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피아나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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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이지만 유쾌 발랄하고 담담하게 무심히 뱉어내는 진술은 역사적 진실에 가닿는다. 시종일관 킥킥대느라 배가 아프고 눈물이 다 찔끔 날 지경이지만 이 소설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만큼 예외 없이 진지한 사유가 넘쳐흐른다.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라는 부제가 작가의 겸손한 표현에 불과하며, 단 한 페이지의 읽기만으로도 그 농축된 박학(博學)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소설은 20세기 인간 정신이 배설해 놓은 사상과 사건과 물질들이 어떻게 다시금 인간 정신에 되먹임 되어 왔는지를 수백 장의 스냅사진이 초스피드로 눈앞을 지나가는 현기증나는 파노라마처럼 들이댄다. 21세기 오늘, 우리들을 만들어 낸, 우리들의 정신과 물질세계의 현재를 이해케 한다. 그것이 때로는 한 없이 유치한 빈정거림 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해박함의 진지함 속에서 화려한 재치의 문장으로 지성을 자극하기에 170쪽에 불과한 작품이 1000여 쪽을 읽어낸 것처럼 녹초를 만든다. 지금도 다문 입에서 김빠지는 풋, 풋 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20세기 시작에 대한 역사가들의 논평부터 시작되는데,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혹은 사실상 산업혁명과 함께였다느니,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라고 말한다며, “몇몇은 자기들이 더 빨리 발달했으므로 원숭이 혈통이 남들보다 덜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1차 대전 전사자의 시체 길이가 15508Km에 이르는 야만성과 물질 자본주의와 인종 구별짓기(우생학)가 바로 20세기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현상의 토대였다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에 착수한다.

 

그래서 작가와 시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1916년 다다이즘을 발명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미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며, 당대의 문화현상을 소개하고, “사람의 판단력과 현상에 대한 이해는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결과물이며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형이상학은 헛소리라고 선언했던 실증주의 철학을, “이제 여자들은 쥐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선입견에 맞춰주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라며 피임기구의 발명이 여성 해방의 기폭물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더듬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말하고 ‘~왜냐하면이라고 이유를 기술하는 단순한 문장의 구조가 그침 없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그 이유의 설명이자 작가의 주석이 그야말로 해학과 풍자의 진수를 이룬다. 여기 이 소설 주제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역사와 기억의 관계에 대한 한 문장 단원을 발췌 인용해 본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기억이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기억은 역사적 영역에서 심리적 영역으로 옮겨갔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방식의 기억이 마련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기억에 대한 기억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기억의 내면화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어떤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지만

누구에게 무슨 빚을 갚아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이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홀로코스트(holocaust)나 쇼아(shoah)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 엄밀히 말해 인종 학살이 아니라 인종 학살을 넘어선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하며

이 특수성을 표현할 만한 다른 이름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P 144 에서)

 

이것은 역사가 정체성의 시대를 마감하고 인식론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주장하는 일종의 선언적 문장이며,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표현 불가능한 잔혹성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기억이라는 인식의 지평으로 넘어왔을 때 그것이 과연 인간 개체 혹은 공동체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의 본성만큼은 우릴 깨어있게 해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기억의 비사실성이라는 내재적 성질과 자의적 조작성이야말로 20세기의 정신임을 비틀어 까발리는 다음의 문장은 유치하지만 진실의 민낯에 주춤거리게도 한다.

 

한편 정신과 의사들은 말하기를 개인의 기억은 어차피 현실과 상응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실을 조작하는 일은 인간 정신의 방어기제로

사람들이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리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P 112 에서)

 

