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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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른 새벽, 떠나는 아버지의 운구를 향해 부르짖는 한 여인의 소리를 들었다. ‘아빠, 나를 나아줘서 고마워요. 아빠’ , 지금도 이 목맨 울음을 떠 올리면 가슴 뭉클함과 눈시울이 젖어든다. 아내를, 여동생을 여윈,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더 이상 손을 맞잡을 수 없는 이별을 겪는 이들의 슬픔은 세상 모든 서글픔과 비통함으로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26편의 내면의 일기로 읽히는 이 에세이집은 슬픔 속에 숨 쉬는 사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이 발산하는 그 빛 때문에 진정 아름다운 사유들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슬픔의 비의(秘義)를 간직한 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삶은 상실을 필수로 하는 고통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곁에 두고 아주 느린 속도로 읽어나가야겠다고 펼쳐든 이유는 공허함의 깊어짐과 의지가 소진되어가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와의 작은 대화의 시도였다고 해야겠다.

 

또한 슬픔이라는 공통의 감정을 지닌 누군가와의 유대감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분명 이러한 기대는 내가 향한 시선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깨달음과 위로와 격려, 공감으로 작은 성취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이미 나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자기와의 대화에 나서는 고독의 시간에 대한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이었을 것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가슴 어딘가에 막혀 있는 슬픔에 저지당한 채 있는 사람들이 이겨내고 마침내 발견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이해는 반복하여 곱씹는 나만의 언어가 된다.

 

누군가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 되고 나서, 그 사람을 만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말을 전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P 14~15)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절규하는 여인이 토해냈던 언어가 그토록 시리게 아름다웠던 이유를 이제는 더욱 분명하게 안다. 그녀의 삶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인생을 바닥에서 지탱해주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희망, 사랑, 신뢰, 위로, 격려, 치유 ....”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존재들이 나의 외부에 있으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침묵 속에 작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으로써 진심으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주선되는 닫힌 문의 열쇠를 발견하는 짧은 순간의 번쩍임이 있다. 아마 벗어나기 어려운 시련 속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시공을 초월하는 울림이 있음을 말하는 작가의 타인에 대한 깊은 유대와 이해의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내면에 잠들어있는 예지의 힘에 대한 일깨움, 어떻게든 견뎌냈기에 살아있는 그 내재된 삶의 용기, 특히 용기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구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P 52)는 구절은 내게 붙잡아야 할 미세한 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슬픔 속에서 다시 발견했을 때” (P 166), 그것을 환희에 넘치는 슬픔이라 묘사한 작가의 감성은 꽤나 오래 내 마음의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이 책은 내 시선이 닿는 책장의 한 곳에서 내 손길을 자주 받아야 할 것 같다. 진정 개개인의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단 한 번뿐인 경험인 문학작품으로서 독자와 무구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책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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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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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가 셋이나 있는 소설이다. 편지글의 주체인 로버트 월턴’, 저주 받은 창조주가 되어버린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분노와 악의에 찬 피조물로서의 괴물’. 이것은 또한 월턴이 누이인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월턴, 월턴과 괴물의 대화라는 여러 겹의 서술 장치로 이야기가 뒤얽혀들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지식의 오만, 가족의 가치와 사랑의 미덕, 소외와 소통 부재의 고립에 도사린 문제 등, 실로 복잡 다양한 주제의식을 발산하게 한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을 다시금 읽게 된 동기는 21세기 신생 과학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 인간 생명의 의식을 가공할 차원으로 옮겨놓으려는 기술지상주의가 지향하는 인간 욕망의 고전적 뿌리를, 그 오래된 연원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문학이란 것이 그렇던가! 인간의 본성과 삶의 가치에 대한 반성의 사유는 물론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니는 계급화, 범주화가 낳는 차별과 소외의 문제와 같은 그 풍성한 의미를 새삼 발견하는 즐거움에 빠져들고 말았다.

