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2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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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는 그랬다. 왕과 관련한 역사이거나 외침과 관련한 역사가 상당히 많다. 이순신 장군이 연승을 거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김성일이 일본을 다녀온 기록은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우리의 역사 사료 중에서 조선의 역사가 가장 많이 현존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듬성듬성 기억하고 있을 뿐 제대로 조선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 기득권과 권력을 우선하고,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으며, 조선통신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김종광씨가 쓴 역사 소설 <조선 통신사 1,2>와 마주하게 되었다. 


1763년 조일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제11차 통신사가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500명의 사내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쇼군을 알현하게 된다. 임진년 조일 전쟁이후1604년 선조 37년에 떠난 제1차 통신사는 조일전쟁에 대해서 전쟁피로인을 데려오기 위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3차에 걸친 통신사는 본질적으로 통신사로서 공식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1636년 인조 임금 때 떠난 제4차 통신사 사절단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통신사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후 제11차 통신사는 1763년 8월 3일 영조 임금때 서울을 출발하였고, 332일이 걸려 1764년 7월 8일 조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이 소설은 1763년 계미 통신사행 즉, 제11차 조선통신사를 다루고 있다.


500명의 사람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우선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크다.서울에서 부산까지 떠나는 그 길을 따라 그들이 머무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할 수 밖에 없다. 왕명에 따라 움직였기에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통신사 일행은 왕명에 따라 움직여야 했으며, 영조 임금의 금주령에 따라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진에 도착하게 되었고, 울산과 창원의 기생들과 함께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대마도로 출발하게 된다.


대마도는 지금도 척박한 곳이다. 그들이 조선을 침범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왜적으로서 조선을 치는 일이다. 조선 통신사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일본 본토와 조선 본토를 연결해 주는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의 수장이었던 정사 조엄과 통신사 일행을 이끌었으며, 다리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 그 당시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길목이 상당히 위험했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의 풍랑에 따라 배를 띄워야 했고, 태풍이 없어야 통신사로서 왕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고, 배가 뒤집히면 100여명의 일해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정사 조엄을 위시하여, 종사관, 역관, 의원, 군관들까지, 더 나아가 노비들까지 함께 동행하는 길은 그렇게 쉽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다. 조엄이 남긴 책과 조선 통신사에 대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소설을 구현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의 시선으로 현대적인 문법체를 사용하고 잇다. 보편적으로 통신사 하면, 백제가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는 그런 형태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또다른 편견과 선입견이다. 이 책을 읽으면 1차에서 12차까지 조선통신사들은 조선 국내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조선통신사를 적절하게 이용하였으며,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아나기 위해서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조선이 필요했던 유황과 무기를 일본을 통해 밀무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그들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다. 조선 통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마도주, 더 나아가 일본은 조선의 인삼을 탐내고 있었으며, 그인삼 재배법을 일본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또한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당근과 채찍을 활용해 그들을 구슬리고 있었으며, 조선 통신사는 일종의 유화정책이다.


흥미롭게 이 책을 읽어나갔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가운데 그들의 자화상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으며, 우리의 역사 속에서 통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더 궁금해졌다. 제11차 조선 통신사를 이끌었던 정사 조엄과 그가 남겨 놓은 해사 일기, 더 나아가 18세기 서역의 문물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일본의 사회적 변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겹쳐졌으며, 조선 통신사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본보다 중국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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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조선통신사 2 조선통신사 2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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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는 그랬다. 왕과 관련한 역사이거나 외침과 관련한 역사가 상당히 많다. 이순신 장군이 연승을 거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김성일이 일본을 다녀온 기록은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우리의 역사 사료 중에서 조선의 역사가 가장 많이 현존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듬성듬성 기억하고 있을 뿐 제대로 조선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 기득권과 권력을 우선하고,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으며, 조선통신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김종광씨가 쓴 역사 소설 <조선 통신사 1,2>와 마주하게 되었다. 


