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호숫가 작은집, 양평에서> 

Watercolor& 갈색 잉크 on paper 2012 

 

호숫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침저녁으로 안개 낀 풍경도 볼 수 있고, 수면 위를 낮게 날아가는 하얀 새도 구경할 수 있고, 맨발로 산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이 주위에 잔뜩 널려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집이면 더욱 좋겠다.


이 그림은 지난번 양평에서 작업했던 것을 집에 돌아와 완성한 것이다. 줄곧 유화 작업만 하다가 모처럼 수채화 팔레트를 펼친 감회가 새로웠다. 대학 시절부터 사용하던 것이니 이제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오래된 팔레트 위에 가을 햇살이 조용조용 내려와 앉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여름을 건너는 조각배, 양평> 

Watercolor on paper, 2012

 

머리도 식힐 겸 야외 스케치를 다녀왔다. 그림 작업을 할 때는 항상 라디오를 켜놓는데 가끔씩 “양평은 자족 도시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양평을 알리는 선전이 나오곤 했다. 차를 몰고 88도로를 달리다 보니 바로 그 양평이었다. 들녘에는 눈부신 햇살이 부서지고 지천으로 널린 푸른 초목들이 꿈속 풍경인 양 정겨웠다.


드로잉 <여름을 건너는 조각배, 양평>  2012

 

모처럼 외출하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연거푸 태풍이 몰아닥쳤다. 이러다 거실 창문이라도 무너져 내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언제 그랬냐 싶게 하늘은 다시 파란빛으로 투명해졌고 아침저녁으로 감겨오는 서늘한 기운이 가을 냄새를 풍겼다. 온종일 실내 온도를 화덕처럼 달궈 놓았던 여름이 뚜벅뚜벅 저만큼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겨울이 오면 너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내년까지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일기를 쓰는 여자1-1>

Oil on canvas, 65×54cm, 20122014

 

중학생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동생과는 2년씩이나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두 자매의 얼굴이며 체격 조건이 너무 흡사해서 친구인 우리들도 헷갈릴 정도였다. 겉모습이 닮았다고 속까지 닮는 것은 아닌지 아쉽게도 언니 쪽이 학과 성적도 훨씬 월등하고 운동도 잘해서 종종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


반 아이들이 가끔씩 지나가는 말처럼 두 사람에 관해 한두 마디씩 툭툭 던질 때마다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한 부모 밑에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긴 했지만 한쪽이 더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났으니 다른 한쪽은 좀 억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 더 있다는 게 과연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쌍둥이 유전자는 생명에 대한 경의와 신비를 느끼게 한다. 이 지구상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 가상의 생명을 지닌 그림에도 그런 쌍둥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들 쌍둥이 작품은 작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그림을 다시 복제한 예라 할 수 있다. 지난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피카소를 밀어내고 가장 높은 낙찰가를 기록한 뭉크의 절규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림 <일기를 쓰는 여자1-2>

Oil on canvas, 65×54cm, 2019

 

뭉크의 작품이 경매되었다는 뉴스로 한동안 신문과 인터넷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미술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조차 기사 내용에 관심을 보인 것을 보면 뉴스의 파급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하루하루 팍팍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서민들에게 그림 한 장 가격이 1,370억 원이나 된다는 말은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 로또에 거듭 당첨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놀랍고 생경한 일이었다. 평소 뭉크 그림을 좋아하던 나 역시 기사를 읽다 말고 휴우 한숨을 크게 내쉬며 손가락을 꼽아 숫자를 세어 보았다.


뭉크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필요한 순간마다 필요한 장소, 적재적소에 있었다는 점이다. 젊은 나이에 파리로 가서 인상파나 야수파 화가들에게 다양한 자양분을 습득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몇 년 후 다시 고향인 노르웨이 오슬로로 돌아온 그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과거의 전통적인 그림만 보아 왔던 사람들에게 그의 거칠고 야수적인 작품은 큰 충격이었다. 원색적인 비난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밑그림 같은 습작일 뿐이다, 스케치풍의 어설픔만으로 관람객을 모독하고 있다는 비평도 있었고, 그림 주제에 대한 불만, 너무 노골적이고 멜로드라마 같다는 조롱도 있었다.


