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비()의 어떤 처연(悽然)함은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부동의 자세로 응시하며 그려낸 더블린 사람들의 불안과 마비의 전경 같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의식의 밑바닥에 두껍게 가라앉은 익숙하고 고정된, 집요한 안착의 느낌이라 할까?

 

색 바랜 낡은 의자에 앉아 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의아해하며 의심에 가득찬 시선을 보내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마침내는 무엇인가에 속았다고 외치는 어리석은, 아니 어쩔 수 없이 펼쳐져야만 하는 그런 장면을 떠 올리게 된다.

 

내게 소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피네간의 경야를 향한 여정의 중간 기착지라 할 수 있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부터 무수히 점화되는 에피파니(顯現)에 대한 익숙함과, 율리시즈아이올로스에피소드나 이타카의 장면에 등장하는 더블린 사람들의 편린들, 피네간의 경야에 지속되는 시간의 순환과 직선적 사유의 오래된 인간적 사유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그 시원의 줄기를 어렴풋이나마 지녀보자는 의도에서 이다.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된 14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死者혹은 죽은 사람들’)은 그 묘사에 있어 가히 꼼꼼한 비속성의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작가의 말처럼 지형적, 연대기적 사실의 정확성, 외모에서 의상에 이르는 추오와 부조화 등 초상화적 기법과 당대 사람들의 관습과 행동, 사상 등 그들의 억눌린 심리적 표현까지 가히 정교함 그것이라 느낄 수 있다. 다만, 사회적, 직업적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묘사는 내 언어적 이해의 불비로 만끽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 소년기, 청년기의 작품들

 

작품의 배열순서는 작가의 의도대로 소년기, 청년기, 성숙기, 대중 생활이라는 4개의 구분된 14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작품인 死者혹은 죽은 사람들이라는 중편 1편은 악곡의 마침부문처럼 종곡(coda: 終曲)으로서 소설집 전체의 주제를 총괄한다.

 

늙은 신부의 죽음을 소재로 소년의 눈에 비친 망자의 여동생들인 두 노파의 속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매, 발전소 구경을 위해 학교를 빠진 채 길을 나선 두 소년의 보잘 것 없는 하루의 풍경에 기성세대의 고착된 반복적 사고의 비루함과 관계의 편협성을 무심히 그려나간 듯한 만난 사람, 그리고 작은 설렘조차 발산 될 수 없는 매몰된 생활의 세계에 고뇌와 분노를 터뜨리는 소년의 이야기인 애러비, 이렇게 3편을 통해 아이들, 아일랜드의 미래에 대한 무관심의 현실을 고발한다.

 

청년기에 속한 작품은 이블린을 비롯하여 경주가 끝난 뒤에」 「두 부랑자」 「하숙집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백화점 점원으로 동생들과 아버지를 부양하고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열아홉 살 처녀의 짓눌린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갈등을 세밀하게 포착한 단편, 이블린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창 커튼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오랫동안 집안을 보살피겠다고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심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적 위험, 동생들의 뒷바라지, 생활고 등 자신을 감금하는 삶으로부터의 도주를 고민하는 내면의 목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그녀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새 삶을 시작하자는 연인 프랭크의 유혹은 번민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쨌든 집에 있으면 먹을 것과 잘 것은 걱정 없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사귀어 온 사람들이 있다.”고 망설이며,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 행 밤배를 타는 프랭크의 손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왜 떠나지 않았나? 에 대해 해외 영문학자들의 많은 해석이 있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프랭크는 여자를 팔아넘기는 포주였기 때문이라는 급진적 해석부터 미지의 공포에 대한 몸의 부동으로 정체된, 변화에 저항하는 아일랜드 현실의 비판적 은유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소설의 형식적 측면에서 열린 결말을 도입한 선구적인 작가로서 제임스 조이스를 위치케 하였다는 점이다. 해석이야 독자들 마음일 것이다!

