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공연을 보거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걸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망설인다는 건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다른 선택지란 대개는 가이드북에 나오는 유명 관광지다. 관심이 전혀 없으면 공연 따위 안 봐도 되고, 뭘 배우거나 체험하는 것도 안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망설여진다면, 유명 관광지 하나를 포기하는 게 낫다. 중국집엔 짬짜면이 있지만 인생에는, 그리고 여행에는 짬짜면이 없다. 유명 관광지가 타인의 선택이라면, 왠지 내가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그 프로그램은 나의 선택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 인생에서 여행 스케줄 정도는 내 맘대로 짜도 된다.

유명한 관광지라고 해서 꼭 가야 한다는 법 있나. 게다가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그 유명 관광지는 알고 보면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곳도 아니다. 평소에는 존재도 몰랐다가 가이드북에서 처음 발견한 장소에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가이드북에 별표 다섯 개 붙어 있는 곳이라고 다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고 사진 말고는 남는 것도 없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유명 관광지보다는 내 마음이 왠지 끌리는 곳, 그곳을 선택했을 때 기억에 훨씬 더 오래 남는다. 좋은 곳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곳이 좋은 곳이다.

여행준비의 기술 | 박재영 저 - P209

여행의 진짜 즐거움은 준비하는 단계부터 시작해서 긴 시간 동안 추억을 곱씹는 과정 전반에 걸쳐 있다. 하나 더 보고 덜 보고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여기를 언제 다시 온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얼마나 어렵게 시간을 내서 왔는데, 뭐 이런 이야기를 여행 중에 흔히 하게 된다. 그래서 잠을 줄이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급하게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은 언제나 한 번뿐이다. 느리게 움직여야 자세히 볼 수 있고, 느리게 움직여야 풍경 말고 내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팁을 하나만 달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처음 세운 계획에서 일정을 20퍼센트쯤 줄이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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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언론에 ‘취소문화‘ ( 캔슬 컬처‘, cancel culture)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소개에 따르면, ‘취소문화‘는 잘못된 언행을 한 인물에 대한 사회적 지탄 운동, 특히 그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셜미디어 기반 운동을 지칭한다.
극적인 사례로 미투 운동이 있다.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틴처럼 막강한 권력을 쥔 인사들이 성폭력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져 사퇴, 해고, 형사처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취소 된 것이다.
- P53

2019년 한 대담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청년과 청소년에게 한 조언이 대표적이다.

"순결함이라는 발상, 항상 정치적으로 깨어 있어야 politically woke 한다는발상, 이런 건 빨리 극복하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은 어지럽고, 애매한부분들이 있다. 정말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결함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 일부는 다른 사람을 최대한 비판적으로 대하는 게 변화를 만드는 길이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당신이 뭔가 제대로 하지 않았기니, 어떤 단어를 잘못 썼거나 했다고 트윗을 올리고 나면, 나는 스스로 꽤 흡족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깨어 있는지 다들 봤나, 내가 당신을 비판 call out 했어, 하고 말이다. (…)그건 운동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 P55

오바마의 발언과 하퍼스 편지는 미국 기성세대 오피니언 리더라 할 만한 이들이 젊은 세대의 사회운동에 느끼는 우려와 불안을집약한다. 오바마와 하퍼스 편지」 저자들은, ‘어지러운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도덕적 완벽주의를 요구하는 소셜미디어 전사들이모든 도덕적 불완전의 흔적에 "신속하고 강렬한 응징"으로 대응하여 "과도한 처벌을 일상화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위축할 것을 걱정한다. 또한 문제적 인물을 연이어 ‘취소 한다고 하여 진정한 변화가일어날지에 회의적이며, 실질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대신 대다수 사람이 그저 보복의 두려움에 침묵해 버리는 사회가 도래할 것으로 염려한다.
- P56

취소와침묵 강요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고, 단지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라는것이다. 이 시각에서 볼 때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취소 운동은 취소의행위를 새로 발명한 게 아니라, 오랜 권력구조에 균열을 냄으로써 주변인이 아닌 주류인에게도 취소의 타격을 가하는 운동이다. 주변인들은, 주류를 거스르는 말을 했을 때 묵살당하거나 소외당하는 일에이미 익숙하다. 취소 운동의 잠재적 문제점과 부작용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이 운동으로 권력 구도를 흔들 수 있음은 의미 있는 일이다.
- P62

젊은 세대가 엘리트를 향해 취소를 확장하려는 것은, 그것이 이상적인 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랜 구조적 차별과 제도적 불공정에 맞설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해서일 수 있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가 건강한 자유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병리가 만성적인 곳이라면, 차라리 "저항과 내전"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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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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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은 첫번째 감상, 재미있다.
'민들게 소녀'를 읽을 때와 같은 SF적 낭만이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우주인이 바라보는 지구인은 어떤가에 대해 부끄럽기도 하다.

우주인이 본 한아는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비오는 날 보도블럭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 자매로 생각'하는 사람,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 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는'사람이다.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징을 닮지 않는 걸까?'

어제 읽은 '서울리뷰오브북스'의 무해한 인간이 떠오른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무해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생물,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무해함을 가진 사람이다. 이 파괴적인 세상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는 건 한아 같은 삶일까?

우리는 매우 이기적인 존재고, 우리 외 다른 존재의 존엄과 중요성,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에 세상에 우리만 존재하는 듯 사는지도 모른다. 세계 곳곳의 혹은 우주 곳곳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를 느끼거나 사랑하지 못해서 삭막하기 만한 물질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세랑이 이 책의 후반부에 넣은 온갖 모습들이 - 저탄소, 친환경, 강요 없는 관계, 진정한 사랑, 거기에 청소년 쉼터라니, - 너무 이상적이라 비현실적이고, 약간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어딘가에 있을 이상적인 사회를 보고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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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아무도 버리지 말자고, 아무도 죽어선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경이롭다. 낙오없고 고통 없고 재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안전에 집착하다가는 빗장 닫아걸거나 수용소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안전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고 존엄할 수 있다고 여기기보다 자유와 존엄 위에서 안전이 추구돼야 한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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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뮤직비디오도 아니고, 뭐야?‘
이 부분을 읽고 혼자 피식거렸다. 긴박한 상황이겠지만, 거기 딱 어울리는 유머에.








그러나 정규도 총을 들고 있다. 그것도 주영의 것보다 훨씬 제대로 된, 아무리 봐도 진짜로 보이는 총이다. 그다지넓지 않은 공간에, 서로 총을 겨눈 두 사람의 호흡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이건 뮤직비디오도 아니고, 뭐야?
- P80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지구에, 한국에 존재하는 건 원래 경민의 몸이 아니라 정보였다. 여러 사람에게 남겨진 정보, 나누어 가진 기억과 관계는 몸보다도 더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 P144

그러니 어쩌면, 한아는 이제야 깨단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 붙잡아두던 유일한 덫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 게 없어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한아의 사랑, 한아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그 모든 관계와 한 사람을 세계에 얽어매는 다정한 사슬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닻이 없는 경민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까?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이르자, 한아는 떠나버린 예전의 경민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 P146

상호 간에 신뢰가 없는 사회였다. 윗세대가 완전히 망쳐버린 것을 우리 세대가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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