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2
필리프 코마르 지음, 안정미 옮김 / 시공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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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개의 이미지 도판과 함께 편집된 이 독특하고 작은 소책자에 시선을 못 박게 된 것은 문자 그대로 인체(人體)’, 사람의 몸이란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여겼던 것에 대한 엄청난 무지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21세기 오늘의 담론들을 바라보면 시대성이란 것에 적응하기 위한 사람들의 자기 신체에 대한 변형의 욕구들, 젊음의 유지와 수명연장, 나아가 불멸에 까지, 신체성에 대한 포기에 이르는 마치 무능하거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진 한낱 물질적 대상화된 인식의 불편함 때문이랄 수 있겠다.

 

필리프 코마르의 이 저작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의 오랜 문명사를 통해 인간이 자신들의 신체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또한 그러한 인식들이 어떻게 인간의 시선을, 가치관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에 대한 줄기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우주관이기도 하며, 미적 관념이며, 심리적 변천의 지성(知性)()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고대의 동굴벽화나 발굴된 조각상들에서처럼 인체는 상징, 즉 종교적 대상의 비유적 의미에서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수리철학 발흥과 함께 종교적 의미를 벗어나 대칭과 비례, 균형을 중시하는 공간개념 속에 인체를 반영하며, ()적 대상으로 변화한다. 그리곤 이러한 이상적인 인체란 현실과는 괴리된, 본질적으로 평범함을 넘어선 속성임을 자각하며,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위해 인체 비례체계를 고안하고, 자연계 전체의 균형과 인체의 조화를 반영하는 사유로 진행된다.

   

 

이 시선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우주의 중심에 선 인간상에서,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대변되는 우주의 실제적 거리라는 과학기술 앞에 왜소화된 인간으로, 유형화된 인간의 분류로, 급기야는 해부와 해체를 통해 변형의 유희라는 단계를 거쳐 꿈에 그리던 인간의 모습에 이르는 인체의 역사를 종단해 낸다.

이 여정은 이상적인 인체에 대한 욕망에서 모욕당한 인체, 해부와 해체를 통한 내부의 탐색이 야기한 인체의 시각적 이미지의 반향들,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지나 마침내 오늘의 베일을 벗은 인체의 적나라하고 물신화된 외형에 도달한다.

 

특히 인간의 신체성에 대한 측면에서, “신처럼 작동될 수 있는 인체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1633년의 르네 데카르트의 선언과, 1741, 자동인형 발명가인 자크 드 보캉송이라는 인물의 리옹 아카데미에서의 발언은 흥미를 이끈다. “자동인형을 이용하여, 동물성 기능에 관한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건강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다. 1818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되기 200년 전에 이미 인체 창조의 욕망을 발견하는 것은 비단 21세기의 독특한 인식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자기의 몸인 인체에 대한 베일을 벗겨냈다는 자신에 찬 오늘의 인류는 이제 자신의 그것을 객체화하고 대상화하며, 마침내 생산물화하고 있다. 인간 고유의 정체성의 변질, 다시 말해서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이해를 허물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러있다. 인간이 다른 인체를 기획할 수 있다는 전망에 경악하고, 내 직관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당혹스러워 한다.

인체를 자르고 꿰매며, 급기야 이를 벗어나려는 자연의 기술화는 분명 윤리적 자기이해를 변화시킬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돌파해낸 만들어진 기술적 존재, 자신의 삶의 저자가 아닌 존재에게 그 어떤 도덕성과 규범적 책임성이 요구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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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0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몸은 과거나 지금이나 남성이 만든 미의 기준에 의해 변형되고 통제됩니다. 미래에 ‘호모 데우스’가 등장하는 시대가 와도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리아 2018-04-06 17:56   좋아요 0 | URL
어떤 현상이나 사상에 대해서 여성주의적 비판도 요구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두를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인체‘는 젠더의 구분을 떠나 왜곡되거나 남용되어왔습니다. 테일러의 동작연구와 같은 남성 근력을 최유효한 노동력 착취의 대상으로 보아왔으며, 모욕의 대상으로서 공히 이용되기도 했어요. 유발하라리가 주장하는 포스트휴먼은 <향연>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파네즈의 태초의 인간인 남녀의 구분이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요? 다만, 여성이 그간의 문명사에서 ‘차이‘를 지닌 존재로서 남성의 시선에 장악되었었다는 cyrus님의 지적은 분명 옳은 이해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시대가 수행하는 미투처럼 문명의 그 취약점이 시정되도록 다함께 노력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