 

빠른 속도, 평판, 이라는 당시 더블린 중산층을 장악하던 의식의 속물성을 빗댄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한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인 등 선진국에 대한 맹목적 경외를 이야기하는 경주가 끝난 뒤에, 재산 있는 청년을 유혹하여 성적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딸과 청년의 행위를 모른 체하며 이를 미끼로 활용하는 하숙집 여주인과 열아홉 살 딸의 암묵적 음모의 천박성을 다룬 하숙집, 하녀를 꾀어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태의 비열한 속성을 그린 두 부랑자역시 아일랜드 무기력의 저변을 이루는 저열함과 속물성, 식민지 의식의 통렬한 까발림이라 할 것이다.

 

2. 성숙기, 대중생활의 작품들

 

성숙기의 작품은 구름 한점(작은 구름)」 「분풀이(짝패)」 「진흙」 「끔찍한 사건(참혹한 사건)4편을 이루고 있다. 자기 삶의 무책임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패링튼이란 인물의 비루한 속성이 전편을 이루는 분풀이(짝패), 옛 시절의 감상을 노래하는 진흙, 도덕성, 예술성 등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는 중산층에 냉소를 보이는 중년 남자의 외곬성과 타인의 고독에 대한 이해조차 형성시키지 못했던 뒤늦은 자기 발견을 이야기하는 끔찍한 사건(참혹한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정신적 성숙을 표상하는 계층의 실상이란 이러한 것, 이처럼 하찮은 유아적이고 보수적이며, 정체되어 있고 또한 감상에 머물러 있음을 응시하고 있다.

 

내 살기를 꿈꾸었네 대리석 궁궐에서

시종과 하인을 양 옆에 거느리고

이 궁에 모인 만 사람 중에

나야말로 희망이요 자랑이었네

라고 세탁소 직원인 장년의 여성 마리아가 노래하는 진흙의 장면은 옛 시절의 영화에 멈추어버린 당대 기성계층의 고착된, 즉 마비되어버린 사유의 전형적 비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4편의 소설 중 단연 압권은 구름 한 점(작은 구름)이다. 오늘의 21세기 여느 현대소설의 의식흐름 묘사를 능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이 작품은 조이스의 후기 작품인 율리시즈피네간의 경야의 하나의 질료로서 그 흔적을 남겨주는 빼놓을 수 없는 사유의 시작점이라는 중요한 작품적 지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은 성서』 「열왕기상편 1844, “그가 말하기를 보라, 사람의 손만큼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 솟도다.”에서 차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인간행동과 사유의 오랜 갈등, 지금도 우리네 관념의 충돌을 지배하는 시간의 순환과 직선적 흐름, 고정과 변화, 보수와 진보, 자기만족과 타인의 배려 등 예언자 엘리아와 바알신 예언자들의 투쟁에 기초를 둔 인간 삶의 경이로운 대립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런던의 신문기자로 성공하여 더블린에 잠시 들른 8년 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약속장소를 향한 걸음의 의식에서 시작된다. 유명 법률회사 직원으로 전형적 중산계급인 일명 꼬마 챈들러(토미)’에게 약속장소인 콜레스 요리집은 한 번의 눈길도 던지려 하지 않았던 고급 식당이며, 이곳에서 성공한 친구 갤러허를 만나게 된 것에 자신의 자부심까지 상승한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가는 길에 드러난 강가에 옹기종기 초라하게 일그러진 채 모여있는 서민들의 집과 낡아빠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그를 더욱 강박적으로 더블린이라는 현실 삶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게 한다.

