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과 과일이 있는 정물>oil, 61×50cm, 2012
오늘은 정물화에 대한 이야기로 문을 열겠습니다. 정물화는 화가들에게 수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주는 중요한 장르입니다. 형태와 색채 배열, 질감과 사물간의 연결 관계, 화면 구성 등을 연구하는데 이보다 매력적인 주제는 없습니다.
오래전 종교화와 역사화가 각광을 받던 시절에는 정물화만 따로 그리는 화가들이 없었지요. 그림의 일부로만 그렸을 뿐 주인공 역할을 떠맡기지 않았습니다.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그린 정물화를 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정물화가 벨기에나 네덜란드 같은 지역에서 구매력을 갖춘 시민세력에 의해 하나의 미술형식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입니다.
졸부들의 공통된 특징은 문화적 열등감입니다. 집안에 오리지널 작품이 한 점쯤 걸려 있으면 그래도 뭔가 좀 있어 보이잖아요. 요즘에 명품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 일겁니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는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고, 물건도 사보던 사람이 잘 사는 법입니다.
과연 어떤 그림을 사야 잘 샀다는 말을 들을까요. 집식구들 눈치도 봐야하고, 남한테도 근사하다는 소리 정도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양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줄곧 일만 하느라 문화생활과는 일체 담을 쌓고 살아온 상태입니다. 이제 제법 성공해서 돈도 벌고 큰 집이 생겼지만 그에 걸맞는 품격이라도 갖추려면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는 데 그런 척이라도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요. 당시 사정이 딱 그랬습니다.
일반 대중이 사회 전면에 나서고 주요 소비자도 등장하면서 문화 패턴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가사가 있는 오페라, 사랑 이야기가 플롯을 이끌어가는 소설, 공감하기 쉬운 정물화 같은 장르가 부상했습니다. 당시에는 특히 단단하고 반짝이는 병과 이와 대조되는 부드러운 것, 꽃과 과일 같은 것이 조합된 그림이 인기를 끌었는데 우리가 미술책에서 보아왔던 정물화 양식도 이때 확립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정물화가 고리타분하다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주위에서 흔히 보는 게 정물화니까요.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정물화 한 장 안 그려 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화실에 나가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도 제일 먼저 손을 대는 게 바로 이 정물화입니다. 요즘은 뭔가 새로운 것만이 주목을 끄는 시대입니다. 새롭지 않은 것은 식상한 것, 가치가 떨어지는 것, 궁상맞은 것으로 인식되기 십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쩐지 정물화는 불리해 보입니다.
예술가들은 유행을 선도한다고들 합니다. 무엇보다 개성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만큼 예술가들도 뭔가 다른 것, 새로운 것이 없나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궁리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배운 철학이나 문화사, 미술사 같은 것도 계속 뭔가로 진화를 거듭해 온 것 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뭔가 새롭게 변모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을 화가들도 느낍니다. 어찌 지금만 그런 상황이겠습니까. 밀레를 좋아하고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을 그리던 고흐가 인상파 화풍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달려간 것도 그런 강박증 때문이었겠지요. 물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아를로 달아났지만 말입니다.
예술가들은 항상 새로운 자극을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 그동안 많이 시도되었던 것, 그 안, 그 빈틈에 숨어 있다고 하지요. 화가들은 과연 어디서 새로움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요. 정물화는 결코 새로운 양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체된 옛날식 그림 장르만도 아닙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정물화에는 사실 무궁무진한 회화적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느는 사과 하나로 20세기 미술을 뒤집어엎었습니다. 세잔느가 반복적으로 그린 정물화는 큐비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에 영향을 받은 피카소 역시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다가도 끊임없이 정물화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초현실주의자이자 전위 예술가였던 듀상의 '자전가 바퀴' '샘', 팝 아티스트 엔디 워홀의 '코카콜라 병'이나 ‘캠블 수프’ ‘브릴로 패드’도 따지고 보면 모두 정물화 전통을 기반으로 한 것들입니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크게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고 한 것 역시 사실적인 정물화 기법을 통해 기존의 관념을 비튼 것이지요.