 

1. 자연을 보는 시각

 

소설의 시작인 월턴의 편지내용은 의외의 흥미로움이 있다. 아마 18,9세기 당대 계몽주의 영향을 피해 갈 수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21세기 오늘의 우리네에게 더욱 심화된 시각이기도 한 정복되어 지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인식이다. 월턴은 극점을 향한 미개척 항해의 여정에 나선 것인데, 그것은 극점 근처의 항로발견, 혹은 자기장의 비밀을 밝히게 될지도 모를 미지의 탐험을 통해 인류 최후의 세대까지 파장이 미칠 공헌을 하겠다는 열정이다.

 

이것은 월턴에게 흔들리지 않는 목표이며, “영혼이 하나의 초점에 지성의 눈길을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고향인 제노바를 떠나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지닌 학문, 그를 매료시킨 자연철학으로서의 화학, 생리학을 통한 과학적 탐구의 경악할 열정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게다가 내가 인간의 육신에서 질병을 추방하고, 그 무엇보다 폭력적인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그 발견에 따라오는 영예는 상상도 못할 것이 아닌가!” 라는 생명의 원리를 발견하겠다는 프랑켄슈타인의 천명은 월턴의 그것과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인다.

 

극점이라는 지리, 환경으로서의 자연, 동물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은 이들에게 오직 지식으로서의 앎, 즉 파악되고 장악되어 소유될 수 있는 피지배적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며, 이 대상에 몰입하는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는 외곬과 몰입을 뜻하는 눈길의 고정이며, ‘경악할 열정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탈신체화의 욕망을 강렬하게 추진하는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과도 아주 흡사하다. ‘메리 셸리는 그렇다면 이러한 물화된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이를 견인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열정이란 무엇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2. 생명에 대한 이해, 지식의 오만

 

개체 발생과 생명의 원인, 무엇보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을 갖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창조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 조물주의 창조 작업이 온통 부패와 죽음에서 시작된다. “생명의 원인을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죽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라며, “시체 안치소에서 유골을 수집하고, 불경스러운 무덤의 습지를 허우적거리며재료를 취득한다. 이러한 묘사는 다분히 상징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완성의 존재에서는 악취와 죽음의 냄새만이 떠돈다.

 

이처럼 재료의 주된 부분들이 시신에서 추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창조의 과정이 생명력과 연루된 자연과는 먼 거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존재는 시초부터 다른 어떤 정상적 인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나 언어의 기반을 넘어선 이상한 부산물에 머무른다. 이것은 메리 셀리로부터 100년 후, ‘카렐 차페크에 의해 효율성과 기술적 관점에 기초한 생식력 없는 로봇(R.U.R)이라는 인간 대체물로 탄생하고, 다시 100년 후인 21세기 오늘에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부르짖는 기술종교주의자들에 의해 포스트휴먼(Post Human)'이라는 모호하고 야릇한 의미를 산출하는 언어로 변주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에서 학문의 진로를 탐색하던 시절, 화학담당 교수인 발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천재들의 노고란 아무리 오도된 것이라도 결국은 인류의 선을 공고히 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네.” 21세기 오늘 우리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신봉이 헛소리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오도되는 즉시 인류에게 더없는 해악을 끼치는 산물임을.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적 정열이 책임감과 올바른 가치관을 동반한다면, 진실로 인류를 위해 바람직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의미는 될 수 있을까? 이건 보다 장고(長考)해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인간의 모습과 닮지 않은 외형이라는 소외를 야기하는 다름의 원천을 떠나서라도 조물주, 즉 인간인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와 악의를 부르짖고, 인간은 자신의 지식, 기술로 제작된 피조물을 통제하지 못한다. 결국 프랑켄슈타인, 그의 지식의 오만은 자신의 실존적 위기, 통한(痛恨)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인간 대체물에 대한 기술적 측면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장면이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한 채 떠돌다 독일의 한 농가에 은신하며 언어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괴물의 자기 학습능력이다. 마치 오늘날 인공지능의 딥러닝(Deep Learning)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각성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고하고 추론하는 피조물은 인간의 의지에 결코 예속되지 않는다. 괴물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추한 모습이 인간들과 얼마나 다른지, 기형의 외모가 인간들에게 어떻게 배척되는지, 이것은 곧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느껴야만 하는 불행의 고통, 그 크기에 대한 조물주를 향한 항변으로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동생을 죽이기에 이른다.