 

이 환상적인 희망은 런던 신문기자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좌절된 꿈인 시()의 발표를 이뤄냄으로써 자신 또한 런던으로 좀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두 사람은 살아온 - 결혼, 아이, ... -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나눈다. 갤러허는 돈과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 자신의 주변에 넘쳐나고 있음을 자랑하며 결혼을 폄하하면서도 토미의 결혼과 아이의 출산에 대한 뒤늦은 축하를 보낸다. 토미의 집으로의 초대는 거절되고, 아내가 부탁한 커피 구입을 잊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간다. 상점으로 나간 아내 대신에 아기를 안지만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 좁은 무덤 속에서 그대의 몸은 잠들고, 한때는 그 몸에도....나는 종신(終身) 갇힌 몸이다. 노여움으로 두 팔이 부르르 떨리며, 갑자기 아기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숙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아기는 애처롭게 울기 시작하더니...”

돌아온 아내는 그의 얼굴을 노려본다. 아기를 빼앗아 들고 아가야! 우리 아가야! 놀랐어? ....” 아기의 울음은 잦아들고, “꼬마 챈들러는 부끄러워서 두 뺨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고 ... 그리고 뉘우침의 눈물이 그의 두 눈에 괴어들었다.”

 

갤러허의 독신 생활과 대조되는 꼬마 챈들러의 가정적 평형을 이루는 이 장면은 정말 통렬한 아이러니를 시사한다. 엘리아와 바알, 진정 무엇이 올바른가? 아니 우리들은 이 둘 모두의 저울대 위를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존재일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끝없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존재로서.

 

한편 대중생활을 기록한 106일 위원실(위원실의 담쟁이 날)」 「어머니」 「은총, 3편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에 만연한 대중의 허름하기 그지없는 위선과 무지와 부조리와 무기력을 각기 민중의 지도자였던 파넬의 기념일과 영국왕의 방문, 어떤 정체성조차 지니지 못한 오합지졸들 선거판의 잡설들에 끼워 식민성과 자본의 교환을 말하고,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이면에 놓여있는 편협성과 초라한 이기심을 드러내는가하면, 술에 취해 나자빠져 있는 한 인간의 잘 난체 하는 정신이란 것에 들어앉은 정말 하찮은 신념의 구조를 목격하게도 한다.

    

 

 

 

 

 

 

 

 

 

 

 

 

 

 

 

 

 

 

 

 

 

 

 

 

 

 

 

 

 

 

3. 중편 죽은 사람들(死者)

 

죽음의 또 다른 언어로서 더블린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마비와 불안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이 소설집의 전체 주제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케이트와 줄리아 두 자매가 가족들과 이웃 친지들을 초대하여 서로의 추억과 우정을 나누고 감사하는 크리마스 연례파티의 소박한 묘사와 두 자매의 조카인 가브리엘과 그의 아내 그레타의 어긋나는 의식의 묘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시시콜콜한 피아노 연주와 노래의 장면이나, 마련된 음식들의 나열과 서빙, 분위기라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인들(더블린 사람들)의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옛날 가수의 향수에 목말라 하는 세대들의 젊은 가수들에 대한 가치 폄하와 같은 신구의 묘한 갈등 양상을 드러낸다. 행사의 주관자인 이모 두 사람을 비롯한 참석자들을 향해 가브리엘이 하는 감사의 말에 이 배경의 주요 주제의식이 모여 있다고 해도 그리 벗어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원칙에 자극 받은 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으며, 비록 그것이 그릇되더라도 진정한 것으로 믿고 싶다고 말하며, “저는 과거에 집착하려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가브리엘의 연설이다. 그럼에도 단서를 다는데 지난날의 유산이었던 자애와 환대와 유머같은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라며, 성대한 시절이었던 옛날을 소중히 간직하자고 주장한다. 사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럴듯하게 뻔지르르한 신구의 균형 있는 자세를 표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말 할 수 있는 구태의 반복적 발언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다음의 배경으로 연결시키는 절묘한 장면이 등장한다.