1763년 조일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제11차 통신사가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500명의 사내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쇼군을 알현하게 된다. 임진년 조일 전쟁이후1604년 선조 37년에 떠난 제1차 통신사는 조일전쟁에 대해서 전쟁피로인을 데려오기 위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3차에 걸친 통신사는 본질적으로 통신사로서 공식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1636년 인조 임금 때 떠난 제4차 통신사 사절단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통신사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후 제11차 통신사는 1763년 8월 3일 영조 임금때 서울을 출발하였고, 332일이 걸려 1764년 7월 8일 조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이 소설은 1763년 계미 통신사행 즉, 제11차 조선통신사를 다루고 있다.


500명의 사람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우선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크다.서울에서 부산까지 떠나는 그 길을 따라 그들이 머무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할 수 밖에 없다. 왕명에 따라 움직였기에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통신사 일행은 왕명에 따라 움직여야 했으며, 영조 임금의 금주령에 따라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진에 도착하게 되었고, 울산과 창원의 기생들과 함께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대마도로 출발하게 된다.


대마도는 지금도 척박한 곳이다. 그들이 조선을 침범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왜적으로서 조선을 치는 일이다. 조선 통신사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일본 본토와 조선 본토를 연결해 주는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의 수장이었던 정사 조엄과 통신사 일행을 이끌었으며, 다리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 그 당시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길목이 상당히 위험했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의 풍랑에 따라 배를 띄워야 했고, 태풍이 없어야 통신사로서 왕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고, 배가 뒤집히면 100여명의 일해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정사 조엄을 위시하여, 종사관, 역관, 의원, 군관들까지, 더 나아가 노비들까지 함께 동행하는 길은 그렇게 쉽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다. 조엄이 남긴 책과 조선 통신사에 대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소설을 구현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의 시선으로 현대적인 문법체를 사용하고 잇다. 보편적으로 통신사 하면, 백제가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는 그런 형태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또다른 편견과 선입견이다. 이 책을 읽으면 1차에서 12차까지 조선통신사들은 조선 국내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조선통신사를 적절하게 이용하였으며,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아나기 위해서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조선이 필요했던 유황과 무기를 일본을 통해 밀무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그들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다. 조선 통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마도주, 더 나아가 일본은 조선의 인삼을 탐내고 있었으며, 그인삼 재배법을 일본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또한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당근과 채찍을 활용해 그들을 구슬리고 있었으며, 조선 통신사는 일종의 유화정책이다.


흥미롭게 이 책을 읽어나갔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가운데 그들의 자화상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으며, 우리의 역사 속에서 통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더 궁금해졌다. 제11차 조선 통신사를 이끌었던 정사 조엄과 그가 남겨 놓은 해사 일기, 더 나아가 18세기 서역의 문물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일본의 사회적 변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겹쳐졌으며, 조선 통신사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본보다 중국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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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1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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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는 그랬다. 왕과 관련한 역사이거나 외침과 관련한 역사가 상당히 많다. 이순신 장군이 연승을 거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김성일이 일본을 다녀온 기록은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우리의 역사 사료 중에서 조선의 역사가 가장 많이 현존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듬성듬성 기억하고 있을 뿐 제대로 조선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 기득권과 권력을 우선하고,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으며, 조선통신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김종광씨가 쓴 역사 소설 <조선 통신사 1,2>와 마주하게 되었다. 


1763년 조일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제11차 통신사가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500명의 사내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의 쇼군을 알현하게 된다. 임진년 조일 전쟁이후1604년 선조 37년에 떠난 제1차 통신사는 조일전쟁에 대해서 전쟁피로인을 데려오기 위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3차에 걸친 통신사는 본질적으로 통신사로서 공식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1636년 인조 임금 때 떠난 제4차 통신사 사절단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통신사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후 제11차 통신사는 1763년 8월 3일 영조 임금때 서울을 출발하였고, 332일이 걸려 1764년 7월 8일 조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이 소설은 1763년 계미 통신사행 즉, 제11차 조선통신사를 다루고 있다.


500명의 사람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우선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크다.서울에서 부산까지 떠나는 그 길을 따라 그들이 머무는 곳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할 수 밖에 없다. 왕명에 따라 움직였기에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통신사 일행은 왕명에 따라 움직여야 했으며, 영조 임금의 금주령에 따라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부산진에 도착하게 되었고, 울산과 창원의 기생들과 함께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대마도로 출발하게 된다.


