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잠자리 소녀>
oil on canvas, 53.0×45.53.0cm, 2013

 

온종일 작업을 하다 보면 하루는 금세 저문다.
<잠자리 소녀>에 등장하는 잠자리는 오래전 설악산에서 그려 두었던 드로잉의 일부다. 파일 한쪽에 끼어 있던 것이 거의 20년 만에 유화 작품 속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시간은 그렇게, 잊힌 것들을 엉뚱한 자리에서 불러낸다.

제목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붙여볼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문장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말보다 먼저 와 있고, 말은 그 뒤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야기를 덜어낸 채, 그림만 남겨두기로 했다.

 

그림 <스카치 한 잔>

보드 종이 위에 유채, 2013

 

낮에 잠시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 구름 낀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공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아 마음까지 무겁게 눌러앉는 느낌이었다.

<스카치 한 잔>은 하드보드지에 유화로 그린 작은 소품이다. 유화는 수채화에 비해 물성이 무겁고, 오일을 동반하기 때문에 종이에 그냥 올리기에는 다소 까다로운 매체다. 젯소를 입혀 바탕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 그에 비해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하드보드지는 같은 종이 계열이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지지체가 되어준다.

컵 받침 위에 놓인 작은 유리잔 하나. 단순한 구성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림은 반복할수록 수월해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난해함 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가깝다.

   

그림 <지난여름, 덕포리에서>

oil on canvas, 65.2×53.0cm, 2013

 

작년에 다녀온 덕포리의 풍경이다. 한 차례 수채화로 옮겼던 장면을, 다시 유화로 불러냈다. 붓의 움직임을 최대한 남기고 싶었다. 마무리 단계에서 화면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감각이 남아, 노란 물감을 짜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꽃 한 송이를 더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 송이의 꽃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의 색이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놓인 자리, 그 자리에 얼마나 어울리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어느새 1월의 끝자락이다.
하루가 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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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 <거울의 저편-2>

oil on canvas 53×46cm 2013

 

요즘은 셀카로 자신의 얼굴을 찍는 일이 하나의 유행이다. 팔을 뻗은 거리 안에서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를 신경 쓰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을 위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기도 한다. 한 번은 인터넷에서 명화 속 자화상과 흡사한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찍어 올린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화가가 손으로 직접 그린 원화와는 또 다른 위트와 참신성이 느껴지는 아이디어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과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결국 ''일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신비, 그 비밀스러움,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낯선 감각. 그래서 사람들은 수시로 어떤 매개를 통해 거기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한다. 화장실 거울일 수도 있고, 식탁 위에서 밥을 먹기 위해 집어든 숟가락의 뒷면일 수도 있고,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의 반짝거리는 벽면일 수도 있다


때론 타인의 동공에 비친 내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저 사람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무엇 때문에 내 얼굴을 그토록 유심히 바라보는 걸까. 어딘가에 반사된 자기 모습을 은근히 훔쳐보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어쨌든 매일 보는 얼굴이다. 눈 코 입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매번 확인할 필요는 없다. 화장은 들뜨지는 않았는지, 머리카락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그런 것도 궁금하겠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 본질과 뿌리 같은 것이 더 궁금할 때도 있다.


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매혹되어 그 자리에서 끝내 수선화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르키소스다. 자기 모습에 매혹되어 결국 자신에게 갇혀버린 남자화가들 가운데에도 자기 얼굴에 집착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가 대표적인 경우다.

 

<렘브란트 자화상> 1640년 작품

 

바로크 시대의 빛의 화가였던 렘브란트는 인간의 내면과 정서를 포착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비슷한 계열의 영화 중에도 유난히 진한 감수성을 전해오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그 감독이나 배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한 결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그러했다. 같은 얼굴을 그려도 그의 작품은 어딘가 달랐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오랜 생애 동안 제작한 60여점의 자화상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화가로서 성숙해 가는 모든 내적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가 남긴 자화상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실험적인 단계’ ‘극적으로 분장한 단계그리고 솔직하고 자기 분석적인 단계.


위의 그림은 두 번째 단계, 화가로서 한창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두둑하게 살이 오른 얼굴과 자만심이 어린 표정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부드러운 벨벳 옷에는 족제비 털 장식이 달려 있고, 모자 역시 값비싼 털로 장식되어 세련되면서도 품위를 드러낸다. 매일 같이 작업에 몰두하는 화가라기 보다는 명망있는 귀족이나 성공한 상인처럼 자신을 치장한 모습이다.