 

파티 내내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던 다아시라는 젊은 가수가 파티가 종료되어 모두 귀가하는 과정에서 비애감 넘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다가온다. 기성의 요구에 대한 저항과 단절의 표현이 하나이며, 죽음이라는 마비의 현상을 일깨우는 슬픈 가사의 의미가 그 둘이다. 이것은 아득히 들려오는 감성의 노래로서 가브리엘의 아내 그레타를 계단에 서서 추억에 잠기게 한다. 가브리엘은 어둠 속에서 그 노래를 듣고 서있는 아내의 우아한 자태에 빠져 화가가 되어 <먼 음악>이라는 이름의 그림에 그 모습을 담아내는 상상을 하기조차 한다. 부부는 호텔에 묵기 위해 마차를 달리고, 가브리엘은 아내에 대한 정념에 휩싸여 즐거움에 차 있지만, 아내의 표정은 이러한 가브리엘에는 무심한 다른 세계의 회상에 빠져있다.

 

따라서 가브리엘의 환상은 좌절되고 마는데, 다아시의 노래가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은 옛 연인을 생각나게 했다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 그레타의 추억에 직면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간에도 어찌 할 수 없는 영혼의 고독을 깨닫게 될 때 죽음의 의미는 정말 새롭게 떠오른다. 그레타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옛 사랑의 모습과 묘지의 전경은 가히 죽음에로의 편향이라 할 만큼 애절함으로 가득 들어찬다.

제임스 조이스가 옛 연인을 마음에서 지워내지 못했던 아내 노라 바나클을 생각하며 자신의 사랑을 초월적인 무엇으로 사유하려했던 한 푼짜리 시들(Poems Penyeach)에 수록된 아름다운 시가 변주되어 소설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라훈을 슬퍼한다

 

비가 라훈에 조용히 내린다. 조용히 내리고 있다.

나의 침울한 애인이 누워 있는 곳.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실로 슬프다. 슬프게 부르고 있다.

회색의 달이 떠오를 때.

 

사랑이여 그대는 듣느뇨.

얼마나 부드럽게, 얼마나 슬프게 그의 목소리가 여태 부르고 있는지를.

여태 대답도 없이 그리고 어두운 비가 내리고 있다.

그 옛날처럼 지금도.

 

우리의 심장도 또한 침울하게, 오 사랑아, 잠들리라, 그리고 차갑게.

그의 슬픈 심장이 누워 있듯이

회색 달빛, 쐐기풀, 파란 곰팡이

그리고 속삭이는 비아래.

 

조이스에게 전기적 의미를 지니는 이 시는 소설 죽은 사람들(死者)의 장면과 어울려 묘한 울림을 준다. “인간의 생과 사, 탐욕과 사랑,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초월한 보편적 은총이라는 해외 평자들의 해석은 많은 서술적 부재로 시달리는 독자의 해석상 불확실성을 충당해준다. 설혹 네 시기의 형상으로 새로운 윤리사회를 제시하려 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의도를 모두 읽어내는 데 미치지 못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그의 응시로부터 1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충분한 사유의 양분을 거둬들이게 된다. 한 신부의 죽음의 이야기(자매)로 시작된 소설은 이렇게 죽음의 이야기로 맺는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발표한 작품들이 지닌 급진적 형식과 달리 바알, 즉 시간의 순환성에 더 매혹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옛날처럼 지금도 내리는 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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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5-12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블린 사람들을 보면 왠지 중국에 넘어가기 전 홍콩이 떠오릅니다. 아울러 장국영의 눈빛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비의식 2018-05-12 22:07   좋아요 2 | URL
네, 영국의 식민지적 형국이었으니까요.
심리적 압박감에서 오는 무력감이 엄청났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님.

AgalmA 2018-05-13 0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조이스 완독한 게 아직 <더블린 사람들>밖에 없는데요^^; 「죽은 사람들」넘 좋아서 제임스 조이스 다른 작품도 꼭 다 읽을테다! 해놓고 어언 10년이 흐른-_-;;;;;

비의식 2018-05-13 07:12   좋아요 1 | URL
잊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시선에 들어오고 그렇게 다시금 읽게되고 하는 것 같아요. ^^
 

 

우리 문학계에 이름이 같은 시인과 소설가 두 분이 계시다보니 독자들의 혼동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한 분은 2006현대시로 등단한 1975년생의 '시인 정한아' 이고, 또 한 분은 1982년생이신 '소설가 정한아' 이다.