어쩌면, 작가 메리 셸리는 여기서 인간이 지닌 지식의 오만함에는 무지가 가득 차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3. 소외와 소통의 문제

 

소설에서 소외와 소통의 문제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각개의 시점으로 언급되며, 전자는 가족의 가치, 혹은 공동체와의 유대감에 대한 환기로, 후자는 타자의 범주화, 차별화에 대한 인간 인식의 편협성의 비판으로 이해된다.

 

프랑켄슈타인이 잉골슈타트의 감옥같은 방에 처박혀 괴물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은 외부세계와의 철저한 단절이다. 그의 말처럼 지향할 길 없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에 내몰려 오로지 전진하는 시간이며, 이것은 극단적인 이기성과 사고의 경직성, 편협성을 확장하고,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심화시킨다. 결국 스스로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괴물이 동생을 살해함으로써 자기 소외는 자기혐오와 우울을 동반하며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를 반대측면에서 보면 소외의 극복, 삶의 균형을 위해서 가족의 사랑, 사회 공동체와의 연결은 인간의 보편적 삶에 있어 중대한 미덕임의 역설(力說)이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괴물은 기묘하게 낯선 존재로 이해됨으로써 소외의 의미를 명료하게 읽게 한다. 괴물의 기형적이고 끔찍한 몸의 묘사와는 상반된 프랑켄슈타인을 능가하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발휘하는 대립이다. 이 비정상은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인간사회의 본능적인 핍박과 주변화의 폭력성을 선명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괴물이며, 악마라는 철저한 소외의 대상이 된다. 역겨움과 추방의 대상으로서.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와 자신과 같은 여성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욕망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욕망, 소외와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타당한 권리처럼 보인다. 비정상성을 바라보는 인간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곧 범주화와 차별이라는 폭력을 낳는다. 아마 당시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계급의식, 혹은 젠더의식에 대한 각성, 인간 존재의 평등성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자 비판이었을 것이다.

 

4. 욕망의 충돌, 그리고 죽음

 

지식의 오만이 불러일으킨 창조의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고통만을 안긴다. 이러한 프랑켄슈타인에 위로와 작은 평온을 주는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괴물의 살해 위협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야만 하는 역겨움과 혐오, 분노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괴물의 요구인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의 실현을 위한 또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던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존재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존재, 다른 추론과 사유의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완성에 이르기 직전 그 피조물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만다. 괴물과의 협상은 깨졌다. 이 충돌은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삶을 앗아간다. 그의 전락(轉落)한 삶의 회복을 위해 우정을 잃지 않는 친구 클레르발, 사촌 누이이자 연인인 엘리자베트, 아들의 안위에 모든 배려를 쏟아주었던 아버지를.

 

마침내 분노와 증오의 화신이 되어 괴물을 쫓던 프랑켄슈타인마저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은 프랑켄슈타인의 더러운 투영이며, 자신이 생명을 얻은 그 날을 증오한다며, 저주 받은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죽음을 본 괴물의 성취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희망을 파괴하긴 했으나, 나 자신의 욕망은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라는 괴물의 독백처럼 허기진 욕망으로 남는다. 채워질 수 없는 것, 역시 죽음, 소멸만이 기다린다.