소설은 20세기의 시시콜콜한 과학적, 산업적 발명품과 발견들,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노선과 그 갈등들, 대중 매체와 인터넷 등 소통의 수단이 지닌 문명적 현상들과 문제성의 비판들, 그리고 문학, 심리학, 철학 등 인간 정신의 표현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거대한 인간 극장의 농축된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20세기 인간사에 대한 기념비적 헌사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혹 오늘의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쾌락주의와 무수한 양의 정보로 인한 망각과 어떤 반응이나 저항의지도 촉발시키지 않으며 그 대신 피로와 체념을 불러일으켜 기억의 소멸에 일조한다지만 그렇다고 기억에 호소하는 기념비의 축조를 멈 출 수는 없을 것일 게다. 역사는 살아있는 과거를 시간 속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정당성을 없애버리지만 기념비는 기억에 호소하니 말이다. 웃기지만 그 진지함을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통찰력과 감히 견준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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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말한다. 마르크시즘(Marxism)은 더 이상 오늘의 사회에는 유용하지 않으며, 폐기되었다고. 헛소리!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순, 인간과 인간사이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질서를 논의하는 것이며, 인간 개체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이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며, 바로 이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형태의 힘으로 자신과 유리되지 않도록 하여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키려는 시도라는 그의 사상 중 극히 일부만으로도 너무도 많은 것들을 인간과 인간사회에 시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당대의 문학거인이었던 빅토르 위고가 그의 소설에서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회의 인간 소외를 개인의 악으로 그릇된 통찰을 하였다고 작품전체가 폐기되지 않는 이유와 같다. 마르크시즘을 구성하는 핵심적 사상의 하나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서로 대립 충돌함으로서 역사의 모순이 발생한다는 통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 생산관계의 전 체계가 정치적 상부구조 및 사회 형태와의 연관성을 가진다는 지적은 여전히 사회의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더구나 마르크시즘을 형성하고 있는 무수한 저술들과 실천행위의 기록들은 한낱 낡아빠진 독단론의 집합이거나 기회주의의 은신처에 똬리를 틀고 있는 현실의 삶과 괴리된 이론적 이념이 아니다.

 

마르크시즘은 자본의 하부에서 임금 노동을 하는 절대 다수의 대중이 스스로 삶의 주체임을 깨닫게 하고 그러함으로써 자기소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인간 존재에 끊임없는 모욕을 가하며 인간정신을 공허와 환멸에 차도록 방치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을 제거하려는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 우리네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제시되었던 그의 사상에서 여전히 배워야 할 것, 이해하여야 할 것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실천적 가치로서 적용할 수도 있다.

 

201855일이면,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이 된다. 19세기 인류 사회를 온통 적셔댄 자본주의의 발흥에 수반된 계급 전쟁, 사회관계의 상층부를 장악하려는 첨예한 갈등으로 점철된 시간의 족적들을 더듬어가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 노동자인 21세기 오늘을 투영해보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알지 못한 채 마르크시즘은 실패한 이론이기에 이제는 관심을 가질 가치조차 없다고 떠벌리는 우매함과 오만을 넘어 무지의 편협은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인용, 재인용하거나 해석 또는 비판의 글들이 난무하다보니 그 왜곡과 몰이해가 지나치게 판을 치는 모양을 보게 된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1989년 번역 소개된 이래 절판과 복간을 반복하다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편집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마르크스 전기 1, 2가 재출간 되었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 이해의 척추를 세우는 최고의 저작이 되어주는데, 마르크시즘을 개관(槪觀)하는 역작(力作)으로서 그가 집필하고 발표한 저술들의 동기는 물론 이것들의 주체적 사상과 의도와 해설을 포함한 내용 소개까지 더해 갈증을 느끼던 무지를 거의 완벽하게 해소시켜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저술이 빛을 발하는 첫 번째의 가치는 헤겔 법철학 비판, 1844년 경제학철학초고,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에 비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 비판, 프랑스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자본등 위대한 저술들이 역사적 시간과 어울려 가히 풍부하고 참된 의미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둘째는 1840년대의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혁명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공산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최초의 국제 노동계급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결성과 이를 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실천적 행동가의 전략과 전술은 물론 그 사상적 토대의 발현을 목격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마르크시즘(Marxism)의 본질을 이해하는 견고한 기초의 터전이라 해도 그릇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특히 과학적이라는 수식어와 관념론적 이론이 아닌 실천 행위로서의 이념이라는 어휘는 마르크시즘을 여타 유사 이데올로기와 구별하는 중대한 요소임을 발견하게 한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몰고 온 사회적 모순의 대두는 유럽사회 정치체제의 급변을 요구하게 되는데, 자본 계급의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계급적 충돌의 불가피한 귀결을 내재한다. 결국 자본주의가 지닌 내적 모순에 대한 대안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만, ‘공상적, 혹은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진정한 사회주의와 같이 감상적, 관념적 인류 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지니지 못한 기회주의적 이해에 머무는 것들이다 이같은 실태가 바로 실천적 사상으로서의 과학적 공산주의를 정식화시키려는 마르크스의 저술들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현장에서의 지도적 역할이라는 행위이다.

