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2
필리프 코마르 지음, 안정미 옮김 / 시공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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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개의 이미지 도판과 함께 편집된 이 독특하고 작은 소책자에 시선을 못 박게 된 것은 문자 그대로 인체(人體)’, 사람의 몸이란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여겼던 것에 대한 엄청난 무지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21세기 오늘의 담론들을 바라보면 시대성이란 것에 적응하기 위한 사람들의 자기 신체에 대한 변형의 욕구들, 젊음의 유지와 수명연장, 나아가 불멸에 까지, 신체성에 대한 포기에 이르는 마치 무능하거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진 한낱 물질적 대상화된 인식의 불편함 때문이랄 수 있겠다.

 

필리프 코마르의 이 저작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의 오랜 문명사를 통해 인간이 자신들의 신체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또한 그러한 인식들이 어떻게 인간의 시선을, 가치관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에 대한 줄기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우주관이기도 하며, 미적 관념이며, 심리적 변천의 지성(知性)()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고대의 동굴벽화나 발굴된 조각상들에서처럼 인체는 상징, 즉 종교적 대상의 비유적 의미에서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수리철학 발흥과 함께 종교적 의미를 벗어나 대칭과 비례, 균형을 중시하는 공간개념 속에 인체를 반영하며, ()적 대상으로 변화한다. 그리곤 이러한 이상적인 인체란 현실과는 괴리된, 본질적으로 평범함을 넘어선 속성임을 자각하며,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위해 인체 비례체계를 고안하고, 자연계 전체의 균형과 인체의 조화를 반영하는 사유로 진행된다.

   

 

이 시선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우주의 중심에 선 인간상에서,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대변되는 우주의 실제적 거리라는 과학기술 앞에 왜소화된 인간으로, 유형화된 인간의 분류로, 급기야는 해부와 해체를 통해 변형의 유희라는 단계를 거쳐 꿈에 그리던 인간의 모습에 이르는 인체의 역사를 종단해 낸다.

이 여정은 이상적인 인체에 대한 욕망에서 모욕당한 인체, 해부와 해체를 통한 내부의 탐색이 야기한 인체의 시각적 이미지의 반향들,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지나 마침내 오늘의 베일을 벗은 인체의 적나라하고 물신화된 외형에 도달한다.

 

특히 인간의 신체성에 대한 측면에서, “신처럼 작동될 수 있는 인체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1633년의 르네 데카르트의 선언과, 1741, 자동인형 발명가인 자크 드 보캉송이라는 인물의 리옹 아카데미에서의 발언은 흥미를 이끈다. “자동인형을 이용하여, 동물성 기능에 관한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건강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다. 1818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되기 200년 전에 이미 인체 창조의 욕망을 발견하는 것은 비단 21세기의 독특한 인식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자기의 몸인 인체에 대한 베일을 벗겨냈다는 자신에 찬 오늘의 인류는 이제 자신의 그것을 객체화하고 대상화하며, 마침내 생산물화하고 있다. 인간 고유의 정체성의 변질, 다시 말해서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이해를 허물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러있다. 인간이 다른 인체를 기획할 수 있다는 전망에 경악하고, 내 직관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당혹스러워 한다.

인체를 자르고 꿰매며, 급기야 이를 벗어나려는 자연의 기술화는 분명 윤리적 자기이해를 변화시킬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돌파해낸 만들어진 기술적 존재, 자신의 삶의 저자가 아닌 존재에게 그 어떤 도덕성과 규범적 책임성이 요구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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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0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몸은 과거나 지금이나 남성이 만든 미의 기준에 의해 변형되고 통제됩니다. 미래에 ‘호모 데우스’가 등장하는 시대가 와도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비의식 2018-04-06 17:56   좋아요 0 | URL
어떤 현상이나 사상에 대해서 여성주의적 비판도 요구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두를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인체‘는 젠더의 구분을 떠나 왜곡되거나 남용되어왔습니다. 테일러의 동작연구와 같은 남성 근력을 최유효한 노동력 착취의 대상으로 보아왔으며, 모욕의 대상으로서 공히 이용되기도 했어요. 유발하라리가 주장하는 포스트휴먼은 <향연>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파네즈의 태초의 인간인 남녀의 구분이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요? 다만, 여성이 그간의 문명사에서 ‘차이‘를 지닌 존재로서 남성의 시선에 장악되었었다는 cyrus님의 지적은 분명 옳은 이해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시대가 수행하는 미투처럼 문명의 그 취약점이 시정되도록 다함께 노력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한 듯 합니다.
 

  

도로 가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나 바야흐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기지개를 켜며 싱그러운 기운에 같이 휩쓸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어지간하면 묵고 낡아서 활력을 막아서는 것들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이고만 싶다. 그런데 여전히 케케묵은 프레임으로, 또한 범주화시켜 그 저의가 뻔한 스토리를 반복하며 이러한 봄의 생동에 중국발 황사처럼 마스크를 쓰고, 넌더리를 내게 하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말의 구린내가 기분을 싹 잡치게 한다.