 

<렘브란트 자화상>1661년 작품

 

그로부터 21년 후의 자화상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마음씨 좋은 노인, 혹은 소박한 성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화려한 모자 대신 흰 천을 두른 머리, 손에는 낡은 책이 들려 있다. 젊은 시절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그는 노년에 재정적 곤궁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런 환경 때문인지 그림 속 인물은 한층 순수하고 겸허해 보인다.


수수한 옷차림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에서는 인생을 어느 정도 통과해낸 사람의 평온함마저 느껴진다. 당시 네덜란드에 설탕이 처음 유입되었다고 하는데, 단 것을 지나치게 즐긴 탓에 치아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실한 치아 상태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려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고흐의 자화상> 1886년 작품

 

얼굴은 다양한 회화 기법을 실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대상이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열악한 경제적 여건으로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그의 자화상을 통해 화풍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어떤 전환을 거치며 점차 무르익어 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886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4년 동안 40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남겼다. 초기 작품은 네덜란드 거장들의 방식과 당시의 관습을 따르고 있다. 모자를 쓴 인물은 사색에 잠긴 듯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고,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렘브란트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다만 색채와 붓질은 훨씬 더 표현적이다.

 

<고흐의 자화상> 1886년 작품

 

같은 해에 그린 또 다른 자화상에는 이미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이 드러난다. 짧은 붓질과 순수 색채에 대한 열정, 빛에 대한 민감한 감각이 엿보인다. 밀레를 좋아했던 소박한 화가였던 그가, 초기의 신고전주의 화풍과 인상파를 넘어 어느새 자신만의 표현주의 세계로 성큼 들어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의 빈센트 반 고흐> 사진

 

모순된 감정과 불안 속에 잠겨 있던 10대 시절의 그는 다소 거칠고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동시에 제법 살이 오른 얼굴에 건강한 생기를 지니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한동안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지내다가,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그림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화가의 삶은 그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1889년 아를의 겨울은 차고 매서웠다. 한기만이 감도는 1월 어느 날, 노란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젤 앞에 앉아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응시한다. 거울 속 세계는 현실을 닮아 있으면서도 또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로 구성되어 있다얇은 판유리 안의 또 다른 세계, 그 안에 있는 한 남자가 고흐를 바라본다. 그 시선 속에서 꿈과 희망, 갈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그림 <강가에서, 양평>

oil on canvas 61×50cm 2013

 

화가의 자화상은 자아 탐구에 대한 절대적인 욕구, 이 우주에 단 하나뿐인 내면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호수나 강가에 비친 수면 또한 이 세계를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가끔은 그 위에 떠오른 존재의 떨림을 향해 묻게 된다. 잘 지내고 있는 거야? 그럭저럭 괜찮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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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겨울 어느 날, 고촌>
oil on canvas, 92×73cm, 2012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서울과 경기도가 만나는 도시 외곽 지역이다. 깊은 밤이면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어 적막하다. 창밖 저 아래로 신호등 불빛만 깜빡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온다.


지난여름, 작업실 창밖 풍경을 수채화로 한 번 그린 적이 있다. 최근에는 눈이 많이 내려 여름과는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흑백의 대비가 강조된 도로 주변 풍경과, 그로 인해 더욱 또렷해진 겨울 능선이 마치 단색조의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30호 캔버스에 그린 <어느 겨울날, 고촌>은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이다. 아직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손을 댈수록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 것 같아 일단 멈췄다. 누군가 이 그림을 내 눈앞에서 십 년쯤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일단 여기에 올려두고 더 지켜볼 생각이다. (결국 다시 작업했다. 여기에 올린 사진은 세 번째 단계의 그림이다.) 최근에 작업한 다른 그림 세 점도 올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함께 소개한다.

 

어느새 2012년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워 어젯밤에는 모처럼 밖에 나가 저녁도 먹고 영화도 한 편 보았다. 줄곧 집에서 다운로드 된 영화만 보다가 극장에서 개봉작을 보니 몰입도도 높고 감동도 더 진하게 다가온다. 

 

그림 <, 리치몬드(3)>
Watercolor on paper, 34×23.5cm, 2012

 

어제 본 영화는 레미제라블이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의 플롯은 사랑구원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다시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장발장은 신부의 은혜로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고, 그 이후 평생을 사랑으로 보답하며 살아간다.

