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겨울 어느 날, 고촌>
oil on canvas, 92×73cm, 2012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서울과 경기도가 만나는 도시 외곽 지역이다. 깊은 밤이면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어 적막하다. 창밖 저 아래로 신호등 불빛만 깜빡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온다.


지난여름, 작업실 창밖 풍경을 수채화로 한 번 그린 적이 있다. 최근에는 눈이 많이 내려 여름과는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흑백의 대비가 강조된 도로 주변 풍경과, 그로 인해 더욱 또렷해진 겨울 능선이 마치 단색조의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30호 캔버스에 그린 <어느 겨울날, 고촌>은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이다. 아직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손을 댈수록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 것 같아 일단 멈췄다. 누군가 이 그림을 내 눈앞에서 십 년쯤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일단 여기에 올려두고 더 지켜볼 생각이다. (결국 다시 작업했다. 여기에 올린 사진은 세 번째 단계의 그림이다.) 최근에 작업한 다른 그림 세 점도 올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함께 소개한다.

 

어느새 2012년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워 어젯밤에는 모처럼 밖에 나가 저녁도 먹고 영화도 한 편 보았다. 줄곧 집에서 다운로드 된 영화만 보다가 극장에서 개봉작을 보니 몰입도도 높고 감동도 더 진하게 다가온다. 

 

그림 <, 리치몬드(3)>
Watercolor on paper, 34×23.5cm, 2012

 

어제 본 영화는 레미제라블이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의 플롯은 사랑구원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다시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장발장은 신부의 은혜로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고, 그 이후 평생을 사랑으로 보답하며 살아간다.

 

한편 감옥에서부터 그를 괴롭히고, 출옥 후에도 집요하게 뒤쫓던 형사 자베르는 장발장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그 치욕스러운 구원과 감당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 <, 리치몬드(5)>
Watercolor on paper, 34×23.5cm, 2012

 

카메라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자유를 쟁취하려는 젊은 이들의 얼굴에도 시선을 맞춘다.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말하고자 한 핵심인지도 모른다.


민초들의 삶은 여전히 버겁고 가혹하다. 우리가 피 흘려 얻었다고 믿는 자유는 때로 착시를 일으켜 시야를 흐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금처럼 각박한 시대에 장발장이 보여준 사랑과 희생만이 해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 <램프가 있는 정물>
oil on canvas, 92×73cm, 2012

 

밤이 깊었다. 창밖의 신호등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깜빡인다. 모두에게 따듯한 연말연시가 되기를 바란다. 내년에는 조금 더 많이 사랑하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파란 지붕 집 - 리치몬드 타운(2)>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요즘은 계속 오일 페인팅에 집중하고 있다. 유화는 중간중간 물감을 말려가며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작품을 번갈아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다루고 있는 캔버스가 예닐곱 점쯤 된다. 오늘 올리는 그림은 유화 작업을 하는 틈틈이 그린 것이다. 캔버스들이 물감으로 젖어 있을 때면 이렇게 수채화 팔레트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다.


올해도 어느새 저물어간다.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콜록콜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포치가 있는 집, 리치몬드 타운(1)>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 남쪽에서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는 자그마한 섬이다. 뉴욕의 다섯 번째 구지만, 옛날식 가옥과 거리 풍광은 80년대 초반 미국의 전원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느긋하면서도 인간적인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의 표정 또한 맨해튼의 팍팍함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띤다


페리 선착장에서 버스로 45분쯤 걸리는 리치몬드 타운은, 예전에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동네라고 한다. 지금도 개발을 늦춘 채 당시의 거리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섬에 도착한 직후, 터미널에서 버스를 하나 놓쳤다. 작은 읍내처럼 생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한참 만에 다른 버스를 타고 정오 무렵 리치몬드에 닿았다. 버스는 나 혼자만 남겨둔 채 낙엽들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간 차멀미를 했던 것 같다. 주위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딱히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풍경이나 지표도 보이지 않았다. 찬바람만 휘감기는 11월 오후의 풍경이 꽤 을씨년스러웠다.