대마도는 지금도 척박한 곳이다. 그들이 조선을 침범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왜적으로서 조선을 치는 일이다. 조선 통신사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일본 본토와 조선 본토를 연결해 주는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의 수장이었던 정사 조엄과 통신사 일행을 이끌었으며, 다리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 그 당시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길목이 상당히 위험했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의 풍랑에 따라 배를 띄워야 했고, 태풍이 없어야 통신사로서 왕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고, 배가 뒤집히면 100여명의 일해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정사 조엄을 위시하여, 종사관, 역관, 의원, 군관들까지, 더 나아가 노비들까지 함께 동행하는 길은 그렇게 쉽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다. 조엄이 남긴 책과 조선 통신사에 대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소설을 구현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의 시선으로 현대적인 문법체를 사용하고 잇다. 보편적으로 통신사 하면, 백제가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는 그런 형태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또다른 편견과 선입견이다. 이 책을 읽으면 1차에서 12차까지 조선통신사들은 조선 국내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조선통신사를 적절하게 이용하였으며,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아나기 위해서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조선이 필요했던 유황과 무기를 일본을 통해 밀무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그들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다. 조선 통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마도주, 더 나아가 일본은 조선의 인삼을 탐내고 있었으며, 그인삼 재배법을 일본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또한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당근과 채찍을 활용해 그들을 구슬리고 있었으며, 조선 통신사는 일종의 유화정책이다.


흥미롭게 이 책을 읽어나갔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가운데 그들의 자화상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으며, 우리의 역사 속에서 통신사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더 궁금해졌다. 제11차 조선 통신사를 이끌었던 정사 조엄과 그가 남겨 놓은 해사 일기, 더 나아가 18세기 서역의 문물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일본의 사회적 변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겹쳐졌으며, 조선 통신사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본보다 중국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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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yl . Album . Cover . Art : The Complete Hipgnosis Catalogue (Hardcover)
Aubrey Powell / Thames & Hudson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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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LP 세대가 아닙니다. LP세대에서 CD세대로 넘어가는 그 시기를 거쳐왔으며, 이 책에 나오는 LP 커버는 나의 기억속에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부모님도 그렇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적 조예도 낮았으며,LP 판이나 LP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책에 나오는 표지 하나 하나는 낯설었지만 호기심 반 기대 반, 그렇게 한장 한장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TV 속에서 간간히 비춰주었던 1960년대 ~70년대 미국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며, 그 시대의 디자인은 어떤 형태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래픽 기술을 컴퓨터로 누구나 마음껏 할 수 있으며, 포토샾, 일러스트레이터 또한 교육을 통해 그래픽 기술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는 그래픽 기술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그들에게 컴퓨터는 특수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며, 그래픽은 자르고 붙이고,감추고, 뒤틀면서 하나 하나 자연스럽게 이어붙여 나가야 했던 시기입니다. 온전히 아트 디렉터의 영감에 따라서 LP 커버를 구현해야 했으며, 자연스러운 가운데 인공적인 요소들을 채워 나가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영국인들의 삶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으며, 장발 일색에 히피문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전 세대로서 전쟁의 목적에 대한 혐오스러움, 자본주의 속에 비인간적인 형태를 LP 커버에 담겨지게 되며, 저항문화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실험적이면서, 도발적입니다. 지금 똑같이 구현하라고 한다면 도덕적인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LP 커버도 존재합니다. 많은 것들이 금기시 되었던 그 당시의 시대상 안에서 그들은 금기 속에서 최대한 자유를 추구하였으며, 자연스러움 그 자체를 LP 커버에 녹여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지되었지만 자유로웠으며, 지금 우리는 자유롭지만 금지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온전히 사진 기법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자 사실주의를 구현했으며, 포스트모던식의 생각과 가치관이 LP 커버에 담겨져 있는 것이 신기하였으며, 성적인 묘사를 이용한 극사실주의, 미국인들 사이에  UFO 가 있을거라는 생각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과거로 여행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의 유행의 동선에 따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77년 애플 2 컴퓨터가 판매됩니다. 그 시점은 LP 표지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자연스러웠던 그래픽 구현기술이 점점 더 세련되어 지고, 인공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표지를 제작할 때 색을 추구하려면 기법을 버려야 했고, 기법을 추구하려면 색을 버려야 했던 1970년대 초반의 그래픽 기술은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의 초기 버전이 나타나면서 소프트웨어적인 기법으로 색과 기법 두가지를 모두 추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극병하게 갈리게 됩니다.LP 커버 하나에서 극적인 변화를 마주하는 재미가  이 책에 있습니다.