 

교활한 언어게임을 통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역행적(逆推進;reaction)인 수사학적 전략들에 신물이 난다. 정말 끊임없이 계속되는 낡고 천박한 이데올로기를 씌워 고착된 틀(Frame)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지독히도 편협한 인식에는 이젠 오직 짜증만 올라오는 것이다. 마침 이러한 편협성이 어떤 수사학적 전략과 인지적 태도에 갇혀있는지를 통찰하는 연구 저술들의 연이은 출간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이 퇴행적 논리, 이 구렁텅이에 함몰되지 않고 살만한 세상,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준다.

 

1. 수사학적 주장과 그 기계적 반복

 

인류역사, 문명의 진보를 언제나 방해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전형적인 수사학적 주장의 형식과 유형을 밝히면서, 그 기계적인 주장이 담고 있는 다분히 반동적인 명제들을 설명하고 있는 앨버트 O. 허시먼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저술은 보수가 지닌 퇴행성의 민낯,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

 

그는 이 퇴행적 세력들이 사용하는 명제, 그 전형적인 수사학적 전략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역효과의 명제라고 하는데, ‘행동이 의도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에서 보듯이, ‘의도와는 달리 고용축소와 총임금 감소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즉 저소득층의 소득향상을 통한 경제적 안정과 사회통합의 고취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만을 야기하여 사회발전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반대한다.

 

둘째는 무용론의 명제이다.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즉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희화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얘기다. 특사의 북한 방문과 북의 핵 폐기 의사,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추진을 시작할 때, 이를 두고 를 하는 것이라고 콧방귀를 껴대던 사람들의 언행이나, 역사학자 알렉스 토크빌이 프랑스 혁명을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고 폄하한 것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 수사학적 태도가 악질인 것은 다수의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이 설득되고 세뇌당하기에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사용하는 교활함 때문이다.

 

셋째는 선()의 정책에 직접 반대하기 어려울 때, 제안된 변화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거나 이런저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위험론의 명제 이다. 서울시의 초등생 무료급식 정책을 시작하려할 때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거품을 물던 수사학이다. 이것이 저것을 죽일 것이다!’라는 제로섬 방식의 해석공식이다.

이 역행적 수사학들은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이 자기들만의 이익수호를 위해 정책이나 사상을 뒤집고 비난하기위한 논쟁태도나 전략, 그들의 설계된 위험신호를 우리가 조기에 알아차리고 경계를 삼도록 도와준다.

 

2. 믿음의 고착화, 그 인지적 태도의 무능(無能)

 

아마 위와 같은 퇴행적 레토릭(Rhetoric)의 빛나는 앨버트 O. 허시먼의 통찰에 내재한 본성의 우아하기 조차한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지 레이코프도덕, 정치를 말하다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공저인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의 두 저술은 무능하기 그지없는 인지적 태도에 도사린 도덕적 모호성의 본질을 관통해내고 있다.

 

2-1. 도덕, 정치를 말하다

 

모든 사람이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동일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도 없으며, 이유도 또한 없다. 이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인류 문명 진보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다름, 세계관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레이코프는 바로 이러한 개별자들의 믿음이 왜 달리 형성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즉 어떻게 사람들의 도덕체계, 도덕적 신념이 창조되고 형성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곧 오늘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정치적 신념이란 것의 내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답변을 제공한다.

 

그는 이러한 도덕적 패러다임의 원천을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가정의 두 중심 모델로 비유하여 이를 정치적 성향에 연장하여 설명한다. ‘엄한 아버지 모델자애로운 아버지 모델이 그것인데, 전자는 절제와 책임, 자립의 장려, 보상과 징벌, 외부의 악으로부터 보호,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힘과 권위, 자기이익, 질서의 중시라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감정이입과 공정성 장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을 돕고, 인생에서 충만함을 장려하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양육을 행동의 주요 카테고리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한 인간의 세계관이 양육된 환경에 지배되어 이것이 개별자에게 세상을 범주화하고, 해석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육모델의 구분이 정당함을 갖춘 것이라면, 엄한 아버지 모델에 비유되는 보수주의의 행동 카테고리의 내용은 개념적 절대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만의 도덕적 경계를 짓고, 도덕적 힘과 권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인간의 번영과 접촉하지 않으며, 보편적 인간성과의 접촉을 거부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중을 쓰레기’, ‘고려할 가치 없는 인종이라고 서슴없이 지껄이는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보수 정치인들의 언어에서 쉽게 발견된다.

 

이들은 우리와 그들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할하고, 기계론적으로 인간을 징벌과 보상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지되지 못하는 근거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들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내몬다.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의 집단적 세력을 구성하고, 자신들을 쓰레기라고 칭하고 있는 이들에게 생존권을 의탁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체 왜 이러한 상황이 유지되는 것일까?

