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긴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저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P.28 )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청매화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개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속에서 화르르 퍼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 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고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P.80 )

 

 

 

 

 

 

 

 

                         물속의 비늘

 

 

 

 

 

 

                           어둠속에서 번득이는 것이 있다

                           불을 켜면 황망한 물소리 남기고

                           물풀 뒤로 사라지는 지느러미

 

                           내가 밥을 먹을 때나

                           혹은 찬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쓸 때도

                           내 엉거주춤한 타협의 자세를 비웃는 듯

                           사각의 유리 안에서

                           게릴라처럼 번득이는 금붕어의 비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그 삶의 날 선 긴장감은

                           나의 시를 간섭하고

                           나의 생활을 간섭하고

                           서른 넘어 적당히 주저앉고 싶은 불안한 나이를 간섭

                          한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짧은 수인사와

                           자꾸만 헛나오려는 말들

                           몇 권의 책과 영치금으로

                           부끄러운 시대를 변명하듯

                           유리 한장을 사이에 두고

                           너와 나의 대면은 참으로 어색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만약 이쯤에서

                           적당히 물을 갈아주고 싶다면

                           고단한 지느러미의 노동 그만 쉬게 해주고 싶다면

                           너는 또 뭐라고 비웃을 거냐

                           타협과 갈등은 유리 한장 차이라고?

                           변절은 그렇듯이 손바닥 뒤집기라고?  (P.101 )

 

 

 

 

 

 

 

 

                      봄날 저녁

 

 

 

 

 

 

                           왕그나아아

                           늙은 보살님의 목소리가 나른한 봄저녁을 깨운다

                           오늘 하루도

                           쌀씻어 밥 지어 부처님들 봉양했다고

                           오늘 하루도

                           쑥 캐다 쑥국 끓이고

                           냉이 캐다 냉이 무쳤다고

                           아무렴 쑥은 쑥이고 냉이는 냉이지

 

                           왕그나아아 아따, 이 썩을 눔이 워디로 갔다냐

                           해 지기 전에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 하는데

                           봉고차 태워 퇴근시켜줄 처사는 보이지 않네

 

                           왕그나아아 워따, 이 썩을 눔이 워디서 또 술푸고 있는

                          갑다

                           어미소 울음 소리가

                           산 아래 바위를 굴릴 만한데

                           주발은 주발대로 씻어 나란히

                           대접은 대접대로 씻어 가지런히

                           오늘 하루도

                           주발에다 밥 담고 대접에다 국 담았다고

                           아무렴

                           주발은 주발이고 대접은 대접이지  (P.108

 

 

 

 

                                            -김태정 詩集,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에서

 

 

 

 

 

 

 

 

 

 바람이 왱왱 우는 날, 김태정 시인의 시집을 꺼내 읽는다.

 바깥의 일이 몇 개 있지만, 바람이 온종일 왱왱 울어 나도

 가만히 앉아 詩集을 읽고, 푸른색 형광빛 자판을 심해를 헤엄치듯

  또깍또깍 두드리며 일을 한다. 

  누군가 가져다 준 진달래꽃을 어항 옆에다도 꽂고, 책상위에다도

  물을 가득 담아 꽂아두고 틈틈히 들여다 본다.

  "어유, 너 참 곱구나! 고와. 참 이쁘게도 피었네."

  이 꽃이 어느 山 자락 기슭에 피어 있던 꽃이든, 지금 나의 눈앞

  에 피어 있든 이미 다 좋기만 하다. 나는 이제 저마다의 꽃빛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윙윙 울어 혼자 있는 날,

  김태정 詩人의 마알간 얼굴,같은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물푸레나무 가지가 파르스름 물을 길어올리듯, 그렇게 읽는다.

 

 

 

 

 

 

           시인의 말

 

 

            마흔해가 넘도록 깃들여 살아온 서울을 떠나 해남에

           내려오기까지 스스로를 내몰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곳

           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정 많은 사람들의 푸근한

           심성 때문이리라.

 

            뒤늦게 묶어내는 시집이라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눌

           즐거움이 있다면 이곳 '정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작고 보잘것없는 시들이나마 부모님 영전에 바쳐지

           는 술 한잔, 물 한모금이 될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겠다.