이 작품의 귀결은 소설 속 한 문장에 일찌감치 서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P 160)

 

이 위대한 허구의 산물에서 오늘 우리는 정신의 소산인 열의와 의지가 방향을 잃을 때, 인지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지식의 오만이 방종할 때, 인간 자신에게 돌아 올 위기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며, 뿐만 아니라 타자성에 대한 이해의 미성숙, 그로인한 인종적,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의 비판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마 이 작품이 발표된 이래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의미들이 풍화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한 채 더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막힌 직조 능력과 작가의 천재적인 지적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문학동네, 1818년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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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20세(19세?)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

비의식 2018-03-23 09:56   좋아요 0 | URL
네, 풍부한 의미로 넘쳐나는 위대한 작품이에요.
고맙습니다. 레삭매냐님~

꼬마요정 2018-03-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전히 궁금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수첩...
메리 샐리 진짜 멋져요^^

비의식 2018-03-23 17:35   좋아요 0 | URL
ㅎㅎ 빅토르는 생명을 어떻게 불어넣었을까요?
21세기 오늘은 ‘웨트웨어그라인드하우스‘ 같은 탈신체화,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있어요. 그네들의 전망노트를 닮았을 것 같네요. 메리 셸리는 그야말로 천재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님 ^^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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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인생은 덧없이 끝을 향해 물러나고, 지상의 기쁨은 희미해지네,

영광도 지나가고, 사방에 보이는 것은 모두 변하고 썩나니,

, 변하지 않는 그대여, 나와 함께 머무소서.” - P 432 에서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다. 내가 지닌 언어는 이상의 표현이 가능하지 않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알지 못하는 어떤 그리움들이 깊어진다. 바다 같이 깊은 감동이 온몸을 감싸듯 휘젓는다.

 

모든 이의 필요에 대해 열린 마음을 함께 나누는 한 자연주의 공동체 아르카디아, 영혼의 양식을 구하려 카라반을 이끌고 이동하던 그네들에게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꼬마 비트가 태어난다. 소설은 바로 이 텍스트의 책임자인 가장 작은 히피 조각’, 비트가 삶의 신성한 존엄성을 의식하고 그것을 아끼고 가다듬으며, 충만한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끝없이 내몰리는 상실에 대한 도저한 발걸음, 삶이라는 그 견딤의 고독한 시간의 이야기이다.

    

자기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삶, 이것을 바라보는 내내 시리도록 순수한 것들이 뭉쳤던 내 숨을 크게 내 뱉게 한다. 춥고 배고프며 고된 노동의 일상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하는 친밀함, 무한히 개방된 마음들의 사랑이 흐르는 곳, 그러나 이 낙원은 서서히 붕괴해 간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사람들, 대마초와 섹스와 방종, 자유의 방종은 열린 마음들을 굳게 걸어 잠그게 만들며, 깊어지는 갈등은 분열과 해체를 재촉한다.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쫓기듯 아르카디아를 떠나 도시로 향한다. 자신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조용하고 좋은 꿈, 사진을 찍으며 사는 삶을 포기해서라도 얻고 싶었던 헬레와 아르카디아를 떠난다. 그의 사랑, 삶의 태도를 형성시킨 터전을 상실한 어린 비트에게 도시의 삶은 고통에의 도전, 그가 자신의 삶에 쓰려는 이야기,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아르카디아인으로서의 심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프고 쓸쓸하게 흘러간다.

 

어느덧 가난하지만 사진예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있는 비트, 그의 확실한 존재였던 부모, 버려진 아르카디아에 오두막을 짓고 돌아간 아버지 에이브에 대한 분노로 인한 어머니 해나의 별거, 그의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바깥세상에서 잘 생긴 성인이 된 아르카디아인들의 단단한 껍데기에 싸인 얼굴은 아프도록 부드럽고 숨김없는 아르카디아 시절의 얼굴과 대조되어 도시가 강요하는 영혼의 두꺼운 장막, 그 우울한 견딤의 아린 통증을 던져준다.

 

이 묵묵한 견딤의 시간에 자신의 삶을 버려서라도 얻고 싶었던 헬레와의 재회, 그녀와의 짧은 시간의 행복 속에 얻은 딸 그레테, 그리곤 다시금 그의 곁을 떠나버린 사랑의 상실은 삶을 온전히 파괴하는 아픔이 된다. “왜 울어? .... 아빠는 항상 울어. 왜 항상 우는 거야?” 라는 비트를 향한 그레테의 말에 이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르카디아 시절, 지붕 수리를 하다 떨어져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아버지, 근육위축경화증으로 점차 거동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 에이브와 해나는 비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죽음은 그의 기반암이자 세계의 중력이었던 에이브만을 먼저 거두어 간다. 딸 그레테와 아르카디아의 옛 친구들, 이웃인 아미시 사람들과 매일 한걸음씩 죽음의 늪으로 향하는 어머니 해나에게 아름다운 삶으로서의 기억을 위한, 진정한 삶의 복원을 위한 자연을 닮은 일상이 찬연하게 이어진다.