 

이러한 단적인 예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를 주창하던 프루동과의 논쟁으로부터 철학의 빈곤이라는 유명한 저술이 집필되는 것으로 확인하게 된다. “역사가 객관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의주의적 역사개념에 입각해 있으며, 사적 소유의 기원은 물론 소유 집중 이유도 알지 못하는 프티부르주아의 한낱 심적 열망에 불과한 빈곤의 철학이라는 프루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가치와 화폐 이론을 포함한 자본이론의 맹아(萌芽)로서의 위치를 갖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행위는 이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자기인식의 명료화와 심화, 대중 확산을 위한 실천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지닌다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인 포이어바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변증법은 또한 헤겔을 피할 수 없는데, 청년기 헤겔 좌파로 불리는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으로서, 인간의 실천행위, 특히 집단적 행동을 과소평가했다고 헤겔의 주관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한 헤겔 법철학 비판이나, 인간을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존재로 파악한 포이어바흐와 달리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역사에 뿌리박은 사회적 제 관계의 산물로 파악하며, 유물론적 관점을 정식화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이해하는 관문임을 알게 되기도 한다.

 

또한 청년헤겔학파의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대한 비판으로 작성된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기초를 제공한, 마르크시즘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저작이다. 노동자의 자기 소외의 원천으로서 재산, 자본, 산업, 그리고 임노동임과, 모든 역사적 시대마다 특정한 경제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음을 과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헤겔의 완전한 극복을 이뤄낸다. 훗날 혹자들은 이를 두고 헤겔 논리학의 병기창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한편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게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당시 임박한 분노도 보게 되는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자기 이해를 방해하는 진정한 사회자들과 같은 이념적 반대파들을 잠재우기 위한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내재한 인간 존재에 대한 모욕의 본성과 모든 계급간의 충돌 대립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기인한다는 역사성의 발견을 비롯한 정치적 상부구조와 사회적 의식 형태와의 연관성 규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르주아 및 프티부르주아와의 연대나 이용행위에 대한 환상을 차단하기 위한 도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마르크시즘의 정식화는 물론 인류 사상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1848년 프랑스 6월 혁명이 지닌 역사적 의미로부터의 깨달음인데,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인류 최초의 내전이다. 프랑스공화국의 심화된 내부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민주공화국 확립 요구에 대한 반혁명세력인 부르주아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처참한 학살로 맺은 피의 투쟁이 준 교훈이다. 여기에는 사상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 각 계급들의 서로 다른 지위, 즉 사회적 관계의 우열인 물질적, 경제적 생활조건이 만들어낸 자본주의가 애초에 내재하고 있는 적대관계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니고 있던 환상, 프티부르주아가,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계급적 믿음이란 공허한 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산업, 금융 자본의 임금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자기 인식의 필요를 절실하게 각성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저서로 표현되고 있는데, 노동계급 결집의 강한 필요성을 이들 집단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 작업은 역사 현장에서의 체험과 통찰이라는 실천적 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848~1849년의 독일에서의 혁명운동 또한 융커 등 대지주 봉건세력과 부르주아세력의 연대, 프티부르주아의 노동계급에 대한 배반과 같은 반혁명 세력과 노동계급의 계급의식 미성숙 등 혁명의 좌절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 공산주의자동맹의 일원들을 독일에서, 프랑스 파리로, 벨기에 브뤼셀로, 지속되는 추방과 체포 구금의 위협으로 내몰고, 마침내 마르크스는 영구 정착지가 될 영국 런던의 망명길로 오르게 한다.