또한 두 분 모두 여성이신데, 이제 혼란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시인 정한아 ]

 

시인 정한아 :

 1975년생 울산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현대시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어른스런 입맞춤, 울프 노트가 있다. ‘작란동인이다.

    

 

    

 

 

 

 

 

 

 

 

 

 

 

 

 

 

 

[ 소설가 정한아 ]

 

 

소설가 정한아 :

1982년생,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4회 대산대학문학상, 12회 문학동네작가상, 2016년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친밀한 이방인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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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초록빛 숲 사이로 지나가느뇨.

봄 물결로 그녀를 온통 치장하고?

누가 경쾌하게 초록빛 숲 사이로 지나가느뇨.

그걸 한층 즐겁게 하려고?

 

누가 햇빛 속으로 지나가느뇨.

가벼운 발걸음 알아채는 길로?

누가 경쾌한 햇빛 속으로 지나가느뇨.

그토록 순결한 용모를 하고?

 

수풀의 길들이

포근하고 금빛 불로 온통 번쩍이니...

(이하 생략)

<실내악> 제 VIII수 中에서

 

 

, 하나 재밌는 얘기로 시작해야겠다. 그의 시집 실내악의 제목이 정해진 에피소드인데, 제임스 조이스는 한 여인에게 실내악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읊어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인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방의 칸막이 뒤에 있던 요기(尿器)에서 소리가 나더란다. 아이쿠! 시집 제목을 실내악이라하자. 라고 했다나?....ㅋㅋ

 

 

 

제임스 조이스피네간의 경야를 읽기에 앞서 일종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그의 시집인 실내악 (Chamber Music)부터 중편 시()지아코모 조이스, 그리고 '꼼꼼한 비속성의 문체라 불리는 더블린 사람들, ’스티븐 데덜러스라는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을 낳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거쳐 율리시즈의 몇 장()을 읽는 사전 학습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상호 문체와 주제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독서 행위에서 이렇게 사전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사실 내 딴에는 야심찬 도전인데, 수많은 외래어들의 중첩과 언어유희, 텍스트의 복잡성 등 피네간의 경야를 읽어 내겠다는 소심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영문학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전혀 지니지 않은 내겐 올 한 해를 꼬박 넘기는 지리한 독서 행위가 될 것 같다.

 

이렇게 사전적 독서 중,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는데, 1914년 쓰여진 조이스의 자전적 경험이 배어있는 지아코모 조이스(Giacomo Joyce)라는 산문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편역한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조이스의 여느 소설들과는 달리 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 친근하게 읽어 낼 수 있다는 반가움이랄 수 있다.

 

자신에게 영어과외를 받던 학생에 대한 연정을 그리려 했던 듯 한 작품이다. 영문학사에 있어서도 산문시의 새로운 창조로 문학적 혁신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받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탈고하고 율리시즈를 쓰기 시작할 무렵인 그의 성숙기 산물이어서 아주 잘 익은 과일을 먹는 느낌을 준다.

 

미지의 여학생을 향한 조이스의 에로틱한 감정의 관찰과 표현이 단연 압권이다. 아래의 시는 전체의 극히 일부분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누구? 짙고 향기 어린 모피에 둘러싸인 창백한 얼굴, 그녀의 동작이 수줍고 신경질 적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까지 미세한 관찰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랑에 빠진 누군가의...., 그러니 외국어가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유식함으로 여겨지고, 작은 깜빡임조차 그의 시선을 장악하곤 떨림으로 어쩔 줄 모르게 한다.

