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피아나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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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이지만 유쾌 발랄하고 담담하게 무심히 뱉어내는 진술은 역사적 진실에 가닿는다. 시종일관 킥킥대느라 배가 아프고 눈물이 다 찔끔 날 지경이지만 이 소설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만큼 예외 없이 진지한 사유가 넘쳐흐른다.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라는 부제가 작가의 겸손한 표현에 불과하며, 단 한 페이지의 읽기만으로도 그 농축된 박학(博學)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소설은 20세기 인간 정신이 배설해 놓은 사상과 사건과 물질들이 어떻게 다시금 인간 정신에 되먹임 되어 왔는지를 수백 장의 스냅사진이 초스피드로 눈앞을 지나가는 현기증나는 파노라마처럼 들이댄다. 21세기 오늘, 우리들을 만들어 낸, 우리들의 정신과 물질세계의 현재를 이해케 한다. 그것이 때로는 한 없이 유치한 빈정거림 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해박함의 진지함 속에서 화려한 재치의 문장으로 지성을 자극하기에 170쪽에 불과한 작품이 1000여 쪽을 읽어낸 것처럼 녹초를 만든다. 지금도 다문 입에서 김빠지는 풋, 풋 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20세기 시작에 대한 역사가들의 논평부터 시작되는데,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혹은 사실상 산업혁명과 함께였다느니,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라고 말한다며, “몇몇은 자기들이 더 빨리 발달했으므로 원숭이 혈통이 남들보다 덜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1차 대전 전사자의 시체 길이가 15508Km에 이르는 야만성과 물질 자본주의와 인종 구별짓기(우생학)가 바로 20세기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현상의 토대였다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에 착수한다.

 

그래서 작가와 시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1916년 다다이즘을 발명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미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며, 당대의 문화현상을 소개하고, “사람의 판단력과 현상에 대한 이해는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결과물이며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형이상학은 헛소리라고 선언했던 실증주의 철학을, “이제 여자들은 쥐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선입견에 맞춰주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라며 피임기구의 발명이 여성 해방의 기폭물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더듬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말하고 ‘~왜냐하면이라고 이유를 기술하는 단순한 문장의 구조가 그침 없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그 이유의 설명이자 작가의 주석이 그야말로 해학과 풍자의 진수를 이룬다. 여기 이 소설 주제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역사와 기억의 관계에 대한 한 문장 단원을 발췌 인용해 본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기억이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기억은 역사적 영역에서 심리적 영역으로 옮겨갔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방식의 기억이 마련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기억에 대한 기억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기억의 내면화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어떤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지만

누구에게 무슨 빚을 갚아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이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홀로코스트(holocaust)나 쇼아(shoah)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 엄밀히 말해 인종 학살이 아니라 인종 학살을 넘어선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하며

이 특수성을 표현할 만한 다른 이름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P 144 에서)

 

이것은 역사가 정체성의 시대를 마감하고 인식론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주장하는 일종의 선언적 문장이며,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표현 불가능한 잔혹성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기억이라는 인식의 지평으로 넘어왔을 때 그것이 과연 인간 개체 혹은 공동체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의 본성만큼은 우릴 깨어있게 해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기억의 비사실성이라는 내재적 성질과 자의적 조작성이야말로 20세기의 정신임을 비틀어 까발리는 다음의 문장은 유치하지만 진실의 민낯에 주춤거리게도 한다.

 

한편 정신과 의사들은 말하기를 개인의 기억은 어차피 현실과 상응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실을 조작하는 일은 인간 정신의 방어기제로

사람들이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리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P 112 에서)

 

소설은 20세기의 시시콜콜한 과학적, 산업적 발명품과 발견들,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노선과 그 갈등들, 대중 매체와 인터넷 등 소통의 수단이 지닌 문명적 현상들과 문제성의 비판들, 그리고 문학, 심리학, 철학 등 인간 정신의 표현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거대한 인간 극장의 농축된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20세기 인간사에 대한 기념비적 헌사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혹 오늘의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쾌락주의와 무수한 양의 정보로 인한 망각과 어떤 반응이나 저항의지도 촉발시키지 않으며 그 대신 피로와 체념을 불러일으켜 기억의 소멸에 일조한다지만 그렇다고 기억에 호소하는 기념비의 축조를 멈 출 수는 없을 것일 게다. 역사는 살아있는 과거를 시간 속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정당성을 없애버리지만 기념비는 기억에 호소하니 말이다. 웃기지만 그 진지함을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통찰력과 감히 견준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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