 

따라서 혁명의 좌절과 반혁명 세력의 승리 이후, 1850년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반동의 시기로서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며 그들 이론의 정교화와 저술 작업을 위한 시간이 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술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그의 자본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주의 체계가 다시 부활한 반동세력이 유럽을 지배하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곤경의 시기였던 바로 그 시간의 덕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을 비롯한 정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자료를 수집하고, 노동계급의 연대를 복원하는 이 역사적 시간이 안타까운 한편 숭고한 시간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오늘 우리네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제시되었던 그의 사상에서 여전히 많은 배움을 얻는다. 마르크스 전기 1, 2는 역사적 인물의 사적 생활을 묘사한 단순한 전기(傳記)물이 아니다. 마르크시즘의 형성과 정식화의 여정에서 서술된 위대한 저작물들의 핵심 내용의 도출과 그 역사적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우리들은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간을 향한,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해방을 위한 인류애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들을 읽으려는 모든 이들의 유용한 안내서이자 지침서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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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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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집은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몇몇 작품 덕에 7편의 작품 모두를 읽게 되었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렇게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임성순, 최정나, 박민정, 박상영 네 작가의 단편은 오랜 만에 즐거운 읽기를 가능하게 해 준 우리문학 작품이라 하고 싶다. 특히 최정나의 한밤의 손님들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 1942>에서 느껴졌던 불안정성과 몰입의 거부와 같은 내가 기억하는 감성과 같은 호흡이라는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임성순의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은 어떠한 진부한 소재라도 그만의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문장으로 전환시켜 독자를 압도해버리는 솜씨에 다시금 매혹되었다고 해야겠다.

 

수상작인 박민정의 세실, 주희는 읽을수록 반하는 글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다시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라 부르고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인 주희가 듣기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예쁜문장이라는 느낌인데, 그것은 어떤 표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극성 강한 의미들이 날카롭게 꽂혀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뾰족함이 감추어진 듯 드러나 있는, 말 없을 것 같으면서 할 말 다하는 그런 것신작 알리미에 이 작가를 등록 해둬야 할 것 같다.

 

동성애 코드를 그려낸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그야말로 젊은 색채가 톡톡 튀어대는 감각을 갖게 한다. 무얼 하지도, 되지도 못한 퀴어영화 감독 지망생, 현대 무용가의 보란 듯한 실패 선언이 그 어떤 소설들과는 다른 맺음 방식의 신선함이었다고 해야 할까? 괴팍하게도 어떤 파괴적인 모양에 끌리는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써 내는 산다는 것의 솔직한 면모들의 장면들에 반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을 발견할 때에 공감의 정도가 높은 것처럼, 수록 작품들에 대한 관심의 고저는 순전히 알고 있는 익숙한 것에 대한 선호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올리비아 랭이 쓴 외로운 도시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한 감금과 노출이라는 쌍둥이 메커니즘에 대한 해독은 내게 깊숙이 각인되었던 이해였기에 유사한 배경을 지닌 한밤의 손님들의 묘사들은 친근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소설 도입부의 한 장면인 몸에 힘을 주고 버텨보지만 누군가에 의해 잡아채어지듯이 식당으로 들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뭔가 부적절하게 배척하고 싶은 것에 끌려가야하는 끔찍한 불쾌감이 느껴진다. 결국 지극히 속물적인 오리와 돼지로 불리는 엄마와 여동생의 천박한 요구와 위협의 이야기들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주인공이 식당의 유리벽이라는 견딜 수 없도록 노출된 더러운 기분과 닫힌 구조의 식당이라는 고립성에서 발산되는 감정에 뒤섞여 식당 벽의 그림과 옆 테이블의 사람들, 유리창에 붙어 핸드폰의 불빛을 비추는 아이를 오가는 불안정한 시선의 의미를 절로 수긍하게 된다. 한 편의 기막히게 연출된, 고독의 기묘하고 소외적인 마법의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끝으로 미술작품 에이전시가 주인공인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단상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이 단편은 자본과 현대미술의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도마뱀 같은 구조를 통해 미학적 쾌감, 돈과 시간의 높은 장벽을 세워 새로운 미학적 감수성을 만들어내는 시시껄렁한 생태계를 들춰낸다. 아마 우연이야말로 섬세한 계산에 의해 이뤄진 필연적 결과물이라는 문장처럼 우리네 주변에서 시침 뚝 떼고 펼쳐지는 많은 현상들의 은폐된 본성에 대한 일종의 대중 고지(告知)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발적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 명쾌함과 적나라함을 무기로 한 도발성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써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록된 일곱의 작품 모두 나름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발산하고 있다. 모처럼의 재미있는 문학 읽기의 시간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작품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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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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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린이한, 林奕含 ; 1991.3.16~2017.4.27 ]