 

맥 빠진 비엔나식 이태리어로 가르랑 거린다: 정말 유식하지! 긴 눈꺼풀이 깜박이며 치뜬다: 따끔한 바늘 끝이 벨벳 홍채 속을 찌르며 전율한다.”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자책하는, 대상의 순결과 무심한 아름다움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그렇게 그녀는 단테 곁에 순진한 자만심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와 폭력에 결백한 채, 첸치의 딸, 비아트리체는 그녀의 죽음을 향해:”

 

나의 수치가 그 위에 영원히 이글거릴, 불결하고 아름다운, 책장들을 매만졌다. 부드럽고, 차갑고, 순결한 손가락들, 저들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결구: 나를 사랑하라. 나의 우산을 사랑하라.”

-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김종건 편역(어문학사, 2012.10) 에서

  

이제 나의 조국의 도덕사이자 나의 사랑하는 불결한 더블린(Dear Dirty Dublin)"15작품의 독서로 생각을 옮겨야겠다. 가끔은 예기치 않은 문학적 수확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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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5-09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를 잘 모르지만 사놓고 미루던 ‘더블린 사람들‘을 어제야 다시 읽었어요. 사람들을 포착한 모양이 보통 아니라고 느꼈어요. 촘촘하고 예리한 풍속화를 보는 듯. 일단 첫인상이 그랬는데요. 제겐 아직 낯설어요.

비의식 2018-05-09 19:44   좋아요 0 | URL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을 이렇게 말했다네요. 중하위 계층(아마 서민층을 말한 듯 해요) 더블린 사람들의 생활에 가해지는 정치,문화,경제적 힘의 압박으로 인한 고통의 객관적, 심리적 사실의 스케치라고요. 풍속화를 본듯한 인상이란 말씀은 이러한 이유일거예요. 댓글 고맙습니다. YoonSoo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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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클럽의 무대에서 쉰일곱 해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두 시간 가까이 주절거린다면 관객인 나는 이내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의 작품에서 영문학 교수인 데블런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고 나서는 재능이란 아무리 색다르더라도 지루하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듯이 그 지리멸렬한 타인의 삶을 듣고 있기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쳐 모두들 안녕히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게 되었다. 40 여 년 전 1년 남짓 우정을 나누었던 옛 친구에게 자신의 쇼에 와주기를 부탁하던 하나의 문장,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 이 말이 울려대는 어떤 정직하고 여실(如實)한 느낌에 울컥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봐주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자신의 정말의 인생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는 부탁이 얼마나 거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쾅 하고 심장에 박혀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생이라는 무대의 맞춤처럼 네타니아 클럽무대의 쇼에서 펼쳐지는 비극으로서의 삶과 뒤틀린 삶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마치 위기 극복의 수단처럼 발화되는 농담의 향연은 그야말로 농축된 삶의 한 시사처럼 다가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삶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옛 친구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있는 전직 지방판사인 아비샤이 라자르의 모습 - “사실 너 같은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만만한 대상이지. ?” - 과 같이 남의 인격을 범주화 해 버리고 인생을 단 번에 재단해 내는 태도가 지금의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코미디언 도브 그린스테인’(도발레 G.)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옛 친구의 부탁에 이러한 대응을 하는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아비샤이가 더 이상 개그 쇼가 아닌 그냥 살아있자는 기획에 불과했던 한 인간의 실패한 삶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갈등하는 객석의 반응에 동화되고 마침내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는 과정은 마치 독자인 나의 소설 속 행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외면하지 않는, 감히 진짜배기 삶을 응시하기 위해.

 

동년배들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소년 도발레는 땅에 손을 집고 거꾸로 돌아다닌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물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의 모습에 보내는 비열한 시선들을 자신의 우스꽝스런 행위로 차단하려했던 의도이다. 그럼에도 물구나무로 걷는 행동이 아버지의 채찍에 의해 중단되어야 했던 고통의 이야기를 발설 할 때, 아비샤이의 기억은 내향적 소년이었던 자신에게 활기와 의욕을 꺼내주었던 행복과 웃음으로 커지는 눈을 지닌 도발레로 이어진다. 유쾌함과 미소로 자기 고통을 보여주지 않았던 도발레를.