 

그 답은 실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지점에 있다. 보수의 전략적인 레토릭에서 보았듯이 다수의 순진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하는 지에 대한 술책의 능란함, 즉 수사의 반복적 사용으로 세뇌된 고정된 프레임() 속에 진리를 왜곡하여 감금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덕적 프레임을 장악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를 100년 가까이 장악한 빨갱이와 같은 타령이 적절한 보기일 것이다. 이 프레임에 가둘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보가 보장되는 기막힌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2017년의 시민들의 촛불 혁명이 이들의 프레임이 지닌 타락한 도덕의 실체를 보았기에 피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수사학적 전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 어느 때부턴가 매우 흥미로운 조어가 떠돈다. ‘중도 보수’, 혹은 진정한 보수주의라는 야릇한 언어인데, 이러한 조어가 성행하는 시기의 특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의 실체가 도덕적 규탄을 받을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사법이라는 것이다. 때 맞춰 아시아권 어느 국가에서도 번역되지 조차 않은 ‘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진정한 보수의 첨병으로 나섰다. 여기서 저자는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사회의 질서를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언어적 유희를 시작한다. 마음이고 방법이라 부른다고 해서 보수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러셀 커크가 제시하는 보수주의 핵심가치 6가지를 보면 조지 레이코프의 엄한 아버지 모델의 그것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대척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인 획일성과 평등주의를 배격하고 다양성과 인간 존재의 신비로움에 대한 애정이라는 선언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여기에는 거짓과 진실이 마구 혼동된 자기기만적인 인식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가치인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 문명화된 사회에는 질서와 위계가 필요하다는 믿음과 모순됨은 물론 충돌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위계, 즉 권위에 의해 나와 너를 분리하고, 평등주의를 배격하는 가치에 터를 두고서는 인간존재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2-2.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조지 레이코프와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공저인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레이코프의 전작인 도덕, 정치를 말하다의 두 아버지 모델의 토대위에 서있는 저술로서, 제목의 뉘앙스처럼, ‘왜 보수에 현혹되는 가라는 인지적 태도에 대한 탐색이다. 즉 주요 논의는 국가는 가정이라는 은유가 전체 세계관을 구조화하며, 뇌 속의 전체 프레임 체계를 조직한다는 인식위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체계들을 주도면밀하게 도출해내고 있다.

 

이를 통해 보수가 어떻게 진보의 프레임보다 더 활성화될 수 있는지를 풀어낸다. 레이건이나 도널 트럼프가 활용한 엄한 아버지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지 확인하는 것은 이것이 대중 배반적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대중들을 장악하는 프레임의 위력을 확인시켜준다.

 

한편, 이 책의 특별한 미덕은 오늘의 우리네에게 더욱 근접한 묘사로 다가오는 소위 이중 개념 소유자에 대한 성찰이랄 수 있다. 실제의 우리네의 삶에 있어 양 극단으로 이분되어있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이 더 이상 적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주택가격이 끝이 없다는 듯이 치솟아 사회 전체의 고통이 되어 돌아오면 정책 부재의 정부를 비난하다가도, 성공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능력이라는 프레임이 활성화되면 부동산 투자에 나서는 양면적 모습을 보이는 자본주의 체제 속 우리에게서 두 모델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 양면적 특성을 지닌 다수의 대중을 어떻게 자기 세력화하느냐는 정치 논리만 남는다. 현실 세계에서 정말 강력한 것은 바로 진실이 아니라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무리되어야 할 것 같다. 보수는 삶은 처절한 경쟁이며 사회는 각자도생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진보는 삶이란 모두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타자로부터 손상되거나 침해되지 않으며, 거짓과 위선, 기만의 정치적 논리에 희생되지 않고 마음껏 봄의 신선한 생동감을 만끽 할 수 있는 세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피곤함의 희생을 피할 수가 없다. 깨어나기 위한 대중의 노력,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펼치기 위한 공동의 가치를 일궈 나가는 것은 오로지 우리 시민대중들의 몫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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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8-04-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님의 글 가운데 포함된 ‘엄한 아버지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제겐 유달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네요. 마침 최근에 그와 엇비슷한 내용을 주제로 다룬 흥미로운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아주 머리속에 쏙쏙 들어오는 듯합니다.

제가 읽은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루이자의 아버지 그래드그라인드는 ‘전형적인 보수주의 국회의원‘이면서 그와 동시에 ‘세뇌된 고정된 프레임‘에 아주 단단히 갖힌 인물이고, 자식들을 위해서도 철저하게 ‘고정된 틀 속에 가두는 교육‘을 시킵니다. 나중에 그래드그라인드는 딸 루이자의 남편감조차 자신과 복사판이나 다름없는 친구인 바운더비라는 사람에게 시집보내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자수성가한 꼰대이자 졸부이자 전형적인 못된 고용주‘의 상징인 인물이지요. 아버지 또래의 늙은 영감에게 시집간 루이자는 남편의 온갖 고약한 언행과 생활방식을 견디다 못해 ‘감옥 같은 삶‘에서 간신히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 나머지 인물들은 결국 ‘각자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점점 더 파멸로 치닫게 되지요.

