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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누군가가 클럽의 무대에서 쉰일곱 해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두 시간 가까이 주절거린다면 관객인 나는 이내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의 작품에서 영문학 교수인 ‘데블런’이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고 나서는 재능이란 아무리 색다르더라도 지루하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듯이 그 지리멸렬한 타인의 삶을 듣고 있기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쳐 “모두들 안녕히”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게 되었다. 40 여 년 전 1년 남짓 우정을 나누었던 옛 친구에게 자신의 쇼에 와주기를 부탁하던 하나의 문장,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 이 말이 울려대는 어떤 정직하고 여실(如實)한 느낌에 울컥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봐주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자신의 정말의 인생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는 부탁이 얼마나 거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쾅 하고 심장에 박혀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생이라는 무대의 맞춤처럼 네타니아 클럽무대의 쇼에서 펼쳐지는 비극으로서의 삶과 뒤틀린 삶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마치 위기 극복의 수단처럼 발화되는 농담의 향연은 그야말로 농축된 삶의 한 시사처럼 다가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삶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옛 친구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있는 전직 지방판사인 ‘아비샤이 라자르’의 모습 - “사실 너 같은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만만한 대상이지. 응?” - 과 같이 남의 인격을 범주화 해 버리고 인생을 단 번에 재단해 내는 태도가 지금의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코미디언 ‘도브 그린스테인’(도발레 G.)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옛 친구의 부탁에 이러한 대응을 하는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아비샤이가 더 이상 개그 쇼가 아닌 ‘그냥 살아있자는 기획’에 불과했던 한 인간의 실패한 삶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갈등하는 객석의 반응에 동화되고 마침내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는 과정은 마치 독자인 나의 소설 속 행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외면하지 않는, 감히 진짜배기 삶을 응시하기 위해.
동년배들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소년 도발레는 땅에 손을 집고 거꾸로 돌아다닌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물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의 모습에 보내는 비열한 시선들을 자신의 우스꽝스런 행위로 차단하려했던 의도이다. 그럼에도 물구나무로 걷는 행동이 아버지의 채찍에 의해 중단되어야 했던 고통의 이야기를 발설 할 때, 아비샤이의 기억은 내향적 소년이었던 자신에게 활기와 의욕을 꺼내주었던 행복과 웃음으로 커지는 눈을 지닌 도발레로 이어진다. 유쾌함과 미소로 자기 고통을 보여주지 않았던 도발레를.
또한 군사훈련을 위해 강제된 캠핑에서 체구가 작은 도발레를 가방에 넣어 던지고 패대기치며 비웃어대고 폭력을 가하는 동년배들의 행위를 외면하고, 하사관에 불려 가방을 메고 홀로 캠프장을 떠나게 되는 도발레에게 끝내 다가가지 않았던 아비샤이는 소녀 리오라에게 열중하고 있었기에 다른 모든 감정이 자신의 생각을 무디게 한 것뿐이라고 당시의 자신을 합리화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기만인 것은 캠핑이 끝나고 부모를 설득하여 도발레와 같이 하던 수학 과외를 중단하는 행위에 있다. 이 기만의 행위는 친구에 대한 비탄과 참혹한 상실을 털어내기 위한 자기 보호였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처럼 고통이고 외면하고픈 충동을 불러오지만, 몰래 훔쳐보고 싶은 유혹 또한 병행한다. “마음의 아픔, 양심의 고통, 악의 사절들, 미래의 악몽을 꾸고 전전반측”하는 광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 시작한다. 내 시선도 이와 같이 떨리기 시작한다. 객석을 떠나는 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남은 자가 옳은 것인가? 대체 어떤 태도가 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인지 갈등하게 한다. 코미디 극이니 “그냥 웃어넘기면” 되는 것인가? “결코 더럽혀지지 않은 거라는 인생의 이야기”, 그의 고통의 근원을 마지막까지 따라가기 위해 인내심을 쥐어 짜낸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불편한 무엇이 저항하게 한다. 정착촌에 사람들을 내몰고,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군사 훈련을 강제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멸시하며,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회와 자신은 마치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신체와 멀리 팔을 뻗쳐 ‘손끝에 자신의 대변 샘플 통을 쥐고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비아냥대는 도발레의 개그가 ‘당신들도 공범이야.’라는 말처럼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허공에 다시 레프트 훅을 날린다.”
캠프를 떠나 장례식에 맞추어 가기위해 군용차에 실려 집으로 향하는 소년 도발레의 회상은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 표현키 어려운 고통이었음이 차 유리에 머리를 부딪는 드-드-드-드-드! 이며, 드르르르르! 뇌가 휘저어져 모든 생각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는 괴로움으로 들려진다. 그는 “도착 할 때까지 나는 인간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토로한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엄마의 죽음을 직면한 소년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보자 물구나무를 서서 도주하는 모습은 소박한 영혼조차 지니기가 불가능했던 삶을 마주보게 한다.
소설은 이처럼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지배했던 모욕과 폭력의 비극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유대인의 정신적 외상의 역사, 이스라엘 중부도시 네타니아로 상징되는 범죄와 불의의 공간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녹여내어 “그냥 살아있자는 것조차 얼마나 놀라운”것이었는지를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집요하게 길어낸다. 어쩌면 이야기의 기록자가 된 아비샤이가 “이 장소에서 자신을 빼내기를”, 혹은 자기 기억의 소환을 거부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진실에 가 닿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자기 삶의 이야기인 병든 타마라와의 추억이라는 내면에 침잠하는 아비샤이의 모습은 나의, 우리네의 한계를 보는 것 만 같다.
반면에 쇼의 시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발레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어린 시절 그를 기억하는 ‘피츠’라는 여성의 눈물과 이야기의 부정과 수긍과 얼굴을 가리며 몰입하는 모습은 타인의 이야기, 더구나 그것이 오직 견딤, 존재의 이유만을 갖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감히 바로 볼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사람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각을 넓혀나가는, 타인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와 사유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한 것임을 다시금 깨우치는 공감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