 

한편 감옥에서부터 그를 괴롭히고, 출옥 후에도 집요하게 뒤쫓던 형사 자베르는 장발장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그 치욕스러운 구원과 감당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 <, 리치몬드(5)>
Watercolor on paper, 34×23.5cm, 2012

 

카메라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자유를 쟁취하려는 젊은 이들의 얼굴에도 시선을 맞춘다.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말하고자 한 핵심인지도 모른다.


민초들의 삶은 여전히 버겁고 가혹하다. 우리가 피 흘려 얻었다고 믿는 자유는 때로 착시를 일으켜 시야를 흐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금처럼 각박한 시대에 장발장이 보여준 사랑과 희생만이 해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 <램프가 있는 정물>
oil on canvas, 92×73cm, 2012

 

밤이 깊었다. 창밖의 신호등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깜빡인다. 모두에게 따듯한 연말연시가 되기를 바란다. 내년에는 조금 더 많이 사랑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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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파란 지붕 집 - 리치몬드 타운(2)>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요즘은 계속 오일 페인팅에 집중하고 있다. 유화는 중간중간 물감을 말려가며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작품을 번갈아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다루고 있는 캔버스가 예닐곱 점쯤 된다. 오늘 올리는 그림은 유화 작업을 하는 틈틈이 그린 것이다. 캔버스들이 물감으로 젖어 있을 때면 이렇게 수채화 팔레트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다.


올해도 어느새 저물어간다.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콜록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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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포치가 있는 집, 리치몬드 타운(1)>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 남쪽에서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는 자그마한 섬이다. 뉴욕의 다섯 번째 구지만, 옛날식 가옥과 거리 풍광은 80년대 초반 미국의 전원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느긋하면서도 인간적인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의 표정 또한 맨해튼의 팍팍함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띤다


페리 선착장에서 버스로 45분쯤 걸리는 리치몬드 타운은, 예전에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동네라고 한다. 지금도 개발을 늦춘 채 당시의 거리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섬에 도착한 직후, 터미널에서 버스를 하나 놓쳤다. 작은 읍내처럼 생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한참 만에 다른 버스를 타고 정오 무렵 리치몬드에 닿았다. 버스는 나 혼자만 남겨둔 채 낙엽들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간 차멀미를 했던 것 같다. 주위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딱히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풍경이나 지표도 보이지 않았다. 찬바람만 휘감기는 11월 오후의 풍경이 꽤 을씨년스러웠다.


괜히 볼 것도 별로 없는데 여기까지 온 건 아닌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는 언제쯤 다시 오는 건지, 낯선 장소에서 길치 특유의 경계심이 점점 마음을 위축시켰다. 아무도 없는 휑한 길바닥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길 건너 도로변 저쪽에 있던 그 낡은 집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집 창가에 켜진 불빛 하나에도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집이라는 존재는 마음을 끌어당기고 귀속시키는 특별한 힘을 지닌 듯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드림 하우스를 꿈꾸기도 한다. 생활의 편리함뿐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성향까지 반영된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그러나 모든 집이 집주인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꿈에 그리던 집이라 해도, 그 울타리 안에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세상의 집들은 저마다 얼굴을 가지고 있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목소리이고 태도이며 몸짓이다. 그래서 집은 곧 그 사람의 몸과도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그 집을 얻었다고 믿고, 그것을 소유물이자 분신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저마다의 인연이 있듯 집 또한 스스로의 주인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사를 위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보면, 첫눈에 내가 살 곳이다싶은 집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 신기해 스스로의 안목을 믿게 되고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의 착각일 수 있다. 사람이 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집이 사람을 선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치몬드 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 발견한, 포치가 달린 그 오두막집은 오래된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미국식 시골집을 떠올리게 했다. 시대의 유행에서 한참 벗어난 구식의 외형이지만, 그 안에는 세월의 완고함과 집주인의 단단한 고집 같은 것이 함께 느껴졌다.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한 계절이었다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집 앞 포치에는 노부부가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집 근처 어디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풍경 속에서 집만이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문을 굳게 닫은 채 겨울잠에 들어간 듯한 적막한 모습으로.


집 앞의 2차선 도로는 비교적 한가하지만, 차량들은 끊이지 않고 지나간다. 밤낮 없이 들려오는 찻소리를 견디는 일은 무척 성가시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누가 이렇게 시끄러운 도로 옆에 집을 세운 것일까.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걸까. 그러나 집은 그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 세상 모든 집은 저마다의 세월과 사연을 품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아스팔트 길이 놓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길 옆의 오두막집은 오늘도 묵묵한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 집 울타리 사이로, 창문 틈으로, 지붕 위로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도 그 오두막집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아직 할 말을 남겨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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