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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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살인자의 이야기이지만 이 소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피가 철철 흐르는 장면이 없으므로 폭력적이지 않다고 어떤 평론가는 썼다. 이렇게 무식한 소리는 초등생에게도 듣기 쉽지 않은 말이지 않은가? 살인, 한 개체의 자유를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영원히 박탈한다는 의미만으로도 가장 극악한 폭력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폭력적인 말이 어디에 있나? 칠십 살 노인이 된 살인자‘김병수’의 단지 “더 완벽한 쾌락의 기대”에 의지했던 수많은 살인 행위는 분명 도덕적 관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병의 진단이 내려진, 점차 기억을 잃어버리고 궁극에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사라질 노인의 기록의 조각들은 동정, 연민이란 모순된 감정으로 이끈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은 인간의 도덕적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의 탐색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의 확인을 향한 여정이다.

 

그런가하면 여러 층위로 겹겹이 쌓여있는 이 소설은 기억이란, 환상성 즉 망각, 삭제능력과 같은 자기 보호로서의 변화무쌍한 이기적 실체를 드러낸다. 조작된 정체성의 기록물로써. 그래서 기억을 잃지 않으며 힘겹게 복기하는 일지의 기록도 결코 진실을 담아 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비록 점차 소멸되어가는 기억, 지워지는 과거의 자신을 복원키 위한, 미래기억을 향한 집념어린 기록조차도 거짓이고 자기기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면화되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성, 혹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의 자각이란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치매로 인한 기억의 지워짐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나 끝내 맞서 싸우려하는 외부적 위협은 바로 그 자신에 내재된 본질과의 투쟁이란 지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층위의 구조를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로 가정한다면, “군중, 포위, 경찰에의 연행”이라는 반복적 상황에 노출되는 치매 노인의 상황과 같은 ‘우리 사회’라는 집단적 주체의 치매적 현상에 대한 “짓궂은 농담”, 시니컬한 에피소드 한 토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살인자 김병수가 혼자만의 전쟁 - 쾌락적 연쇄살인 -을 지속하고 있을 때, “4.19와 5.16, 박정희의 시월유신에서 계엄군이 광주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이던 폭력의 역사가 소설 중간 중간에 양념처럼 곁들여져 주마등같이 별개의 차원에서 배경을 장식하며, ‘유령에 의한 죽음’이 가능했던 시대를 증언하는 것과 같다. 즉 주체가 보이지 않는 폭력, 그것은 상상 속에 전도된 딸‘은희’를 노리는 위협(威脅)자가 치매 노인 바로 자신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암묵적 세계, 그 자체의 고유특성인 내재한 폭력을 인지하지 못함으로 인한 자기 반복적 순환을 계속하는 무지이자 몰지각이다. 이 고리를 끊어내야 폭력의 쳇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치매라는 은유적 혼란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소설은 탈출방법으로 치매의 자각조차 상실하고, 모든 기억이 사라질 때“제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 달라”라는 말을 뱉어냄으로써 혼란, 내재된, 본질인, 그래서 비가시적인 폭력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려는 듯하다. 대상없는 무의미한 용서의 발언이다. 징벌할 수 없음이다. 이것은 우리를 도덕적 모순에 빠뜨린다. 외부의 위협이 퇴행성 질병인 치매자체라는 이해와 연쇄살인 행위를 동일한 위상에 올려놓기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내재적 주체의 절멸 자체가 발생한 폭력을 도덕적으로 합리화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유령에 의한 죽음, 그 비가시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김병수의 끊임없는 행동을 지속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주 폭력적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을 좋거나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생리학적 퇴행으로 야기되는 제자리에 갇혀 벗어날 수 없는 좌절감을 고통과 공포라고 말하는 것이 자기애로 눈물짓는 인간 누추함의 또 다른 미화이듯이 혐오스러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작 흔해빠진 치매라는 자기 소멸의 공포를 말하는 것이라면 굳이 문학일 이유가 없으며,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이란 수사도 터무니없어 보인다. 어쨌단 말인가? 이 소설이 스릴러인가? 아니라면 공허한 말이다. 도덕적 불완전성?, 보이지 않는 내재된 구조적 폭력의 드러냄?, 삶의 환상성? 존재자로서의 의미에 대한 사유?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디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좌절한 듯한 인상이다. 가독성 높은, 즉 이야기의 재미라는 절반의 성취에 머문 것만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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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용 - 인간 지성의 기원을 찾아서 사이언스 클래식 6
칼 세이건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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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쏟아지는 과학을 소개하는 대중 서(書)들은 마치 자신의 진술만이 올바른 이론인 것처럼 하나의 극단을 표방한다. 이를테면 과학은 감정과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대자연 우주의 유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근본주의적 견지이거나, 이와는 달리 여전히 미지의 전경이 남아있는, 합리주의에 기초하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끌어들이는 식이다. 과학적 근본주의와 유사과학만이 과학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과학이라는 진리를 앞세워 생명을 조작하고, 다른 쪽에서는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구태로서의 신화에 열광한다.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의 대립은 이러한 양상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가? 그러나 진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라고 자문하면 답변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외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 과정 자체의 산물로서 획득되는 지식과 이해가 인간 삶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 『에덴의 용』은 과학 본래의 사명을 다하면서 인간과 세상의 본성,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고, 과학의 형평적 자기이해와 과제를 탐색하는 균형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칼 세이건’은 합리주의적 지성에 기초한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이고, 진화론적이고 데카르트적 기계주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과학의 세계에서 인문학적 비유를 동반한 정서의 세계를 발견한 몇 안 되는 지성이라 할 것이다.