 

                                                                 2004년 7월

                                                                       김태정

 

 

 

 

 

 

 

 

 

시인 김태정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펴내

04.07.30 15:01l최종 업데이트 04.07.30 15:36l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럼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28~29쪽, <물푸레나무> 몇 토막

서울에서 탯줄을 끊고 마흔 해가 넘도록 줄곧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울 토박이 김태정 시인. 그이가 어느날 갑자기 손때 발때뿐만 아니라 마음때까지 골고루 묻은 그 서울을 버리고 홀연히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로 내려갔다. 한반도를 혁띠처럼 조이고 있는 휴전선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서울과 해남은 한반도의 끝과 끝이 아니겠는가.

해남은 어떤 곳인가. 해남은 우리 문단사에 획을 그은 <오적>의 시인 김지하를 비롯한 <진혼가>의 시인 김남주, <참깨를 털면서>의 시인 김준태, <초혼제>의 시인 고정희 등이 생명의 탯줄을 자른 곳이 아니던가. 그 중에서도 땅끝마을은 말 그대로 한반도의 끝자락이 아니던가.

근데 왜 김태정은 하필이면 땅끝마을로 내려갔을까. 그이는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 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 그곳이 바로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그 곳에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달마의 뒤란)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마흔해가 넘도록 깃들여 살아온 서울을 떠나 해남에 내려오기까지 스스로를 내몰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정 많은 사람들의 푸근한 심성 때문이리라./ 뒤늦게 묶어내는 시집이라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눌 즐거움이 있다면 이곳 '정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우수(雨水)>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태정(41)이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을 펴냈다.

등단 13년 만에 펴낸 이 시집은 모두 3부에 '호마이카상', '오늘밤 기차는', '겨울산', '혀와 이', '해남시외버스터미널', '멸치', '배추 절이기', '내 손바닥 위의 숲', '세상의 불빛 한점', '물속의 비늘'을 포함 45편의 시가 "이 저녁 허기진 밥상 위에/ 따뜻한 고봉밥으로 숲을 이룬 산"(산)처럼 이 세상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

이 세상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고? 그렇다. 지금 땅끝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인은 "손바닥의 잔금만큼 사소한 근심들이 거미줄 치던 세월," 그 고된 세월 속에서 "시누대 그 고통의 생장점이 스스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듯 슬픔이 나를 팽창시켰고 나는 어느덧 손금 위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좋을 나이"(봄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서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8쪽, <호마이카상> 몇 토막


어느 날 시인은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호마아카상을 펴다가 문득 무서움을 느낀다. 귀퉁이가 닳아 반질반질 빛이 나는 그 호마아카상은 시인과 더불어 거의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다. 그러다 보니 그 호마이카상이 시인의 가난한 살림살이와 시인의 속내를 모조리 궤뚫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그 상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밥을 먹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그런 시를 써왔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이제는 "죽도 밥도 아닌" 그런 세월이 너무도 초라하고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시인 김태정은 누구인가?
서울 토박이, 지금은 해남 땅끝마을로 내려가

▲ 김태정 시인
ⓒ창비
"그가 사물과 만나는 방식은 사뭇 다정하고 나긋나긋하다. 잔잔하고 찬찬하게 다독거린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듯이 그렇게. 그는 세상과 대결한다기보다는 감싸안으려 애쓴다. 그의 이 같은 순정은 참으로 맑아서 익숙지 않은 사람은 일순 당황하기도 한다." -정우영(시인) '해설' 몇 토막

지금 서울을 떠나 해남 땅끝마을에서 살고 있는 시인 김태정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雨水'(우수)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13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낸 시인 김태정은 '시인의 말'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시들이나마 부모님 영전에 바쳐지는 술 한 잔, 물 한 모금이 될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 이종찬 기자

이제 시인은 그 호마이카상을 버리려 한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여기서 시인이 버리려 하는 것은 비단 호마아카상뿐이 아니다. 이십년 동안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세월과 그 세월 속에서 끝없이 자신을 옭죄이고 있었던 그 모든 것을 몽땅 버리려 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이 시시한 자존심"은 남에게 나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알량하고 얄팍한 그런 자존심이 아니다. 고된 세상살이에서 끝없이 버림 받고 짓밟히면서도 기어이 살아나는 질갱이처럼, 시인의 초라하고도 가난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의 샘이다.