칼 마르크스는 찰스 디킨스에 대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과연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파업을 선동하는 노조위원장의 열정적인 연설‘만 들어봐도 일견 그 말이 수긍이 가기도 하더군요.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해고된 불쌍한 노동자인 스티븐이 악덕 고용주인 바운더비에게 하소연하는 대목을 재미삼아 살짝 덧붙여 봅니다.

* * *

˝사장님, 저는 저 나름대로 문제를 느껴왔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유능하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엉망진창입니다. 도시를 둘러보세요ㅡ부자이지요ㅡ그 다음에는 여기서 살도록 끌려와서 실을 짜거나 보풀을 뜯거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평생 같은 일만 하면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집에서 지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어떤 가능성을 안고, 얼마나 똑같이 살아가는지 한번 보세요. 그리고 공장이 매일 어떻게 굴러가는지, 공장이 우리를 어떻게 혹사시켜서 멀리 있는 목적지ㅡ거의 항상 죽음이지요ㅡ에 이르게 하는지 보세요. 사장님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대표자들을 통해서 우리에 대해 장관님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사장님들은 항상 옳고 우리는 항상 그를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성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것인지 한번 따져보세요. 해를 거듭하고 세대가 바뀔수록 어떻게 이런 일이 점점 커지고 광범위해지고 악화되었는지 생각해보세요, 사장님. 이걸 보고서도 엉망진창이 아니라고 분명하 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장님?˝(245∼246쪽)

비의식 2018-04-03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한 아버지의 모델에 의해 성장한 사람들중에도 많은 이들이 그 알을 깨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 알을 깨고 나올 기회가 없는 계층들이 있어요. 성인이 되기 무섭게 권력의 상위계단에 오르게 되는 부류들인데요, 이들에게 타자란 그저 이용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죠. 2018년 한국사회의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배들이 그런 예라 할 수 있겠죠. 세상의 다양함에 대한 이해를 미처 학습하지 못한 채 부와 권력을 쥐게 된 탓이겠죠. 들려주신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일화, 감사드립니다.
 

 

요즘 부쩍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무한 역행적’, 즉 논리적으로 대답이 불가능한 물음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원인/이유의 물음에 대한 답은 논리적으로 제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물음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1)사실적인 측면에서 그 대답은 공허, ()와 같은 허무를 떠나지 않지만, 줄기차게 거듭하는 것은 이성적 사유가 도달한 결론을 부정하고 싶은 본능적 저항, 아마 삶에 대한 뿌리 깊은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의미의 부여를 통해서만 이것에 반항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이 소설도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이 물음일 것이다. 아니 우리들은 애초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또 자문한다. 인간은 조건반사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의미 해석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로써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 것인가를 탐색하는 확장된 의미의 대상이 된다. 바로 지금 개별자로서, 혹은 종()의 집단인 사회, 국가, 그리고 인류라는 동종의 총체에서 벌어지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유, 그 해석을 추상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인간, 나는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서.

 

소설의 공간적 무대는 지구가 아니다. 지구는 단지 모()행성으로서 스치듯 언급될 뿐이다. 인간 실존조건의 핵심인 공기와 태양의 열과 빛, 대지라는 지구를 벗어나있을 뿐 아니라, 이백년간 캡슐에 갇힌 채 우주미아로 떠 돈 후 무인행성에서 깨어난 한 존재의 행위와 기억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그야말로 이 얄궂은 배경은 우리들이 굳게 믿고 있는 인간의 실존 조건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세계임을 알린다. 실존적 조건을 벗어난 존재로서의 객관적 지위를 획득한 자, 어쩌면 이미 인간이 아닌 자의 시선으로서.

 

1. 인간 실존의 조건에 대해서

 

화자는 지구의 식민행성으로서 독자적인 체제를 수립한 네이처정부로부터 육백 이십 오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살인을 저지르고 추방된 1급 범죄자이다. 네이처는 법, 제도적 계급의 구분은 없으나, 실재적 계급으로 철저하게 분리된 계급사회이다. 즉 거대한 위선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 중에서 5계급은 최하위 계층으로서 거주 지역뿐 아니라 체제에 소외되어 오직 노동자로서의 신분만을 세습한다. 또한 개별자들의 몸에는 그들의 신상을 통제하는 칩이 내장되어 있는 감시사회이자 통제사회이다. 극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축조한 사회가 기실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확인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과학기술과 정치를 이끌어가고 다수의 인간은 그 혜택으로부터 차단되어 노예화되어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촘촘하게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채 하는 오늘의 우리네처럼. 그 기만의 사회처럼.