 

1. 파충류의 동산에서 탈출한 포유류

 

행성 지구의 생성에서 시작하여 호모(homo)속(屬) 현생인류의 출현에 이르는 우주의 시간을 보게 되면 포유류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순간적이고 희박한 가능성의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24시간이라 한다면 인류의 출현은 23시 59분 57초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시간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불과 2,3초에 지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행성 지구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찬양하자거나 대자연의 통제자로서의 독보적인 권위자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오늘의 ‘인간’이란 종(種)이 될 수 있었는지, 이 종(人間)의 본질적 특성을 가름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세이건’은 뇌의 출현과 뇌의 구조적 진화를 쫒는다. 표제인 ‘에덴의 용’은 바로 이것의 메타포이다. 파충류(용; 뱀)의 동산에서 탈출한 포유류, 파충류에 적대적인, 혐오와 극도의 경계심을 무의식적으로 발현하는 포유류의 행동 속에 내면화된 그 본성을 해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크게 R복합체와 변연계, 그리고 신피질로 구성되어 있다. 뇌의 이러한 구조는 진화의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R복합체만 있는 어류에서, R복합체와 변연계를 가진 파충류, 여기에 신피질을 더한 포유류처럼 층위가 더해진 것이다. 결국 인간에겐 여전히 예전(어류, 파충류)의 본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다만 새롭게 쌓인 신피질이라는 뇌의 층위가 불안하게 이것들을 통제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을 두 마리의 말(馬) - R복합체와 변연계 - 이 끄는 마차이며, 말을 통제하는 마부(신피질)의 힘은 약하다.”라는 유명한 비유는 꽤 탁월한 통찰로 보인다.

 

파충류의 뇌란 어떤 것인가? 관습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며, 생리적 본능에 충실한 이기적 탐욕, 즉 폭력성이며 마치 정적인 사회에서 사는 듯한 행동을 하는 뇌이다. 간혹 ‘파충류 수준’이라고 상대를 조롱하는 표현은 과학적으로 정당한 언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예를 든다면, 우경화된 보수주의자의 대표격인 아베와 같은 부류들은 아마 인간의 차별적 상징인 신피질이 미성숙된, 즉 파충류적 인간에 머문 집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논의를 조금 더 발전시켜 보자. 신피질의 성숙과 활동이 곧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형성이라 할 것이며, 신피질이 없다면, 혹은 신피질의 활동이 극도로 미약하거나 정지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한 주장이 된다. 우린 이것을 윤리적으로 언제부터 인간이 되고,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에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 즉 태아에게 인권을 부여할 수 있는 시기와 사망의 기점에 대한 준거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태아는 임신 3~4개월이 지나면 신피질의 활동을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한편 가사상태에서 신피질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면 사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은 다름 아닌 신피질의 발달과 기능에 있다는 것이며, 바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간의 뇌가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우반구와 좌반구

 