 

이 작품을 다 읽어 나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혐오와 수치와 분노의 감정이 검붉게 솟구치는 것을 누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열세 살 소녀가 열여덟 살에 이르는 동안 학원 선생에게 지속적인 성 폭력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죽어서야 겨우 풀려 날 수 있었던 참담한 실제의 이야기다. 교활함과 사악함, 타인의 고통위에 선 쾌락의 탐닉에 몰입하는 인면수심의 인간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왜곡과 위선, 추한 시선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언어와 문장들로 구성되어 그 감당할 무게가 더욱 지나치게 힘겹고 아프고 시리게 다가온다.

 

어린 소녀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달래던 쉰 살의 학원 강사 리궈화는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소녀를 발견하고, 샴쌍둥이처럼 지식과 삶의 지혜를 공유하던 열세 살 동갑내기 류이팅과 팡쓰치 두 소녀와 그네들의 부모에게 작문학습을 제안한다. 계산된 접근을 통해 이 인물은 팡쓰치의 인물됨을 탐색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이가 지닌 자존심”, 그로인해 절대 자신의 일을 밖으로 발설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리궈화란 인물의 이러한 자신감은 이미 수없이 많은 여학생들을 성적 노리개로 손에 넣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완벽하다 할 만큼의 천상의 미모를 한, 게다가 지적 균형까지 갖춘 열세 살 팡쓰치의 사춘기는 잔인하게 찢겨진다. 이후 리궈화는 어떤 멈춤도 없이 팡쓰치가 자신의 기억을 상실하고 미쳐버려 정신병원에 수용되기까지의 5년에 걸쳐 성적 유린을 지속한다. “이건 네 잘못이야. 네가 너무 예쁜 탓이야.”, “네 몸 위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이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어떤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소름끼치는 비열함 이외에는 아무런 인격도 없는 성욕에 장악된, 더러운 침을 흘리는 괴물만이 보인다.

 

리궈화에게 학원선생이란 이처럼 어린 여학생들을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는 권력이자 수단으로 활용되고, 세상은 이런 야비함과 폭력성에 입을 다물고 외면하며, 오히려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멸시의 손가락질을 해대며, 자신들의 위선을 도덕성이라는 외피에 은폐한다.

이를테면 피해자의 호소에 감히 남의 가정을 깨뜨려? 난 너 같은 딸을 둔 적이 없어!”라든가, “넌 늙은 놈이랑 붙어먹었어!” 와 같은 반응, 혹은 SNS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에, “원조교제네”, “불륜녀는 뒈져버려”, “경쟁 학원강사가 올린 글인가”, “어차피 같이 즐긴 거잖아.”처럼 범죄행위에 대한 비난이나 도움의 지원이 아니라 성적 행위만을 소비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양태는 리궈화 같은 성폭력자가 사회의 어떠한 비난이나 지탄도 받지 않고 오히려 옹호되는 사회적 양식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이 문장은 지금 우리 한국사회에 벌어지는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P123에서)

 

이러한 사회의 성적 무지와 편견, 곡해는 여성 스스로가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팡쓰치의 책 읽기를 도우며 세상의 지혜를 나누어주던 이원이라는 또 다른 형식의 피해자인 여성의 주위에서도 발견된다. 폭력적인 여성편력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첸이웨이라는 남자의 배우자로서 자신의 딸은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원을 중매하는 행위에 도사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외면의 심리이다. 또한 팡쓰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는 우회적인 성폭력의 시사에 성교육이라니?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교육이란게 다 그렇지 않니?”라며 외면하는 태도도 여성의 성적 피해를 방조하고 있음을 피할 수 없는 듯하다.