힙노시스는 아트워크 인쇄에 새로운 편집 기법을 시도한 어도비 포토샾의 선구자였다. 새롭고 특이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사진을 자르고 일그러뜨리고 구부리고 태우고 가리고 이중 노출을 하고 오븐에 굽고 그 위에 낙서를 하거나 함께 콜라주했다. 사진 리터치 역시 '접합 부분을 가리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었는데,탁월한 재능을 지닌 리터치 전문가 리처드 매닝은 항상 사진 디자인 마무리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었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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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닐. 앨범. 커버. 아트
오브리 파월 지음, 김경진 옮김 / 그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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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LP 세대가 아닙니다. LP세대에서 CD세대로 넘어가는 그 시기를 거쳐왔으며, 이 책에 나오는 LP 커버는 나의 기억속에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부모님도 그렇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적 조예도 낮았으며,LP 판이나 LP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책에 나오는 표지 하나 하나는 낯설었지만 호기심 반 기대 반, 그렇게 한장 한장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TV 속에서 간간히 비춰주었던 1960년대 ~70년대 미국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며, 그 시대의 디자인은 어떤 형태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래픽 기술을 컴퓨터로 누구나 마음껏 할 수 있으며, 포토샾, 일러스트레이터 또한 교육을 통해 그래픽 기술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는 그래픽 기술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그들에게 컴퓨터는 특수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며, 그래픽은 자르고 붙이고,감추고, 뒤틀면서 하나 하나 자연스럽게 이어붙여 나가야 했던 시기입니다. 온전히 아트 디렉터의 영감에 따라서 LP 커버를 구현해야 했으며, 자연스러운 가운데 인공적인 요소들을 채워 나가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영국인들의 삶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으며, 장발 일색에 히피문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전 세대로서 전쟁의 목적에 대한 혐오스러움, 자본주의 속에 비인간적인 형태를 LP 커버에 담겨지게 되며, 저항문화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실험적이면서, 도발적입니다. 지금 똑같이 구현하라고 한다면 도덕적인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LP 커버도 존재합니다. 많은 것들이 금기시 되었던 그 당시의 시대상 안에서 그들은 금기 속에서 최대한 자유를 추구하였으며, 자연스러움 그 자체를 LP 커버에 녹여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지되었지만 자유로웠으며, 지금 우리는 자유롭지만 금지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온전히 사진 기법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자 사실주의를 구현했으며, 포스트모던식의 생각과 가치관이 LP 커버에 담겨져 있는 것이 신기하였으며, 성적인 묘사를 이용한 극사실주의, 미국인들 사이에  UFO 가 있을거라는 생각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과거로 여행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의 유행의 동선에 따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77년 애플 2 컴퓨터가 판매됩니다. 그 시점은 LP 표지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자연스러웠던 그래픽 구현기술이 점점 더 세련되어 지고, 인공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표지를 제작할 때 색을 추구하려면 기법을 버려야 했고, 기법을 추구하려면 색을 버려야 했던 1970년대 초반의 그래픽 기술은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의 초기 버전이 나타나면서 소프트웨어적인 기법으로 색과 기법 두가지를 모두 추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극병하게 갈리게 됩니다.LP 커버 하나에서 극적인 변화를 마주하는 재미가  이 책에 있습니다.


힙노시스는 아트워크 인쇄에 새로운 편집 기법을 시도한 어도비 포토샾의 선구자였다. 새롭고 특이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사진을 자르고 일그러뜨리고 구부리고 태우고 가리고 이중 노출을 하고 오븐에 굽고 그 위에 낙서를 하거나 함께 콜라주했다. 사진 리터치 역시 '접합 부분을 가리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었는데,탁월한 재능을 지닌 리터치 전문가 리처드 매닝은 항상 사진 디자인 마무리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었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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