신피질은 이렇게 인간의 특성을 구분 짓는 생물학적 특질이지만, 이것의 힘은 지극히 불안한 것이고 강력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먼저 발달한 비언어적 지각과 인지작용을 하는 우반구와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능력과 놀라울 정도의 언어능력을 지닌 좌반구로 구성되어 있어, 균형적이지 못하다. 또한 신피질의 전형적인 작동이 시작된 것은 우주시간으로 0.1초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숙한 시간이다. 그러나 현생인류의 진화에 이르는 그 엄청난 시간에 비하면 이토록 짧은 시간임에도 자기 행성을 벗어나 우주항해의 여정을 준비하는 독보적인 지적능력처럼 진화의 속도를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신피질’의 발달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의 진화를, 자신의 미래를 해독하고 예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어둡고 의심이 가득한 정서로 채워진 우반구의 세계, 예술과 감성의 세계에 갇혀있던 인간의 지성이 분석과 해석, 수식과 이해라는 이성의 세계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물질로 환산되었으며, 무한한 비언어적 영역이 언어적 영역에 장악당하여 오직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제한성에 매몰되어 버렸다. 물론 좌우반구를 연결하는 뇌량, 전교련(anterior commissure)이 있어 좌우 기능의 협조적 교량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이성은 우반구의 활동을 극도로 제약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기계론적 물신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 터 잡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왼손(left hand)은 우반구의 지배를 받으며, 오른손(right hand)은 좌반구의 지배를 받는다. 때문에 언론을 장악한 좌반구가 오른손을 긍정어로 사용한 것은 비(非)신사적이고 편협한 동기가 의심스러운 관습이라는 것이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보다 긴 진화의 역사적 산물로서 ‘직관’을 발전시켜 온 우반구는 좌반구의 언어적 비판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에 어떻게 그와 같은 지식을 얻었는지 알 수 없음”이라는 직관의 능력은 진화라는 선택과 변이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생물학적 지혜를 의미한다. ‘right hand'는 옳고, ‘left hand'는 그르다는 좌반구의 언어적 비판은 그만큼 의뭉스럽다. 우반구 우위의 시대에서 좌반구와의 조화를 이룩한 데카르트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 좌반구 우위의 교만이 불러온 또 다른 의심의 시대에 우반구와의 조화는 필수적 요청이라 활 것이다. 물질만능, 과학만능이 아니라 물질과 정신, 과학과 경외라는 감성의 균형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3. 과학사(科學史)적 만찬으로서

 

인간 지성의 본질과 진화에 대한 탐구, 그리고 궁극에는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인간 뇌’에 대한 생물학적 증거로서의 전(全)학문적 통찰의 서(書)라 할 수 있다, 천체물리학작가 쓴 ‘뇌’의 과학은 그래서 신화라는 거대한 인문학적 서사가 흐르고, 단순한 경험의 추상화(抽象化)로서의 대수(代數)의 발견에서 해석기하학이란 추상(抽象), 그 자체의 인지에 이르는 철학적 사변(思辨)이 있으며, 뇌의 구조적 층위의 발현에서 계급화, 관습화와 같은 보수성의 내재적 원천을 발굴해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다분히 기계적 사고의 전진으로서 뇌의 미래기술, 인간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인류의 청사진을 고심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책은 과학서에 머물지 않고 인류사에 대한 서사시이며, 철학적 고찰이고, 미래학인 총합적 인문서라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초판이 발간된 지 반세기에 근접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책이 읽히는 까닭은 인간인 ‘나’를, 그리고 후손인 우리의 미래와 조화로운 삶의 본질을 사유 할 수 있는 깊고 넓은 지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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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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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눈웃음 지으며 뱉어내는 정중한 말에 내재된 폭력성을 설명하려 하거나, 빌게이츠 같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베푸는 자선의 이면에 축적된 폭력성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적이고 표면화된 것에만 익숙해진 물질의 시대에 상징적이고 구조적이어서 비가시적인 것을 이해할 지적 사유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비가시적 폭력에 대해서

 