괜히 볼 것도 별로 없는데 여기까지 온 건 아닌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는 언제쯤 다시 오는 건지, 낯선 장소에서 길치 특유의 경계심이 점점 마음을 위축시켰다. 아무도 없는 휑한 길바닥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길 건너 도로변 저쪽에 있던 그 낡은 집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집 창가에 켜진 불빛 하나에도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집이라는 존재는 마음을 끌어당기고 귀속시키는 특별한 힘을 지닌 듯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드림 하우스를 꿈꾸기도 한다. 생활의 편리함뿐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성향까지 반영된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그러나 모든 집이 집주인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꿈에 그리던 집이라 해도, 그 울타리 안에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세상의 집들은 저마다 얼굴을 가지고 있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목소리이고 태도이며 몸짓이다. 그래서 집은 곧 그 사람의 몸과도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그 집을 얻었다고 믿고, 그것을 소유물이자 분신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저마다의 인연이 있듯 집 또한 스스로의 주인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사를 위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보면, 첫눈에 내가 살 곳이다싶은 집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 신기해 스스로의 안목을 믿게 되고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의 착각일 수 있다. 사람이 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집이 사람을 선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치몬드 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 발견한, 포치가 달린 그 오두막집은 오래된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미국식 시골집을 떠올리게 했다. 시대의 유행에서 한참 벗어난 구식의 외형이지만, 그 안에는 세월의 완고함과 집주인의 단단한 고집 같은 것이 함께 느껴졌다.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한 계절이었다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집 앞 포치에는 노부부가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집 근처 어디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풍경 속에서 집만이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문을 굳게 닫은 채 겨울잠에 들어간 듯한 적막한 모습으로.


집 앞의 2차선 도로는 비교적 한가하지만, 차량들은 끊이지 않고 지나간다. 밤낮 없이 들려오는 찻소리를 견디는 일은 무척 성가시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누가 이렇게 시끄러운 도로 옆에 집을 세운 것일까.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걸까. 그러나 집은 그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 세상 모든 집은 저마다의 세월과 사연을 품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아스팔트 길이 놓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길 옆의 오두막집은 오늘도 묵묵한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 집 울타리 사이로, 창문 틈으로, 지붕 위로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도 그 오두막집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아직 할 말을 남겨둔 사람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벚꽃>
oil on canvas, 55×46cm, 2012

 

온종일 눈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밖에서 일하는 분들은 얼마나 춥고 힘들었을까. 어느새 겨울이다. 지난여름 양평으로 야외 스케치를 나갔던 일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두 계절이 흘러갔다. 그리고 12.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한 해가 너무 짧은 것 같고,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보다 더 짧은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착잡해진다.

 

뉴욕을 다녀온 뒤, 죽어 있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자극이 워낙 강해서 한동안 혼미한 상태로 미로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림 몇 장을 망치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물화에 매달렸다. 문 밖에 내놓았던 탁자를 끌어다 놓고, 전에 한 번 다뤘던 벚꽃 화병을 올려놓았다. 특별한 배경이나 장식 없이 화병 하나에만 집중했다.

 

오늘 올린 벚꽃은 완성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미완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완성이 무엇인지 묻게 되어, 그 지점에서 작업을 멈췄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상황에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소설도 초고를 쓴 뒤 석 달쯤 서랍에 넣어두라고 조언한다. 그림도 다르지 않다. 너무 오래 방치하면 곰팡이가 슬겠지만, 열기를 식히는 정도의 거리는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객관적인 시선이 생긴다.

 

뉴욕에서는 블로그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그 안의 작은 도서관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처음으로 내 글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무척 기뻤다. 예전 작가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홀로 작업하며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이들에 비하면 지금은 송구할 만큼 여건이 좋아졌다. 물론 작업에 따른 고충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겠지만, 이렇게 컴퓨터 안에 가상의 갤러리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오늘 하루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일은 무엇을 그릴지, 캔버스 사이즈를 더 키워야 할지 그런 궁리를 한다. 과거의 화가들은 여러 면에서 현실의 제도에 묶여 있었다. 후원자의 눈치를 봐야 했고, 주문자의 취향과 요구를 세세히 파악해야 했다.