부업이나마 한 일년
코일을 감고 나사를 돌려도
시급 2,000원의 밥을 모른다는 말씀

연결대에 나사를 끼우는 것은 아주 단순한 일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나사가 돌듯
세상은 바삐바삐 또 때론 단순하게 돌아가지만
컨베이어를 타고 온 시간은 차곡차곡
박스째 부려지지만

우두커니 완성품이나 세고 있는
철없는 시인
손톱 밑의 쇳가루나 파고 있어라
쇠의 밥을 먹겠다는 엉뚱한 시인
기름때 먼지 한가운데 그저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바탕 싸우고 난 사람들처럼
막 작업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열기나 느껴보아라
손끝에 남아 있는 쇠의 온기나 힘껏 쥐어보아라

-43~44쪽, <부업> 몇 토막


시인은 그동안 서울에서 너무도 힘겹고 배고픈 삶을 살아왔다. 어렵사리 시인이 되었지만 시가 밥을 먹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식의주를 해결하기 위해 "가윗밥을 넣고 아이롱을 달구어도/ 밥의 내력"을 잘 몰랐다. 언젠가는 시가 밥이 되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결국 "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부업)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면서 쉽게/ 시를 쓰듯이 정말 쉽게 밥을 먹는 것"이란 "눈물 나는 이 시대의 코미디"(거식증)라고 결론 짓는다.

그렇다. 이 땅에서 시만 쓰면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설령 각종 잡지와 언론사에서 시 청탁이 줄을 잇는다 하더라도 시가 어디 국화빵 찍어 내듯이 그렇게 쓰여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시인은 "요 시인, 철없는 시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만/ 생업과 부업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60쪽, <동백꽃 피는 해우소> 몇 토막


시인의 꿈은 소박하다. 아니, 어쩌면 가난한 시인에게 있어서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도 엄청난 사치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해우소에 앉아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 본다.

그 바닥에는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도 보이고, "슬픔도 기쁨도 다만 /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도 보인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처럼.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78쪽, <배추 절이기> 몇 토막


김치를 담그기 위해 소금을 뿌려 배추를 절이던 시인은 배추가 쉬이 절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퍼런 상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인의 얼굴 반쪽에 마치 천형(天刑)처럼 시퍼렇게 배인 그 쓰라린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시인이 배추에 뿌려지는 왕소금 같은 세파에도 불구하고 끝내 절여지지 않았던 자존심, "씹새끼!/ 설사가 나온다/ 후련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좋다"(시의 힘 욕의 힘)처럼 끝내 시를 버릴 수 없는, 그래서 시의 예리한 칼날에 이리저리 베인 그 상처를 말하는 것일까.

그 때문에 시인은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화장실 가며오며 또 한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득" 뿌려 주었지만 결코 절여지지 않는 배추를 보며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제 스스로 제 성깔 잠 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배추 절이기) 기다리기로 한 것일까.

시인 김태정의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은 마흔이 넘도록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온 서울에서의 삶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리고 서울을 버리고 해남 땅끝마을에 정착한 사십대 여성시인의 물결처럼 자잘한 삶의 결이 마음 쓰리게 일렁거리고 있다.

그래.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궁핍이 나로 하여)가 아니겠는가.

 

 

 

 

 

[弔詞] 시인, 땅끝에 잠들다

 

민중서정시인 故 김태정을 추모하며

 

시인 김태정(1963~2011)의 부고를 들은 건 문자메시지를 통해서였다. 내가 속해 있는 한국작가회의에서 보낸 단체 발송용 문자였다. 시인 김태정 회원 별세, 해남 제일 장례식장, 발인 9월 8일.

처음에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껏 김태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시집 한 권을 수년전에 내었다는 사실밖엔 없었으니까. 시들이 참 단단하고 단아하여서 마음이 땡볕 같은 날에 꺼내보는 시집이었다.