그래서 무언가 부당하고, 비정상적이며, 우리의 삶을 잔혹하게 배제시키며, 자유를 구속하고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폭력성을 지적할 때 고작 동족학살, 인종주의, 성차별,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겉보기에 비합리적인 주관적 폭력을 말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를테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적 공권력의 양태라든가, 부패의 썩은 내가 진동하는 관료의 도덕적 무감각이란 사악성, 착취적 노동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도착적 이기심 같은 것을 지적함으로써 사회적 폭력의 병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제아무리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굳이 이론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 아니 한국사회만 바라보더라도 이것은 결코 변화된 적도 없으며,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정작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비판하여야 할 정말의 ‘폭력’을 해독하는 ‘지젝’의 폭력에 대한 사유는 사회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그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폭력, 가시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의 원인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는 폭력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통상 겉으로 드러난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과 ‘ 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것이다. 상징적 폭력이란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어가 의미세계를 대상에 부과하는 형식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체가 정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적 결과이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어서 정상을 혼란시킴으로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과 달리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거의 대다수가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폭력, 즉 주관적 폭력만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마치 그것이 사회악을 야기하는 전부인 듯 다른 형태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객관적 폭력(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려는 듯이.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의 실질적 동인(動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주관적 폭력을 비판해 보아야 근본적 폭력성을 근절할 수 없는 것이다.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소설은 바로 이것, 시민을 무심히 학살하는 구테타 군의 만행, 이 주관적 폭력이 한국사회의 밑바닥까지 잠식해 있는 - 이미지, 언행, 삶의 습관 등 - 구조화된 폭력성을 원인으로 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주관적 폭력이란 객관적 폭력을 토대로 한 결과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사람들을 삶의 평안에서 고통으로 내모는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이웃들의 언행, 구조적인 것임을 시종 그려내고 있다.

 

지젝은 이러한 객관적 폭력의 본질, 그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그야말로 찬란한 설명을 구가(謳歌)하듯 열거하는데,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필두로 해서 자유주의, 근본주의를 구조적 폭력의 토대로 하여, 언어라는 상징화 과정 자체의 폭력성, 궁극의 공포정치인 생명정치, 보편성의 윤리에 터 잡은 종교의 잔혹성, 사회적 최고의 악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빗장 공동체, 나르시시즘적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니체적 말인(末人)의 형상을 한 쾌락주의적 금욕주의에 몰입하는 대중문화 등 비가시적 폭력의 양태 등은 무궁무진하다.

 

2. 자신과 맞서 싸워야 하는 구조적 폭력의 역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공동체가 맞서 싸우는 외부적 위협이 바로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이라 할 것이다. 예로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개인은 자기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편적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거대 자본가인 ‘조지 소로스’나 ‘빌 게이츠’가 인도주의를 위기로 부각하고 진정 사랑을 보내며 자신들의 선한 면을 드러내는데 내재된 폭력을 보는 것이다. 막대한 기부를 위해서는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야 한다. 극단의 개인주의적 경제윤리라는 착취는 예외로 하더라도 “변비를 고치기 위해 변비를 유발하는 초콜릿 변비약”을 파는 태생적인 폭력성을 본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자선은 초자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며, 사회적 재생산의 순환을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연명(延命)적 필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편성을 겉으로 명백히 내세우는 윤리의식일수록 근원적으로 더 잔혹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기독교의 논리를 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는 하나이니라, 모든 인간은 형제이니”, 이를 다른 말로하면 기독교의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가장 보편적인 듯 하지만 가장 지독하게 타자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악랄한 상징적 폭력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지배계급이 자신이 저지른 결과에서 쏙 빠져나와 유기농 식품을 사먹으며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빗장공동체의 내재적 폭력과 너무 닮아있다. 이렇게 타자를 배제하는 것, 자기이익, 자기연민을 위해서 타자를 고통에 빠뜨리고, 타자의 삶을 파괴함으로써, 아니 설혹 아무런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 지속적인 구조적 폭력이 누적되어야 했음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을 보게 된다.