뭉크를 둘러싼 오슬로 미술계의 소식을 접한 베를린 미술협회가 그를 초청해 전시회를 연 것은 아마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시장을 둘러보러 왔던 협회장이 이건 그림도 아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퇴장하는 바람에 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건을 진화하기 위해 미술협회는 전시를 계속 진행할 것인지에 관한 안건을 투표에 부쳤는데 결과는 전시 중단이었다. 전시를 하다 말고 작품을 벽에서 떼어 내야 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큰 수모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뭉크의 이름을 먼 외국에까지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투표 결과에 불만을 품은 미술가들이 협회를 탈퇴하고 베를린 분리파를 형성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소문을 등에 업고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정치가나 방송인들,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들, 저술가와 언론인, 대학교수, 역술가들. 이들에게 스캔들은 어쩌면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전략적으로 추문에 휩싸이거나 예민한 쟁점을 몰고 다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화가들 중에서도 마네, 쿠르베, 고갱, 피카소, 앤디 워홀, 달리 등이 활동 당시 큰 이슈를 몰고 다녔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카라바지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벤스, 렘브란트 등도 마찬가지다.


뭉크 역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그런 스캔들의 수혜자였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이력만으로 그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는 변방의 화가였다. 나이 들어 더욱 완숙한 작품으로 주목을 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위대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위대한 것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 많은 쟁쟁한 화가들을 제치고 뭉크가 21세기 미술품 최고 경매가를 갱신했다는 소식에 새삼 격세지감을 느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이 지구상에서 자신만의 전시실을 따로 가진 유일한 작품이다. 그것도 다른 데가 아닌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다. 그 그림 앞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의 장막이 떠오른다. 어떻게든 인증 사진 한 장 찍어 보겠다고 몰려들던 사람들 말이다.


모나리자의 그윽한 미소라니

두꺼운 방탄막으로 둘러싸여 있어 원화의 실체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미술관에서는 함부로 사진을 찍지 못한다. 그림이 빛에 계속 노출되면 물감이 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방에서는 관람객의 윤리를 강조하는 감시자가 아무도 없다. 카메라를 집어넣으라고 했다가는 큰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작품 하나 보려고 멀리 루브르까지 날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지하 현관에서 근무하는 경비원이 하루 종일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무려 92%모나리자 어디 있어요?”라고 한다. 6%밀로의 비너스 어디 있어요?”이고, 나머지 2%나 지금 어디 있어요?”라는 존재론적 질문이라고 한다. 오래전 책에서 읽은 이야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아무튼 루브르에 왔으니 잽싸게 2층으로 올라가서 으쌰, 으쌰 겨우 사람들 장막을 뚫고 들어간 다음 언능 찍어! 김치!” 하고 사진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모나리자 이야기를 꺼내느냐고요. '절규'가 이제 그 모나리자만큼이나 유명해졌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모나리자는 이 세상에 단 한 장뿐이지만 절규는 적어도 다섯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작품 절규가 모습을 드러낼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뭉크 <절규>1893년, 캔버스, 유채, 91X73cm


절규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도 있고 종이에 파스텔 등 혼합 재료로 그린 것까지 네 점이 있으며석판화로 제작된 것까지 합하면 모두 다섯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이번에 경매에 나온 작품은 개인이 70년 가까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다른 작품들에 비해 색채가 특히 강조된 그림이라고 한다아마 파스텔화 위에 유화를 덧칠해 그린 작품이 아닌가 싶다.