그녀의 살아생전 유일한 한 권의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에 소개되어 있는 그녀의 약력은 이렇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雨水」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김태정의 시들은 어느 하나의 경향에 가둬놓는 일이 어리석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동시대 여느 시인들과는 다른 어떤 지점을 그녀가 선점하고 있다는 얘기다. 시인 정우영은 그녀의 시집 해설에서 그녀의 시를 '민중서정시'라 명명하고 있다.

개천 건너엔 여직 환한 공장의 불빛/점심 먹고 저녁 먹고/실밥을 따고 아이롱을 달구는 당신/늦게 나온 별처럼 깜빡깜빡/고단한 두 눈이 졸음으로 이울고/숨차게 돌아가는 미싱 소리에 이 밤은/끝도 없을 것 같아도/오늘밤 무슨 불꽃놀이라도 있는지/잔치라도 한판 걸게 벌이려는지/물 위에 드리워진 불빛을 밟고/가만 가만히 다가가서는/당신의 창가에서 펑펑 터지는 별들/그러나 당신은 아랑곳없고/미싱은 숨차게 돌아가고/실밥은 하나 둘 쌓여가고//보세요 당신/그 거친 손에서 달구어진 아이롱처럼/이밤사 순결하게 달아오른 별들을/따버린 실밥들이 하나 둘 쌓여갈 때마다/활발해지는 이 어둠의 풍화작용을/보세요, 땀방울 하나 헛되이 쓰지 않는 당신/누구의 땀과 폐활량으로 오늘밤/하늘의 사막에 별이 뜨는 지

- 「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중에서

절창이다. 시인 정우영의 해설처럼 "노동의 가치가 이처럼 다사롭게 울리는 시도 달리 찾기 어렵"겠다. 80년대 노동시의 생경함과 90년대 서정시의 공허함과 2000년대 환상시들의 난해함에서 그녀의 시들은 멀찌감치 비켜서 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수많은 '경자언니'들이 "땀방울 하나 헛되이 쓰지 않"고 노동을 하고 있질 않은가. 그녀의 다른 시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태정의 시에는 저 박노해의 절절함과 허수경의 관능미가 편편에 녹아 있다.

▲ 故 김태정 시인

그런 김태정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건 올 봄의 일이다. 63년생이라면 올해로 마흔 아홉인데 참으로 단출한 약력이다 싶어 나는 그녀의 시를 읽다 문득문득 검색 창에 <시인 김태정>을 쳐보곤 하였다. 첫 시집 출간에 관한 기사 외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태정 시인의 근황을 알 게 된 건 이원규 시인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 이원규, <땅끝 해남의 시인들……김남주 고정희 그리고 김태정>, 경향신문 2011년 4월 13일, 중에서

 



서울 토박이인 그녀가 훌쩍 땅끝마을 해남으로 떠난 것은 2004년의 일이라 한다. 그녀의 시들에선 해남에서의 생활이 간단치 않은 언어로 녹아 있다. 시인 정우영이 명명한 '민중서정시'의 많은 시들이 그곳에서 씌여진 듯하다. 아쉽게도 나는 그녀와 이승에서의 인연이 없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녀의 빈소에 찾아가질 못했다.

이상한 가을이다. 분명히 9월은 가을이라 배웠는데 연일 폭염주의보다. 이 가을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셋이나 잃었다. 타격의 달인 장효조, 무쇠팔 투수 최동원, 그리고 '민중서정시인' 김태정. 연일 매스컴에서는 장효조의 기록적인 통산타율과 최동원의 전대미문 한국시리즈 4승을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단 한 줄, 내 사랑하는 시인이 이 세상을 등졌다는 기사 하나가 없다. 너무나 유치한 고민이라고 해도, 시샘이라고 해도, 이 땅의 시인들 설 자리가 땅끝마을 저 바깥으로 자꾸만 내몰리는 것 같아 나는 자꾸만 서러워진다. 시인이 내려놓고 간 계절의 모퉁이에 나는 내 방식대로 조사(弔詞)를 쓴다. 시인이여, 부디 저 세상에서는 편히 쉬기를.