 

내 삶의 이야기, 내 삶이라는 소설의 첫 장에서 그 완결의 페이지인 마지막 장은 어떻게 덮여질까? 온통 사람들에게 열린 자신의 사랑이 마침내 소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빛이 그림자에 이르고, 다음 세대에 희망을 주는 그런 삶의 이야기를 써 낼 수 있을까를 생각게 된다.

흙의 달콤함이 나를 향해 피어오를 때, 비트의 황금빛 먼지가 앉아 빛나는 회고처럼 자기 이야기에 대한 숭엄한 책임의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나도 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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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구마 2018-03-19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표지는 뭐죠? 제가 받은 책의 표지와 조금 다른 데 느낌있네요.

2018-03-19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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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전쟁, 그 이념의 광기에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결코 잊혀져선 안 될 우리들의 아버지, 형제들의 목맨 울음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숭고한 역사적 작품으로서 거듭 읽혀져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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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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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25일 저녁 프라하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로봇과 조우했으며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봇에 절멸되었다.(1)”

 

 

위 문장은 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던 사실에 대해 다소 위협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체코어 로보타(robota), 강제노동을 뜻하는 오늘날 공용어로 사용하는 로봇은 여기서 처음 쓰였다. 대략 1세기 전에 천재 작가에 의해 창조된 상상력이 바야흐로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들의 삶에 다가왔다. 그는 과연 어떤 의도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을까?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은 어떻게 끝나는 것일까?

 

서막과 1~3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의 줄거리는 일견 비관적이지만, 오늘의 표현인 포스트휴먼(Post human), 다시 말해 호모사피엔스보다 우월한 종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기술지상주의자들의 견해에서는 희망적이랄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현 인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류에게 지상의 삶이 이전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희곡의 마지막 문장은 불멸 하리라! 불멸!”이다. 이러고 보면 취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을 새로운 인간형 장치로 대체하려는 오늘의 신생기술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의지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 그것과 어떠한 차이도 없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차페크는 현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올 기술지상주의의 실천이 과연 인간적 진실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일까?

 

 

1. 희곡 속으로

 

늙은 발명가 로숨(Rossum)의 제조 공식, 그리고 그의 아들이 생산 공정을 완성한 로봇을 대량 생산하는 외 딴 섬이 무대이다. 생리학 연구부장 갈 박사, 로봇 심리학 연구소장 할레마이어 박사, 기술담당 중역 파브리 등의 기술진들과 이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강력한 주체인 회사 대표 해리 도민과 로봇의 인권보호를 위해 섬을 방문한 헬레나, 그녀의 유모 나나, 그리고 건축주임인 알퀴스트가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역이 되어 열연한다.

 

헬레나는 도민에게 묻는다. “로봇을 왜 만들고 있죠?” 그 답변은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스트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정말 대책이 안 설 만큼 불완전하며,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 현대 기술을 제대로 쫓아오기에는 효율성도 떨어지며”,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유년기란 완전히 난센스인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봇들은 세계의 시장에 무한히 팔려 나간다. 그것들은 인간을 대체하여 노동을 하고, 전쟁의 군대가 되어 전투 병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자아실현만을 위해서 살면 되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그 한계를 제어하는 데 무척이나 서툴다. 로봇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식하기 위한 작은 변화의 시험이 시도되고, “어느날 갑자기로봇들은 인간에 복종하기를 멈추고, 인간은 완전히 불필요한 유물임을 각성하며, 인간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한다.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음을 학습해 온 로봇은 세계의 모든 인간을 살해하고, 그것들의 본산지인 섬을 공격한다. 인간이 절멸된 로봇만의 세계,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로봇의 시대임을 선언한다.