반면 오늘의 작가들은 훨씬 넓은 자유를 누린다. 어떤 이들은 그 자유 자체를 주제로 삼기도 한다. 그런 작업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자유란 무엇일까. 새로운 도전을 부추기고, 심장을 뛰게 만들며, 무언가를 밀어붙이게 하는 힘. 그러나 때로는 그 자유가 두렵고 위태롭게 느껴진다.


예전의 화가들은 선택의 폭이 좁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 교회 벽화를 그릴 때는 성경을 따르면 되었고, 초상화를 의뢰받으면 인물의 이목구비와 옷감의 질감, 장신구의 반짝임에 집중하면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들에게는 끝없는 자유와 함께, 어디로든 떨어질 수 있는 추락의 자유까지 주어진다.


스스로 후원자이자 고객이 되어 자신에게 주문을 내리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계몽주의가 남긴 자유라는 선물은 지나치게 달콤해서 때로는 치명적이다. 기준점이나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길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방이 안개처럼 흐릿하다. 이 공백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저 어딘가에서 내 얼굴만 노려보는 그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방법은 하나다. 한 번에 하나씩. 한 번에 한 주먹씩. 그러다 보면, 어느 쪽이든 먼저 쓰러질지 모른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장 배지> (2012)


어느새 뉴욕을 떠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오후 7시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 자정을 넘긴 시각에 비행기에 오르게 되니, 계산해 보면 오늘 밤과 내일 하루를 더 머무는 셈이다. 내일 낮 12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하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1517일 동안의 뉴욕 체류는 길었다고도, 짧았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나는 일기를 쓰고, 이것저것을 담아 두기 위한 작은 크로키북을 들고 다닌다. 이번에도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한 권을 거의 채워가고 있다.


인천공항을 떠난 순간부터 이 작은 노트는 나의 유일한 말벗이자 친구였고, 때로는 동반자였다. 이런 여행일기조차 끄적거리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 긴 시간을 거리에서 혼자 보낼 수 있었겠는가. 생각할수록 대견한 크로키북이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적거나 그리거나 오려 붙인 것들은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사진이 포착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겉모습의 구도와 윤곽만 비슷할 뿐, 색채나 분위기는 전혀 다를 때가 많고 중요한 디테일도 사라지기 쉽다.

요즘은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사진을 찍는 횟수는 늘어났지만, 그만큼 희소가치도 줄어들었다. 예전에 필름으로 찍을 때는 사진을 현상해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고, 잘 나온 사진을 골라 벽에 걸어 두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파일이나 폴더 속에 담아 두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여행일기란 들고 다니기도 버거운 구식 카메라로 흑백 필름을 찍어, 기억을 현상하고 인화해 오래 간직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친구나 아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실 집중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였고, 정말로 줄기차게 미술관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짐가방을 꾸리다 보니 그동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갈 때마다 받았던 입장 배지가 한쪽에 쌓여 있었다. 옷깃에 달고 다니는 얇은 금속 배지들이다. 세어 보니 모두 아홉 개였다. 그러니까 아홉 번이나 메트에 다녀왔다는 뜻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다른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동선이 길어져 메트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나름 뿌듯한 하루하루였다.


메트에는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부터 현대의 미니멀 아트와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에드워드 호퍼, 보나르, 마티스, 모네, 르누아르, 마네, 척 클로즈, 클레, 피카소, 베르메르, 드가, 고흐, 로트렉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어 더욱 기뻤다.


그림을 보다가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잠깐씩 작품을 모사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손으로 그려보는 경험은 전혀 다르다. 내가 언제 또 뉴욕에 와서 이렇게 혼자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을 따라 그려 보겠는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림 앞에서 펜을 쓱쓱 움직였다.

  

펜 드로잉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 자화상 모사>

크로키북 중, 2012

 

어제는 스태튼아일랜드에 다녀왔다. 일반 가정집처럼 생긴 작은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마주친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은 조금 뜻밖이었다. 고야는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큐멘터리적 시선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가 아닐까 싶다. 아래 스케치는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였는데,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장면이라 나중에 자료가 필요할지도 몰라 어설프게나마 비슷하게 그려 보았다. 