 

사랑을 배워야 할 어린 소녀 팡쓰치에게 가해진 성폭력은 사랑으로 둔갑하여 죄책감과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자기 파괴의 혼란으로 내몰고, 마침내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고통에 매몰시켜 버린다. 아무도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없을 때, 리궈화에게 말한다. 자꾸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괴물의 환호하는 내심을 읽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혹독한 수치와 분노에 휩싸이게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 중 하나가 바로 피해를 당하고도 자책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P192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고 되뇌는 팡쓰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바로 1년 전 오늘인 2017427일 생을 마감한 이 소설의 작가 린이한이 남긴 후기가 사무칠 만큼 아프게 새겨진다. “다 쓰고 난 뒤에 보니 가장 무서운 건 내가 쓴, 이 가장 무서운 일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이에요.” 나는 책장을 덮고 이 이야기가 실제가 아니라 소설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뻔 했다.

 

이 세상에 한 사람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고통이 있음을 매양 잊어버리는, 혹은 알지 못하는 나와, 우리들, 그리고 사회의 망각과 무지를 깨닫는다. 아마 지금 어디선가 신음하며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어 잠 못 이루며, 눈물 흘리는 소녀와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그녀들 혼자 느낄 죄책감도 아니며, 수치도 아니라고, 그것은 정작 왜곡하고 외면하며 무관심했던 나와 우리들, 사회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더 이상 상처받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썼던 작가의 영면(永眠)이 더욱 안쓰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그 어떤 팡쓰치든 소비될까 두렵다던 유언 같기만 한 작가의 말을 진정 소중하게 지켜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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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day Stories : Selected and Introduced by Haruki Murakami (Paperback)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Vintage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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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생일 이야기(birthday stories)라는 선집(anthology)의 소개 글에서 어느 날의 드라마틱한 기억을 술회한다. 이른 아침 무심히 튼 일본 전국망의 라디오 방송에서 112일 일종의 공개 행사(public event)로서 그날 출생한 유명 인사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런데 바로 자신의 이름 - “Novelist Haruki Murakami today celebrates his **th birthday.(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 임을 알아차렸을 때 너무 감동해서 그는 목 놓아 울었단다. “Whoa! I cried aloud....”

    

 

 

그저 평범하게 지나갔을 관습적으로 맞이하는 그런 생일이었을지 모를 하루가 그의 삶에 대한 기쁨을 자극하고,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충동으로 번졌음은 어쩜 당연한 감정이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누군가가 나의 출생이란 사건에 의미를 불러 넣어주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아마 하루키의 단편소설, 버스데이 걸(birthday girl)은 그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을 생일을 맞이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비로소 이해하게 된 특별하고 소중한 의미를 지닌 생()의 감동을 나누기 위해서였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주인공은 별 신통치 않을 생일을 직감하는 스무 살 여자의 신비로운 하루의 이야기로 전달된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던 어느 날의 이야기로서.

 

남자 친구와 깊은 상처의 말을 주고받은 후 다가온 그녀의 생일은 우연히도 그녀가 쉬는 날이었지만 동료의 질병으로 불가피하게 대신하여 근무하게 된 날이기도 하다. 그녀는 뭔가를 딱히 기대하는 그런 날이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담담히 맡은 일에 임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녁 손님을 준비하던 오후부터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규칙적으로 같은 건물에 있는 사장에게 식사를 배달하던 매니저마저 복통으로 자리를 비우게 된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레스토랑의 사장에게 저녁 식사 배달의 임무를 맡게 된 여자는 낯 선 노년의 남자, 사장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축하를 받는다.

생일 축하해,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없기를.”

 

 

 

그리곤 흡사 친절한 요정처럼 특별한 날에 수고스럽게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었음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단 한가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여자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던 소원을 골똘히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많은 돈도 아니고, 좀 더 똑똑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며, 뛰어난 미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신비에 싸인 노인은 예상 밖의 소원에 다시금 확인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손바닥을 딱 하고 마주침으로서 그녀의 소원은 성취되었음을 알린다.

 

사장의 방을 나서는 여자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다. 그녀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노인의 생일 축하의 말에 이어졌던 어떤 것도 그녀의 인생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 생일 나는 내게 무엇을 선물 할 수 있을까? 하루키는 누구나 일 년에 딱 한 번 갖는 공평한 하루인 생일은 삶이라는 축복을 얻은 무엇보다 소중한 날임을 선언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 그것으로부터 타인에 대한 사랑이 이어지고, 삶의 축복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음을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올 해는 내 자신을 위해 작은 과잉을 저질러 볼 까하고 소심한 다짐을 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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