 

3. 사회적 습관의 뒤흔듦에 대해서

 

내가 주목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폭력의 이유 중 하나인 ‘습관’에 대한 통찰이다. 습관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떠받치는 지하영역”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습관이란 무엇일까? 일을 신속하고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 급행료와 뇌물을 주고, 법률 등 규칙의 절차를 밟지 않거나 위반하면 학연, 지연 등 인맥을 찾는, 부정한 것을 잘하는 융통성이며, 인간관계의 칭송이며, 이것을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치켜세우는 것이다.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는 이 습관의 본바탕은 그야말로 위협적인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수년전 한국사회를 들끓게 했던 해병대 병사의 총기사건은 습관, 즉 “동료군인을 아무도 모르게 구타해도 된다는” 집단 결속의 확인을 위한 행위는 암묵적 관습이 지닌 폭력성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위반행위이지만 모두가 묵인하는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폭력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의 삶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떠올려보자. 가시적 주관적 폭력은 이러한 구조적, 상징적 폭력을 원인으로,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이다. 자신의 권력야욕을 위해 동족을 학살하는 군인 독재자의 탄생이라는 폭력은 한국인, 한국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객관적 폭력위에서 가능했었다는 것을.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하다. 일례로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엄격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 전략을 아주 즐겨 사용한다. 그리곤 집행은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 아주 자의적으로 행사되는데, 마치 자비를 베풀듯 집행 또는 유예하는 것이다. 단지, “ 뭐 우리에게 거슬리는 자들이 있을 때 우리 뜻대로 버릇을 잡아 줄 수단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의 체제’는 전체주의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 전체주의적 행태가 다소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암묵적인 관습적 규칙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인 전체주의적 습관을 붕괴시켜야 하는 것인데, 소비에트의 붕괴는 이것을 실제로 증명한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면 되던 것이, 어느 순간 그 누구라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기존의 구조적 폭력의 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를 던져준다. 습관을 파괴하면 체제는 붕괴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 공동체를 위협하는 폭력의 본질로서의 습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 그것과 싸워야 비로서 삶의 자유와 평온, 정당함이라는 진리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만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무의식’, 일상생활을 암묵적으로 받치고 있는 것을 뒤흔들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의 경험을 의미있는 전체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공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폭력의 정당성,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폭력적인 무엇을 할 수 있음의 얘기들은 이 배타적이고 범주화하는 불온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식과 태도, 사유의 방식을 안내한다. 폭력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뮐레르’의 말처럼 지젝의 이 책은 폭력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더없이 탁월한 저술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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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8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8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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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충혈된 의식의 탐욕스런 목소리로 소란스럽게 소음을 양산하는 세상에서 정말 차분히 이러한 외란들을 차단한 채 지금 내가 있는 세상의 진실은 어떤 모양새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지식 e』1권을 시작으로 이제 8권에 이른 이 시리즈의 이러한 시선은 주류적 삶의 소요에 매몰되어 망각되거나 혹은 저 심연에 묻혀 잠들어버린 고귀한 정신을 깨운다. 특히,‘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간결한 메시지들을 통해서 우리 보통사람들의 의지와 소망을 깨우고,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라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지적, 그 자체의 실천을 보여준다.

 

여전히 ‘언론 부분자유국’이며, 인권의 유린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상시적으로 자행되고, 사회적 부의 불균형은 세계 1위 그룹을 놓치지 않으며, 사회학자‘에밀 뒤르켕’이 정의내린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라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이 사회의 자살율은 OECD국가 1위의 명성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노인 빈곤율 OECD 1위를 명예라도 되는듯이 사회안전망부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복지이야기만 나오면 종북주의자니 빨갱이니를 떠드는 기득권력의 악랄성은 그칠 줄 모른다.

 