 

화자는 HD-733으로 불린다. 계급과 신분의 분류를 함의하는 기호화된 존재. 노동과 실의의 삶을 전전하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아이를 버리고 가출해 버린다. 고아가 되어 떠돌던 아이는 구역 관리자의 선택에 의해 교육과 계급적 구속을 벗어날 기회를 갖게 되고, 네이처 정부 지도자의 아들인 관리자 JN-210의 보살핌과 후원이 있지만 군인으로서의 미래를 시작한다. 20대의 젊은 얼굴을 한 일백 사십 육세의 관리자와 극소수의 지배자가 지닌 욕망의 독점, 그 혐오스러움은 모든 인간, 인류를 위한 과학기술이라는 인본주의의 낙관적인 전망을 선전하지만 그것은 대다수의 인간이 꿈꾸는 인간중심주의의 빗나간 사랑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견뎌야 할 삶이라는 의미에서는 불평등의 심화와 고착처럼 아무런 변화의 이익에 참여치 못한다.

 

2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삼십대의 성인이 된 HD-733은 갈아탔던 복제된 신체의 질병을 벗어나고자 육체교환을 앞두고 있는 JN-210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JN-210은 말한다.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밑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지 놀라게 될 거다.” 이기심, 복제된 신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 육신으로 갈아타는 그 무한한 탐욕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인간에 대한 살해, 정상적인 한 번의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HD-733을 위한 변론이 진행되지만 네이처 정부는 삼백년간의 추방을 선고한다. 새로운 신분의 기호인 'DH(different human)-194'가 되어.

 

소설의 거대한 한 축인 DH-194가 되기까지의 HD-733의 행성 네이처에서의 성장(成長)()(2)‘전뇌(全腦) 에뮬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을 통한 자아의 무한 반복적 복사로 영원한 존재가 되려는 21세기 뇌 임플란트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희망찬 죽음학이라는 이 모순어가 지닌 기술실증주의의 소름끼치는 욕망의 현주소, 그것의 지향점이 인간에게 말한다. 지구라는 자연의 인간 실존적 조건의 마지막 끈조차 없애버린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세계관의 진리들이란 것이 더 이상 인간의 말과 사유로 표현되지 못하는 불구인 것은 아니냐고.

 

2. 다른 존재들의 불문율의 가능성에 대해서

      

두 번째 축은 유배지인 신생 은하계의 한 행성인 루시아에서의 생존을 향한 전쟁(戰爭)()라 할 수 있다. 무인 행성의 유일한 인간인 DH-194(이하 ‘DH’라 함)는 홀로 100년의 유형을 마쳐야 한다. 그러나 너는 고독하지 않은 상태를 알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며, 항상 자신은 외로움을 단짝처럼 지녔던 존재로써 이 낯선 행성에서의 새로운 삶의 걸음을 내딛는다.

 

DH는 미지의 환경에서 괴성에 불가한 소리만을 내지르는 인간의 외형에 근접한 짐승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를 위해할 의사가 없는 존재임으로 이해하게 되지만, 혐오스러운 그것들에 총을 난사하여 학살한다. 주어진 자유, 그의 의지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이질적인 것,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반감은 무한한 폭력의 행사로 이어진다. 결과는 인간의 외형에 친숙한 것들만 살아남는다. 양식을 구하던 DH는 우연히 숲 속 한 장소에서 열매를 줍는 듯한 이 짐승의 무리를 발견하고,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 돌아오지만,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그것들의 임을 인지하게 된다.

      

부화한 짐승의 새끼에게 애정을 갖게 된 DH이라 부르며 양육하지만 양식을 찾기 위해 은거지를 떠난 뒤 잃어버린다. 렘을 찾기 위해 짐승들의 행동을 좇던 중 알을 주웠던 장소의 특이한 흙과 알껍질의 단 맛에 홀린 듯 먹게 되고, 이후 그의 신체는 변화하고 발화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지하 은거지의 여러 통로 중 하나를 통해 버려진 지하의 거대 유리도시를 발견하게 되고, 최초의 인간인 여성 과 조우한다. DH는 그녀로부터 호전적인 짐승의 공격성을 사라지게 변화시키기 위한 화학적, 약물요법의 계획이 도리어 인간 문명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신체변화는 이러한 화학지대의 영향임을 전해 듣는다.

계획이 진행되면 될수록 문제가 생겼죠. 놈들에게서 짐승의 특성이 사라져가자, 거꾸로 놈들에게 그동안 숨겨져 있던 인간과 비슷한 면들이 하나둘 드러나게 된 거예요. ...엉뚱한 결과가 초래....우리의 계략이란 것이 거꾸로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게 되어버린 셈이었죠.”(P 239)

 

그런데, DH의 변화에서 발화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말이 힘을 잃은 세계 속으로 진입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3)이것은 지식과 사유가 결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곧 자신의 방법론적 노예, 자기의 창조물에 내 맡겨진 생각 없는 피조물로 전락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 DH는 식물로 화하는 자신, 기억하기를 잊어버린 생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며, 인간이 진화의 단계를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아마 결코 주어지지 않는 개별자의 존재적 영원성에 대한 헛된 욕망이 아닐까? 자연은 종의 존재적 영원성만을 보장한다. 또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진리가 물론 있을 수 있다. 홀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비정치적 존재에게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 세계에 행위하며 살아가는 인간, 다수의 인간들은 서로 소통하고 타인에게 통하는 을 할 때만 의미를 경험 할 수 있다.

