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식을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출발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의 과제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실수와 실패의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최고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는 부모가 아니라, 부모라는 직업의 불가능한 성격을알고 있는 부모다. - P87
최악의 부모, 자식들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부모는 자식들을 가르칠 의무를 저버리는 부모라기보다는자신의 부족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말의 계율‘로 자식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고개 숙일 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이 계율을 대신한다고 믿는 어리석은 부모다. 이들은 선생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앎이 하나의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아이에게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이들이 자식들의 삶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말의 계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대신 자신이 아이들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 P87
완벽하고 이상적인 모델로서 존재해야 할 의무를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악의 부모는 이상적인 모델이 되겠다고 자식들 앞에나서는 부모다. 부모가 불가능한 것들, 거세의 원리와 스스로의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어른이 자신의 행동에서 ‘말의 계율‘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 P110
우리 시대의 문제는 반대로 새로운 세대를 보살피겠다는 의지의부재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초월적 쾌락주의의 이데올로기가지나치게 억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신속하게 청산을 원한 모든 교육적 담론의 분해에서 비롯된다. 관점은 다르지만 푸코 역시 이러한 문제를 간파했다. 그는 통제를 담당하던 절대적 ‘타자‘가 약화되면서 완전히 분해되는 지경에 이르러 새로운 세대를 ‘계율‘ 없는 세계에 몰아넣었다고 보았다. - P115
현대인들의 초월적 쾌락주의는 어른의 의무인 교육을 도덕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폄하한다. 결과적으로 자유는이제 아무런 제재나 의무감 없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늘어만 가는 의무가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고, 계율의 부재가 욕망의 창조적 힘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자유는 어떤 만족감도 창출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우울증과 연계될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서 끊임없이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그럴 리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우울하다니?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들의 자유가 사실은 감옥일뿐이며 이 감옥이 아무런 미래가 없고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하는 단순한 쾌락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 P118
15 (옮긴이) ‘부재하는 성관계‘가 성관계의 실질적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이 <세미나 20권>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바 있는 ‘성관계의 부재‘는 인간의 성적 쾌락이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동시에 ‘타자‘의 쾌락일 수 없다는 한계를 뜻한다. 라캉에 따르면 "성관계의 부재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사랑과 성, 사랑의 기호와 쾌락, 기표와 육체 사이에서 드러난다. 사랑이 기호를 선호하는 반면 쾌락은 육체를 선호하고, 여성이 부재하는 ‘타자‘의 기호로서 사랑의 기호를 추구하는 반면, 남성은 ‘타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추구한다. 결국 ‘성관계‘는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 P120
‘한‘ 사람의 쾌락은 결코 동시에 ‘타자‘의 쾌락이 될 수 없다. 이성 간의 만남은 치료할 수없는 불균형에 노출된다. 예를 들어 나는 결코 타자로서의 ‘타자‘에게 도달할 수 없고, 나와 다른 것을 나와 비슷하게 만들 수없다. 나는 이성 간의 차이를 상쇄시킬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성관계를 한다 하더라도, 나의 육체는 스스로의 성적 쾌락만을 즐길 수 있을 뿐 ‘타자‘의 육체를 흡수할 수는 없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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