우리사회의 은폐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실들, 혹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그네들의 처지들, 정작 자신들이 마주해야 할 현실이자 미래임에도 무관심과 배척으로 드러나지 않는 실제들이 작은 대안들과 이 고통의 터널이란 세상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고 지옥 아닌 길을 찾기위해 분투하고 묵묵히 실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통하면서 바로 개인인 ‘ 나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임을 직시하게 한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지옥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 속에서 지옥 아닌 길을 찾으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세상을 바꿔요? 계란으로 바위치깁니다. 그냥 자신의 일에 열중하세요.’ , 더구나 ‘정치가 바뀌겠어요, 교육이 바뀌겠어요, 저들의 의식이 바뀌겠어요.’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불의와 모순, 왜곡과 부정과 불평등이 구조화된 세상을 외면한다면 절로 좋은 세상이 올까? 이렇게 지레 포기만 하려드는 사람들, 그리곤 불이익이나 불평등을 마주하면 불평하기 시작한다. 이기심이 도달 할 수 있는 자기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자기만은 저 높은 고지에 올라 권력과 부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은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지만 희망의 세상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사회학자 에릭 홉스봄의 이야기로부터 대중의 진의를 감시하고 훈육하려드는 야비한 권력의 전체주의적 욕망을 해부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한 사면제도의 남용과 인권과 언론에 대한 권력의 교활한 법제화등의 수단을 드러내는가 하면, 시민 대중과는 어떠한 교감도 없이 국민의 혈세인 국고보조금으로 독재자의 기념탑을 세우고, ‘새천년 생명의 숲’이 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쿠데타 주역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으로 탈바꿈하는 아부와 파렴치한 권력의 전형적 타락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일상적 관심에서 떠나있지만 희망의 세상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의 적시만을 상기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축구 명문 클럽인 ‘바르셀로나’를 통해 무한 경쟁체제인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협동조합을 설명하기도 하고, 23년간의 총리직을 사임했을 때 자신을 위한 아무런 소유물도 없었다는 국가 지도자의 이상적 모델의 실존을 발견하기도 한다. “국가, 국민을 위한 좋은 집, 이 집에서 누구도 특권의식을 누리지 않으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타게 에를란데르’스웨덴 총리의 실천은 너무도 부러워서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우리도 이러한 지도자를 탄생시킬 만큼 시민 의식이 성숙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들의 아픈 곳을 찌르기도 한다. 옛 만주지역이었던 지금은 연변이라 불리는 곳은 20세기 전후 살기위해 쫓기듯 제 나라를 떠나 일구었던 황무지이다. 이들의 후손을 오늘 우리는 ‘조선족’이란 부른다. 다분히 인종적 폄하가 담긴 언어. 너와 나의 다름을 구분짓는 언어로. 그러가하면 ‘데니스 P. 렛’이라는 미국의 인류학자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은 낮은 임금에 고용된 하인에 가깝다.” 이 한마디에 오늘 우리 한국인의 의식 모두가 담겨있다면 과언이 될까?

 

이렇게 왜곡된 우리들의 의식, 우리들이 잊고 지내거나 은폐한 과오들을 우린 바꿀 수 있다. 정작 배제시켜야 했던 민족배반자는 득세하고 안아야 할 것은 소외시키고 내치는 사회가 아닌 정의가 바로선 당위의 사회를. 한 사람의 작은 정의의 실행이, 이러한 사람들이 협력하고 연대하면 그 무엇인들 바꾸지 못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힘인 것을. 이 책 『지식 e』의 판매부수가 100만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적어도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고, 또한 방송으로 접했던 사람들까지 더하면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에 대한 시민적 합의와 의식의 성숙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 희망의 세계에 대한 낙관을 기대하게도 된다.

 

P.S.