미술을 새로운 양식과 기법 차원만으로 접근하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여행 중에 네덜란드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을 실제로 보았을 때는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윌리엄 터너의 달리는 기차에서 품어내는 수증기나 모네의 '건초더니' '수련' 연작, 윌리엄 드쿠닝의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그림들, 로스코의 색면회화 들은 또 어떻고요. 그런 매혹적이면서도 숭고한 아름다움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음악이 그런 것처럼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고 기억되는 무한의 감동입니다. 사르르 파장을 그리다 깊숙히 파고드는 그런 것. 그런 총체적인 떨림. 예술작품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겠지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못 거창해진 것도 같습니다. 제가 오늘 사이트에 올린 정물화 소품은 그런 가슴 떨리는 감동이나 미술사적 야심과는 하등 상관없는 지극히 평범한 그림입니다. 게다가 미완성품이죠. 이미 그림을 눈여겨보신 분은 그냥 그런 그림이로군, 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휴식 같은 작품입니다.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 정물화를 그린 것은 지난 봄 늦은 오후의 일입니다. 뭔가 심심하고 무료했습니다. 작업 중이던 그림도 잘 안 풀리고 아주 지루했습니다. 그때 문득 예전에 화실에서 수채화로 정물화를 그리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그동안의 나는 미술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추상화 작업만 고집해 왔던 터라 어찌 보면 자연으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실에 대한 추억이 밀려오면서 그때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도 뭔가 하나 결심하면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편입니다. 그때도 즉각 행동에 착수했습니다. 화실에 있던 빈 캔버스를 펼치고는 창가에 있는 꽃 화분이며 냉장고에 있던 과일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부엌에 있던 다기 세트의 일부, 서재에 있던 석유램프도 들고 왔습니다. 서가에 꼽혀 있던 파란 책장의 책과 오래전에 사용했던 검은색 표지의 작은 스케치북도 눈에 뜨이더군요.
전통적으로 정물화 구성에 있어서 유용한 법칙은 이미지를 3등분 하는 것입니다. 정물이 너무 많으면 구성만 복잡하지 좋지 않습니다. 사물을 어떻게 연결하고 뗴어 놓느냐에 따라 그림의 주제가 정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 상관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테이블에 늘어놓고 재빨리 그려나갔습니다. 화폭 안에서 붓 자국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이시지요. 얼마나 정신없이, 재미있어 하면서 그렸는지 모릅니다. 일말의 두려움도 고민도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야후! 그러다가 차츰 해가 기울고 채광이 바뀌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요.
이 정물화는 그날 이후 작업실 한 귀퉁이에 걸려 있습니다. 제가 끝내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그렸다가는 뭔가 중요한 것이 망가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또한 왜 다시 구상화를 그리고 싶어졌는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왜 일까? 왜? 아마도 그건 상실감 때문이 아닐까요.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자의 외로움, 그 삭막함,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허공에 대한 절망감,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때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처럼 기뻤습니다. 그 즐거움은 정말 모처럼만에 찾아온 천사의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이 소중했고 달콤했고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화분의 꽃도 다 떨어진데다 과일도 누군가 먹어버려서 작업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신선한 붓 작업과 오랜만에 찾아온 순수의 기쁨, 그 생생한 가슴 시린 느낌, 현실적인 중력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림에는 완성이 따로 없습니다. 완성에 대한 강박증만 없다면 이런 습작도 괜찮다 싶습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항상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마도 제일 크고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인생도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왜 이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지. 이 그림은 어디까지 가려 하는지. 거기에 가서 또 후회하는 것은 아닌지. 모두가 훑고 지나간 길에 나만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출구나 도피처가 없으면 어쩌나, 거기가 막다른 골목이라면.. 절벽이라면.. 도대체 이 길은 무엇인가. 왜 여기에 있나. 이 끝은 어디일까. 나는 과연 거기에 닿을 수 있을까. 끝까지 못 가면 어디까지 가야 하나. 어느 단계까지, 어느 높이까지, 어느 깊이까지..
*글 안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올립니다. 이런 것도 저작권에 걸리는 건지, 조금 걱정되지만.. 미술 책에 있는 걸 그냥 펑펑 찍은 거라 각도도 이상하고 색채도 안 좋지만 관심 있는 분은 참고로 봐 주세요.
세잔느
피카소
피카소

듀상 '샘'

듀상 '자전거 바퀴'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엔디 워홀 '코카콜라 병'

고흐 '해바라기'

고흐 '붓꽃'

모네 '건초더니'

모네 '수련 연작'

로스코

로스코

윌리엄 드쿠닝 '여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