위 그림은 오슬로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다뭉크의 작품은 독특하다그것이 그가 유명해진 또 하나의 이유이다그는 당시 파리 화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절규에서도 인상파나 야수파 화가들의 환하고 맑은 색채와 달리어둡고 축축한 북구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절규가 큰 인기를 얻게 된 것도 북유럽 특유의 노스탤지어 어린 우수와 고독좌절의 기미그리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 속 긴장과 스트레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 그림은 마치 사람의 귀를 찌르는 비명과도 같다이런 극단적인 순간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상황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감각이 얼어붙는 공포의 순간이 떠오른다눈앞이 흐려지고 판단 능력도 마비되는 상태이다뭉크는 공포의 극단을 표현하기 위해 객관적인 사실성을 버리고 자신만의 표현법을 선택했다얼굴의 이목구비는 계란처럼 단순해졌고 신체의 윤곽도 흐물거리는 배경 속에 녹아든다화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다리는 불길하게 보인다같은 공간 안에서도 서로 다른 두 상황이 감지된다뒤따라오는 두 인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어오고 있지만앞서 가던 이 남자만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무엇 때문일까.

  

뭉크 <절규>1896년, 석판화, 35X25.2cm

 

뭉크의 일기를 보면 친구들과 산책을 하다가 다리 아래 멀리 보이는 피오르드 만 위로 붉은 구름이 피처럼 요동치고, 그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의 실제 경험이 화폭 속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셈이다.


같은 제목의 절규가 여러 점 존재하는 이유는 뭉크의 독특한 작업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쉽게 놓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작품을 가져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밤새 비슷한 그림을 또 그리곤 했다. 이런 이유로 절규뿐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여러 버전이 남아 있다.

 

정신분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을 예로 들며 공황장애나 광장 공포증 같은 심리 현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실제로 뭉크는 예민한 성격이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알코올 의존도 심했다. 자신의 귀에만 들려오는 비명 같은 감각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태어난 직후부터 죽음은 나의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천사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돌봐주던 누나마저 열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이런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뭉크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반복해 다루었던 것도 이런 개인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마음속 두려움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응시하려 했다. 그가 느꼈던 내면의 불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정과도 닿아 있다. 이유 없이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초조함 말이다. 한때 이건 그림도 아니다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의 작품이 지금 우리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후기 인상파 화가이자 뭉크처럼 표현주의 계열의 작가이기도 한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다. 그의 작품 빈센트의 침실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다.

 

<빈센트의 침실, 아를> 1888, 유채, 72X90cm,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국립미술관

 

고흐는 아를의 노란집에서 고갱의 방문을 기다리며 침실을 정성스럽게 꾸몄다그 방을 그린 그림이 두 점 전해진다고갱이 도착하기 전 1888년에 제작된 작품은 암스테르담에 있고스스로 귓불을 자른 사건 직후 고갱이 떠난 다음 1889년에 그린 두 번째 작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고흐가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영혼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침실을 그릴 생각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그러나 그가 바라던 영혼의 안식은 오지 않았다그 노란집에서 고흐는 첫 번째 간질 발작을 일으켰고그 집을 나와서는 정신병원으로 직행했다.


<빈센트의 침실, 아를> 1889, 유채, 57.5X74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두 그림은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뒤에 그린 작품은 훨씬 밝고 투명한 햇살 속에 놓여 있다. 화면 구도는 비슷하지만 벽의 색, 창으로 들어오는 빛, 바닥의 색조 등이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왜 그는 같은 방을 두 번 그렸을까. 혹독한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림에 대한 확신이 더 깊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이지만 예술적 감수성과 대상에 대한 시선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화가들이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린다. 무엇인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일 수도 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다시 시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끝이 없다. 작은 화면으로 읽고 있을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다른 화가 이야기만 하다 보니 정작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한 작품을 소개한다.


오늘 소개하는 나의 작품은 일기를 쓰는 여자 1’이다. 이미 앞선 글 ‘3. 뮌헨, 일기를 쓰는 여자에서 일기를 쓰는 여자 2’를 먼저 소개한 적이 있다. 두 그림은 서로 닮은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처음에는 일기를 쓰는 여자 1’을 그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새로운 캔버스를 꺼내 일기를 쓰는 여자 2’를 먼저 완성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첫 번째 그림을 손보게 되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나 자신도 잘 설명하기 어렵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캔버스 속 사정과 삶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예술도 그렇고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결국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는 없다. 숨이 막힐 만큼 힘든 순간이 오면 피하지 말고 그 감정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뭉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두려움을 외면하기보다 끝까지 응시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참고. 김미진의 오후 3‘22. November in 뉴욕(1)’에 가면 같은 해 11월 뉴욕 Museum of Modern Art에서 찍은 사진을 볼 수 있다. 그곳에 전시된 뭉크의 절규와 그 앞에 선 관람객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가 그 그림 앞에 서서 자기만의 침묵을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일기를 쓰는 여자 2>