'지식채널 e'는 2005년 9월부터 '1초'와 '베이비 사인'을 주제로 EBS에서 방송되기 시작한 5분짜리 동영상 프로그램이다. 알파벳 'e'를 키워드로 사회, 인간, 교육, 문학, 과학 등 각 분야의 지식을 강렬한 영상과 음악, 간결한 메시지만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진실을 감동적으로 체화토록 하여준다. 책으로 간행되어 100만부를 돌파한 이 프로그램은 “2013,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라는 주제하에 시청자 및 독자를 대상으로 UCC 동영상 공모전진행하고 있다. 이 시대의 올바른 가치와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는 귀중한 계기가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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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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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여느 작품과 다른 시적 운율(韻律)로 읽는 내내 간결함, 문장의 경쾌함과 율동감을 느낄 수 있었던 소설임을 우선 말하고 싶다. 제목의 ‘그 노래’에 무엇인가가 깃들듯이 말이다. 저 깊은 안에 갇혀 자기 소리마저 잃어버린 그 노래의 사연들을 오늘의 사람들이 혹여 지레 귀를 막아버릴까 저어하여 선택된 유혹의 비(非)의식적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속하여 말하여야 할 것이고, 써야 할 것이기에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아니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이기에 노래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배경인 1980년 전후는 내겐 더할 수 없이 우울한 시절, 바로 대학 재학시절이었다. 계엄군이 점령한 학교는 오랜 휴교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4년의 기간 중 삼분의 일은 사실 세월만 낚았다고 해도 될 듯하다. 더구나 부마항쟁을 시작으로 광주민주화항쟁이 내 젊은 대학 시절을 횡단하고 있었기에 아마 인생의 가장 밝아야 했을 시절이 나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어둠 그 자체로 기억되곤 할 것이다.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 등의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 만행은 새삼 되뇌고 싶지 않을 만큼 잔혹하고 처절한 것이었음을 반복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 있다. 부정한 것이 권력을 가지려할 때 그 폭력성은 가히 극악함의 끝이라고, 또한 약자의 것을 빼앗고 그네들을 짓밟는 것이 곧 선이 되고 재화가 되어 권력이 되는 이 패덕(悖德)의 순환은 이젠 끊어야 하지 않겠는냐는 이성 말이다. 30여년이 지났으나 우리사회는 이 점에 있어서는 별반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녀자를 겁탈하고 대검으로 잔인하게 난도질하며 패악질로 한 지역을 파멸시킨 인면수심의 군인이 대통령이 되고 이에 뇌동(雷同)하고 협력하던 정치 행정관료들이 오늘 더욱 득세하여 나라의 정체성을 흔들어대고, 인민의 삶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잊기 좋아하며 무심하고 생무지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이러한 외형적이고 누구나 아는 드러난 폭력을 말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깊고 본원적인 폭력, 이 땅의 대다수 사람들의 생리가 되어버린, 너무도 구조적이이서 보이지 않는 폭력의 실체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단지 지독히 객관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폭력성이 군사 쿠데타와 정치권력 탈취를 위한 시민의 대대적 학살인 1980년 5월 광주 민중의 항쟁이란 역사적사건과 맞물려 표현될 뿐이다. 늘상 거침없이 뿜어내는 탐욕의 광기들, 그러나 이것을 광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온통 미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애’와 ‘묘자’로 대변되는 소설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그녀들의 어린 시절을 에워싼 우리사회, 아니 시골동네의 이웃이라 불리는 바로 우리네들이 약자에게 행하는 위선과 추오를 보게 된다. 다름아닌 광기이다. 곤궁함으로 스러져가는 이웃, 그러한 이웃의 생존을 도적질하는 우리네들의 무심한 얼굴이다. 도적질 항의에 자신의 자존심을 해쳤다고 살해하는 사회, 그리고 이를 비호하는 사회, 나아가 그러한 이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시리게, 그리고 끝도 없이 그려진다. 어찌 이 모두를 쓸 수 있겠는가? 굶어죽고, 겁탈당하고, 시퍼런 대검에 찔려 살해당하고, 삼청교육대라는 기이한 이름의 국가폭력에 끌려가 정신과 육체 모두가 파괴되는 엄연한 현실을 마주한 당사자가 온전히 살아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망상일 것이다.

 

한국인의 심신에 새겨진 이 구조화된 폭력성, 무심함, 타자가 배척된 자기중심적이기만한 탐욕스러움, 소설의 면면에 새겨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욕망이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라는 이 기만적인 노래를 타고 광적으로 흐른다. 소설은 거창한 외침이나 과도한 울분을 토하지 않는다. 구조화된 것은 자극적이지도 노출되지도 않는 것이기에 그 객관적 형상, 본질적 폭력의 양태란 어떤 것인지를 담담하게 기술할 뿐인 것이다. 권력에 눈먼 무식한 군인이 벌인 민중 학살이란 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폭력이 가능한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내재적 인식능력이 지닌 폭력의 모습들을 말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에게 체화된 폭력으로서의 광기 말이다.

 

계엄군에게 겁탈당하고 피투성이로 길거리에 버려졌던 정애의 정신이 현실에 머물지 못하고 이미 주검이 된 가족들의 온기와 고향마을을 떠도는 것, 또한 어린시절 정애의 유일한 벗이었던 묘자의 수감생활은 이들에게 광인의 낙인을 찍는 우리의 정신을 의심케 한다. 정작 미친 것들은 누구인가하고. 회사재산의 유출을 막기위해 수레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의 신체 곳곳은 물론 수레의 틈새 모두를 수색한다. 그러나 정작 유출되는 것은 수레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일화처럼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폭력과 패악은 구조적이고 객관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우리네의 일상적 몸짓이라는 것을 소설은 말하려는 것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사람이 더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 정애의 아비에게서, 그리고 정애에게, 그리고 묘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음같은 공허한 노래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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