 

또한 군사훈련을 위해 강제된 캠핑에서 체구가 작은 도발레를 가방에 넣어 던지고 패대기치며 비웃어대고 폭력을 가하는 동년배들의 행위를 외면하고, 하사관에 불려 가방을 메고 홀로 캠프장을 떠나게 되는 도발레에게 끝내 다가가지 않았던 아비샤이는 소녀 리오라에게 열중하고 있었기에 다른 모든 감정이 자신의 생각을 무디게 한 것뿐이라고 당시의 자신을 합리화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기만인 것은 캠핑이 끝나고 부모를 설득하여 도발레와 같이 하던 수학 과외를 중단하는 행위에 있다. 이 기만의 행위는 친구에 대한 비탄과 참혹한 상실을 털어내기 위한 자기 보호였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처럼 고통이고 외면하고픈 충동을 불러오지만, 몰래 훔쳐보고 싶은 유혹 또한 병행한다. “마음의 아픔, 양심의 고통, 악의 사절들, 미래의 악몽을 꾸고 전전반측하는 광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 시작한다. 내 시선도 이와 같이 떨리기 시작한다. 객석을 떠나는 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남은 자가 옳은 것인가? 대체 어떤 태도가 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인지 갈등하게 한다. 코미디 극이니 그냥 웃어넘기면되는 것인가? “결코 더럽혀지지 않은 거라는 인생의 이야기”, 그의 고통의 근원을 마지막까지 따라가기 위해 인내심을 쥐어 짜낸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불편한 무엇이 저항하게 한다. 정착촌에 사람들을 내몰고,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군사 훈련을 강제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멸시하며,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회와 자신은 마치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신체와 멀리 팔을 뻗쳐 손끝에 자신의 대변 샘플 통을 쥐고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비아냥대는 도발레의 개그가 당신들도 공범이야.’라는 말처럼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허공에 다시 레프트 훅을 날린다.”

 

캠프를 떠나 장례식에 맞추어 가기위해 군용차에 실려 집으로 향하는 소년 도발레의 회상은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 표현키 어려운 고통이었음이 차 유리에 머리를 부딪는 드----! 이며, 드르르르르! 뇌가 휘저어져 모든 생각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는 괴로움으로 들려진다. 그는 도착 할 때까지 나는 인간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토로한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엄마의 죽음을 직면한 소년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보자 물구나무를 서서 도주하는 모습은 소박한 영혼조차 지니기가 불가능했던 삶을 마주보게 한다.

 

소설은 이처럼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지배했던 모욕과 폭력의 비극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유대인의 정신적 외상의 역사, 이스라엘 중부도시 네타니아로 상징되는 범죄와 불의의 공간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녹여내어 그냥 살아있자는 것조차 얼마나 놀라운것이었는지를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집요하게 길어낸다. 어쩌면 이야기의 기록자가 된 아비샤이가 이 장소에서 자신을 빼내기를”, 혹은 자기 기억의 소환을 거부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진실에 가 닿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자기 삶의 이야기인 병든 타마라와의 추억이라는 내면에 침잠하는 아비샤이의 모습은 나의, 우리네의 한계를 보는 것 만 같다.

 

반면에 쇼의 시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발레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어린 시절 그를 기억하는 피츠라는 여성의 눈물과 이야기의 부정과 수긍과 얼굴을 가리며 몰입하는 모습은 타인의 이야기, 더구나 그것이 오직 견딤, 존재의 이유만을 갖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감히 바로 볼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사람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각을 넓혀나가는, 타인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와 사유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한 것임을 다시금 깨우치는 공감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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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 지도로 본 도시의 역사
제러미 블랙 지음, 장상훈 옮김 / 산처럼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굶주린 뇌가 황홀해지는 진귀한 사료들 - 도시와 지도 등 - 과 높은 인문학적 성찰이 어우러진 가히 수준높은 도시역사의 노작(勞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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