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 캔버스에 유채 55X46cm 2012
온종일 눈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밖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무척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겨울입니다. 지난여름 양평으로 야외스케치를 하러 갔던 게 어제 일 같은데 벌써 두 계절이 흘러가버렸습니다. 그리고 12월...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한 해가 너무 짧은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인생은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마음만 복잡합니다.
뉴욕을 다녀온 후 죽었던 세포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성이 어찌나 강하던지 한동안 혼미한 상태에서 미로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림 몇 장을 망치고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새로운 다짐을 하고는 정물화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문 밖에 내놓았던 탁자를 끌어다 놓고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 벚꽃 화병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배경이나 장식 없이 그냥 화병 하나에만 집중했습니다.
오늘 올린 '벚꽃'은 다 완성했다고 할 수 없지만, 과연 내가 생각하는 완성이라는 게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에 일단 중단했습니다. 작업 할 당시에는 그 상황에 너무 밀착되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은 소설 작업도 초고를 쓰고는 석 달 가량 서랍에 집어 넣은 채 방치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 입니다. 너무 오래 내버려 두면 곰팡이가 피겠지만 가끔씩 열기를 삭히는 선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블로그가 있어서 심심한 줄 몰랐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거기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 처음으로 제 글에 댓글이 달린 걸 보고는 무척 기뻤습니다.(소심한 답글, 양해 바랍니다. 워낙에 그런 데는 서툴고 익숙지 않은 터라..) 예전 작가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자 작업하며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그런 분들에 비하면 지금은 송구하다 싶을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물론 작업에 따른 고충이야 피차일반이겠지만 이렇게 컴퓨터 안에 가상 갤러리도 만들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소통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고맙고 소중합니다.
오늘 하루도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내일을 뭘 그릴까, 좀 더 사이즈를 키워야 하는 건 아닐까, 저는 지금 그런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화가들은 어느 면에서 현실 제도에 끌려다닌 면이 많습니다. 후원자의 눈치도 봐야 하고 그림을 주문한 고객의 입맛과 특성까지 모두 파악해야 했으니까요. 요즘 작가들은 그에 비해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그런 자유를 주제 삼아 작업하기도 합니다. 그런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합니다. 과연 '자유'라는 건 뭘까요. 새롭게 도전하게 만들고, 가슴을 뛰게 하고, 뭔가를 도발시키고, 추진하는 동력...때때로 저는 이 '자유'가 두렵고 무섭기만 합니다.
예전의 화가들은 운신의 폭이 좁긴 했지만 자신이 뭘 그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회 벽화를 그릴 때는 성경을 보면 되고, 고객의 얼굴을 그릴 때는 그냥 그리라는 대로 멋진 이목구비와 옷감의 질감처리, 장신구의 반짝임에만 신경 쓰면 되었지요. 그러나 현대 작가들에게는 끝없는 자유의 확산 뿐만 아니라 추락의 자유까지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후원자이자 고객이 되어 자신에게 오더를 내리는 상황이 결코 녹녹하지 않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이 가져다 준 자유의 선물은 너무 달콤해서 때론 치명적입니다.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건 그만큼 오류에 빠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방이 뿌연 안개처럼 흐려 있습니다. 이런 진공 상태를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까요. 저기 어딘가에서 내 얼굴만 노려보고 있는 그 녀석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 걸까요... 한 번에 한 놈씩, 한 주먹씩..그러다 내가 먼저, 띠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