 

이제 소설은 이러한 물음의 끝으로 달려간다. DH가 행성 루시아에서 처음 맞이했던 짐승들은 절반쯤 인간화된 변이가 진행 중인, 즉 인간의 과학기술적 오만이 야기한, 자신들의 피조물이었으며, 이제 그것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 역시 사라져야 함을 알게 된다. 아마 이 서사 축을 압축하는 문장이 될 것 같다. “우리에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개념과 사고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인간이나 지적 생물체에겐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하고....다른 존재들의 불문율의 가능성을 이해해야한다는 자각이다. 인간화된 짐승들은 종족의 우성인자를 지켜내고 재편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살상을 시작하고, 열등한 마지막 인간변종, DH는 종말을 고한다. 그들의 원년, 첫 날의 시작과 함께.

      

인간은 무엇인가? 다시 반복하지만 인간은 물을 수 없는 의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 하는 여타 동물과는 차별화된 종이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기도 하다. 21세기 인류의 존재론적 가능성에 의문을 품은 필 토레스는 말한다. (4)‘부주의, 실수, 사고(事故), 사고(思考)적 결함, 지식의 불완전성, 게다가 불가지(不可知)에 이르기까지 인간 스스로를 위협하는 그 불완전성에 대해서. 결국 유발 하라리의 인본주의에 경도된 인류의 비판적 사유의 촉구, (5)인간의 자연지배와 약탈행위의 정당화가 만들어 내고 있는 그 마지막 열차의 질주가 인간의 말과 사유를 말살하는 영원한 죽음의 희망학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라는 통렬한 자성의 목소리에 이르게 한다.

 

 

참고 도서:

(1)박이문 , 죽음 앞의 삶, 삶속의 인간, 미다스북스, 2017.2

(2)마크 오코널 , 트랜스휴머니즘, 문학동네 2018.2

(3)한나 아렌트 ,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7.3

(4)필 토레스 , 디 엔드, 현암사, 2017.7

(5)유발 하라리 , 호모데우스, 김영사, 2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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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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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아주 비열한 장면의 세세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4년이나 지속되던 전쟁이 끝나기 채 열흘도 남지 않은 1918112,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 귀족가문의 배경을 가진 장교 프라델은 자신의 병사 사살을 독일군의 저격 사망으로 위장하여 전투를 속개한다. 이후 증거인멸과정에서 프라델은 목격자인 병사 알베르를 흙더미에 매몰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한다. 다리부상으로 의식을 잃었던 병사 에두아르 페리쿠르는 사력을 다해 알베르를 구조해 내지만, 얼굴 중 하악부(下顎部)가 날아가는 중상을 입는다.

 

이렇게 시작되는 발단, 이 사건적 장면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면면이 전후(戰後)의 사회 질서 속에서도 단절되거나 전복되지 않고 두려움과 도피, 곤궁함과 죽음의 노출로 혹은 의기양양과 협잡과 탐욕 등, 여전히 유효한 심리적, 사회 경제적, 정치적 관계들로 그들 삶의 행보를 결정짓는다.

 

1. 끝나지 않은 전쟁

 

종전으로 동원 해제된 알베르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얼굴의 반을 잃은 에두아르와 함께 한다. 알베르는 전우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몰핀의 조달과 생계를 위해 삶의 곤궁함에서 허우적댄다. 전쟁에 동원되기 전의 직장인 은행은 그의 복귀를 거절한다. “<우리의 소중한 병사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빚을 지고 있노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선언하던 국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내는 수단이었을 뿐,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이들을 공동체는 알지 못한다.

 

알베르는 흉괴(凶怪)를 은폐하기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던졌던 프라델에 대한 두려움, 복귀한 사회의 냉담함으로 항상 경계의 눈을 치뜨며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인 불안의 일상을 피하지 못한다. 에두아르 또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자신의 얼굴을 포함해 모든 얼굴이 사라져 버린 얼굴 없는 세계에서집착할 것이 없는 삶을 지탱할 뿐이다.

등 돌린 사회는 이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서나 무겁게 그들의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내리누르는 것, 그들이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적과의 싸움이 종료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퇴락한 귀족가문의 프라델은 재계의 명망가인 페리쿠르가()의 여식인 마들렌과의 혼인에 성공한다. 쇠락한 성()과 이름뿐인 가문의 복원, 자신의 명예와 부의 축적을 향한 야비한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이 인물은 페리쿠르라는 배경을 통해 권력층의 연결고리를 획득하고, 전선에 묻힌 병사들의 유해발굴과 이장(移葬)이라는 막대한 이권 사업을 권력의 후광과 뇌물, 향응을 통해 획득한다. 승인받은 관의 나무 재질을 낮추고, 병사의 유해를 톱으로 잘라내서 입관시킬 정도로 관의 크기를 줄이고, 시신의 신분확인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처넣고, 유품은 절도하며, 빈 관에 흙을 집어넣어 이장 수량을 늘리는 등 악질적 물욕을 가차 없이 쏟아낸다. 이 인물 역시 전쟁은 진행 중이다. 이들에게서 전쟁이 전정 끝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유령사업과 기만사업

 

자기기만과 유대감과 원망과 반감과 형제애 등이 뒤섞인 지극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알베르와 에두아르(외젠)는 갈등 끝에 각기 누추(陋醜)와 저열함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짜릿한 놀이로서 <애국적 회상>이라는 이름의 전사자 추모 기념비를 제작해주는 유령 사업에 착수한다.