Oil on canvas, 61×50cm, 2012


여행을 하다 보면 외로움이 초록 물결처럼 출렁거릴 때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쉼 없이 걷고 또 걸어 들판을 지나고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낯선 얼굴들이 하나씩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어느새 흐린 그림자 하나가 등 뒤로 길게 눕는다. 여기는 어디일까.

 

낡은 지표처럼 뜬금없는 그리움이 펄럭인다. 길모퉁이 카페의 통속적인 풍경 속에서도 한낮의 태양은 졸고 있다. 커피 대신 주문한 맥주 한 모금은 달고 시원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혼자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결코 이러려고 길을 떠나온 것은 아닌데.

 

마음속에 회한이 소용돌이친다. 추스를 수 없는 감정의 갈피들이 뒤엉켜 있다. 내 집 작은 방의 어둠 속에서는 여행을 꿈꾸었고, 여행길에는 내 집 작은 방의 어둠을 목말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꽃과 과일이 있는 정물>

Oil on canvas, 61×50cm, 2012

 

오늘은 정물화에 대한 이야기로 문을 열려 한다. 정물화는 화가들에게 수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주는 중요한 장르이다. 형태와 색채 배열, 질감과 사물 간의 연결 관계, 화면 구성 등을 연구하는 데 이보다 매력적인 주제는 드물다.


오래전 종교화와 역사화가 각광을 받던 시절에는 정물화만 따로 그리는 화가가 거의 없었다. 그림의 일부로 그렸을 뿐 주인공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그린 정물화를 본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물화가 벨기에나 네덜란드 같은 지역에서 구매력을 갖춘 시민 세력에 의해 하나의 미술 형식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졸부들에게는 흔히 문화적 열등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집안에 오리지널 작품이 한 점쯤 걸려 있으면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지 않겠는가. 요즘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심리와 비슷한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튼 음식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고, 물건도 사 보던 사람이 잘 사는 법이다.


과연 어떤 그림을 사야 잘 샀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집안 식구들 눈치도 봐야 하고 남에게 근사하다는 소리도 듣고 싶을 것이다. 교양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이제 돈을 벌고 큰 집을 마련했지만, 그에 걸맞은 문화적 품격을 갖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사정이 대체로 그랬다.


일반 대중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고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르면서 문화의 흐름도 바뀌기 시작했다. 노래 가사가 있는 오페라, 사랑 이야기가 플롯을 이끄는 소설, 공감하기 쉬운 정물화 같은 장르가 부상했다. 당시에는 특히 단단하고 반짝이는 병과 그와 대조되는 부드러운 물건, 꽃과 과일 등이 함께 놓인 그림이 인기를 끌었다. 우리가 미술책에서 보아 온 정물화 양식도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물화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정물화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정물화를 한 장도 그려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도 가장 먼저 손대는 것이 바로 정물화이다. 요즘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 주목받는 시대이다. 새롭지 않은 것은 식상한 것, 가치가 떨어지는 것, 궁상맞은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런 점에서 정물화는 어쩐지 불리해 보인다.


예술가들은 유행을 선도한다고들 한다. 무엇보다 개성이 중요한 시대이다. 그런 만큼 예술가들도 다른 것, 새로운 것이 없을까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궁리한다. 우리가 배운 철학이나 문화사, 미술사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 온 것처럼 보인다.


뭔가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을 화가들도 느낀다. 어찌 지금만 그런 상황이겠는가. 밀레를 좋아하고 전통적인 주제를 즐겨 그리던 고흐가 인상파 화풍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달려간 것도 그런 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시 그곳을 떠나 아를로 향했다.