이상한 가을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죽었다
무쇠팔 최동원도 죽었다
그리고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을 낸 김태정도 죽었다
9월이었다

김태정의 시를 읽다가
마음이 먹먹해져
느리게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한 저녁이었다
티브이를 켰는데
오래된 화면에서
마운드엔 최동원이
홈플레이트엔 장효조가
서 있었다
1984년의 가을이었다
이상한 저녁이라고 생각했다

글_시인 박진성_2001년 『현대시』등단. 시집 『목숨』, 『아라리』

 

 

 

출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918180911§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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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9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04-09 18:34   좋아요 0 | URL
다 좋은데 전 '물푸레나무'가 마음에 드네요.^^
담아두고 두고두고 읽어보고 싶은 시입니다!!*^^*

appletreeje 2013-04-09 20:54   좋아요 0 | URL
예~저도 '물푸레나무'가 제일 좋았어요. ^^
오늘은 김태정 시인의 말간 얼굴이, 많이 생각났던 날이었요.
후애님! 편안하고 따뜻한 밤 되세요.~~

보슬비 2013-04-09 20:28   좋아요 0 | URL
나무늘보님 시집을 많이 읽어서인지 글도 시처럼 쓰세요.
확실히 표현법들이 다양한것 같아요. 어쩜 이런 글을 사용할까 읽을때면 깜짝 깜짝 놀란답니다.

바람이 왱왱우는날 저는 동생이랑 커피전문점에서 차를 마셨어요. 요즘 감기 때문에 커피보다는 차를 시켜서 3번정도 따뜻한물만 리필해서 먹고있어요.ㅎㅎ

appletreeje 2013-04-09 20:53   좋아요 0 | URL
^^;;;; ...
보슬비님 감기 어서 나으셔야 할텐데요...이궁,
아, 바람이 왱왱 울던 날 동생분이랑 커피전문점에서 따뜻하고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
부럽습니다~^^ 보슬비님! 좋은 밤 되세요. *^^*

숲노래 2013-04-09 21:21   좋아요 0 | URL
시인은
사람들 가슴에 예쁜 이야기 잘 풀어내고
좋은 곳에서 즐겁게 웃으시겠지요.

appletreeje 2013-04-09 22:38   좋아요 0 | URL
그러시겠지요~? *^^*

하늘바람 2013-04-10 07:40   좋아요 0 | URL
덕분에 울었네요 ㅣ 좋구나 참 안타깝구나 하며

appletreeje 2013-04-10 09:09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반갑습니다. ^^
예...참 좋고 안타까워요..많이요..
좋은 날 되세요. *^^*

수이 2013-04-10 07:52   좋아요 0 | URL
봄날 저녁-이 참 좋습니다. 읽고 또 읽고 있어요. 봄날 아침에.

appletreeje 2013-04-10 10:02   좋아요 0 | URL
봄날 저녁, 좋아요. 저도요. ^^
오늘도 날씨가 찹니다.
좋은 봄날 아침 되세요. *^^*

드림모노로그 2013-04-10 10:41   좋아요 0 | URL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
오늘 시는 참으로 다정합니다 ㅎㅎ
김태정 시인의 시들은 다 슬픔이 배여있는 것 같아요 ^^
바람이 찹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 ㅎㅎ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

appletreeje 2013-04-10 12:04   좋아요 0 | URL
예~그렇지요.
'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드림님께서도 그러시잖아요, 늘. ^^
정말 오늘도 바람이 차네요. 드림님께서도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13-04-10 22:58   좋아요 0 | URL
제가 몰랐던 시인을 또 한사람 만나게 해주시네요. 얼굴이 어쩜 저리 맑을까요. 물푸레나무,의 마지막 다섯행도 경자언니에게 쓴 시도 참말 좋습니다. 이런게 시군요.^^

appletreeje 2013-04-11 10:08   좋아요 0 | URL
정말, 시인의 얼굴이 너무나 맑으시지요. ^^
시인의 얼굴을 자꾸만 바라보며 위안을 얻습니다.
프레이야님! 좋은 봄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