 

드로잉 <여행 일기 중 고야의 판화와 스태튼 출신 화가 콜맨 루킨의 판화 모사>

크로키북 중에서, 2012


중앙에 있는 악마처럼 생긴 폭군의 하반신 묘사가 그다지 정확하지 않아 조금 난감했다. 이렇게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작업 과정에서 생긴 실수나 고민, 갈등과 다시 시도한 흔적 등을 그대로 집어낼 수 있다. 물론 그림의 외형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 관람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경비원은 백인 중년 여성이었는데,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때로 친절한 말벗이 되어 주었다. 스태튼 출신 화가 콜먼 루킨의 판화와 모노톤 추상이 강조된 유화 작품들도 무척 신선했다.


스태튼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많이 정착해서일까. 도로와 건물에서 어딘가 시칠리아 섬 같은 인상이 풍겼다. 여러 면에서 아직 소박한 구석이 많이 남은 섬이었다. 오가는 선상에서 자유의 여신상도 덤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박물관만 둘러본 것은 아니다. 시청 건물 안의 프레스코화도 감상하고, 히스토릭 리치먼드 타운에서는 오래된 저택들의 사진도 많이 찍었다.


날씨도 춥고 허리케인 센디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곳에서도 여행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뜻깊은 시간이었다. 마치 1980년대 초반의 미국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때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진짜 미국의 모습을 그 섬에서 다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 오전에는 메트에 가기 전에 77번가의 아쿠아벨라 화랑에 잠깐 들렀다. 거기서 웨인 티보의 작품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으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간단한 스케치로 그림을 따라 그려 보기도 했다.


드로잉 <웨인 띠보 ‘Boston Cremes’ 모사>

크로키북 중, 2012

 

캘리포니아 화가 띠보의 파이 그림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는 동시에, 반복해서 진열된 음식의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하나의 기호로 환원시킨다. 그는 현재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팝 아트 계열의 그림들, 여자 구두나 사탕, 아이스크림 같은 먹거리, 도시 풍경 등을 주로 그려 왔는데, 아흔이 넘어 추상 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또 다른 흥미로운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의 1960~70년대 작품이 더 끌린다. 조금 더 진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띠보의 여든 번째 생일을 휘트니 미술관에서 직접 축하해 드렸다고 한다. 노구의 화가는 여전히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분이라며 칭송이 자자했다.


오늘은 또 다른 이야기를 귀동냥했다. 전시를 보러 온 어느 강사가 띠보의 요즘 근황을 들려주었다. 젊고 활동적인 부인과 함께 살고 있고, 다섯 살쯤 된 쌍둥이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뜻밖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멋진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띠보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수영복 차림이나 가운 차림의 여자가 혹시 지금의 부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뉴욕 사람들은 띠보의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작품 전시회 역시 연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미술관 같은 데서는 더 이상 현대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를 열기 어렵다고 한다. 소장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데다, 이동은 물론 보험 문제 등도 까다롭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렇게 화랑에서만 전시를 열 수 있다고 하는데, 덕분에 나는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실컷 그림을 구경하고 이렇게 작품 모사도 할 수 있었다. 

 

크로키북 중에서 <웨인 띠보 ‘Hot Dog Stand’, ‘Pastel Scatter’ 모사>

숙소의 작업대 모습 일부, 2012

 

짐을 정리하다 보니 크로키북 속에 그동안 그려 놓은 모사 스케치들이 제법 쌓여 있었다.
오늘은 계속 펜 스케치만 하다가 색을 한번 얹어 보고 싶어 수채 물감을 꺼냈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펜으로만 그렸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위에 물감을 얹으니 밑그림이 뭉개져 버렸다. 갤러리에서 다리가 뻣뻣해질 때까지 공을 들여 그린 그림이라 더욱 아쉬웠다.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지니 뉴욕에 머무는 동안 센트럴파크에 나가 하루쯤 사생 스케치를 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밤이 깊었다. 잠깐 나가 숙소 근처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오탈자나 문장 정리는 시간이 날 때 다시 살펴볼 생각이다. 그런 것까지 꼼꼼히 챙기다 보면 오늘 밤 안에 이 글을 끝내지 못할 것 같다서울에 돌아가 이 기록을 올리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이곳에서 글을 마무리한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