 

착수금의 마련을 위해 알베르는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는 에두아르의 아버지인 재력가, 페리쿠르의 은행에 자리를 잡고, 횡령을 통해 카달로그 제작, 우편 발송비용 등을 조달한다. 알베르는 유족들의 애절함을 이용하는 자신들의 사기 행위까지 더해 삶은 피폐해져 가지만, 연인 폴린에 대한 열정으로 작은 위안을 갖는다. 이에 비해 에두아르는 그들이 은거하는 집 주인의 딸인 루이즈와 각양의 얼굴 마스크를 만들어가며, 비할 바 없는 도발의 쾌감을 즐기며 행복감에 도취한다. 예상대로 100만 프랑을 초과하는 신청금이 그들의 손에 들어오지만, 사기 행각은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부정과 위협을 통해 수익을 늘려가던 프라델은 군사묘지 조성사업의 관할 정부인 연금부에서 파견된 퇴물 관리 조세프 메를랭에 의한 감사에서 비위사실을 지적당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건네준 10만 프랑이 도리어 사업의 부정함을 자인하는 형국이 되어 돌아온다. 사업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장인 페리쿠르는 물론 아내에게까지 인맥을 통한 사법적 처벌의 회피 시도는 좌절되기에 이른다.

 

전쟁이 낳은 세상은 그 끝을 향해 달려 나간다. 알베르와 에두아르, 프라델. 어쩌면 비정한 세계, 얼굴 없는 세계, 싸울 대상을 알 수 없는 세계와의 싸움은 애초에 승산이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국가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것들, 공동체라는 허구의 존재는 인간 개인의 삶에 책임지는 어느 누가 아니다. 그렇다면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삶을 황폐화시킨 직접적 요인을 만들어낸 프라델의 야비함과 이기적 욕심만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 몬 장본인은 누구인가? 전쟁이 끝나고 이들을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수 없게 한 장본인은 또 누구인가? 이 순환적인 질문의 답은 무관심과 외면으로 자기 안위에만 몰두하던 기성세대의 이기심 아니었을까? 특정되지 않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3. 패배함으로써 끝나는 이야기

 

전사자의 유해 발굴과 이장사업의 비위를 조사하는 메를랭은 전쟁에 무관심과 냉소를 보내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버려지듯이 묻힌 젊은 병사들의 즐비한 유해와 돈벌이 수단으로 마구잡이 취급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됨으로써 억울한 희생자들로서 젊은 전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로소 얻게 된다. 젊은이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전쟁, 그럼에도 그들의 취급은 부당함을 넘어 분노의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이젠 끝내버려야 해....,, 이 놈의 전쟁을 이젠 끝내버려야 한다고.”라는 그의 자조(自照)의 목소리에 실려 다시금 종료되지 않은 그들 사회의 전쟁이 외쳐진다.

 

이 같은 기성세대의 반성은 또 다른 관점에서 반복되는데, 도발적인 그림에 몰두하며, 성적 정체성까지 혼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되어버린 자신의 후계자이기를 기대했던 아들에 대한 재계의 권력자인 페리쿠르의 돌연한 회한과 죄책감이 그것이다. 전사자인 아들 에두아르에 대한 비로소의 애도에서 시작된 전사자 기념비 건립사업의 추진에 몰두한다.

이것은 아버지와 맞붙어 패배한 전쟁에 대한 반복임을 시사하는 에두아르의 유령사업이 예술가들과 부르주아들간의 영원한 싸움으로 선언되는 것에서 이미 페리쿠르의 사업은 실행될 수 없는 한계를 내재한다.

 

이제 이야기는 오직 한곳을 향해 모여든다. 종전(終戰)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끝나야만 한다. 폭죽처럼 다발적이고도 집중적으로 프라델, 그리고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업은 대형 스캔들이 되어 터진다. 전쟁을 끝내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의건 타의건 그 끝에 이른다. 에두아르의 아버지에 대한 전쟁, 페리쿠르의 아들에 대한 회한의 전쟁, 프라델의 탐욕의 전쟁, 알베르의 빈곤과 트라우마와의 전쟁, 메를랭의 소외와 정의의 전쟁은 패배하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하나의 결말을 남기며 종지부를 찍는다.

