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치가 있는 집, 리치몬드 타운(1)>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 남쪽에서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는 자그마한 섬입니다. 뉴욕의 다섯 번째 구지만 옛날식 가옥과 거리 풍광이 80년대 초반 미국의 전원도시를 떠올립니다. 느긋하면서도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의 표정 또한 맨해튼에서의 팍팍함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페리 선착장에서 버스로 45분쯤 걸리는 리치몬드 타운은 특히나 예전에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동네라고 하는데 지금도 개발을 늦춘 채 당시 거리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섬에 도착한 직후, 터미널에서 버스를 하나 놓치고는 작은 읍내처럼 생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다 다른 버스를 타고 정오 무렵 리치몬드에 당도했습니다. 버스는 나 혼자만을 남겨둔 채 낙엽들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간 차멀미를 했던 것도 같습니다. 주위에는 사람의 인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딱히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풍경이나 지표 따위도 없었습니다. 찬바람만 휘휘 감기는 11월 오후 녘 풍경이 꽤나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괜히 볼 것도 별로 없는데 여기까지 온 건 아닌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는 언제나 되야 다시 오는 것인지, 낯선 장소에 대한 길치 특유의 경계심으로 마음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휑한 길바닥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길 건너 도로변 저쪽에 있는 그 낡은 집이 문득 저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느 집 창가에 켜져 있는 불빛 하나에도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집이라는 존재는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귀속시키는 뭔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는 듯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집, 자신만의 ‘드림 하우스’를 꿈꾸기도 합니다. 생활의 편리성뿐만 아니라 본인의 개성과 특성까지 모두 고려한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집이 집주인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꿈에 그리던 드림 하우스에 살게 되었다 해도 그 집 울타리 안에 자신만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 또한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집들은 모두 저마다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고 태도이고 몸짓입니다. 그래서 집은 그 사람의 몸 자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노동의 가치로 그 집을 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집은 자신의 소유물이고 분신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사물이나 사람에게도 그에 걸맞는 인연이 따로 있듯이 집들도 그 나름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보면 첫눈에 내 집이다 싶은 집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신기하기도 하고 내 안목이 뛰어나다는 생각에 절로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러나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착각 일지 모릅니다. 사람이 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집이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리치몬드 타운에 도착한 직후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 발견한 그 포치가 있는 오두막집은 오래된 영화 속에 나오는 전통적인 미국식 시골집 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시대 유행에서 한참이나 뒤쳐진 구시대 유물 같은 모양새지만 한편으론 세월의 완고함, 집주인 노인네의 줏대 같은 것이 느껴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화창하고 따스한 계절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마당가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집 앞 포치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앉아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울철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은 집 근처 어디에서도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저 풍경 속에 그 집만이 깊은 침묵에 잠겨 있을 뿐입니다. 문을 꼭꼭 닫아 건 채 겨울잠에 빠져든 그런 적막한 모습으로.

 

집 앞 2차선 도로는 비교적 한가한 상태지만 그래도 차량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밤낮 없이 문밖에서 들리는 찻소리를 견뎌내는 일이 무척 성가시고 때론 고통스럽기조차 할 것입니다. 누가 이토록 시끄러운 도로 옆에 집을 세운 걸까요. 여기 밖에는 마땅히 집을 지을만한 장소가 없었던 걸까요. 집은 그런 질문 따위 대꾸조차 하지 않습니다. 집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집은 저마다의 세월과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여기에 아스팔트길이 깔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길 옆 오두막집은 오늘도 묵묵한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집 울타리 사이로, 창문 틈으로, 지붕 위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사람들이 떠나간 뒤에도 그 오두막집은 침묵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마치 할 말이 아직 남은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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