랍니다. 서울 사람들 원래 많이 안 먹는다더
군, 물가가 비싼 데니 그럴 만도 하겠군. 둘은 서로 그럴
듯한 짐작을 주고받으며 섭섭한 식사를 마쳤답니다. 어쨌
거나 마뜩찮아도 먹긴 먹었으니 주머니 털어 돈을 내고
문을 나섰는데 식당 주인이 부리나케 부르더랍니다. 저
밑에 한 판은 왜 남기셨느냐, 먹다말고 왜 갑자기 나가시
느냐, 주인은 빤히 쳐다보고, 서울 사람들 턱마다 주렁주
렁 국수를 매달고 웃더랍니다. 오십 평생 메밀국수 처음
먹어 본 그들, 복 달아나게 무슨 음식을 포개주느냐고
들으란 건지 말라는 건지 툴툴거리며 서로 말도 없이 남은
국수 삼켜버리고는 바쁜 일이나 있다는 듯 나왔다는 겁니
다. 아버지 지금도 오다가다 그 얘길 하며 메밀밭처럼 흐
드러진 웃음 쏟아놓곤 합니다. (P.52 )
뉘우침
불국사 부처님을
뵈러 갔더니
삼십 년 만인데도
옛적 그대로
아래만 내려보고
계셨습니다
그동안 턱 치켜들고
이겼다 생각하며
살았던 날들이
치욕인 듯 아파 와
석탑 따라 우두커니
겨울비 맞고
서 있었습니다 (P.64 )
연리지(連理枝)
-어느 신부에게
연리지 되시기를
햇살이 반듯한 언덕에
미더운 깊이로 뿌리를 묻고
가장 실팍한 가지 내밀어 서로 맞잡고
똑같이 키 크는 나무 한 쌍 되시기를
푸르른 날에는 함께 숲을 이루고
바람 찬 날에는 함께 바람을 이기는
그렇게 손 붙잡고 하늘 향해 돋움하는
맑은 잎 주렁주렁한 나무 한 쌍 되시기를
겨울 오면 제 잎 떨궈 짝의 몸 덮어주고
빈 들 스산해도 얘깃거리 더 소복한
그때 뿌리는 언 땅보다도 더 굳게
서로를 참으로 꼭 쥐고 놓지않는
힘센마음 가진 나무 한 쌍 되시기를 ( P.82 )
-오성일 詩集, <문득, 아픈 고요>-에서
햇님이 쨍하게 나왔다가
실컷 울고도 미처 남은 아기 울음들이 흑흑..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또 다시 낯빛이 흐리다가, 또 햇님이
미련을 가진 듯 얼굴을 내미는 그런 날. 창밖에서는
새가 짹짹짹..울고.
오성일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詩集 <문득, 아픈 고요>를
읽다, [영주사과]란 시에 마음이 오랫동안 머문다. 영주사과
는 아주 오래전의
내 시간들 속에서 사과껍질에 촘촘히 박힌 점들조차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보였던 그런 아름답고도 각별한 추억
으로 언제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꽃이 진다고 너를 잊을 수 있나,'
그런 영주사과가 이 詩集안에선, 영등포 청과시장 길바닥에
굴러 떨어진 난생 처음 서울 올라온 경상도 영주 사투리로 자란 촌놈으로
두 볼이 한껏 발그레해져 때깔 좋은 과일마다 눈침을 놓고, 그것도 모자라 지나가는 처자
몸매가 꼭 부석사 선묘낭자마냥 좋다고 엉큼스런 눈길을 흘리다가는 화들짝 놀란 치맛자락에
쓸려 영등포 청과시장 길바닥에 보기좋게 나가떨어진 영주사과, 저 저 촌놈.으로 따순 웃음을
주는구나~.
부석면 북지리 볕 좋은 언덕/ 봉황산 정기 먹고 힘 좋은 저 놈/ ... / 알도 안 여문
것이 발랑 까져서/ 그 동네 꽃사과 여럿 건드렸던 놈/ ... / 서울 간다고 물색없이 들떠서/ 사과
박스 작은 구멍으로/ 말똥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온 놈/ 서울 와서는 촌놈 행색 감춘다고 이마
를 반질반질 매만지고 두 볼이 한껏 발그레해진 저 놈/ .
'문학의전당 시인선' 157권. 시집 <외로워서 미안하다>를 펴낸 오성일 시인의 시집.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눈물이 스미고 미소가 퍼지는 소박한 詩' 한 줄을 꿈꾸는 오성일 시인은 외로움 너머에서 시의 언어를 건져 올리는 시인이다. 그의 시 속에서 소박한 삶 속에 머무는 시혼과 구김 없이 참된 목소리를 내장한 한 사람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