예술가들은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 방황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것, 이미 많이 시도된 것, 바로 그 안의 빈틈 속에 숨어 있다화가들은 과연 어디에서 새로움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정물화는 결코 새로운 양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체된 옛 장르도 아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정물화 안에는 무궁무진한 회화적 가능성이 숨어 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사과 하나로 20세기 미술을 뒤흔들었다. 그가 반복해서 그린 정물화는 큐비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피카소 역시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시도하면서도 끊임없이 정물화로 되돌아갔다. 듀상의 자전거 바퀴’, 워홀의 코카콜라 병캠벨 수프’, ‘브릴로 패드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정물화 전통 위에 서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마그리트가 파이프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쓴 것도 사실적인 정물화 기법을 통해 기존의 관념을 뒤틀어 놓은 사례이다.


미술을 새로운 양식과 기법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행 중 네덜란드에서 반 고흐의 붓꽃을 실제로 보았을 때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터너의 달리는 기차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모네의 건초더미수련연작,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 회화, 로스코의 색면 회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매혹적이고 숭고한 아름다움은 설명하기 어렵다. 음악이 그렇듯 그림도 그러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며 기억되는 무한한 감동이다. 사르르 파장을 그리다 깊숙이 스며드는 것. 그런 총체적인 떨림. 예술 작품의 위대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못 거창해진 느낌이다. 내가 오늘 사이트에 올린 정물화 소품은 그런 미술사적 야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평범한 그림이다. 게다가 미완성이다. 이미 그림을 눈여겨본 사람은 그냥 그런 그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일종의 휴식 같은 작품이다.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정물화를 그린 것은 지난봄 늦은 오후였다. 그날은 왠지 무료하고 심심했다. 작업 중이던 그림도 잘 풀리지 않았다. 그때 문득 예전에 화실에서 수채화 정물화를 그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오랫동안 추상화 작업에 몰두해 왔다. 어찌 보면 자연으로부터 꽤 멀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화실에 대한 기억이 밀려오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도 무엇인가 결심하면 곧장 실행에 옮기는 편이다. 그날도 바로 행동에 나섰다. 화실에 있던 빈 캔버스를 펼쳐 놓고 창가의 꽃 화분과 냉장고에 있던 과일을 가져다 놓았다. 부엌에 있던 다기 세트의 일부와 서재에 있던 석유 램프도 옮겨 놓았다. 책장에 꽂혀 있던 파란 책 한 권과 오래전에 쓰던 검은 표지의 작은 스케치북도 눈에 들어왔다.


전통적인 정물화 구성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화면을 삼등분하는 것이다. 정물이 너무 많으면 구성이 복잡해질 뿐 좋지 않다. 사물을 어떻게 연결하고 떼어 놓느냐에 따라 그림의 주제가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규칙을 따지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이끄는 대로 사물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재빨리 그리기 시작했다. 화폭 안에서 붓 자국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즐겁게 그렸는지 모른다. 두려움도 고민도 없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해가 기울고 채광이 바뀌면서 더 이상 작업을 이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이 정물화는 그날 이후 작업실 한쪽에 걸려 있다. 내가 끝내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것은 더 그렸다가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망가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왜 다시 구상화를 그리고 싶어졌는지 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연에서 멀어진 사람의 외로움, 삭막함, 끝없이 펼쳐진 허공 같은 느낌. 그런 것들이었다.


그날 나는 그림을 그리며 아이처럼 기뻤다. 그 즐거움은 모처럼 찾아온 천사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지금은 화분의 꽃도 시들었고 과일도 누군가 먹어 버려 더 이상 같은 정물을 놓고 작업을 이어 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신선한 붓질과 오랜만에 찾아온 순수한 기쁨, 그 생생한 가슴 시린 감각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림에는 완성이 따로 없다. 완성에 대한 강박만 없다면 이런 습작도 괜찮다. 작업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가 늘 문제이다. 아마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인생 역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나는 왜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이 그림은 어디까지 가려 하는가.

거기까지 가서 또 후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지나간 길에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출구나 도피처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면, 절벽이라면.

이 길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끝은 어디인가.

나는 과연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어느 단계까지, 어느 높이까지, 어느 깊이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