 

로봇들의 공격으로부터 살해되기 직전의 도민을 비롯한 경영진과 기술진들의 자기항변과 사태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반성의 대화들은 가히 오늘의 진술들과 견주어도 어떠한 손색이 없다.

회사대표 도민은 인간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었으며, 그걸 극복하려 한 건 정당했으며, 그 어떠한 장애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종, 인간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으로 살려한 것은 위대한 일이었다고 항변한다. 반면에 알퀴스트는 생체로봇의 생산은 돈, 보다 많은 이익배당을 꿈꾼, 자신들의 거대한 이익을 위해, 인류의 거대한 무언가를 위한다는 인간의 과대망상이 자초한 단순한 인류의 멸망뿐이라고 자성한다.

 

로봇들은 마침내 이들 모두를 살해하지만, 건축노동을 하던 알퀴스트만을 살려두고, 로봇들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한 제조공식을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같으면 엄청나게 축적된 빅데이터를 비롯하여 디지털화되어 저장된 기술내용으로서 고도의 지능을 갖춘 로봇들에게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100년 전의 사람인 차페크에겐 이 갈등이 위대한 걸작의 중요한 반전 요소가 된다. 더 이상의 로봇제조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멸종뿐 아니라 새로운 종으로서의 로봇 또한 절멸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아마 이 희곡의 대단원이야말로 백미(白眉)라 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의 이타성과 성()의 구분이 발생한 로봇 헬레나와 프리무스라는 한 쌍의 로봇이 출현하고, 인류가 절멸한 세계에서 새로운 종의 시대를 시작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인데,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우상화에 대한 육신으로서의 생명이 지니는 가치를 향한 차페크의 염원으로 느껴졌기 때문에서이다. 형이상학적 고뇌가 결여된 현대의 과학기술과, 그 진보란 단지 산업적 생산의 진전이상이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이지 않았을까?

 

2. 카렐 차페크의 의도

 

19236월 런던에서 개최된 이 희곡에 대한 토론에 당대 최고의 작가인 버나드 쇼’, ‘G.K.체스터턴등이 참석하여 차페크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해석과 비판을 하였던 모양이다. 차페크는 이에 대한 관대한 수용과 한편, 왜곡된 작품의 바른 의도를 알리기 위해 로봇의 의미라는 제목의 소고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작품의 의도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 첫 째는 과학의 희극이라는 것이다.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도리어 산업의 지배를 받게 되며”, “결국에는 인간의 손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한 기술적 특이점의 필연적 도래와 닮은 이 주장은 기술미래에 대한 동일한 예측이지만 그들이 딛고 선 영역은 서로 경계의 반대에 서 있다는 점이다. 기술지상주의자에겐 낙관적인 특이점이지만, 차페크에겐 과학의 희극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과학기술의 수용에 대한 인류의 이해에 어떤 편견이나 단정적 진실이란 방패를 씌우지 않는다. 그것이 의도의 두 번째 이다. 인간의 로봇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존재한다. “산업주의만이 현대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를 타락시킬 것이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다.”, “비인간적 기계화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육신과 마음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와 같은 다양하게 대립되는 이상론들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이렇듯 진실을 향한 견해들은 고상한 진실과 사악하고 이기적인 잘못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현대문명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이며, 바로 진실의 희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좇아야 할 진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 오늘의 기술은 점점 인간에 대한 도구적 관점을 강화하고 있다. 교체 가능한 멀티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에 맞춰진 불멸의 어떤 물체가 되는 것이 과연 인류의 진정한 욕망인가? 이것은 기술자본주의의 탐욕과 망상인 것은 아닐까? 1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이처럼 이 작품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사유케 하는, 성숙된 인간의 태도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성찰케 한다. 가히 경이로운 고전중의 고전이다.

 

*(1): 트랜스휴머니즘P150(마크 오코널 , 노승영 , 2018.2 문학동네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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