이들 모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적수, 이미 적수가 될 수 없는 대상없는 싸움에서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얼굴을 한 마스크를 쓰고 천사의 날개를 단 채 달려 나오는 에두아르와 질주하는 페리쿠르의 차량이 부딪는 비극적 장면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흐릿하기만 했던 삶의 본질을 발견케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소설은 공동체의 무관심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채 빈곤과 자기경멸의 삶을 지탱해가야 하는 상이 병사들과 전쟁을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 부의 토대로 인식하는 계층의 혐오스러움은 동일한 광기의 흐름 속에서 경합한다. 그리곤 예견 된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야기시킨 장본인일 수 있는 재계와 정치권력의 상부 층들의 무관심과 외면, 국민이라 불리는 개인들 또한 이러한 방임과 외면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 진지한 주제의식들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즐거움 또한 풍요롭다. 프라델이라는 인물을 통해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과 분개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얼굴 없는 사내, 에두아르를 통해 세상에 대고 우스꽝스러운 주먹 감자 한 방을 먹이며 그와 함께 미칠 듯한 행복감을 안겨 주기도 하고, 단지 생의 안정만을 희망하는 알베르의 연인 폴린과의 소박한 사랑과 평범성의 꿈을 쫓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로서의 몫을 다한다. 한편의 기막히게 잘 연출된 우아한 비극을 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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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쉼표까지도 팽팽한 긴장을 지닌 소설

 

 

밝은 햇살로 가득하고 모두 자유롭게 행복한 곳,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을 동경한 탓에 그 남자는 죽었다.” - 티저북 P 155에서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날이 선 채 살아있다. 이면의 진실이라는 정보를 가득 담고서. 초입부터 쇄도하듯 등장하는 각양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 통화의 내용에, 신문의 사건 기사, 하물며 광고판에 스치듯 발설되는 이름, 인상, 캠페인 등등 모두가 어두운 베일에 가려진 빛처럼 보인다. 이 긴장이 더욱 작품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어느 종착역을 향해 추진력을 얻게 하는 흐릿하게 뿌려진 자기력을 지닌 단서들 무엇 하나도 놓칠 수 없게 한다. 아마 근자에 이처럼 집중하고 읽어 본 작품의 기억이 내겐 없다.

    

 

2005325일 금요일, 화창한 봄날의 한가로운 오후, 네 명의 죽음과 자상(刺傷)을 입은 한 명의 생존자를 발생시킨 전철역 앞 광장의 무차별 살인사건이 저예산 예능 프로그램의 농담처럼 비현실적으로 벌어진다. 그리곤 뜻 밖에도 필로폰과 헤로인의 투약으로 심부전을 일으킨 살인 용의자가 사망한 채 발견되고, 경찰의 수사는 마약 중독자의 환각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 소위 아무런 이유 없이 수행된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종결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편, “너 같은 놈은 빠져도 아무 문제없어.”라며, 수사 과정에서 배제되고 피해자 가족들의 형식적 조서나 받아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형사 소마, 그리고 속물적 이익만을 탐하려는 인간집단에 깊은 혐오를 지니게 된 살인사건의 생존자인 청년 시게토 슈지’, 후일 소마, 슈지와 함께하게 되는 프리랜서 방송인 야리미즈는 집단 지성이라 부르며 의심 없는 지붕아래 무임승차하는 물신 숭배적 몽매성과 집단이기심의 밖에 서서 사회적 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을 쫓으려는 개인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다수라는 얼굴을 하고 집단적 견해와 그 안이(安易)성에 편승하여 휘둘러대는 폭력적 무지와 몰지각성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실을 쫓는 독자성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제 사건의 수사는 경찰조직을 떠나 독자적인 진실 추구의 과정이 되고, 사건의 이면에서 개인으로서의 소마와 슈지가 마주하게 될 진상, 그 실체는 더욱 위험하고,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조바심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예측적 불안과 흥분에 맞추어 안면이 붕괴되는 미지의 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엄마, 노회한 정치가와 이 못지않은 술책과 모사의 달인 같은 비서처럼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산아 육성책인 스마일 키즈 캠페인의 슬로건, 항 안벽 근처 바다에 가라앉은 차량과 찾을 수 없는 차량 소유자의 직업, 뇌경색으로 의식불명에 빠진 괴물기업 타이투스 그룹 회장 등, 놓칠 수 없는 암시와 단서, 복선들이 미스테리 특유의 지적 자극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이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존자인 슈지를 집요하게 살해하려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강한 배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살인에 정통한 프로로서의 존재와 이를 피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려는 힘의 지원 없는 개인 간의 보이지 않는 긴박한 싸움이라는 구도이다. 또한 이 싸움에는 시간적 제한이 있다는 강한 추측이 더해져 그 강도를 극대화하기까지 한다.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 , “44일 건은 문제없나?”와 같은 구체적 시간은 있으나, 그 구체적 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은폐된 진실을 엮어가며 완성된 무엇으로 향하는 추론의 게임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원초적인 주제에 관통하는 이중적 발견의 즐거움으로 견인된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느 추리작품의 세련됨을 능가하는 미덕일 것이다. 미증유의 살인 사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던 피해자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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